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47화 (47/83)
  • 47화. 실종 23일째 <1>2016.12.15.

    -실종 23일째

    와그작. 장 경감은 애꿎은 담뱃갑만 무참히 구겨버렸다.

    한신그룹 본사를 나오자 3:00 AM. 자동차 대시보드 시계가 노란 형광색을 띠었다.

    미명도 밝지 않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살려줘.’신영원은 문자로 SOS를 쳤다.

    필사적으로 정신병원을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국회 앞에서 직접 만난 여자는 예상과 많이 달랐다.

    멀리 도망쳐도 모자를 상황인데, 오히려 제 발로 진주양을 찾아왔다.

    죽여버려도 시원찮은 남자인데, 어째서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는가?

    이해가 가지 않던 수수께끼는 씨실과 날실처럼 정교하게 맞물렸다.

    장 경감이 비웃었다.

    “이제야 납득이 가는구만.”정신병원에 갇혀 도움을 요청한 건 신해수였다.

    신해수는 신영원의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갇혔다.

    자신의 신원을 복권하기 위해 가짜 신부의 내막을 밝히려 그토록 애쓴 것이다.

    국회 앞에 나타난 신영원은 진짜 신부였다.

    아마 결혼식장에서 사라진 직후, 진주양을 찾아온 찾아온 것일 터이다.

    신영원이 진주양에게 보낸 그 눈빛은 신부의 눈빛이었다.

    신랑을 버리고 사라진 미안함, 죄책감.

    모든 것이 퍼즐처럼 꿰맞춰졌다.

    장 경감은 지하철 출구에서 수진을 픽업했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수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정보원은 잘 만났어?”“다른 인맥 뚫던지 해야지.”“정보비 많이 요구해?”“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겠어요. 그 사람 캐시를 너무 밝혀요.”수진이 언짢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꺼냈다.

    건강보험공단 직원에게 돈을 찔러줬다. 타인의 의료기록을 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신영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캐낼 필요가 있었다.

    “신영원은 작년 11월에 정신병원에 격리됐네요. 망상을 동반한 정신분열.”수진이 조수석에 앉아 기록을 훑으며 밝혔다.

    기록엔 신영원이라도 되어 있지만 사실 그건 신해수였다.

    자매를 정신병원에 처박아두고서, 신영원은 그때 진주양과 신해수의 신분으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게 있어요. 파주 정신병원 간호사한테 들은 얘기로는, 신영원이 입원을 한 게 11월이 처음 아니라고 들었거든요.”“의료기록엔 11월이라며?”“그러니까요. 신영원은 총 두 번 걸쳐 정신병동에 입원했어요. 첫 번째 격리는 작년 8월. 두 번째 격리는 작년 11월 초겨울에 이뤄졌어요. 11월에 격리되고서 올해 6월까지 쭉 갇혀 있던 거고요.”분명 2차례에 걸쳐 입원했는데 의료기록엔 11월 기록만 남아 있었다.

    “첫 번째 입원이 비보험이었다는 거죠.”장 경감은 턱을 쓸었다.

    “왜지?“신영원이 가출을 했다는 소문 기억나세요?”“가출?”‘걔가 좀 이상한 애인기라……. 제 언니, 해수 남편 될 사람을 그리 쫓아댕겼제.’‘그것 때문에 집도 나갔다니까. 가출을 해서 한동안 걔 찾는다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지.’그래. 그런 얘기가 있었다.

    진주양과 신해수가 깊은 사이가 되자, 이를 질투한 신영원이 가출을 했다고.

    수진이 뒤늦은 깨달음에 쐐기를 박았다.

    “가출시점이 작년 8월쯤이더라고요.”“근데?”“뭐 냄새 나지 않아요?”정신병원에 격리 수용되려면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동의 없이 불법으로 사람을 감금시키는 경우는 음지에도 허다했다.

    신영원이 가출을 한 시점이 작년 8월.

    비보험 입원도 마침 작년 여름.

    신영원이 8월에 가출한 게 아니라 사실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었다면?

    백운당 가족들조차 모르게.

    비보험으로 사람을 감금시켰다 빼낼 수 있는 권력을 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진주양의 짓인가?”“적어도 8월에 정신병원에 갇혔던 건 진짜 신영원이었을 확률이 커요.”2번에 걸친 정신병원 수용 중에 8월은 진짜 신영원이었고, 11월 두 번째 격리수용 땐 신영원의 이름으로 신해수가 감금됐다.

