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50화 (50/83)
  • 50화. 소꿉놀이2016.12.25.

    -1년 전, 영원 26세

    영원은 눈을 깜박였다.

    침대에서 일어나니 낯선 호텔방이었다. 옷도 새로이 갈아 입혀져 있었다.

    주변을 경계했지만 주삿바늘을 무식하게 꽂아 넣던 간호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객실은 50평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녀 혼자.

    텅 빈 호텔……

    “아, 깨어나셨네요.”호텔 직원이었다.

    “아프셨다고 해서 죽을 준비했습니다.”그녀는 피폐해진 영원의 속을 달래주려 곱게 쑨 흰 죽을 챙겨주고 떠났다.

    하루는 주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지나갔다.

    이틀째. 그는 오지 않았다.

    사흘, 나흘, 룸에서 지내는 동안 식사는 제 시간에 세끼가 챙겨졌고 그녀는 무료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하게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안에서 치솟는 분노를 영원은 주체할 수 없었다.

    TV 액정에 스탠드를 집어던졌다.

    와장창 - ! TV가 선반 뒤로 넘어갔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룸서비스 직원이 왔다가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아연해졌다.

    폭풍이 휩쓴 듯 처참해진 폐허에 그녀는 서 있었다.

    “아……, 이런.”직원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30분 뒤 달칵, 문이 열리고 누군가 왔다.

    사내는 살벌한 방 안 풍경에 잠시 멈칫했다.

    영원이 얼른 문가를 봤지만 기묘한 실망감에 찼다.

    그녀가 기대했던 남자가 아니었다.

    “충견이 왔네.”“불만 사항이 있으신 것 같다 해서 왔습니다.”단호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양 비서가 영원에게 말했다.

    “그런 거 없어.”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룸서비스 직원에게 부탁하시면 됩니다.”“…….”“직원을 부르고 싶다면, 내선 전화를 이용하시고요. 다행히 전화기는 부서지지 않았군요.”그는 묵묵히 물건들을 치우며 잔해 속에서 전화기를 찾아냈다.

    영원은 소파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가 물건들을 치울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았다.

    양 비서가 드디어 허리를 폈다. 문으로 걸어가는 등을 영원이 멍하니 쫓았다.

    나가기 직전 양 비서가 그녀를 돌아봤다.

    영원은 아무 말도,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눈을 할 뿐이었다.

    “이사님을 원망하십니까?”자기 상사를 죽이려 한 여자에게 예의를 갖출 마음은 없는지, 그가 짧게 해법을 제시했다.

    “나가고 싶다면, 문을 열고 나가면 됩니다.”문을 여는 법을 알려주었다.

    여전히 재미없는 낯짝을 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탁, 문이 닫혔다. 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다시 사흘이 흘렀다. 여전히 영원은 혼자 식사를 했다.

    멍하니 숟가락질을 하다 다시 발작이 찾아왔다.

    ‘난 다정해질 수 없어.’‘그러니까 네가 포기해.’그따위 말 하나 해놓고 코빼기도 비치치 않는 남자에,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는 남자한테 미친 듯이 화났다.

    우격다짐으로 입속에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손가락으로 디저트까지 집어 위에 밀어 넣다가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우……웩.”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폭식이었다.

    1시간쯤 흘렀을까.

    어질어질해서 세수를 하는데 얼굴이 창백했다.

    그녀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한 건 다음 끼니를 가져온 직원에 의해서였다.

    급체로 병원에 실려 갔다.

    영원은 병실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찾은 건 옆자리였다.

    이번에도 없으면 정말 용서하지 않겠다고……

    영원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부드럽게 이마부터 흘러내리는 음영선, 윤곽을 이루는 이목구비는 균형적이다.

    긴 팔다리마저.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던 얼굴이었다.

    그때 그가 눈꺼풀이 밀어 올렸다.

    누워서 그를 빤히 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8일 만이었다.

    살아 있는 그를 확인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뛰어 왔던 걸까.

    후줄근하게 풀어헤쳐진 와이셔츠가 긴박한 상황을 대변했다.

    칼라가 땀에 젖어 있었다.

    약간 피가 비치는 목 거즈를 보며 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룸서비스 비싼 걸로만 잔뜩 시켜먹었어.”영원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진하게 말했다.

    “체크아웃 할 때 돈 엄청 깨질걸. 내가 그 방에서 비싼 물건은 다 때려 부쉈거든.”그녀에게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주는 남자였다. 그 원망은 그만이 풀어줄 수 있다. 그는 반응이 없었다.

    “화 안 내?”“이제부터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참아줄 참이야.”“네 성격에?”“단 한 가지 빼고.”그 한 가지가 뭔데? 영원이 궁금해서 눈알을 굴렸다.

