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실종 21일째 <1>2016.12.04.
-실종 21일째
“선배! 아이 씨, 선배!”발소리가 수사 본부로 거칠게 다가왔다.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쾅! 내동댕이쳐진 문짝이 굉음을 냈다.
칼 같은 살기를 뿜고 쳐들어온 이에 모든 시선이 쏠렸다.
장 경감이 과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배가 달려와 장 경감을 막았다.
“제발! 지금 들어가면 불똥 다 튄다고요!”“놔, 새끼야! 수사지휘관 면상이나 보게!”“체계라는 게 있지. 다짜고짜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장 경감은 헛웃음만 났다.
“그렇게 체계 따지는 것들이, 불법 감청을 하고 일반인을 미행해?” 경찰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신부 실종 관련 수사를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알아놨는지는 모른다. 그들 역시 장 경감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신영원을 가리키는 모든 정황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후배가 거칠게 장 경감을 잡았다.
“솔직히 선배도 잘한 건 없잖아요. 현 과장하고 나, 동생들 따돌리고 혼자 독단 행동하고. 신부 실종이 단순 가출이 아닌 거 왜 숨긴 겁니까. 처제와의 내연관계……? 신랑한테 그거 숨겨주는 대가로 성공 보수 받기로 했어요?”빡 돌아버린 사람에게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너 이 새끼, 날 그 정로밖에 안 봤어?”장 경감은 잇새로 새는 배신감을 짓씹었다.
후배가 격한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길을 내주었다.
후배도 궁지에 몰린 나머지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벽에 기댄 놈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혼자 따돌리는 사람은 없어.”애초에 판에 안 끼워준 건 그들이었다. 장 경감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현기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진주양을 마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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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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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경감이 들어오자 진주양은 테이블에서 증거품을 챙겼다.
고작 1-2초 사이였다.
장 경감은 재빠르게 봉투 안을 스치듯 확인했다.
증거품 1호 라벨이 붙은 투명 지퍼 백이었다. 신부가 떨구고 간 구두 한 짝이 요사스럽게 반짝거렸다.
“마침 잘 왔어.”현기영이 예고 없이 쳐들어온 불청객을 반갑게 맞이했다.
장 경감은 현기영을 노려보며 당당히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당당히 상석에 엉덩이를 뭉갰다.
현기영이 픽, 비웃었다.
진주양을 위해 피해줬던 자리였다.
현기영은 곧, 뭐 아무렴 어떠냐는 낯짝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쪽 팔리지도 않냐. 이 나이 먹도록 고자질이나 하는 거.”“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신랑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어.” “고자질은 네 엄마한테나 해.”억지스런 말대답으로 장 경감은 대화를 묵살시켰다.
이런 건 리허설에 불과하다. 현기영이 준비해놓은 것은 이제부터가 본론일 테니.
그렇기에 지금 셋이서 기묘한 삼각구도를 형성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잡으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 그리고 놓친 자.
현기영이 노트북을 돌려서 둘에게 보여주었다.
국회 앞 도로 CCTV 영상이었다.
개미떼처럼 시위자들이 바글바글했다.
내막을 몰랐다면 이상할 것이 없는 영상이었다. 그저 평범한 거리를 찍은.
“우리 경찰도 신영원 씨가 병원에서 탈출한 것은 알고 있어. 현재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도.”현기영이 영상의 한 부분을 커서로 네모나게 확대했다.
그곳에 신영원이 서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에 휩쓸려 여자는 화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체, 이게 뭔 시추에이션인지 설명해줄래?”현기영은 차마 진주양에게는 직접 묻지 못하고 장 경감을 추궁했다.
아직 신영원이 제3자에 납치된 것까지는 입수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날 그들의 타깃은 자신과 진주양이었을 테니까.
신영원이 그 장소에 왔다는 것도 미행 붙였던 형사에게 장 경감이 신영원의 생존여부를 확인했기 때문에 영상을 판독해 찾아냈을 것이다.
현기영이 눈가를 쓸며 물었다.
“왜 신부가 아닌 신부의 여동생을 신경 쓰는 거지?”장 경감은 주양에게 시선을 건네었다.
