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48화 (48/83)

48화. 진실을 비추는 거울2016.12.18.

-1년 전, 영원 26세

1개월 전, 8월.

영원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병원 직원들을 따라갔다.

과연. 주양이 소개한 성형외과는 초호화였다.

강남에서도 이런 곳을 찾기는 힘들 거다.

“쌍꺼풀 없애는 수술은 가격대가 어느 정도 해? 사람에 따라 수술 결과가 차이 난다는데. 설마 수술한 티가 나는 건 아니겠지.”권력이란 게 아래서 좋은 거다.

알아서들 기어주니까. 한신가의 지인에게도 병원은 VIP 대접을 했다.

“VIP께 불편함 없도록 하세요.”“VIP 식사 시간은 절대 엄수해야 합니다.” 원장이 직접 마중 나와 간호사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당연히 병실도 특실 층이었다.

간호사는 옷가지를 놔두고 갔다. 환자복과 슬리퍼, 쾌적하고 깔끔한 병실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TV는 갖춰놔야 하는 거 아냐? 며칠을 어떻게 버티라고. 나 참.” 항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미닫이문을 좀 더 힘주어 밀었다.

덜커덕 덜커덕. 문 밑에 못이 박힌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여기! 문이 고장 난 거 같아!”소리쳐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못 들은 걸까?

“이봐!”외침이 복도 밖까지 무의미하게 메아리 쳤다.

이 층수에 있는 사람은 그녀 혼자만 있는 듯 지나치게 적막하다.

병실 공기가 숨 막히게 그녀를 에워쌌다.

“여기…….”목소리에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

표정이 굳은 영원은 병실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었다.

“여, 여기 사람 있어.”겹겹이 둘러진 석조 건물은 감옥의 형상처럼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피가 터져라 외친들 누구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니까.

그제야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영원은 피부로 느껴졌다.

*

똑딱똑딱똑딱똑딱  -

똑딱똑딱똑딱똑딱  -

시계초침이 핏속을 흘러 다녔다.

귓가를 고통스럽게 누르는 건 주양의 나지막한 속삭임이었다.

‘……모든 게 달라질 거야.’원망스런 목소리는 꿈을 넘어 현실 영역까지 점령했다.

확 - 의식이 확장됐다. 영원은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꿈이었다. 한때 과거이자.

그녀가 깨어나는 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곧장 문이 열렸다.

드르륵. 문이 내는 스산한 소음을 누르며 교도관이 들어왔다.

“오늘 기분은 어때요.” 이 병원의 원장이었다.

매일같이 찾아와 그녀의 기분을 묻는 상냥한 낯짝은, 약탈자의 냄새를 풍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던데. 병원 옥상이 아주 잘돼 있어요. 점심 먹고 옥상으로 산책을 나가보는 것도 좋은 생각 같군요.”“수술 스케줄은 잡혔어?”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아 영원은 최대한 얌전하게 물었다.

병실에 갇힌 지 3일째.

아무도 영원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쌍꺼풀 수술 받으러 왔어.”원장은 인자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기분이 나아지면 쌍꺼풀 수술을 하도록 하죠.”“그깟 성형 수술 받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걱정하지 말라는 모습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희미한 불안으로 영원의 음성이 히스테릭하게 높아졌다.

“지, 집에 가고 싶어. 그냥 안 받을래.”일어나려 했지만 건장한 남자간호사들에 의해 영원은 어깨가 잡혀 눌렸다.

침대에 다시 앉혀졌다.

“가, 갈 거야!”“대기 환자들이 많아요.”“웃기는 소리 마!”“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우리 병원에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잘 따르면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요.”“미친 인간들뿐이라고! 여긴.” 자신이 조선시대에서 타임 슬립을 했다는 거짓말쟁이도 있었고, 사람을 죽여놓고 게임과 혼동하는 살인마도 있었다.

주양은 성형을 시켜주겠다며 그녀를 이곳에 데려왔다.

먼저 선심을 베풀 때부터 눈치 깠어야 했다.

하루가 삼 일이 될 동안 그는 코빼기도 모습을 안 비췄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마치 저들은 그녀를 여기에 가둬두지 못해 안달 난 이처럼 굴고 있다.

여긴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난 안 미쳤어.”“…….”“난 안 미쳤어!”영원이 식판을 집어던졌다.

사방으로 음식물이 튀었다.

원장의 하얀 의사가운을 더럽혔다. 남자간호사들이 그녀를 짓눌렀다.