    주양은 영원의 얼굴을, 손가락을 훑었다. 눈썹, 미간, 입술……

    “목을 찔렸을 때 생각했지. 만약에 내가 죽지 않고 눈을 뜨면…… 널 놔주지 않겠다고.”영원은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화내도 좋아. 평생 미워해.” “…….”“넌 나한테 못 벗어나.”“…….”“너는 그때 날 죽였어야 했어.”이런 사랑 고백이라니.

    그것을 또 그녀는 알아들었다. 그도 이상하고 그녀도 이상했다.

    그러니까 자기감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할 줄 모르는 이 불쌍한 남자를 그녀는 미워할 수 없다.

    주양이 호텔에 나타나지 않아 불안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까 봐.

    나갈 수 있었지만 나가지 않은 것은 그녀였다.

    그는 그녀를 감금하지 않았다.

    영원은 얼마든지 호텔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콩떡같이 말해도 나는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이런 남자인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는가.

    사랑한다고 고백할 줄 몰라서 협박처럼 옆에 놔두겠다고 엄포를 놓는 남자를.

    사랑이란 허물을 덮어주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것은 주양의 멋진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돈과, 그가 입은 옷, 그의 외모만 보고 그를 판단하며 좋아하는 속물 같은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은 손을 뻗었다.

    손끝이 주양의 가슴을 타고 올라갔다.

    더듬어지는 손길에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손은 가슴을 올라 거즈가 붙은 그의 목에 도착했다.

    영원은 거즈를 들추며 물었다.

    “아팠어?”그가 뜨겁게 그녀를 봤다.

    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을 쓸어내렸다.

    영원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정하게 웃지도, 다정한 말을 속삭여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체온만은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정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

    어두운 방에 스탠드 불빛이 은은하게 객실을 밝혔다.

    그들은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영원은 멍하니 TV를 보다 거실 옆에 딸린 방을 곁눈질했다.

    주양은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원목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영원은 시계를 봤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출발해도 늦을 텐데…….

    “서류는 언제까지 봐야 해?”영원의 물음에 주양이 힐끗 봤다.

    “먼저 샤워해.”“어?”“난 이따 할 거니까.”맥락 없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녀가 먼저 씻고 그가 씻는다.

    하지만 잠시 생각이 헝클어졌다.

    무슨 소리지? 그가 왜 여기서 샤워를 하지?

    기계결함이 난 로봇 같은 자세를 하고 있자 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의자에 기대어 영원을 깊숙이 눈동자에 담았다.

    “너랑 할 거야.”“…….”“오늘.”그의 직설적인 방식은 언제나 그녀가 예상치 못한 지점을 침투해왔다.

    그것은 예상치 못하다는 점에서 강렬한 의미를 지녔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그녀에게 그가 진지하게 명령했다.

    “샤워해.”무엇이든 중간이라는 게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혹은 되기까지 그렇게 되리라는 전조 같은 것.

    사람들이 오랜 기간 신중하게 쌓아놓은 연애의 기본 단계들을 그는 무색하게 만들었다.

    자질구레한 과정 따위는 훌쩍 건너뛴다.

    종착지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에게 정석 따윈 통하지 않는다.

    영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카펫v바닥만 더듬어봤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운이 그에게까지 가 닿았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영원은 혼란을 그대로 내보였다.

    그가 흥이 깨진 얼굴을 했다.

    영원이 앞에서 신경 쓰이게 알짱거려 집중이 안 되는지 완전히 서류를 닫았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걸어왔다.

    영원부터 해치우자고 작정한 사람처럼.

    소매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그럼 지금 해.”영원은 느닷없이 외쳤다.

    “새, 생각해보니까, 나 빼먹은 일이 있어.”어색한 연기에 그가 느긋하게 입술을 당겼다.

    “유감인데. 이렇게 갑자기?”“내일 아침 조식메뉴 확인하지 않았어. 가끔 맛없는 게 나오기도 하거든.”단추를 푼 손이 타이를 잡아끌었다.

    영원은 뒷걸음질 치다 소파에 오금이 부딪혔다.

    급해진 마음에 얼른 리모컨을 찾아들었다.

    “맞아! 지, 지금 <동물의 왕국> 재방송 할 시간이야. 지성인은 다큐를 즐겨 봐야 해.”하지만 리모컨을 금세 강탈당했다. 주양이 리모컨을 눌러 TV를 껐다.

    “먼 데서 찾을 거 없어. 동물의 왕국은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으니까.”그가 그녀의 몸을 밀쳤다. 털썩, 소파에 드러눕혀졌다.

    그가 위로 올라탔다.

    완전히 풀어진 타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거, 건강도 안 좋잖아. 회복 덜 된 거 아니었어?”“목운동은 아니잖아?”“허리와 목은 관계가 있댔어.”“내가 알아서 조절해.”그가 영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기도가 꽉 막혔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말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채근했지만 그도 흐릿해졌다.

    짓눌린 숨이 살짝 새 뜬 입술에서 배어나왔다.

