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실종 23일째 <2>2016.12.22.
영원은 간호사를 사로잡고 병원 관계자들과 대치했다.
유리조각을 꽉 쥔 탓에 팔뚝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얀 환자복에 알알이 맺힌 원색적인 피비린내가 각막에 파편처럼 꽂혀왔다.
사, 살려줘요.
간호사의 목 끝에 메스를 겨누고 영원은 눈앞의 남자를 봤다.
증오스런 눈길이 주양을 끝장낼 것처럼 담았다.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어.”허기진 음성은 쇳소리처럼 갈라졌다.
“나는 그저 사랑을 했을 뿐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그를 믿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믿기로 한 거였는데……,
그녀가 하는 사랑은 항상 실패였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사랑만 고르기 때문일까.
그녀가 사랑을 준 사람들은 전부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계모를 사랑했다. 친엄마보다 더.
온 힘을 다해 사랑했지만 돌아온 건 학대였다.
“맞는 게 너무 치욕스러웠는데, 죽고 싶을 때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왜 자신을 때리는지,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나중에는 사는 것보다 ……맞는 게 쉬워졌어.” 납득할 수 없는 시간들이 무연히 흘렀다.
“이제부터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주양은 영원을 병원에 데려오며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했다.
영원의 생각은 달랐다.
달라지는 것, 없다.
“네가 날 여기에 평생 가둬도, 비참했던 내 인생에 달라지는 건 없어.”“…….”“나를……, 나를 눈물 흘리게 하는 사람이…… 하아, 하. 그 여자에서, 너로 옮겨진 것뿐이야.”체념이라 해도 무방한 자조가 주양의 마음에 타격을 입혔다.
그가 턱에 힘을 주었다.
모두들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다.
주양이 한 발짝 걸음을 떼었다.
영원이 간호사를 칼날처럼 위협하던 유리 끝을 그에게 겨눴다.
“오지 마.”“…….”“오지 마……. 내가 못 할 거 같지?”“…….”“널, 널……! 죽일 수 있을 거 같아!”이 칼로 그를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감이 생성됐다.
주양은 멈추지 않고 한 발짝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경호원들이 위험하다고 저지했지만 그를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행위가 이뤄졌다.
영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유리조각을 놓쳤다. 간호사가 도망을 쳤다.
그가 영원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짠 물기가 뺨을 가르고 적셨다.
거친 숨소리…… 영원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빨려 들어갈 듯, 지독히 검은 눈동자가 버티고 섰다.
응시해오는 눈빛은 노기로 미약하게 데워져 있다.
그녀에게 화가 난 듯했다.
“매일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자신을 꽤 자세히 확인하곤 해. 거울을 똑바로 보며 다짐하지. 어제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 오늘 하루도 뿌듯하고 보람차게 보내자.”“…….”“모두들 배신감을 느낄 거야……. 내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보람찬 삶을 산다는 것에.”“…….”“나 같은 악인은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주양은 유리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딴 게 날 죽일 수 있을 거 같아?”“왜 그랬어?”영원은 턱을 웅얼거렸다.
“나한테 왜 그랬어……?”덜덜 떨려 입술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듣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다.
“나한테 왜 이래!”“내가 왜 그랬을 거 같아.”그의 물음에 맹렬한 혐오감이 영원의 표정에서 돋아났다.
사랑에 눈이 멀어 그동안 외면해왔던 것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콩깍지도 벗겨질 때가 됐다.
주양은 그녀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었다.
조부가, 삼촌이, 김인택이 그를 볼 때의 시선이었다.
정상인의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폭력성.
그는 피 묻은 유리를 정중히 손수건으로 감싸 영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 네 눈에도 제대로 보여? 내가 누구 같아.”긴 시간을 돌아 이 꼴을 보이며, 또다시 그때 그 54층 방에서처럼 여자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나쁜 겁니까?’“역시 내가 나쁜 게 맞지?”영원이 팔을 쳐들었다.
그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유리를 쥐고 있던 걸 깜박했다.
그는 그 순간에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목덜미에 대었다.
영원은 팔목을 뒤로 빼다가 유리를 잘못 휘둘렀다.
푹, 하고 박혔다 빠져나오는 감각이 머리끝을 쭈뼛쭈뼛 곤두 세웠다.
