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43화 (43/83)

43화. 예쁜 구두가 어울리는 여자2016.12.01.

-1년 전, 영원 26세

백운당의 밤이 무르익어갔다. 숲속에 자동차가 은밀하게 정차되어 있었다.

비밀스런 접선이 있었다.

“그래. 이게 4년을, 내 발목을 붙들었던 그 ‘족쇄’란 건가?”열에 들떠 이중모가 침 튀기게 반기며 봉투를 찢었다.

소문만 무성하던 대외비 동영상 CD이 드디어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노트북에 넣어 영상을 확인한 이중모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압수수색을 담당한 검찰직원 내에 심어놓은 사람이 있었다.

동영상이 갑자기 사라지면 최혜란이 의심할 것을 염두해 다른 파일로 바꿔치기 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 시디였다.

이중모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신뢰 가득할 눈빛을 주양에게 보내었다.

“대선 고비만 넘기자구. 내가 청와대에 입성하는 날이 자네가 한신의 왕좌를 차지하는 날이 될 테니.” 주양이 원하는 건 고비를 같이 넘길 동료가 아니라 ‘충견’이었다.

손이 닿는 곳에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가 목줄에 잡아당기면 반항 없이 끌려올 수 있는 개.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남자에게 ‘개’가 되길 바라는 게 이상한 건가.

죄의식은 그를 흔들지 못한다.

서로가 물리고 물린 관계였다.

아마도 이중모 역시 말은 믿고 있다고 하지만 ‘개’가 되지 않기 위해 주양의 약점을 캐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찾아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주양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자폭을 택하지 않는 이상 서로에게 칼을 겨눌 일은 없다.

믿지를 못하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선의 공격은 방어라는 방식으로.

주양은 점잖게 검은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당분간 최혜란도 눈치채진 못할 겁니다.”“근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자네 백운당 둘째 딸과 염문설이 있던데.”최혜란은 엄연히 이중모 의원의 적이었다.

주양이 최혜란의 사위가 되는 것은 곧 자신과 등을 지겠다는 것이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주양은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막 교제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남녀 사이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죠.”“…….”“미친 듯이 좋았다가도, 당장 내일 아침 철천지원수 지간으로 돌변할 수도 있고.”그제야 이중모 의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네. 비즈니스라 이거지?”이쪽 세계에서 그다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요즘 입방아에 오르기 바쁜 태성실업 둘째 아들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20년 전에 신인 여배우와 진한 연애를 해서 아들을 낳았지만, 결혼은 다른 재벌가 여자와 해야 했다.

여배우가 죽고 그 아들이 친자소송을 걸어서 세간이 시끄럽다.

“난 아내가 첫사랑이라 잘 모르겠다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문 사람들은 연애관이 좀 다른가?”온전히 주양에게 되묻는 물음이었다.

주양이 이중모를 돌아봤다.

“그냥 느낌이 좀 달라져서 말이야.”무얼 말하려고 뜸을 들이는가.

이중모가 느른하게 말꼬리를 내렸다.

“자네……,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주양이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넉살 부리며 이중모가 그를 가라앉혔다.

“아아. 화내지 말게.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과민할 필요는 없잖은가. 숨겨둔 여자가 있는 줄 알았는데 백운당 둘째 딸하고 가짜 연애를 한다니 묻는걸세.” “오해하신 것 같군요.”“너무 앞만 보진 말게. 옆도 보고 뒤도 살피고. 돈도 좋지만 자기 여자 정돈 챙겨.” 이중모가 유부남으로서 나직이 충고를 속삭였다.

챙겨? 주양은 한가하게 온정을 베풀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그가 영원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선하듯 던져주었던 주머니 속 그의 이니셜이 박힌 단추 빼곤.

그런데 4년이 지난 오늘 이 단추가 다시 그의 손에 돌아왔다. 신해수를 통해.

4년이나 갖고 있을 줄 몰랐다.

신해수는 직원이 주웠다고 했지만 그는 백운당에서 잃어버린 단추가 없었다.

신해수가 준 것은 4년 전 그가 영원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영원은 그때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를 짝사랑하는 여자는 뭘 하고 있을까.

충격 먹었을까? 슬퍼할까? 배신감에 치를 떨까?

영원의 생각으로 온통 뒤엎어진 머릿속을 다시 한 번 이중모가 찢었다.

“사랑이 좋다지만 못할 짓이야. 태성실업 말일세. 다른 여자랑 버젓이 살림 차린 남자를 보며 상대는 어떤 마음이었겠어?”사랑한다는 달콤한 말로 붙들어놓았지만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는 관계.

끝은 불 보듯 뻔하다.

여자는 허황된 사랑의 낱말을 곱씹다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연인 간에도 예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신해수와 자신이 교제한다는 소식을 영원은 지금쯤 들었을까.

*

“한신중공업 사장 진두영 알지? 그 사람 숙부. 내일 그분한테 해수를 직접 인사시킬 거래.” 성원이 굴욕을 입히려는 특유의 과장된 눈웃음으로 영원을 깔봤다.

조악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웃기려면 좀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대야지?

얄궂은 말장난에 놀아나줄 마음이 없다.

짙은 피로감이 누적되었다.

영원은 지쳐서 일어났다.

“자야겠어.”누군가 돌아선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거칠게 뿌리쳤다.

영원은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말짱해져갔다.

“미친년.”영원의 입에서 거친 언어가 마구 쏟아졌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야.

오늘도 늦게까지 나이트에서 놀다가 술을 처먹고 헛소리를 하는 걸 거다.

어느새 영원은 집을 지나쳤다. 마을로 이어지는 숲길까지 걸어 나와 버렸다. 집에 갈 마음이 싹 사라졌다.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아랫마을로 가는데, 희미한 엔진 소음이 들렸다.

