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54화 (54/83)
  • 54화. 실종 24일째 <2>2017.01.08.

    -실종 24일째

    풍향이 좌에서 우로 헤쳐 왔다.

    끈끈한 열기를 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장 경감의 앞머리를 훑고 갔다.

    머리칼은 눈을 찌르며 시야를 불편하게 했다.

    주륵 - 땀방울이 콧잔등을 미끄러졌다.

    장 경감은 대치하고 있던 상대의 등에 총부리를 겨눴다.

    “대체 너 이 새끼…… 정체가 뭐야.”“형사인가.”총기를 쥔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범상치 않은 위압감을 풍기는 상대였다.

    “여자를 어디로 납치했어!”뒤돌아선 강호운의 눈초리가 장 경감을 향해 살짝 내려앉았다.

    하반신이 꼴사납게 후들후들 거리고 있었다.

    불시착하듯 준비도 없이 맞닥트려진 조우가 당혹스러웠다.

    강호운은 부적절한 웃음을 지었다.

    “납치?”웃기다는 투였다.

    “그 남자가 그러던가.”강호운은 침착했고 생각을 느리게 흙바닥을 발로 비볐다.

    “극단적인 건 여전해. 그 남자, 진주양.”“닥쳐.”“전해. 우린 이 나라를 뜰 거야.”정신이 잠깐 가출했다 돌아왔다. 충격이 장 경감을 강타했다.

    “밀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라니……?”“그 애가 원한 일이야.”“신영원에겐 남편이 있어.”“하지만 도망쳤지.”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확신으로 찬 음성이 날아들었다.

    장 경감은 할 말을 잃었다.

    신영원은 정말 진주양을 떠나 이놈과 도피하려고 했나.

    장 경감은 등을 빳빳하게 세웠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방아쇠 옆에 달린 안전핀을 눌렀다.

    미세한 소리를 강호운이 놓치지 않았다.

    “날 쏘면, 영영 찾지 못해.”“신부를 쫓고 있는 경찰병력만 몇인 줄 알고 하는 소리야?”꼴같잖은 협박이었다.

    “살아 있는 한 찾아낼 수 있어.”“영원이가 많이 아파.”총체적 난국이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 신물 났다.

    장 경감의 머릿속엔 그날, 노조원들의 밀침 한 번에 볏단처럼 기절하던 신영원이 떠다녔다.

    사기는 아닌 듯싶었다.

    “아무도 그 애가 있는 곳을 몰라. 아는 건 나 혼자뿐이야.”“닥쳐 이 새끼야!” “내가 죽으면,”“……”“걔도 죽어.”신영원은 강호운이 가지 않으면 몇 날 며칠 그대로 그곳에 방치된 채 죽게 될 것이다.

    장 경감이 매섭게 그를 몰아붙였다.

    “어디 가봐. 그 즉시 발포할 테니까.” “쏴봐. 그깟 가스총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군인 출신답게 총의 겉모양에 속지 않았다. 강호운이 천천히 발을 뗐다.

    “멈춰!”장 경감이 소리쳤다.

    “서라고!”강호운은 유린하듯 장 경감의 눈앞에서 느긋하게 멀어졌다.

    결국 쏘지 못했다.

    총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쏘지 못할 바에야 들고 다녀봐야 소용이 없다.

    범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할 바에야……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이건 호신용이었다.

    살상용이 아니었다.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조롱당할 만했다.

    .

    .

    .

    장 경감은 한신그룹 본사 로비를 격하게 가로질렀다.

    최혜란은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강호운은 최혜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에 왔을 것이다.

    협박? 통보? 무엇일까.

    최혜란 역시 무언가 감추고 있었다.

    “이사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습니다.”프런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장 경감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본사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데 로비 입구에 차가 섰다.

    가드들이 차에서 내리는 오너 일가를 일렬로 나와 맞이했다.

    진 회장이 공식적으로 두문불출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차기 후계자인 진두영이 잘려 나가고, 남은 건 진주양뿐.

    구체적 병명은 안 밝혀졌지만 찌라시에 진 회장은 경영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다.

    복귀하지 못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말만 ‘부’행장급이지 한신은 이미 진주양의 입맛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직원들이 허리를 굽혔다.

    진주양은 한 자락 애정도 담기지 않는 눈으로 그들을 객관화했다.

    진주양의 특기였다.

    타인과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것.

    아쉬울 것 없는 남자가 한 여자에게만은 비상한 관심을 쏟는 것은 연구해봐야 할 일이다.

    ‘저 남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강호운의 말투를 보아하니 그들 서로는 각자의 존재를 아는 듯싶은데.

    ‘대체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 거야.’ ……당신.

    장 경감은 담배꽁초를 발아래 던지고 걸음을 떼었다.

    오늘은 꼭 대답을 듣고 말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척으로 다가선 그때였다.

    여비서 하나가 불쑥 장 경감의 시야를 침범했다.

    가드들에게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대기업 비서들이 그러하듯 여자는 늘씬한 몸매를 자랑했다.

    검기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멋스럽게 묶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가 다시금 하얗게 그의 머리에 불을 질렀다.

    아직도 김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의문점을 많이 남겼다.

    만에 하나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면……

    김 회장 살해 유력용의자로 지목할 만한 인물…

    “포니테일…….”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고 작은 파문이 커다란 파도를 일으켰다.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가.

    *

    치익 - 담배가 회색 연기를 피어 올렸다.

    주양은 니코틴을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텅 빈 회사, 퇴근하지 않고 집무실에 남아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신부님의 마지막 행적입니다.’양 비서가 건넨 그것은 결혼식 당일, 인근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사진이었다.