장 경감 역시 진주양이 시선을 주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길 건너에 신영원이 있을 거라곤.
진주양은 무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저 버림받은 신랑일 뿐이라는 결백한 자세였다.
심지어 혈색 없는 낯빛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진주양의 뻔뻔스런 연기력에 감탄했다.
장 경감의 턱이 단단하게 물렸다.
‘더 이상 네 연기에 기만당하지 않아.’분노 어린 표정을 진주양은 놀랍도록 정확히 읽어냈다.
그가 입술에 스미듯 이중적인 미소를 드리웠다.
역시 비열한 가면이었다.
진주양이 눈을 감았다. 다시금 그 눈꺼풀이 떠졌을 때 닭살이 오싹하게 돋아났다.
눈동자에 새겨져 있던 비통함은 전혀 새롭게 바뀌어 있었다.
강마른 무저갱이었다. 치가 떨리는 만큼 지독한 어둠만이 증식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그렇게 경고해오는 듯한 주양의 서슬 퍼런 눈빛이 무서웠다.
‘그 겁먹은 주둥이로 헛소리를 뻥끗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장 경감을 조롱하고 도발했다.
신영원이 병원에 갇혀 있었을 때도, 탈출한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장 경감이 가지고 있던 딱 하나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진주양이 신영원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의 방식이건, 저 남자는 신영원을 사랑했다.
그가 신영원과 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보며 장 경감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저토록 뻔뻔하다.
만약 그녀를 사랑했다면 납치된 그녀 생각에 정상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저 남자는 신영원을 사랑한 게 아니야.
이용한 거야.
참을 수가 없었다.
장 경감은 주양을 향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었다.
“나 역시 궁금한 참이야. 대체 저 남자가 신영원과 뭘 했는지.”쏘아붙이자 주양이 재미있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
수사본부를 나오자 새까만 밤이었다.
진주양이 앞서 갔다.
장 경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곧은 등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가늘어졌다.
“당신 같은 남자한테 ‘순정’이 있을까?”혼잣말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진주양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괜히 시비를 걸었다.
“당신한테는 사람 목숨 같은 건,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할 거야? 그지?” 농도 짙은 야유에도 진주양은 예의 그 무표정한 마스크를 고수했다.
장 경감은 새삼 자신의 의뢰인을 눈여겨보았다.
그래. 그는 의뢰인이다. 자신의 고객이고, 밥줄이며, 왕이다.
살인자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살인자에게 불리한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건 많이 잘못되었다. 자신이 뱉은 말은 그 의뢰인을 모함하기 위해서였다.
신영원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자각한 현기영에게 그럴싸한 미끼를 던져주었다.
비밀유지를 위해서 어떻게든 둘러대도 모자랄 판에 의뢰인을 추궁하다니. 실격이다.
‘나 역시 궁금한 참이야. 대체 저 남자가 신영원과 뭘 했는지.’진주양은 미미한 반항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로운 용기로 넘겨주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저 남자에게는 수세 몰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란 게 없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 대단한 남자다. 뭐가 저렇게 당당하지?
진주양은 손끝으로 소파 원목을 간단히 두드리다 고백했다.
‘예. 그녀와 나는 내연관계였습니다.’폭탄처럼 터트려진 진실게임. 장 경감도 현기영도 굳었다.
진주양은 너무도 쉽게 인정했다.
‘나는 처제와 몸을 섞었습니다.’‘아, 저…….’비난하듯 추궁했으면서 현기영은 말리려 했다.
떨떠름한 것은 장 경감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양은 집요했다.
‘꽤 여러 번. 셀 수 없을 만큼.’ ‘…….’‘꽤 잘 맞더군요.’현기영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헛기침이 방을 가득 메웠다.
진주양이 날카롭게 현기영을 봤다.
‘이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거죠?’‘뭐, 그야.’‘결론은, 신부실종을 수사하는 데 이것이 중요한 이야기인지 의문스럽습니다.’주양의 입에서 스스로 사적인 은밀함까지 시인하게 했다.
현기영은 그를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대야 했다.
