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45화 (45/83)
  • 45화. 배반, 감정의 이름2016.12.08.

    복잡한 도심은 교통체증으로 시끄러웠다.

    빌딩 앞에 차를 세운 매향이 얼굴에서 선글라스를 치웠다.

    그녀의 시선이 높다란 빌딩 꼭대기까지 따라간다.

    “낭군님이 계시는 곳이라 이건가.”한신파이낸셜그룹의 사옥임을 알리듯, 입구에는 한신의 마크가 박힌 깃발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감히 태극기와 나란히 서서 펄럭이는 모습은 초재벌기업의 오만함을 닮아 있었다.

    거대한 위용 앞에선 자연히 기가 죽었다.

    커튼월 공법으로 시공된 빌딩의 외벽은 거울이었다.

    강화유리로 뒤덮인 마천루는 한낮의 뜨거운 빛을 받아 푸른빛으로 일렁였다.

    아쿠아마린, 딥블루(Deep Blue), 심해의 차가운 블루 홀이 이러할까.

    빌딩 외벽에 비친 구름이 잔잔한 호수 위를 지나듯이 유유히 흘러간다.

    영원은 차에서 얼른 내렸다.

    “오늘은 버스를 놓쳐서 네 차를 얻어 탔지만 자만하지 마. 도움 받는 건 오늘뿐이니까.”매향은 그런 영원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은행 문 닫겠어!”앗!

    영원이 서둘러 은행으로 들어갔다.

    한신 JK은행 본점은 한신파이낸셜그룹 1층에 있었다.

    별채에 돈을 보관하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엄청난 건물에 위축되었지만 영원은 애써 용감한 척 팔을 휘두르며 들어섰다.

    창구 앞에서 대기표를 뽑아놓고 기다렸다.

    은행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인데, 큰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근데 말이야. 왜 하필 JK은행이야?”어느새 따라온 매향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뭐야. 그냥 가라고 했잖아.”“조금 있다 가야 해. 왜 JK은행이야?” “뉴스도 안 봐? 경영자의 잘못으로 은행이 파산해서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은 거.”“그래서, 비교적 자금력이 안전한 은행을 선택한 거다?”“안전한 정도가 아니지. 빵빵하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은행이잖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눈뜨고 코 베이는 일은 없겠지.” “얼씨구? 도대체 얼마나 있길래?”영원이 조심스럽게 손가락 5개를 폈다.

    매향이 화들짝 놀라 속삭거렸다.

    “오천?”“오, 오십.”매향의 표정이 썩었다.

    영원은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100분 토론에서 경제학자가 그러는데, 한신이 흔들리면 국가 신용도가 하락한대. 회사가 위험해지면 정부에서 불구경하듯 손가락만 빨지는 않겠지.” 물론, 애초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 남자가 이 회사에 있는 한 영원은 믿을 수 있었다.

    철저한 사람이니까 회사를 어려운 지경에 빠트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매향이 음흉하게 웃었다.

    “흐응. 근데 정말 순수하게 통장만 만들러 온 거야?”“하고 싶은 말의 요지가 뭐야?”“목적이 불경스러운 걸.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운명을 가장해, 여기 있는 누군가를 마주치려고…….”“무슨……!”영원은 펄쩍 뛰었다. 정색하며 말했다.

    “생사람 잡지 마. 그리고 오기 싫다는 사람 끌고 온 건 너였어.”“발끈하지 마. 그냥 생각해봤어. 왜 하필 본점이어야 했을까. 쎄고 쎈 게 은행이고 널린 게 지점인데. 같은 건물에 있는 소감이 어때?”“아, 아무 생각 없거든?”아차, 영원은 낭패스러웠다.

    매향의 페이스에 휘말려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말았다.

    “내가 말하는 게 누군 줄 알고 대답하는 거니, 너.”매향이 희미하게 웃으며 놀렸다.

    영원이 마지못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시선이 자꾸 은근슬쩍 은행 밖을 향하는 것은 막아지지 않았다.

    한신파이낸셜 사옥 로비.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영원의 눈이 그들의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이 건물 상층부 어딘가에 있을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간부가 한가하게 이런 시간에 돌아다닐 리가 없다.

    아는데……. 그래도…… 아쉬웠다.

