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53화 (53/83)

53화. 실종 24일째 <1>2017.01.05.

사랑은 우리를 거지로 만든다.

구걸하고 싶었던 때가 있다.

*

-1년 전, 영원 26세

쿠탕!

영원은 복도를 지나다 멈췄다.

안채에서 나는 파열음에 뒤를 돌아봤다.

계모의 방이었다.

계모라면 백운당에 있을 시각이었다. 한창 장사 준비에 숙수들을 들볶을 때다.

“무슨 소리지?”방을 확인해봤다.

역시 사람 그림자도 안 비쳤다.

문지방에 얹어진 발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원은 조심스럽게 다시 방을 돌아봤다.

사실 안채에는 출입문 말고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커튼 뒤편으로 갔다. 저 뒤에 문이 있었다. 문을 통과하면 백운당 사장실로 곧바로 진행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정체 모를 파열음은 저곳에서 샜을 소지가 다분했다.

‘대체 얼마나 큰 소란이었으면 반대편 집까지 울려 퍼진 거야?’비밀문 뒤로 긴 복도가 이어졌다.

그 길이를 단숨에 좁히고 여기까지 달음박질 쳐왔다는 건 꽤 거칠었다는 거다.

노 집사도 이랬던 걸까?

계모가 영원에게 매질을 할 때 그 소리가 온전히 다 들렸던 걸까.

매번 저 복도 끝에 있는 반대편 문에 눈을 가져다 사장실을 엿봤다.

‘열려 있어.’ 영원은 침을 삼켰다.

계모는 영원의 허튼짓을 참지 못했다.

이러다 들키면 죽어나갈 거다.

영원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참지 못하고 문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두운 한옥 복도를 지나자 문이 나왔다.

그 문 뒤가 사장실 벽이었다.

영원은 작은 문 틈새에 눈구멍을 대었다.

‘손님이랑 싸움이라도 난 걸까?’계모가 혈압 올라 졸도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계모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손님의 모습은 장식품 도자기에 가려져 볼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영원은 당황하고 말았다.

“나 죽는 꼴 볼래?”계모가 울고 있었다.

울고……

이제 보니 찻잔과 계모 얼굴의 높낮이가 비슷했다.

계모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닥에.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애원했다.

“집을 사줘도 들어가지도 않고, 차도 싫다, 옷도 싫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주지도 말라고.”마녀 같기만 했던 매서운 눈초리는 너무도 당연히 여자로 변모했다.

눈물 맺힌 얼굴로 계모가 상대를 올려다봤다.

한껏 목이 뒤로 젖혀졌다.

꺾이는 각도로 보아 키 큰 남자 같았다.

상대가 가려고 했다.

계모가 못 가게 바지를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래돼 퇴색된 카키색 바지.

“내가 주는 건 받지도 않겠다. 그런데 내 고통은 즐겨주시겠다.”계모를 쳐내는 손길이 냉랭했다.

집착하는 쪽은 계모였다. 어떻게든 질기게 부여잡으려 했지만 떨쳐내는 손아귀 힘에 자빠졌다.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사이였다.

“호운…….”말하다만 계모가 갑자기 휙 시선을 틀었다.

영원은 놀라서 얼른 눈을 떼었다.

도망치듯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하아…… 하아…….”안 들켰겠지?

급한 숨을 몰아쉬며 방에 들어오는데 누가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양이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반응했다.

*

햇살, 열린 창문. 바람에 나풀거리는 흰 커튼……

남자는 해수에게 완벽하게 이별을 고했을 터였다.

주양이 이리 오라는 듯 조용히 턱짓했다.

영원이 우물쭈물 그 앞에 섰다.

화를 낼까? 갑자기 사려져서 그를 찾아오게 만들었다.

영원은 결국 실토했다.

“네 집안에서 알았어.”“정확히는 진두영이겠지.”그 말에 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득 불쾌함에 입매를 찌푸렸다.

“나한테 사람 붙였어?”“내 사람들, 네 뒤치다꺼리 하라고 있는 한가한 인력 아냐.”주양이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영원은 창피해서 얼굴이 벌게졌다.

그가 영원의 미간에 있는 주름을 꾹꾹 눌러 폈다.

“그런 건 애쓰지 않아도 금세 알아. 오죽 네가 흘리고 다녀야지.”그가 영원의 턱을 들어올렸다.

영원은 속으로 불평했다. 흘리다니. 어감이 기분 나빴다.

“호텔에 안 가.”영원이 소심하게 말했다.

“이젠 거기 안 가.”“뭐가 두려워서?”“…….”“진두영이?”영원은 세차게 도리질 쳤다. 진두영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럼 뭐가.”“다들 날 네 세컨드라고 떠들어.”주양이 유심히 영원을 살폈다.

그녀 안에 알을 깐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가늠하려는 행동이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들키기 싫어 등을 돌렸다.