그가 느낀 수치심을 치유해줄 만한 무엇.
현기영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신부가 사라진 이유에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난 신부와 결혼했습니다.’말을 자르고 들어온 어조가 몹시 위압적이었다.
‘그게 중요한 거죠. 내가, 신해수와 결혼했다는 것.’신영원과 과거에 어떤 사이였건 결국 그는 신해수와 결혼했다.
어쨌거나 신부가 가출한 것은 맞고, 신부가 내연관계로 인해 상심했건, 그래서 신랑을 떠났건 경철은 그저 찾으면 되었다.
내연관계는 민사소송을 하건, 매스컴으로 심판을 받건 어쨌거나 경찰의 몫은 아니었다.
현기영은 말하지 못했다.
‘이해가 되었습니까?’주양이 재차 확인했다.
그들이 찾아야 할 사람은 신영원이 아닌 신해수였다.
그리고 그것마저 못 해내고 있는 게 그들이다.
면목 없어 해야 하는 것을 묻는 거라면 현기영은 완벽히 이해했다.
고개를 숙였다. 권력에 굴복했다.
하지만 장 경감은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있을 턱이 없지. 당신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한테…… 컥!”빛의 속도로 뻗어온 팔이 장 경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강제로 묵살당했다.
재미있게 전개되는 상황에 주양이 웃어 보였다.
“내가 의뢰한 여자는 신영원이 아니었을 텐데.”“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 군. 큭. 그날 신영원과 왜 만났지?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여자를 헌신짝 버리듯…….”“어째서 내가 불리하지.”“신영원이 병원을 탈출한 것, 우연이 아냐. 그리고…….” 신영원을 그날 유인해서 다시 납치한 것, 내 말이 틀려?
차마 완성되지 못한 말이 모래알처럼 입안을 굴러다녔다.
주양이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흐억. 허억. 비좁아진 옷깃에 숨구멍이 죄였다.
“어떨 거 같아. 아직 살아 있을 거 같아?”주양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봤지. 그녀가 납치당하는 것을.”그 말에 장 경감은 단박에 굳었다.
자기가 그녀를 해치웠을 거 같냐는 수수께끼 문제를 내고 있는 거였다, 지금.
마치 재미있는 장난처럼.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불리해지지 않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남자다.
“이 살인자 새끼……!”주양을 향해 주먹이 날아갔다. 잽을 뻗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진주양은 엄청난 싸움 실력자였다.
장 경감은 오히려 주양의 발길질에 얻어맞아 고꾸라졌다.
덤볐지만 무르팍에 턱이 찍혔다. 충돌한 치아가 어긋 낫고 코피가 터졌다.
두피가 뜯겨나갈 듯 뒷머리를 움켜잡힌 채 도로로 끌려갔다.
하수구에 머리가 집어 처넣어졌다. 쓰레기와 오물들. 썩어가는 악취에 구역질이 났다.
“씨…… 씨발!”“뭐가 보이지? 진실? 거짓? 때론 눈에 보인다고 그게 다 진실이 아닐 때가 있지.” 느껴지는 건 거짓 냄새 나는 악취들뿐이었다. 이 남자처럼.
“넌 살인마야!”“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마. 네 직분에 충실해.” “너 같은 살인자 새끼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어.”“돈을 받았으면 프로답게 굴어. 아들 같은 일을 재현시키진 말아야지?”상처를 후벼 파서 그 위에 소금을 뿌렸다.
그러는 너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야. 자식도 지키지 못하고, 아내도 챙기지 못해 이혼 당한 실패자. 낙오자. 변변찮은 직업.
그렇다고 의뢰인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도 아니다.
아직 신부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수표 몇 장이 도로에 흩뿌려졌다.
“치료비에 쓰도록 해요.”진주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괘씸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복부에 구두를 한 방 더 꽂아주고는 화를 삭였다.
손수건을 꺼내 장 경감을 만졌던 손을 닦았다.
더러운 것에 닿아 찝찝하다는 듯 표정을 한껏 구기고서.
장 경감은 맥없이 늘어졌다.
머리통에 뭔가 둔탁하게 떨어졌다.