챙강 - ! 영원은 유리를 떨어트렸다.
후드득, 눈물이 추락했다.
피가 그의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천천히 손바닥으로 목을 덮었다. 손에서도 피가 마구 흘러내렸다.
의료진들의 다급한 외침이 소용돌이쳤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뒷걸음질 치는데 그가 손을 뻗었다.
영원의 멱살을 틀어잡아 가지 못하게 했다.
“출혈이 심해요.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이사님!”의료진들이 그를 그녀에게서 떼어내려 했지만 그가 그녀를 쥐고 놓지 않았다.
코끝이 가까이 그와 맞붙었다.
저를 찌른 칼날보다 더 강렬하게 그녀를 주시했다.
주양은 피가 새는 목을 지혈하듯 꽉 눌렀다.
머리는 냉정하니 차가운데 호흡이 이상하리만치 가팔랐다.
이렇게 아픈데, 이 고통의 10분의 1만큼도 그는 인간적이지 못하다.
아픔을 느끼는 센서는 똑같이 장착되어 있었지만 여과장치에 하자가 있다.
그의 아픔은 심장을 거쳐 뇌로 가는 동안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죽인다.
사람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타인과 공감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다르다. 동질의 아픔이 곧 인간성을 완성시켜주진 않는다.
그가 아팠던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아플 거야, 가 아니다.
내 아픔은 아픔이고 그들은 용서할 수 없다.
아픔을 느끼는 순간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화된다.
왜 나는 ‘그들과’ 다른 것인가.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통은 그의 태생처럼 도구로서 존재했다.
5천만 원에 대리모의 자궁에서 태어났듯이, 고통은 그의 안에서 철저히 도구화됐다.
타인과 공감하기 위해서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난 다정해질 수 없어.”주양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멱살을 옥죈 손아귀는 더욱 그녀를 틀어쥐었다.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열병처럼 뜨겁게 쏟아진 그의 말이 그녀의 심장이 뒤흔들렸다.
피로 뒤덮인 셔츠를 보다가 영원은 비겁하게 울먹였다.
“내가 한 게 아니야.”“…….”“내, 내가 한 게 아니야. 갑자기 네가 칼을 목에 대는 바람에…….”그를 찔렀다는 사실이 영원을 패닉에 빠뜨렸다.
눈물 흘리고 있는 여자를 보다 주양은 얼룩진 뺨을 닦아주었다.
야박한 척 굴지만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여자를 볼 때면, 그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살아났다.
그녀는 그를 채워주었다.
심지어 고통마저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여전히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이 여자의 눈물은 외면이 안 됐다.
그녀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 되었다.
“그래. 네가 한 게 아니야.”주양은 잇새로 마른 음성을 흘렸다.
“네가 한 게 아니야.”“…….”“내가 한 거야.”영원은 그저 멍청하게 눈물만 떨궜다.
그녀를 이곳에 가둬놓고 그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최대한 만남을 미루고 싶었다. 이렇게 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인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 것이란 걸 예견했기 때문에.
주양의 손끝이 떨려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미안.”예상치 못한 고백. 영원이 휑뎅그렁해져서 그를 봤다.
사실 병원에 와서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였는데…….
“미안…… 하다.”이제 생각나서.
주양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무릎이 꿇려지고, 손이 축 땅으로 늘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모든 고통도, 괴로움도, 그러므로 사라졌다.
★
-실종 23일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정신병원 원장은 장 경감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내용을 털어놓았다.
신영원이 파주병원에 온 첫날, 그 뒤에 벌어진 자살소동.
고작 일주일 사이에 터진 사고였다.
“이사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죠.”병원원장은 그날 벌어진 살풍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난 이미 그때 예감했습니다. 그녀가…… 이사님의 신부가 될 거라고.” 장 경감은 수첩을 닫았다.
여운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그 남자, 생각보다 더 진심인지도 몰랐다.
가려는 장 경감을 원장이 불러 세웠다.
“노 집사님을 만나보시겠습니까?”아니. 만날 계획이 없었다만.
“그분이 아직 병원에 계십니까?”장 경감이 놀라서 원장을 봤다.