    8월.

    그 한 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8월에 진주양의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귀찮은 여자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가 사랑으로 승화시킨 건가?

    어째서 신부가 바뀌게 된 건지 장 경감은 아직 잘 몰랐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진주양은 그 무엇에 대해서도 보류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아끼듯이.

    그저 장 경감에게 경고성 멘트를 날렸다.

    사냥하기 전에 사냥당하지 말라는.

    ‘내 가족, 경찰, 심지어는 내 편들도. 아무도 믿어선 안 됩니다.’진주양은 장 경감에게 오롯이 혼자 힘으로 신부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가족을 믿지 말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근데 경찰과 그의 주변 심복들까지 믿지 말라니.

    ‘프락치가 있는 건가.’ 진주양의 적이 진두영만 있을 거란 건 오산이었다.

    한 명의 괴물을 죽이면 또 다른 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신의 친인척들……. 괴물 같은 인간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묻는다고 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장 경감은 자세한 내막은 혼자 알아내기로 했다.

    처제와 바람난 개새끼에서, 알고 봤더니 버림받은 왕자에, 신부를 기다리는 로맨티스트라니.

    ‘당신 뭡니까?’작은 불만이었다. 시비 걸듯 그렇게 물은 것은.

    주양은 짧고 굵게 대답할 뿐이었다.

    ‘신랑.’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지극히 당연한 단어가 장 경감의 마음을 이상하게 흐트러트려 놓았다.

    저토록 무정한 남자를 비련의 남자주인공으로 만든 신영원은 어떤 여자였을까?

    기이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왕자가 기껏 마음을 준 여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허름한 하녀였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이기에?’ 아니. 매력이 없었기에 남의 이름까지 훔쳐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 때문에 신해수는 정신병자가 되었다.

    멀쩡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점에서 신영원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악인이었지만, 맹렬한 거부감이 일지 않는 것은, 영원이 남긴 불행한 삶의 발자취 때문이었다.

    백운당의 귀신. 사람들에게 천대받던 천덕꾸러기. 재투성이 신데렐라.

    질투하고 동경하던 다른 자매의 신분을 훔쳐 결혼을 감행했지만 결국 도망쳤다.

    그녀의 성격이 대략 나왔다.

    커다란 욕망에 비해 어설프고 나약해서 손해만 보는. 끝장을 보지 못하는 무른 성격.

    ‘막상 죄책감이 들었나? 무서워서 도망쳤나?’‘그런 신영원을 납치한 제3자는 또 누구지?’이런저런 상념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수진이 끼어들었다.

    “전화로 대충 정황사정 듣긴 했는데, 믿기지가 않아서요. 지금까지 우리가 정신병원에서 봤던 여자가 정말 신해수였다는 건가요?”“그런 셈이지.”“기가 막히네.”“작정하고 달려들면,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거, 저 세계 사람들한테 그다지 어려운 일 아냐.”“그러니까 진주양이 결혼한 건 사실 신영원이었고, 신영원이라고 알았던 정신병자가…….”“신해수였다고.”수진의 경악 어린 어조와 달리 장 경감은 담담했다.

    지금 자기네들이 죽어라 찾는 신부가 신영원이란 걸 알면 현기영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족 전부를 속인 연극이겠죠.”“그러니까 경찰이 신부를 찾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겠지.”경찰의 귀에 들어가면 숙부 진두영에게도 흘러들어갈 테고, 그걸 기회 삼아 진주양을 흠집 내려는 세력들이 들끓듯 일어날 터다.

    “세상에 밝혀지면 쇼킹한 사건이 될 거야.”“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신해수예요. 굉장히 똑똑한 여자라고 들었는데.”온화하기로 소문난 백운당 해어화와 히스테리 부리며 자살난동을 피운 정신병자는 매치가 안 된다.

    “어떻게 한순간에 그렇게 망가질 수 있는 겁니까?”자동차는 논이 펼쳐진 곳으로 접어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파주’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쳤다.

    장 경감이 나직이 목소리를 깔았다.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알아내야지.”대체 저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1년 전, 해수

    기억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있다가도 어떤 계기로 거품처럼 일어난다.