주양이 느리게 속삭였다.

“이 방. 온통 네 냄새가 나.”그의 손끝이 가구 하나하나를 스쳤다.

“책상, 침구…….”애무하듯 쓸던 손가락이 커튼자락에서 종지부 찍었다.

“난 여기서 해도 상관없어.” 욕망을 숨기지 않고 직선적으로 좁혀오는 솔직함에 영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방은 무척 좁았다. 그저 침대와 책상 등 살림살이가 오밀조밀하게 들어갈 수 있는 평범한 크기였다.

그가 있으니 더 좁게 느껴졌다.

그가 혹은, 그녀가, 조금만 움직이면 서로가 스칠 것 같았다.

그와 이렇게 작은 공간에 있던 적이 없다.

그의 집이나 호텔에선 이런 밀폐감은 느낄 수 없었다.

주양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대담한 유혹.

여긴 그녀의 집이었다. 식구들이 있는.

“저, 전혀 내 말 안 듣고 있잖아. 분명 호텔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 “그러니까.”그가 확고하게 말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여기서 해. 호텔 갈 필요 없이.”그는 진심이었다.

“호텔에 가지 않겠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몰라?” 영원은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그가 두려웠다.

그때였다.

삐거덕, 누군가 다락방 계단을 밟았다.

해수다.

주양과 함께 있는 걸 알면 계모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영원이 얼른 문으로 달라갔다.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주양이 몇 걸음 되지도 않는 좁은 방을 훌쩍 가로질렀다.

어느새 영원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그녀가 문고리를 잠그려는 것보다 더 빠르게 문고리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뭐, 뭐하는…….”“평범해지겠다고?”그가 무섭게 귀에 입술을 붙였다.

“날 끌어들여놓고 너 혼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평범하게, 그래?”영원의 손이 길을 잃고 방황했다. 머리맡에 지어진 그림자.

“네가 날 연애놀음에 끌어들인 순간, 넌 내 여자고, 내 여자는 평범한 인생에서 이미 한참 멀어졌어.”그녀가 동공을 떨었다.

“해수가 있어. 해수가…….”주양이 명령했다.

“키스해.”영원은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심연을 드러내보이듯 그가 그녀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해수가 계단 3개를 앞두고 있었다.

5초,

아니 2초.

그를 유혹한 것은 그녀가 먼저였다.

가만히 있는 그를 충동질 하고, 부추기고, 매정하게 뿌리치는 그를 끝끝내 옆에 잡아다 묶어놓았다.

1초.

영원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가 문을 잠갔다.

단단한 손이 영원의 턱을 움켜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거칠게 치아가 닿았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키스는 계속되었다.

해수가 떠난 지 한참 후에야 그가 멈췄다.

주양이 흐트러진 타이를 제대로 바로 잡았다.

영원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룸 키를 꺼내 영원의 저고리 사이에 떨어트렸다.

그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먼저 가 있어.”문을 열고 그가 떠났다.

*

이제 와 자매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하는 건 위선이다.

해수의 아픔은 영원에게 죄의식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송곳 같은 악의로 그녀를 찌르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남의 이목 따위 상관없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영원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찾아온 그가 싫지 않았다.

아니, 그래주길 바랐다. 간절하게.

그런데 뭐가 문제지?

영원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려는 것이 무슨 짓인지.

자신의 사랑이 남들에게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것.

남의 이목 같은 거…… 라고 치부하기에 그녀 안에 뿌리 깊은 뭔가가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두려움 같은 것.

마침 그때였다.

‘그’가 나타난 것은.

“잘 지냈냐. 꼬맹이.”멍하니 백운당 화단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빛바랜 카키색 바지가 그녀 앞에 섰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훤칠한 골격.

햇살이 눈부셔서 눈을 감았다 떴다.

희뿌연 잔재가 사라지자 ‘그’의 모습이 분명했다.

영원의 눈이 시커멓게 패였다.

강호운이었다.

-실종 24일째

불가마에서 땀을 빼는데 수진이 단서를 안고 왔다.

“강호운?”장 경감이 살짝 고개를 틀었다.

“신영원을 납치한 놈이 강호운이란 자식이라고?”신부의 나머지 한쪽 구두에 박혀 있는 보석을 처분하려 한 사내.

신영원을 엎고 뛰어간 그 남자.

진주양, 신해수, 이중모, 김 회장.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힌 이들에 또 다른 진범까지 끼어들었다.

“31세. 과거 육군 교관출신. 전당포 주인이 보석 맡아주면서 신분증 확인을 해놨답니다.”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현재 직업은.”“제대하고서는 딱히 소속을 두진 않았고요. 신체 건강하고, 남자답고, 돈 많은 아줌마들깨나 후릴 타입이죠.”“아줌마가 여기서 왜 나와?”“백운당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인사던데요. 최 사장의 정부라는 소문이 있어요.”최혜란이 과부니까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였다.