노 집사는 이 병원에서 회복기를 갖고 있다고 했다.
신영원, 그러니까 신영원의 이름으로 병원에 감금되었던 신해수가 탈출 시도 중에 수면제 치사량을 먹여 죽다 살아났다.
노 집사는 옥상에 쳐놓은 유리펜스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들이 옥상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노 집사가 허공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불러댔다.
“잘못했어요.”누구에게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간병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그 뒤에 쭉 저런 상태예요. 사장님이란 사람만 불러대요.”노 집사는 확실히 눈빛에 총기가 없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허공에 대고 사장님만 애타게 찾고 있었다.
“사장이라면, 최혜란 사장을 부르는 건가요?”“아뇨. 죽은 전 사장이라던데요.”최혜란 사장의 전 남편, 백운당의 진짜 주인.
노 집사는 죽은 전대 사장의 환영을 보는 듯했다.
“용서해주세요. 내가 아가씨를 모르는 척했어요. 사모님이…… 무서워서…… 내가 아가씨를.”장 경감은 조심스럽게 옆 벤치에 앉았다.
노 집사가 원래 죽은 전대 사장의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마자 새로운 실세로 부상한 최혜란에게 노선을 틀었다고.
죄책감인 걸까?
자신을 거둔 사장을 배신하고 최혜란에게 붙었으니 미안할 만도 했다.
그의 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책임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착잡한 마음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노 집사가 장 경감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장 경감이 물었다.
“나를…… 알아보겠습니까?”부릅뜬 눈동자는 분명 장 경감을 알아보는 듯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겠어요?”노 집사는 의식이 통째로 잘려나가 웅얼거렸다.
“세상한테서…… 와, 세상으로부터…… 라. ……도대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뭐라고요?”“세상한테서…… 부정당한 여자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던 남자의 사랑이라. 그런 사랑은 도대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넋이 나간 노파가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였다.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봐도 노 집사는 자기 세계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사랑의 형태? 신영원과 진주양의 사랑을 묻는 건가?
재벌과의 사랑은 뻔했다.
세상 모든 걸 가진 왕자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하녀를 버리거나, 왕자가 하녀를 거두거나.
하녀가 왕자를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왕자가 없이 하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왕자가 사랑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 하녀가 특별해질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하녀가 왕자를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이 사건이었다.
신영원은 진주양이 누리게 해주는 모든 부와 권력을 걷어차고 제 발로 나가버렸다.
“나 역시 궁금하네.” 세상한테서 부정당한 여자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던 남자의 사랑이라.
그런 사랑은 도대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
병원을 나오자 수진이 먼저 차에 타 있었다.
“자살소동 이후에 신영원은 정신병원을 나왔어요.”간호사들을 탐문해 알아낸 것들을 수진이 늘어놓았다.
“진주양은 어떻게 됐지? 목을 찔렸잖아.”“뭐, 죽을 정도의 상해는 아니었으니까. 결혼도 했고, 지금 우리 목줄을 틀어쥔 거겠죠?”생각할수록 기상천외한 여자였다.
신영원. 그 남자를 다치게 하고도 무사하다니.
사랑에 빠지면 대책이 없다더니, 가차 없는 그 남자도 별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내인가.
“잠깐. 자살소동 직후라면 고작 8월 초잖아. 너무 이른데?”가출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 한 달을 병원에서만 보냈던 게 아니라는 소리죠.”병원에 입원한 기간은 고작 일주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4주는 누구와 있었을까? 안 봐도 비디오였다.
“수사 초기에 진주양의 행적을 역추적한 적이 있어요. 작년 8월. 그 기간에 진주양은 W호텔에서 한 달을 머물렀어요.”수진이 중요한 단서를 넘겼다.
“신영원의 행적은 곧 진주양이지. 진주양을 따라가면 신영원이 나오고.”“진주양이 호텔에 들어간 시기가 8월. 신영원이 병원에서 퇴원한 것도 8월이에요. 그땐 소문의 여자가 당연히 신해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주양이 호텔에 숨겨둔 여자가 있다는 스캔들이 흐르기 시작한 게, 바로 8월이에요.”“그 말은…….”“신영원과 진주양. 둘이 호텔에서 본격적으로 살림을 차렸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