진주양이 옷을 갈무리하고 떠났다.
장 경감은 관절이 녹슨 몸을 이끌고 스타렉스에 올라탔다. 백미러에 터진 입술을 비추었다.
쓸데없이 주먹은 왜 그렇게 세?
“펜대만 굴리는 새끼가…….”두 번 덤비다간 골로 가겠네.
“염병.”후시딘을 찾기 위해 글러브박스를 뒤지는데 잊고 있던 실내화가 나왔다.
신영원이 탈출하면서 병실에 떨구고 간 실내화 한 짝이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러고 보면 신영원은 어째서 진주양에게 다시 돌아왔던 걸까.
병원에서 힘들게 탈출해 결국 돌아온 게 진주양의 품이었다.
왜 진주양의 앞에 나타났지?
그렇게나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했으면서.
그의 머리통을 쳤던 둔탁한 물건은 신부의 구두였다.
진주양은 오늘 현기영에게 이걸 받으러 왔었다.
밀봉된 신부의 구두를 응시했다. 신영원의 실내화 또한.
쓸모없이 짝 잃은 신발만 잔뜩 수중에 들어왔다.
실내화를 의미 없이 있던 자리에 쑤셔 넣는데 손에서 놓쳐 조수석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게 뭐지?” 깔창이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그 아래 딱지 모양의 쪽지를 감춰두고 있었다.
실내화 밑창에 왜 이런 게 있나.
종이는 이음매가 매끄럽지 못했다. 수첩에서 찢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혹시 신영원이 그에게 남기기라도 한 메모일까 서둘러 펼쳤다.
쪽지는 이런 대사로 시작했다.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여자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일방적이고 통보되어오기까지 하는 상냥함엔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신념을 따르겠다는 아집이 묻어 있었다.
남의 기분 따위와 상관없이, 상냥함이란 얼굴을 두르고 상대의 살점을 도려냈다.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은 ‘내가’ 먼저였다.
……
네가 내 언니가 되었을 때부터.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를 네가 집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어쩌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타고 난지도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너는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쪽지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장 경감은 글귀를 헤아려보았다.
일기 같기도 하고, 저주 같기도 했다.
쪽지는 신영원의 실내화에서 발견되었다.
이 메모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여자’는 언니 신해수이고, ‘나’는 신영원이다.
그러니까 ‘나’ 신영원의 것을 먼저 여자 ‘신해수’가 필연적으로 빼앗아갔고, ‘나’는 ‘신해수’의 것을 다시 빼앗고 싶다는 간절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종이 상태를 보아 몇 개월은 더 된 과거에 쓰인 것이므로, 그 뒤에 신영원이 신해수의 것을 빼앗았는지 그저 소망에서 그쳤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빼앗았다면 신영원은 신해수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갔을까?
장 경감은 버려진 실내화를 쥐었다.
문득, 시선 끄트머리가 신부의 웨딩 구두에 닿았다.
‘뭐가 보이지?’진주양이 물었다.
장 경감의 눈에는 짝을 잃은 구두가 보였다.
‘진실? 거짓?’ ‘때론 눈에 보인다고 그게 다 진실이 아닐 때가 있지.’진실을 보지 말라면서 무수히 진실을 주장하던 남자.
신부의 실종, 처제와 형부의 금지된 사랑,
진실.
‘경찰이, 신부를 찾지 못하게 해줘요.’‘그럼 찾아내요. 여기서 찌질대지 말고.’신부를 찾지 말라는 순간에도, 신부를 찾아내라는 순간에도, 그 남자의 행동은 매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신부.
장 경감은 숨을 몰아쉬었다.
설마……
신영원이 빼앗은 것은…… 설마…….
★
-1년 전, 주양
“저 여자로 어떠세요?”커피숍에 음악이 흘렀다.
진주양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신해수가 당돌하게 제안했다.
“번거롭게 가짜 하지 말고 진짜 연애해요. 우리.”서로의 요구조건이 맞아떨어진 거래였다.
주양은 백운당을 살려주었고, 신해수는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가 원한 건 계약 연애였다.
진두영 면전에서 그들이 연인인 척하는 것.