    “332번 고객님.”창구에서 그녀를 불렀다. 영원은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얼른 일어났다.

    매향은 볼일이 있다며 훌쩍 떠나버려서 혼자 은행을 나왔다.

    성형하기 위해 대출받았다는 건 매향에게 비밀이었다.

    가장 싼 쌍꺼풀 수술이 대략 100만 원을 상회한다고. 저축해놓은 오십에 백을 합쳐 150이니까 적당히 마지노선은 넘겼다.

    의외인 건 대출이었다.

    영원에게 신용등급이라곤 전혀 없을 터인데. 넙죽 돈을 내줄 거라고 예상 못 해서 신 났다.

    혹시 날치기라도 당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걷는데 우우웅. 휴대폰이 울렸다.

    [이자율은 잘 따지고 대출 받은 겁니까.]이상한 메시지였다.

    대출 호객 광고인가 싶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시 걸었다.

    우우웅-

    영원은 짜증스럽게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내 개인 사비로 턴 돈이니까, 이자는 나한테 꼬박꼬박 다달이 갚도록 해요.]그제야 사태 파악이 돼서 주변을 살폈다.

    주양이 그녀가 돈을 빌린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개인 사비라니?

    두려움이 안면을 뒤덮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너 누구야.”영원이 단어를 꾹꾹 눌러 보냈다.

    옆에 정차되어 있던 자동차 유리가 내려갔다.

    화들짝 놀라 물러서니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주양이 차 문 열고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타.”

    .

    .

    .

    영원은 어색함에 돈 봉투만 만지작거렸다. 차가 출발했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그 물음에 주양이 비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회사 앞이었다.

    “그 돈으로 뭘 할 거지?”“네, 네가 알 필요 없어.”그의 옆에서 부끄럽지 않은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형할 거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역시 은행에서 아무 절차 없이 돈을 내준다 했다. 주양이 전화를 넣은 거였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순순히 불어버렸다.

    “이, 이마에 있는 흉터를 지울 거야.”“그리고?”“쌍꺼풀도 없애버렸으면 좋겠어.” “남들은 없어서 만드는 쌍꺼풀을 풀겠다고? 몹시 비효율적인 일이야.”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그건 주양이 흠잡을 데 없는 잘난 외모를 지녀서다.

    영원의 외모를 천박하게 만드는 8할은 다 이 눈빛에서 나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빛이 변태적이 되었다.

    마치 욕구불만에 찬 창녀처럼, 남자에게 잔뜩 안달 나서 뭐 마려운 여자같이.

    어느 순간 사람들을 그렇게 핥아대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보다 문득문득 영원은 자기 얼굴에 놀랐다.

    축축하고 음습한 시선.

    저도 모르게 눈빛이 돌변해 있었다.

    처음에 몰랐는데 계모가 자신을 혐오하면서 알게 되었다.

    다행히 주양은 워낙 무서운 남자라서 이 눈빛에 눈 하나 꿈쩍 안 하지만, 이렇게 비천한 눈빛으로 사랑 고백을 하면 받은 사람 입장에선 로맨틱하지 않을 것이다.

    쌍꺼풀을 없애버리면 좀 나을 것 같은데.

    눈이 작아지면 눈빛의 강렬함도 좀 줄지 않을까.

    빤히 주시해오는 주양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영원은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항상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주양이 어떤 행동을 하기 직전에 그녀를 초조하게 만드는 무엇.

    “……차멀미 나.”영원은 모르는 척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바깥바람을 쐬기 무섭게 주양에게 턱이 잡혔다.

    억지로 그에게로 돌려졌다.

    그가 머리카락을 치우려 했다.

    “앗! 싫어!”영원이 발버둥 쳤다. 힘으로 제압당했다.

    그가 영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다. 눈, 코, 입, 자세히도 뜯어보았다.

    얼굴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지 그가 말했다.

    “난 관상 같은 것 믿지 않아. 인생의 불확실성은 관상만으로 설명하기엔 변수가 많지.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유별난 건 인정해.”결국 그게 그 소리다. 영원은 울먹였다.

    “봐, 너도 내 눈빛이 음탕하다고 생각하잖아.”자신의 모습은 하등했다.

    주양이 그녀의 턱을 잡아 눈높이를 맞췄다.