영원은 아래에 깔려 숨을 흉포하게 들썩였다. 발악하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하악……! 내가 모를 줄 알지? 여긴 성형외과가 아니야. 하아……! 하아……! 왜 다들 날 미친 여자 취급해.”“신영원 씨. 진정해요.”“그 사람은? 왜 그 사람은 언제 와?”“자꾸 이렇게 흥분하면 진정제 투여합니다.”“……날 여기에 집어 쳐 넣고 안 오냐고!”“안 되겠군. 로라제팜 2mg 투여해.”주양은 오지 않았다. 여기가 사이비 정신병원이란 것쯤은 이제 영원도 받아들여야 했다.

“싫어. 싫어!”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저들은 상냥한 낯짝으로 잔뜩 겁에 질린 영원을 안심시켜놓았다.

그때가 바로 팔뚝에 주사를 꽂는 순간이었다.

“흐……아아앗! 놔!” 팔다리가 구속복에 꽁꽁 싸매어졌다.

진정제를 맞으면 하루 종일 몽롱해서 꼼짝도 못 했다.

진정제는 환자들을 공포스럽게 통제하는 ‘체벌’이었다.

“해를 끼치지 않아요. 우린 환자분을 도우려고 존재합니다. 당신은 이 병원의 VIP입니다.”VIP. VIP. 저들이 입을 열 때마다 불러대는 호칭이 처음엔 듣기 좋았지만 이젠 아니다.

VIP란 것이 어떤 건지 대력 견적이 나왔다.

VIP. 일반 환자들과 차별되는 특별 관리 대상자.

간혹 정상인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영원처럼.

허억. 허억. 허억..

믿고 싶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도 함께 밀려왔다.

그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었다. 닿지 않는 심해였다.

그를 들여다보려고 그의 심연에 내 얼굴을 비출수록 우물은 그 깊고 괴괴한 골격으로 나를 빨아들였다.

거대한 압력이 내 뼈를 뭉개고 형체도 없이 갈아버렸다.

‘겉모습만 보고 혹 했나 본데, 그 사람은 가망 없어.’해수는 진즉에 알았던 거다.

주양에게서 달아나야 산다는 것을.

광기어린 혓바닥이 속삭이는 말뜻을.

‘……모든 게 달라질 거야.’영원은 인정해야 했다.

그가 이곳에, 나를 버렸음을.

*

불빛 한 점 들지 않는 병실이었다.

주양은 어둠이 내려앉은 소파에 앉아 잠든 진 회장은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은 잠잘 때 가장 천진해진다 했던가.

얼굴에서 형형한 눈빛이 사라진 진 회장은 그저 평범하게 늙은 노인일 뿐이었다.

독한 항암치료 탓에 거무스름해진 얼굴이 더욱 가련해 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나약함을 숨결과 함께 내보내고 있었다.

평생 진 회장은 자신의 다른 면을 모른 채 살다 죽을 것이다.

자신의 잠든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타인뿐이었다.

진 회장이 눈을 떴다.

“준영아.”진 회장이 허공에 대고 헛발질하듯, 첫째 아들을 부르짖었다.

진 회장의 눈길은 소파에 앉은 주양에게 와 닿았다.

“준영아.”현실과 꿈결에 혼동하는 듯했다.

노인은 근육이 소실된 팔뚝을 흔들어 힘겹게 주양을 불렀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내 아들.”노인의 관자놀이로 악어의 눈물이 흘렀다.

주양은 반쯤 정신이 풀린 진 회장을 차갑게 봤다.

진 회장은 의아해했다.

“왜 그러니. 이 애비가 반갑지 않은 게야?”독한 약물에 혀가 뭉그러져 발음이 꼬였다.

“회장님. 전 진준영이 아닙니다.”이젠 아예 자신을 죽은 첫째 아들로 착각할 셈인가.

진 회장은 믿지 않았다.

“내게 화가 났구나. 미안하다. 아픈 너를 그렇게 포기해버리는 게 아니었는데.”뜻밖의 고해가 시작됐다.

“네가 고통스럽다고, 죽여달라고 해도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나를 미워하지 말 거라. 너답지 않은 눈빛을 하지 마.”“회장님. 전 진준영이 아닙니다.”“나를 노려보고 있잖니.”“…….”“무섭게.”주양이 입술을 비릿하게 쳐 올렸다.

“제가, 무섭습니까?”친인척들은 그가 지나가면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저주받은 왕자. 인조인간, 진준영의 대용품, 진회장의 첫째 아들을 향한 집착의 소산물.

주양은 끊임없이 달라붙는 구설수를 내버려두었다.

삶을 구성하는 데 극히 사소한 부분이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간 얼마나 편리하게 그것들을 이용해왔던가. 죄의식에 무뎌진다는 건 편리한 삶이었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영원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오지지 않았나.

그러나 ‘무섭다’라는 말은 적어도 진 회장이 입에 담을 말은 아니었다.

“준영아.”“왜 날 만든 겁니까?”주양의 목소리는 반쯤 잠긴 상태에서 흩어졌다.