    해수는 갑자기 어릴 적 일이 생생해졌다.

    세 자매는 숨바꼭질 자주 했었다. 백운당은 곳곳이 숨을 장소 천지였다.

    커다란 백운당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서로를 찾아다녔다.

    언니인 성원은 그때도 어린애답지 않게 얌체 같았다. 백운당 담장 밖에 숨는 반칙을 썼다.

    그래봐야 얄팍한 수였다. 해수는 언제나 성원을 찾아냈다.

    그에 반해 영원은 요령이 부족했다.

    매번 비슷한 장소에 숨으면서 자기 딴엔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성원과 해수는 영원이 숨은 곳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저녁시간이 돼서, 영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잠자리에 들다 영원이 생각나 직접 찾으러 가니, 영원은 그곳에 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를 찾으러 와줄 때까지.

    해수는 달리기에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술래였다.

    못 찾진 않았다. 그 반대였다.

    자매들의 성향은 읽기가 쉬웠다.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다는 걸 해수가 간파한 건 타고나길 눈치가 빠르고 센스가 탁월한 탓이었다.

    해수는 반드시 찾아냈고 자매들은 어김없이 잡혔다.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기억은 뒤통수를 치듯 불쑥 해수를 찾아왔다.

    숨바꼭질이 다시 시작됐음을 예고하며.

    영원이 숨어버렸다.

    8월, 그 서늘한 여름에.

    *

    성원이 사장실 테이블에 쪽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

    “신영원이 남기고 간 거야.”영원의 방 책상에서 찾아낸 쪽지였다.

    아침에 집이 발칵 뒤집어졌다. 아침밥을 차려야 할 영원이 모습을 감췄다.

    백운당 어디에서도.

    “드디어 가출한 거지, 뭐.”성원은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자신은 영원이 가출한 작금의 사태와 무관한 타인인 양 객관화했다.

    “엄마가 오죽 걔를 구박했어. 신해수, 너도 은근 부려먹었지.”해수는 쪽지를 읽었다. 당분간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로?”“그냥 집 나간 거야. 너 때문에.”“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내가 뭘 어쨌다고?”“오래 버텼어. 나 같았으면 벌써 나가도 열 두 번은 나갔지.”“……그만!”상석에 앉은 최혜란이 다툼을 막았다.

    혜란은 곧장 해수에게 오늘 스케줄을 일렀다.

    “호들갑 떨지 마. 별것도 아닌 일에 쏟을 시간 없다.”그녀는 딸들을 사장실에서 쫓아내듯 내보냈다.

    두 자매는 복도를 걸었다.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혜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영원이 가출할지 몰랐을 테니까.

    누구보다 영원의 가출에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막말로 영원이 이대로 가출해서 시체로 발견된다면 경찰이 용의선상에 둘 1순위가 혜란이 될 것이다.

    해수가 모퉁이를 돌려는데 성원이 벽에 기댔다.

    질기게 해수를 물고 늘어졌다.

    “엄마가 아냐.”해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럼 나 때문이라는 거야?”“너 때문이지.”“무슨 근거로?”“네가 진주양하고 혼사가 오갈지도 모른다고 한 뒤 바로 나갔어.”해수는 반박하지 못했다.

    “엄마의 학대는 걔한테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해. 만성이 되었으니까.”“…….”“일상 그 자체니까.”“유감이지만 빈약한 추론이야. 가출할 이유는 많아.”   “걔가 가출할 위인이 못 된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정확히 보증할 텐데.”성원이 표적을 향해 결정적인 비난을 꽂았다.

    일단 자신한테 불리하면 인정하지 않고 보는 게 해수의 습성이었다.

    영원이 주양에게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

    영원이 가출을 했다면 그건 주양 때문이었다.

    영원은 가출할 마음이 없는 무뇌에 가까웠다.

    가출을 했다면 혜란의 학대가 절정에 이르렀던 청소년기에 진작 시도했을 것이다.

    “그 말 병신, 내심 진 이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어, 넌 몰랐겠지만. ……아니. 알고 있었나?”성원이 고약하게 해수를 찔러보며 비꼬았다.

    해수의 어깨를 치고 그녀가 복도를 돌아나갔다.

    .

    .

    .

    며칠 내로 돌아올 줄 알았다.