    씹어 먹을 것처럼 그녀를 응시하다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음탕하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가까워진 그의 입술에 숨이 헐떡거렸다.

    “그래서 몸을 섞었지.”그가 그녀를 유혹했다.

    *

    영원을 본 남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

    당황하거나, 적극적이거나.

    영원은 자신의 눈빛이 음란하기 때문에 눈이 마주친 남자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고 두려워했다.

    문제는 눈빛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냥 가만히 무표정을 지어도 남자가 꼬여드는 자극적인 외모였다.

    예쁜 여자 앞에서 남자들이 보이는 당황하고 어색한 반응을, 음란한 눈길에 대한 불편함과 혐오로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탐욕적인 반응 역시 영원은 그런 맥락으로 해석했다.

    여자들은 투기를 하며 영원을 미워했겠지. 최혜란이 치를 떨었듯이.

    얼굴을 보여줬을 때와 안 보여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상이해지니, 자기 눈빛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머리카락 안에 얼굴을 감추었다.

    최혜란의 오랜 구박과 세뇌가 합해져.

    주양은 성형을 말릴 생각은 없다.

    만약 추측대로 신영원이 노승이 말한 ‘관상의 여자’라면 필히 성형을 해야 했다.

    영원이 진두영과 엮이는 상황은 그로서도 상당히 불쾌했다.

    다만, 자신의 취향인 그녀의 외모가 무척 아까웠다.

    “성형 재고해볼 마음은?”“창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창녀가 왜 싫어?”“당연한 걸 왜 물어?”“사랑 받을 수 없으니까?”그 말에 영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단칼에 그녀를 지적했다.

    “성경에서 읊어대는 논리엔 현실성이 없어. 수녀가 구원을 실현한다고? 현실의 ‘구원’은 성경에 있지 않아.”주양이 영원의 이마에 난 흉터를 엄지로 더듬었다.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건, 신도, 수녀도 아니야. 신에게 버림받고, 신조차 돌아봐주지 않는, 이 세상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창녀’야. 예수가 창녀 마리아를 애인으로 뒀다는 소문만 봐도 알 만하지.”그가 영원을 봤다.

    간악한 사람들 틈에서 멍청하게 당하는 영원이 한심한 듯, 바싹 달라붙은 입술이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구원은 절망 안에 있어.”“…….”“적어도 내가 믿기엔 제 몸 하나 더럽힐 줄 모르는 수녀보다는, 창녀가 구원에 가까워.”영원은 심장이 뛰었다.

    그의 직관적인 눈빛 앞에선 계모가 했던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영원을 영원히 다락방에 속박해두고, 그녀를 평생 눈 뜬 장님으로 만들려는 계모의 술수.

    계모가 널 질투한 거야. 고고한 신해수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어…….

    “남자들이 구원 받는 건 수녀가 아니라 창녀한테서야.”그러면 너도 내게서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뭐, 성형을 하면 관상도 바뀌겠지.” 알 수 없는 말은 내뱉은 그가 대뜸 제안했다.

    “성형외과 따로 예약한 곳이 없다면 소개해줄 수 있는데.”“가, 강남으로?”영원이 침 튀기며 흥분해서 외쳤다.

    그가 영원을 보고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웃는 듯도 했다.

    그가 영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머리를 쓰윽 쓰윽 쓰다듬었다.

    이 나쁜 남자가 유난히 친절한 게 이상하다.

    어째서 이토록 친절하게 대해주는 걸까.

    영원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

    백운당으로 향하는 길에 갑작스런 변고가 터졌다.

    진 회장이 쓰러졌다.

    *

    “썩을 놈들. 누가 죽었어? 쓸데없이 이럴 시간에 회사 일이나 더 봐! 쿨럭! 쿨럭!”진 회장이 병석에서 소리쳤다.

    주양은 원장과의 면담을 가졌다.

    “지난번 수술은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경고 드린 대로 연세가 문제입니다. 독한 항암치료를 몸이 버티질 못하고 있어요. 최악의 경우, 혈관성 치매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진 회장의 며느리가 원장실 밖에 서 있었다.

    아직 밋밋한 배는 임신한 티가 안 났다.

    주양은 숙모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네 번째에도 딸이란 결과를 받고 뵐 면목이 없어 진 회장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핼쑥해진 얼굴이 가련했다.