돈 있는 여자가 젊은 남자 사는 것쯤이야.

그런데 단순히 정부가 아니었단다.

최혜란이 꽤나 마음을 깊게 주고 있는 놈이라고.

그런 놈이 신영원과 함께 있다?

“최 사장과 관련된 치정범죄는 어때?”최혜란의 정부였다면 원한 혹은 돈을 노리고 그 딸을 납치했을 수도 있다.

최혜란의 딸인 신영원, 게다가 한신이라는 거대한 그룹과의 결혼.

뜯어먹을 게 많다.

“가장 편리한 추측이긴 하죠.”장 경감이 힐끗 눈을 위로 치떴다.

“미덥지 못한 투다?”“결혼 1시간 전에 실종된 신부, 신부를 찾고 싶지 않아하는 신랑, 그러나 사실은 신부가 뒤바뀌었다. 이 사건, 항상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고 있지 않습니까?”“그렇지.”“이번에도 뻔한 논리는 안 통합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런 건 어떻습니까? 신영원이 자발적으로 사라졌다.”“죽을래?” “이놈과 함께.”장 경감은 멍해졌다. 수진이 진하게 눈을 얽으며 말끄트머리를 매듭지었다.

“함께 도피했다.”신선한 충격이 장 경감을 강타했다.

어째서……?

신영원이 최혜란 정부랑 왜 도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이런 남자랑……

그것도 진주양을 버릴 만한 가치가 있으면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납치범의 존재.

아군인지 적군인지 애매모호한 태도만 취하는 신랑.

종적을 감춘 신부.

“뭐야? 대체.”

*

장 경감은 백운당을 방문했다.

‘최혜란의 정부가 납치범이라면 최혜란을 떠보면 될 일이지.’ 해답을 얻지 못할 지라도.

뜻하지 않게 백운당이 당일부터 한 달 간 휴업이었다.

굳게 문을 걸어 잠근 백운당을 당혹스럽게 봤다. 연중휴무 없이 돌아가던 곳이었다.

‘최혜란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일어났나?’ 강호운이 납치범이란 것은 경찰 쪽 수사본부에서 먼저 흘러나온 정보였다.

진주양에게 전달보고 됐을 것이다.

최혜란이라고 백치처럼 방구석에 앉아만 있었을 리 없다.

딸이 실종되고 납치됐을지 모르는 일일 테니까.

장 경감은 코를 킁킁댔다.

희미하지만 그을린 냄새가 백운당 주변을 부유하고 있었다.

“가마솥이라도 끓이나?” 백운당은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탕 종류를 가마솥에 푹 고아냈다.

백운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조리방식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실제로 주방 뒤편에는 참나무 장작이 한 트럭이었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이유는 휴무라고 걸어놓은 팻말이었다.

영업도 하지 않는데 장작이 타고 있다?

게다가 이 정도 탄내라면 보유한 참나무 전체에 불을 질러야 가능했다.

이상한 느낌에 그는 인적이 뜸한 담장으로 갔다.

비교적 낮은 담벼락을 단숨에 넘었다.

평상시 음식 냄새와 직원들로 북적이던 가게였다.

서늘할 정도로 고요했다.

오직 장 경감의 발소리만 울렸다.

마침 남자 직원 하나가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이 탄내의 정체가 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누군데 몰래 들어왔냐고 따지면 도리어 이쪽이 귀찮다.

일직선으로 서로에게 가까워지다가 어깨를 스쳤다.

멀리서 봤을 때도 알았지만 장 경감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건장한 남자였다.

180이 넘는 키.

검은 야구모자 아래서 미동 없는 눈초리.

로봇 같이 절도가 있는 자세였다.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있다.

신병대에 들어가면 교관들은 모자를 깊게 눌러써 위압감을 연출한다.

반쯤 가린 눈은 쉽게 의중을 읽을 수 없다.

……과거 육군 교관출신.

사내가 장 경감의 곁을 스쳤다.

낡고 쉰 목소리가 장 경감에게서 흘렀다.

“강호운?”부름과 동시에 우뚝,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장 경감은 총을 빼들었다.

“너 뭐…….”쿵쾅대는 심장소리에 지축이 흔들렸다.

자기를 호명하는 게 아니라면 멈출 리가 없다.

무서울 만치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조우다.

납치범이,

이 벌건 대낮에 버젓이……

“대체 너 이 새끼…… 정체가 뭐야.”“…….”사내의 등은 묵묵하게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사건, 항상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고 있지 않습니까?’‘이런 건 어떻습니까? 신영원이 자발적으로 사라졌다. 이놈과 함께.’‘함께 도피했다.’

신영원을 업고 눈앞에서 유유히 사라진 강호운.

신영원을 찾으려 했던 진주양.

진주양을 향해 미안한 눈빛을 보내던 신영원……

정말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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