조카와 사귀었던 여자를 씨받이로 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주양은 오전에 신해수를 데려가 진두영에게 소개시켰다.
정식으로 교제하게 되었다고 하자 진두영은 사색이 되었다.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또 받아들이지 않아도 도리가 없다.
진두영과의 짧은 만남 이후에는 대검찰청 총장과 골프 약속을 잡았다.
골프회동에서 그녀를 소개하면서 백운당 압수수색 관련 언질을 넣어주었다.
담당 검사인 강규웅에게 총장의 지시사항이 하달될 터였다.
신해수는 한신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자신에게 더 매력을 더욱 느끼는 눈치였다.
영악하게 머리를 굴린 신해수가 내린 결단은 그와의 ‘진짜 연애’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자신이 주양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진두영이 사색이 되어 떠날 만큼.
주양이 커피 잔을 조용히 들었다.
“이상하죠.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어쩐지 싱거워요.” “커피 맛이요?”“아니.”주양이 숨 막히게 직선으로 해수에게 눈빛을 부딪혔다.
해수가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주양은 그저 커피 잔을 부드럽게 들어 보였다. 대답을 보류시켰다.
‘진짜 연애’ 제안에 대답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해수는 안달하지 않았다.
급할 거 없다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주양이 팔목에 두른 해수의 갈색 염주를 향해 눈짓했다.
“예쁜 팔찌군요.”“열여덟 생일에 어머니가 선물해주셨어요. 염주가 번뇌를 씻게 해준대요. 전 미신 같은 거 안 믿지만.”그녀가 자기 팔목에 두른 갈색 염주를 만졌다.
그렇게 귀한 걸 들고도 그녀는 전혀 모른 눈치였다.
사실 신해수가 지닌 염주는 굉장히 비싼 값을 들여 구입한 부적이었다.
범오사 주지승의 기원이 담긴. 염주에 달린 은장식에 새겨진 무늬는 범오사 사찰 로고와 같았다.
원래 부적이란 게 상대가 모르게 해야 효험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저 흔해 빠진 염주 취급을 하고 있다.
주양이 염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처님께 보름을 치성을 드려 만들었다죠.”“누가요?”“범오사 성철스님이.”아……. 신해수가 한탄했다.
“범오사 성철스님 뵌 적이 없습니까?”무심결에 던져진 물음이었다. 딱히 의도가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해수가 보인 당혹스런 반응.
신해수는 눈치가 빨랐다.
주양의 앞에선 대답 하나하나에 기로가 갈라진다는 걸 진득 깨닫고 있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에서 불리한 무엇을 읽어냈다.
봤다고 해야 맞는 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야 하는 건가.
복잡하게 뒤엉키는 의중이 그대로 전해졌다.
주양은 그런 해수를 빤히 보았다.
모든 게 싱거웠다.
진두영이 내보인 우둔한 반응도, 충격 먹은 모습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승기를 거머쥐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하지만 해수의 당황한 표정을 본 지금, 문득 재미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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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수가 아닙니다.”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서 주양이 말했다. 양 비서와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범오사 주지승이 말한 그 여자, 신해수가 아니에요.”신해수의 염주에 찍힌 문양과 같은 직인이 입구 비석에 가장 크게 박혀 있다.
염주가 범오사와 관련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것은 이상하다.
신해수는 그 사찰의 주지승을 본 적이 없다.
“다시 알아보겠습니다.”노승은 신해수를 어떻게 알고 그녀가 아들을 낳아줄 관상이라고 했을까.
차가 본사 앞에 다다랐을 즈음, 주양의 시선에 거리를 서성이는 영원이 들어왔다.
비슷한 뒷모습의 여자, 아니 실제로 영원이었다.
펄떡펄떡. 그녀 때문에 심장이 아려왔다.
불현듯, 홍예다리 위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가 재현되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어째서 뛰는지도 모른 채.
사고가 엉망이 되었다. 자꾸 조잡한 상상이 멎지 않는 것은 그 탓이었다.
그가 범오사에서 마주쳤던 것은…… 영원이었다.
주지승이 말한 여자가 영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