“왜 나는 만들어진 겁니까?”정작 답을 해줘야 할 진 회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서.

진 회장은 하품을 했다. 몰려오는 졸음에 잠시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노인은 수마에 빨려 들어갔다.

진 회장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선보인 기이한 행동들과 주양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 왔냐.”진 회장이 퉁명스럽게 눈치를 줬다. 준영과 대화를 나눈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노인은 다시금 주양에게 의아스런 눈빛을 보냈다.

“내가 이상한 잠꼬대를 했니?” 주양은 진 회장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보다 자리를 떴다.

복도에서 퇴근하던 김 원장과 마주쳤다.

주치의로서 직분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환자에게 퇴근 허락까지 받는.

“회장님께 들렸다 가시는 길이시군요.”김 원장이 먼저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회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아들에 이렇게 효심 지극한 손자까지. 하하하.”간단히 인사치례 후 헤어지려는데, 불현듯 주양이 김 원장을 돌려세웠다.

“더 물어보실 게 남았습니까?”“항암치료 후유증……,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죠? 그때.”“면역력 저하는 물론이고 탈모에, 최악의 경우 혈관성 치매를 대비하셔야 합니다.”그 말에 주양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정돈, 재배열되었다.

“회장님께 변고 있습니까?”김 원장은 되물으며 주양을 빤히 봤다.

회장은 치매기를 보였다. 지금 발견하면 조기에 예방할 수도 있었다.

주양은 입을 떼었다. 한 치의 죄책감 없는 시선으로 간결히 일축했다.

“아뇨. 아무것도.”

.

.

.

“죽여 버릴 거야!”살기 어린 그림자가 주양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병원 지하 주차장에 들어설 때 기둥 뒤에 누군가 숨어 있었다.

수행원들이 막기도 전에 가슴팍에 계란이 투척됐다.

김보경이 악에 바친 비명을 질렀다.

“넌 인간도 아니야!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어!”김인택의 49재를 혼자 치르고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양 비서가 더러워진 주양의 옷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를 대피시키려고 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면 금세 재기할 거야. 오빠의 원수를 기필코 갚아줄 거야!” 차에 타려고 했으나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저주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돌아선 주양과 김보경의 시선이 충돌했다. 그가 여자에게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죽이겠다고 계란을 투척한 여자는 막상 그의 앞에서 고양의 앞의 생쥐였다. 찍소리 못했다.

살해당할 두려움에 김보경이 뒷걸음치다 넘어졌다.

주양의 보폭이 한 걸음을 남겨두고 멈췄다.

구두 끝에 내용물이 다 빠져나온 여자의 핸드백이 닿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물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담아 핸드백을 김보경에게 건네었다.

친절하고 정중하게.

경계의 끈을 놓지 않으며 김보경이 핸드백으로 손을 뻗었다. 주양은 정중히 충고했다.

“네 오라비는 너 때문에 죽었지.”김보경이 굳었다.

주양은 김보경의 얼굴을 위험한 시선으로 더듬었다.

“너는 네 오라비를 위해 죽을 수 있나?”김보경은 얼굴 가죽이 샛노래졌다.

주양을 이렇게 태어나게 한 건 진 회장이었다.

그런데 진 회장은 그의 눈빛이 무섭다며 두려워했다.

진 회장이 원한 건 죽은 첫째 아들 진준영이었다.

진 회장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자 그의 말에 따르면 가장 순수하고 다정한 영혼을 지녔던 그의 자식.

하지만 주양에겐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비일 뿐이었다.

진준영은 죽어서도 망령으로 존재했다.

그 굴레를 주양이 대신 뒤집어쓰고 그의 아바타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당신한테, 마음……이란 게 있긴 한 거야?”김보경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 간신히 꺼냈다.

“없을지도.”죽은 김인택 같은 마음이라면 없을 지도 몰랐다.

김인택은 동생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주양을 찾아왔고 전사했다.

주양은 그게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그런 건 어려웠다.

핸드백을 받을 생각이 없는 여자를 대신해 그가 친절히 가방 끝을 쥐여주었다.

여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주양은 차에 올라탔다.

.

.

.

쏴아아아 -

물줄기가 두피를 갈랐다.

샤워부스 아래 서서 주양은 뜨거운 머리를 차가운 물로 식혔다.

옷장을 열었다가 행거에 걸린 넥타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푸른 타이였다.

일전에 영원이 머리카락을 묶었던.

매끄러운 실크를 느끼다가 그는 타이를 코끝에 댔다.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무의식에 깔려 있는 영원의 존재감에 그가 무섭게 눈을 치떴다.

타이를 쓰레기통이 던져버렸다.

그때 양 비서가 노크했다.