    가출은 일주일에서 한 달이 되어갔다.

    모두들 정상적으로 일상을 되찾아갔다.

    백운당 직원들도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세상의 가십들이 짧게 소비되었다가 사라지듯, 일주일을 못 버텼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영원은 빠르게 잊혀져갔다.

    해수의 기억에서만 빼고.

    모두들 너무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석연치 않아 하는 건 해수 혼자였다. 그녀만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사실 이상한 것들투성이였다.

    해수가 이상하다고 여긴 것은 백운당에 꽤 여러 개 있었다.

    그중에 가장 이상한 것은 ‘매향’이었다.

    해수는 머리에 전모를 쓰고 길을 걷었다.

    백운당 중정 연못을 지나던 참이었다. 딴생각에 빠져 중심을 잃은 그때였다.

    턱, 하고 손이 그녀를 잡았다.

    “조심해야지.”시린 매화꽃 같은 향이 자취를 남겼다.

    백운당의 화중왕.

    해수가 매향의 시선을 피했다.

    “고맙…… 습니다.”해수는 어쩐지 매향이 껄끄러워 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영원이 가출한 거 사실이야?”매향이 해수를 먼저 붙잡았다.

    두 사람은 왕래가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 애한테 참 친절하시네요.”“영원이?”“왜 그 애한테 자꾸 호의를 베풀죠?”다들 느끼지 못했지만 해수는 저 여자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진즉 알고 있었다.

    몹시 이상한 여자가 아닌가.

    백운당은 살벌한 세계였다. 살아남기 위해 알게 모르게 모두가 암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 백운당에서 매향만이 영원에게 친절하게 굴고 있는데, 그게 과연 정상일까?

    매향은 모두가 기피하는 영원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다정한 언니처럼.

    혹은 친구처럼.

    인간은 자신에게 이득이 없으면 뭘 하지를 않는 족속들이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다.

    영원에게서 무엇을 얻기 위해 잘해주는가.

    적대감 가득한 해수의 눈초리를 매향이 곰방대로 스치듯 훑었다.

    “넌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치?”해수는 인간에겐 남들은 모르는 두 번째 얼굴 존재한다고 믿었다.

    남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민낯과 자기만 아는 민낯.

    간혹 그 경계가 모호한 이들이 있었다.

    매향은 세 번째 민낯을 가진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진주양과 더불어.

    “영원이는 좋은 아이야. 너 같은 거보다 훨씬.”매향이 웃기는 소리를 했다.

    아니. 그 애는 바보였다. 자기를 잡아먹을 포식자인지도 모르고 머리를 들이미는 바보.

    해수는 그들을 이용할지언정 그들의 가면에 절대 속지 않았다.

    해수가 반박했다.

    “모르기 때문이겠지.”“…….”“그 애 주변에 유독 당신들 같은 부류가 발견되는 것은. 당신들 같은 부류가 그 애에게 끌리는 것은.”“…….”“그 애가 겁도 없는 무지렁이기 때문이겠지.” 초식동물은 포식자를 만나면 경계를 한다.

    간혹 멍청한 초식동물은 포식자를 포식자로 알아채지 못하고 그들과 친구를 맺는다.

    처음엔 잡아먹으려 했다.

    포식자는 초식동물의 순진함에 주저하다가 얼결에 마음을 줘버리게 된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는 거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수 같은 정상적인 초식동물은 불가능했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뼛속까지 박혀 있기 때문에.

    .

    .

    .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한 달이 흘렀다.

    9월.

    영원이 예고도 없이 귀환했다.

    *

    해수가 앞을 아연하게 응시했다.

    “영원아…….”멀쩡한 모습을 하고 영원이 나타났다.

    느닷없이, 가출한 적이 있었냐는 컴백이었다.

    성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왔네?”성원이 투게더를 퍼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지나쳤다.

    해수는 다급하게 영원을 살폈다. 팔, 다리, 모두 다 멀쩡하게 달려 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냥.” 영원은 무뚝뚝한 짧은 대답뿐이었다.

    방으로 올라간 그녀는 짐 가방을 풀며 옷 정리를 했다.

    해수가 영원에게 바싹 붙어 물었다.

    “무슨 일 없었지?”영원이 해수를 날카롭게 돌아봤다.