    “유산할까 생각 중이예요.”병원 VIP 대기실에서 주양이 고민 상담을 들어줬다.

    “숙부가 동의한 일인가요?”숙모는 조금 서운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사람 요즘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딴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딴생각?”“마음이 멀어져 가는 게 느껴져요.”여자문제였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선비 같은 진두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돈과 힘이 있는 남자가 아내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 이 세계에서 보지를 못했다.

    노승은 사이좋던 한 부부를 갈라놓았고, 애꿎은 한 여자의 인생을 망가트렸다.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주양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영원에게는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만 가만히 두면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는 천방지축이었다.

    곁에 있던 양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신영원 씨와 거리를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충고입니까? 경고입니까.”“혹시 몰라 신영원 씨의 휴대전화를 복구해봤습니다. 찌라시 일로 접근한 것도 그렇고, 하필 그날 이중모 의원과 있는 사진을 찍은 것도 이상해서.”영원의 휴대폰을 돌려주지 않고 양 비서가 가지고 있었다.

    “신영원 씨,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양 비서는 그녀가 어떤 사람 같습니까.”“…….”“남을 속이고, 스파이 짓이라도 할 주제가 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까?”“그건 아니지만.”“그럼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지하주차장으로 나오는 그때였다. 운전기사가 급히 달려왔다.

    “잠깐…… 볼일이 급하다고 하셔서. 10분이 넘도록 안 돌아오십니다.” 주양은 병원 1층 로비로 올라갔다.

    양 비서와 함께 영원을 찾았다. 자판기 근처에서 영원을 발견했다.

    안심하고 걸음을 떼었다.

    “그쪽은 참 다정한 것 같아.”영원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고 그녀에게 다가가는 이는 진두영이었다.

    그가 영원에게 캔을 건네었다.

    “여자에게 남자가 다정한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진두영이 영원에게 말했다.

    “안 그런 사람도 있어. 매일 죽이겠다고 협박이나 하고.”“협박? 내가 혼찌검을 내줘야겠군요!”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마주 보며 웃었다.

    진두영이 보내는 다정한 눈빛과 거리낌 없는 행동. 그것을 넘어 그는 영원의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었다.

    주양은 진두영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유부남임에도 전혀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손끝을.

    마치 소유를 주장하듯 한 손가락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굳어 있는데, 어깨 너머에서 양 비서가 착잡하게 말했다.

    “복구한 신영원 씨 휴대폰 통화목록에서 뜻밖의 번호를 발견했습니다.”주양이 멍한 얼굴로 양 비서를 봤다.

    “김 부장 번호가 나왔습니다.”김 부장은 진두영의 심복이었다.

    “그리고 더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말한 여자, 신영원 씨가 맞았습니다.”엎친 데 덮친 격. 한꺼번에 감당할 수 없는 해일이 몰려왔다.

    주양은 두 사람에게로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하하하하. 영원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고 아연해졌다.

    진두영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서로에게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적어도 진두영은 호감이 확실했다.

    ‘운명’이란 무엇일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라면 저 두 사람은 노승의 예언대로 인연인가?

    자그마하게 물새는 틈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성미는,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을 불러일으켰다.

    ‘만에 하나’라는 것을 주양은 경멸했다.

    분명 막을 수 있는 시간차를 두고서 기회를 놓쳐놓고,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순간 주양은 이미 결정을 내려버렸다.

    ‘만에 하나’라는 것에 경멸당하지 않기 위해.

    영원이 진두영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렇게’ 해버리겠다고 결정 내렸다.

    모든 일과 계획에 ‘만에 하나’는 없어야 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완벽함을 추구했다.

    영원에게 ‘그런 짓’을 하게 된 것은 그의 고유한 스타일이고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때, 무엇을 위해서였나.’어째서 그토록 불같은 배신감에 휩싸였던가.

    진두영을 견제하기 위한 선택?

    양 비서의 말대로 그녀가 진두영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아니다.

    주양이 화난 건 엑스트라가 된 자신이었다.

    그가 모른 곳에서, 그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토록 진두영과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영원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그녀는 저 자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진두영이 진실을 눈치채기 전에 그녀를 지워버려야 했다.

    사람들 틈에서.

    세상 속에서.

    저열한 배신감이 주양을 휩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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