“이사님, 서류를 가져 왔습니다.”“들어오세요.”옷장을 닫고 침실로 나갔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양 비서가 내미는 자료들을 받았다.

신규투자계획서와 딜러들의 연간 운용성과에 관한 보고서였다.

“김보경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양 비서가 계란사건을 잊지 못하고 모욕을 삼켰다.

주양은 확인할 것들을 사인해주고 서류를 닫으며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자 끝일 겁니다. 김인택의 처참한 시신을 마지막까지 확인한 사람이니, 제일 잘 알지 않겠습니까.” 양 비서가 납득했는지 금세 수긍했다. 그러면서 넌지시 영원의 소식을 전해왔다.

“신영원 씨에게 한 번은 가보시는 게……. 일주일이 지났습니다.”주양은 갑자기 비위가 안 좋아졌다.

“양 비서님.”“말씀하십시오.”“하나만 하세요. 신영원과 가까이 하지 말랬습니다. 자꾸 왔다 갔다 할 겁니까?”주양이 서늘하게 시선을 들었다.

영원을 믿지 말라고 한 건 양 비서였다. 양 비서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 숙였다.

“통 굴복하지를 않습니다. 짐승도 아니고, 자신이 정신병원에 가둬진 이유는 알려줘야 순응하지 않을까요.”“이유를 알면 더 화나지 않겠습니까?”“그게 무슨.”“고작 아무것도 아닌 이유였다는 걸 알면 더 화나지 않겠어요?”“……이사님?”주양은 54층 야경이 비치는 창가에 섰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경관이었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 뒤의 어둠은 드러나지 않는 법이었다.

화려한 이면 뒤에 감춰진 절망.

주양은 양 비서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랬습니다.”“…….”“나는.”얻어맞은 사람은 있는데 잘못한 사람은 없다.

얻어맞은 이유가 있지만 시시한 이유였다.

자기 손으로 아들의 숨을 거둔 죄책감이든, 진 회장은 그저 죽은 아들을 재현해보고 싶었을 테고, 주양은 그렇게 태어났다.

진 회장의 사랑은 폭력이었다. 타인이 빚어낸 일방적인 폭력에 주양은 무력한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진 회장은 인정해버린 것이다. 주양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주양을 그렇게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주양이 잘못한 것은 1퍼센트도 없었지만 고통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가 어떤 역심을 품고 조부를 봐왔는지.

‘회장님께 변고 있습니까?’김 원장의 물음에, 그는 망설이는 시늉도 않고 조부를 죽음으로 한 발짝 밀어 넣었다.

‘아뇨. 아무것도.’그래. 주양은 매순간, 조부를 자신의 인생에서 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날이 밝았다. 주양은 영원을 찾아갔다.

특진병동은 아수라장이었다. 심전도 검사를 틈을 타 영원이 자살소동을 벌였다.

의료진들 방심한 틈에 간호사 하나를 사로잡아 협박했다.

영원의 손에는 위협적인 유리조각이 들려 있었다.

“다 필요 없어.”영원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진주양, 흐윽……! 그 나쁜 새끼만 내 앞에 데려다 놓으란 말이야!”주양이 지나가자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다.

끔찍한 소음, 무더기로 쏟아지는 공포에 질린 숨소리.

터벅…… 터벅……

영원의 붉어진 눈시울이 그를 향했다.

“내려놔.”그런 순간에도 그는 침착했다.

“내려놔. 신영원.”자신이 내린 명령에 분한지 영원이 메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괴로움을 참는 표정은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년이…… 내 팔뚝에 주사바늘을 몇 개나 꽂아 넣었는지 알아?”영원이 원망스럽게 그를 보며 토해냈다.

“나를 죽이려고 했어. 나는 죽어갔다고.”“내려놔.”“그 시간에 넌 어디서 뭘 했어?”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출근했어. 그리고 퇴근을 했지.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이런 게 아닐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다는 것.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주양은 머리로는 이해했다.

사랑이란 것.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상대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정의는 그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뜬구름과 같았다.

자신이 쏟아부은 것에 비해 턱없이 보잘것없는 보상이 돌아올 때, 지금의 그녀처럼 사랑은 증오로 변질된다.

그 헌신에 배신당할 때 그들은 폭주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하기에 이른다.

영원이 바란 것은 극히 사소한 배려였다.

다정함.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부인 것.

죽었다 깨어나도 그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다.

‘넌 인간도 아니야!’영원을 탐하면 탐할수록 주양 역시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라는 인간을 한마디로 정의해버리는 낱말이었다.

그녀를 들여다보려고 그녀의 심연에 그의 얼굴을 비출수록, 그는 스스로가 무엇인지 알아갔다.

타인을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

주양의 가슴이 찢어졌다.

나는,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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