    경찰도, 장 경감도 그 어느 누구도 손에 넣지 못했던.

    소통을 한다고 여겼다. 이런 게 영원의 소망이었다면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5월이었다. 사진에 찍힌 주변 가로수들은 푸릇하게 물들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영원은 강호운과 함께였다.

    예식장을 막 도망쳐 나온 신부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납치범.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다른 남자와, 그것도 도피한 여자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주양은 피우던 담배를 사진 모서리에 갖다 붙였다.

    불씨에 잇닿은 사진 끝이 야금야금 타들어가다가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그는 휴지통에 사진을 던져 넣었다.

    사진이 활활 불타올랐다.

    ‘……하신 것 같습니다.’1년 전에도 호텔에서 동일한 일이 있었다.

    ‘신부님이 사라지셨습니다.’결혼식장에서 그날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되었을 때 그는 선택했다.

    영원이 호운과 떠난 걸 알았지만 결혼을 그대로 진행했다.

    포기할 수 없으리란 걸 있었기에, 그는 태연하게 대타를 구했고 면사포를 씌웠다.

    그리고 태연히 결혼식을 치렀다.

    처음부터 납치 같은 것은 없었다.

    강호운은 언제나 그를 한계로 몰아붙였다.

    ‘잘 지냈냐. 꼬맹이.’나타났던 날부터 이도저도 아닌 불분명한 행동을 취하며, 영원에게 투박함이 섞인 다정한 면모를 보였다.

    강호운은 과거의 사람이었다.

    주양은 모르는, 주양이 모르는 영원의 과거를 공유하는 남자.

    불쾌했다. 양 비서가 눈치껏 강호운의 뒷조사를 했다.

    ‘과거 육군 부사관 출신이라는데, 현재는 최혜란의 정부라는 소문이 지배적입니다.’더 알아볼까요? 하고 묻는 양 비서에게 그는 조소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내가 할 짓이 없어 몸 팔아 먹고산다…… 시답잖은 놈일 뿐이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로소 주양은 안도했다.

    ‘아뇨. 됐습니다.’그러나 그때, 그래선 안 되었다.

    강호운은 최혜란의 정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이 삐걱 열렸다.

    어둑한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느슨하게 타이를 풀며 바라보자 그 끝에 여비서, 유선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년 전, 영원 26세

    영원은 고개를 들었다.

    “잘 지냈냐. 꼬맹이.”짙은 눈썹 아래로 시원하게 찢어진 눈이 웃음을 그렸다.

    볕에 그을린 사내의 얼굴이 남성적이었다.

    카고 바지에 군용화,

    흰 민소매에 후줄근한 남방에 걸쳤지만 근육을 감출 수 없었다.

    군인이었음을 알려주는 군번줄이 빛에 반사되어 눈을 부셨다.

    “계집애가 꼬라지 안 고칠래?”강호운이 덥수룩한 영원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영원이 움칠, 경계하듯 물러섰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애처로웠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충격을 먹은 얼굴이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그는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그가 무안해진 손을 거두었다.

    긴 어색함을 부수고 강호운이 먼저 말했다.

    “백운당 마마님이 몸 좋은 정부한테 홀딱 정신이 팔렸다지? 그게 나고.” 여종업원들이 그만 지나가면 저들끼리 시시덕거렸다.

    가오가 있지 이유를 물어볼 순 없어 입 가볍고, 몸 가벼운 것 같은 기생 하나를 꼬셨다.

    소문이라는 게 같잖아서 강호운은 무척 화가 나 얼굴을 구겼다.

    영원은 고개 숙였다. 끝까지 호운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등장에 이미 충분히 정신 사나웠다.

    6년 전부터 가끔이지만 백운당에 왔다 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호운이 그녀를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피해준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당연했고, 서로가 함께 있어봐야 좋을 것도 없다.

    호운은 영원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운의 시선 끝에 한 남자가 걸렸다.

    남자는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타인의 불쾌감은 제 몫이 아니라는 듯이 거만할 정도로 빤히.

    강호운이 느리게 불청객을 훑어 내렸다.

    영국 귀족이나 입을 법한 슈트가 잘 어울렸다.

    고급스럽게 머리를 넘긴 남자에게는 기품 같은 것이 있었다.

    호운은 짧은 시간 내에 그에 대한 분석을 끝냈다.

    반면, 남자는 애초에 호운 따윈 보지도 않았다.

    자기 안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허락된 사람만 가능하다는 듯, 오직 영원만 보았다.

    호운의 눈길이 영원에게 내려갔다.

    남자는 분명 영원에게 볼일이 있었다.

    같은 곳에 서 있지만, 절대로 같이 섞일 수 없는 부류인 것이 냄새부터 확 풍기는데.

    어째서 저런 남자가?

    어떻게 영원은 저런 남자와?

    “신영원.”나지막한 울림.

    영원이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남자를 보고 눈이 커진다.

    와.

    남자가 손을 한 번 까딱했다.

    호운이 닿을라치면 경기를 일으키던 영원이었다.

    소스라치던 영원이 그 손짓 한 번에 양처럼 온순하게 달려갔다.

    남자는 배려도 없었다.

    기다려주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서는 그를 쫓는 건, 영원이었다.

    거부감을 일으켰다. 남자의 오만함이……

    뒤에 알았다.

    저 남자가 진주양이며,

    한신그룹의 후계자이고,

    영원이 사랑하는 남자라는 것을.

    유일하게 그녀를 믿게 한 ‘인간’이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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