    “마치 무슨 일 당하기라도 했음 하는 말투네?”해수는 당황했지만 상냥하게 대꾸했다.

    “아무 일 없었나 보네. 그 입, 아직 살아 있는 거 보면.”험한 일을 당한 기색은 아니었다. 분명.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영원은 전혀 고생한 흔적이 없었다.

    못 먹어서 살이 마르지도…… 아니. 살이 좀 올랐나?

    역시 수상쩍었다.

    흠칫. 해수는 스스로 반문했다.

    ‘수상쩍다고? 무엇이?’ 영원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해도 모자랐다.

    해수는 그간 영원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었다.

    걱정이 아니었다.

    영원이 빨리 돌아오길 바랐던 마음은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불안했다.

    어디에 있었는지. 뭘 했는지. 누가 그녀와 함께였는지.

    해수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묻고 싶었다.

    ‘누구와 있었어?’‘누가…… 널 보살펴줬어?’‘지금까지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건 아니지?’

    *

    가출사건은 해프닝에 그쳤다.

    성원도, 혜란도 영원에게 가출에 대해 이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빈자리는 채워졌고 일상으로 넘어갔다.

    해수만 빼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불안함에 마음이 갈피를 잃었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일상이 뒤틀리고 있음을 해수는 감지했다.

    주양은 바로 그 뒤틀린 지점을 비집고 들어왔다.

    영원이 돌아오고 일주일 뒤, 그가 백운당을 방문했다.

    “집으로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별채에서 할 이야기는 아는 것 같아서.”주양은 사택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왔다.

    해수는 정원에 예쁜 테이블을 차려 다소곳이 그에게 차를 대접했다.

    “통 발길이 없으셔서 해외출장 떠나신 줄 알았어요.”화려한 본차이나 찻잔에 달콤한 홍차가 향내를 피어 올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해수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 쿠키가 담긴 접시가 놓였다.

    영원은 가출 이후 근신령이 내려져 출근하지 않고 집안일만 맡았다.

    해수는 집기를 놓는 영원을 곁눈질하다 말했다.

    “저도 근래 곤혹을 치렀어요.”“곤혹?”“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사님과의 관계를 물어봐요. 비밀연애가 민망해지게.”곤란함을 애써 덮듯 해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며칠 전에는 여성지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부탁하는데, 소문이 도나 봐요.”언제부턴가 그녀는 혼자 떠들고 있었다.

    “저와 이사님이 교제를 한다는. 염문설이 사실이냐고 묻는데…….” 해수는 말을 멈췄다. 주양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딴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영원이 달그락 거리며 포크와 티슈를 내려놓았다.

    툭 불거진 영원의 손가락……, 그의 눈동자가 뼈마디마디를 타고 올라갔다.

    영원의 행동 하나하나에 남자가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

    .

    .

    해수는 어느덧 혼자 남았다.

    주양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깐 실례하죠.’주양은 냉정하게 전화해줘야 할 곳이 있다며 엉덩이를 뗐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그를 찾아 나섰다. 백운당 어디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해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을 잃은 차는 지독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해수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2층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주양이 그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 주양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백운당을 아무리 뒤져도 그림자도 밟히지 않았다.

    해수는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비좁은 계단을 응시했다.

    다락방 계단을 밟았다. 삐걱삐걱. 오래된 나무가 뒤틀릴 때마다 그녀 안의 무엇도 크게 뒤틀려갔다.

    불안이 오싹하게 그녀를 옭아매며 무섭게 심장이 뛰었다.

    ‘그는 이 안에 있지 않을 거야.’일상의 뒤틀림.

    해수는 문 앞에 섰다. 긴장한 손끝을 문고리에 얹었다.

    그것은 절묘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의도적이었을까.

    안에 있던 누군가가, 문을 잠갔다.

    팅 - !

    스크래치를 일으키듯 소름이 해수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완벽히 그녀를 차단하는 안전핀 소리.

    들어갈 수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이. 방. 에. 두. 사. 람. 이. 함. 께. 있. 어.

    내내 의심으로만 남겨두었던 두 사람의 밀애현장을 드디어 잡았다.

    기억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찌하여 그 순간 숨바꼭질의 주문이 희미하게 귓가를 울렸는지.

    파멸의 전조는 이미 그때부터 실체화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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