    “아…….”소파에 등이 완벽히 눕혀져 밀착됐다.

    엎치락뒤치락, 거친 숨소리가 어둠을 채웠다.

    활력이 넘치는 어깨근육을 더듬자 후우, 어둠 속에서 날 선 그의 눈빛이 깜박깜박 그녀를 비추었다.

    자극했는지 그의 욕망이 일어선 것이 느껴졌다.

    영원은 그의 셔츠 끝을 부여잡았다.

    “숨 쉬기가 힘들어.”그의 아래에 깔려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영원이 바르작거리자 주양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때 기억해?”그가 귓불을 핥고 그녀와 눈이 얽었다.

    그날 그들이 섹스한 첫 날.

    “차차 돌아올 거야.”“…….”“선명하게.”그의 말은 정확했다. 그때 그 감각, 쾌감이 해일처럼 다시 그녀를 덮쳤다.

    *

    “소꿉놀이에 너무 심취하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차에 올라타려는데 문을 열어주며 양 비서가 딱딱하게 말했다. 주양이 양 비서를 봤다.

    “이사님은 현재 공식적으로 사귀시는 분이 계십니다.”그간 잊고 있던 현안을 주양은 그제야 떠올렸다.

    영원의 문제로 신해수를 아직 처리하지 못했다.

    진두영이 찾는 여자가 신해수인 줄 알고 저지른 섣부른 실수.

    주양이 얄팍하게 미간을 좁혔다.

    “공식적은 아니죠. 비밀 연애일 텐데요.”“소문이 돌고 있습니다.”“진두영 쪽 움직임, 아직도 수상합니까?”진두영은 자신이 신해수와 사귀는 걸 믿지 못할 것이다. 정말 사귀는지 뒤를 캐고 다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집은 주시할 것 같아서 호텔에 뒀는데.

    영원과 있다는 사실이 진두영의 귀에 들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

    “당분간 이곳 출입은 자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양 비서가 말했지만 주양은 알 수 없이 눈을 치뜰 뿐이었다.

    *

    그와 호텔에서 계속 지냈다.

    아침이 되어도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호텔에서 출근을 했고 퇴근했다.

    일상이 반복되면서 영원은 그를 위해 청소를 하고 저녁을 차렸다.

    출근하는 그를 배웅할 때가 가장 외로워지는 때였다.

    주양이 출근하면 영원은 호텔 라운지 카페에서 시간을 때웠다.

    대낮에 한가로이 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부류 상류층 여자들뿐이었다.

    생크림 잔뜩 얹어진 티라미슈를 먹다 보면 심심찮게 사교계 여자들의 이야기가 흘러들었다.

    “선자리가 계속 들어오는 모양이야. 명진그룹 쪽에서 노골적으로 의사를 밝혀오는데 감감무소식이래. 염문설 돌잖아.”“안 그래도 우리 남편 검찰 쪽에 친분 두텁잖아. 총장 선에서 흘러나온 얘기라며?”“겨우 사귄 게 백운당 둘째 딸이라니. 말이 되니? 격 떨어지게.”영원은 순간 포크질을 멈췄다.

    “어찌나 황당하던지.”“이미 가족들한테 인사시켰대.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기정사실화 됐다던데.”“에이. 결혼까지야 가겠어?”잊고 있었다.

    그가 해수와 교제를 한다는 것.

    어떤 사업적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건, 그는 해수와 대외적으로 사귀는 사이다.

    이렇게 소문이 발 빠르게 퍼질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안일했다. 주양이 해수와 결별한대도 해수의 자매인 자신과는 불가능하다는 것.

    한신그룹의 명예에 먹칠한 추문이 될 거라는 것.

    여자들은 귓속말을 했지만 다 들렸다.

    “근데 그것만이 아냐. 나 저번 주에 피트니스 이용하고 가다 한신 손자 봤어. 매일 여기서 출퇴근하는 거 같아.”“잘못 봤겠지.”“나만이 아냐. 심심찮게 목격되나 봐.” “아니,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영원은 정면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앞 테이블에 낯익은 사내가 뜨거운 차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분명하게 영원을 응시하면서.

    “뻔하지. 호텔에 숨겨진 여자가 있는 거 아니겠어.”수평선보다 평행선에서 바라볼 때 서로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기이한 운명의 얽힘과, 절실했기에 그 사랑은 역겨울 수밖에 없었던 것들.

    하필 그 순간에 진두영이 그녀 앞에 있어야 했던 운명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건지.

    여자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어머. ……진 이사한테 여자가 또 있어?”진두영의 깊고 부드럽던 눈매는 얼음장처럼 한없이 차가웠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냐고.

    어떻게 나를 이리 실망시킬 수 있냐고.

    그는 좀처럼 영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 세컨드.”영원의 처지를…… 신랄하게 질책하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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