영원은 플래시를 끄고 수풀 뒤로 숨었다.

“하하하하! 이러니까 자네를 믿을 수밖에 없는 거야.”차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란히 붙은 자동차 두 대는 어떤 짙은 정치적 야합의 색을 띠었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백운당에서 접대가 끝나고 본론에 들어가는 상황인가?

심심찮게 봐온 광경이었지만 그녀와 상관없는 세계였다.

뒷좌석에 앉은 인물이 ‘이중모’라는 걸 알기 전까지.

“하아…… 하아…….”영원은 내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엄습해 무릎을 꿇었다.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많은 것을 잊었다. 비겁하게 안도하며 살아왔다.

해수와 사귄다니.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니.

해수가 마음먹으면 남자 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주양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신해수와 그가 결혼이라도 하면 그를 형부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죽기보다 싫다.’ 그에게 형부라고 부르게 되는 것. 차라리 이 집구석을 나가고 말겠다.

이중모라……. 이건 필시 다시 보지 않을 비리의 순간이었다.

응어리진 깊은 곳에서부터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노 집사처럼 찌라시를 팔아서 나도 한 몫 챙겨 집을 나가겠다고.

어차피 저런 나쁜 인간은 이용당해도 상관없었다.

따지고 보면 다 저 인간 때문이었다.

저 인간만 아니었으면, 4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주양을 만나지 않았을 거다.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고, 해수와 사귀게 되었다는 말에 이토록 구역질이 나지는 않았을 거다.

영원은 달달 떨면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잔가지가 발에 밝혔다.

우직.

요란한 소음에 여섯 개의 눈알이 한순간에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영원은 휴대전화를 떨어트렸다. 도망쳤다.

“흑…… 싫어!”경호원들이 도망가는 영원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잡아 눌렀다. 비명을 지르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에게 끌려가 꿇어앉혀졌다.

이중모가 허둥지둥 놀라서 뛰쳐나왔다.

“뭐야!” “기자가 붙은 거 같습니다.” “파파라치 하나 확인 못 해? 이렇게밖에 못 할래!” 이중모가 자신의 보좌관의 뺨을 후려갈겼다. 분노의 화살이 영원에게 돌아왔다.

보좌관이 주워온 영원의 휴대전화에 찍힌 동영상을 이중모가 비릿하게 보았다.

영원의 머리채를 포악하게 잡아 올렸다.

“부수지 마…… 내 휴대폰 부수지 마!”그때였다.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이중모가 내린 차 뒷좌석에 다른 동승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박음질한 수제화가 소리도 내지 않고 밤공기로 내려왔다. 복사뼈부터 옷감에 휘감긴 긴 다리까지.

남자는 다급한 용무에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차분하게 상황을 관망했다.

마침 이중모가 뒤를 향해 물었다.

“내 쪽은 아닌 거 같고, 진 이사 자네한테 붙은 꼬리 아냐?” 운명이란 형체가 없다. 하지만 운명은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운명의 장난에 누군가는 비참해진다.

주양이 눈길을 내려 그녀에게 닿아왔다.

주저 없이 망막을 가르고 들어오는 시선은 폭력처럼 심장에 가해졌다.

어째서 또 그인가.

그가 여기에 있는가.

“아는 년인가?”이중모의 물음에 주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원이 대신 밝혀주었기 때문에.

“……사이.”“이년이 뭐라는 거야?”이중모가 양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주양은 똑똑히 들은 듯, 영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원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뱉었다.

“형부와, 처제가…… 될 사이.” 사랑. 믿음. 존중. 우리가 그런 것을 주고받던 관계는 아니었지.

뒤엉킨 욕망과 원한이 서로를 뚫어지게 겨누었다.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욕심내지 않겠다고 했는데 하나를 가져보니 그 은밀한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졌다.

그저 처음엔 단추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를 만져보니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지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아프게 닿아올수록, 심장에 아로새겨진 상처가 덧날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멍청한 꼴을 보이고 마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다.

*

이중모는 양 비서가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이중모가 떠나고 주양과 단둘이 남겨졌다. 영원은 시위하듯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화를 내고 있는 정수리를 주양이 미지근하게 내려다봤다.

하지만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모습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증명해봐.”“…….”“내가 널 붙잡아야 할 이유…….”“…….”“널 내 옆에 두면 내게 돌아올 이익.”“…….”“자신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해봐.”영원은 할 말을 잃었다. 진주양은 계산적인 남자였다.

그는 감정에 지배를 받지 않았다. 오롯이 이익이 되는 일에만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가 해수를 사귀듯, 영원을 붙잡으려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

영원은 비웃음이 샜다.

“이유?”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양이 보였던 감정이 그 이유였다.

사람이라면, 여자라면, 그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신해수와 사귄다니.

‘넌 날 농락한 거야. 난 너한테 농락당한 거야!’ 자신이 그에게 이럴 권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가 주체가 안 됐다.

화를 낼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없지?”“…….”“없어. 너는 아무것도.”주양이 나직이 읊조린 현실에 영원은 닭똥 같은 눈물만 떨궜다.

그런 영원을 보는 시린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억울해서 영원은 눈을 부릅떴다.

“그럼 해수는 가치가 있다는 거야? 해수는 네가 붙잡게 만들어?”“적어도 너보단.”새빨간 영원의 입술을 연약하게 경련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되는 거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영원은 터벅터벅 돌아섰다.

멀어지는 영원을 보다가 주양은 알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워졌다.

따라잡아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영원이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영원이 팔목을 비틀어 잡아 빼려고 하자, 그가 거칠게 끌어당겼다.

“피곤하게 굴지 마.”“놔아!”“사람은 피곤해지면 눈앞에 봬는 게 없어지지.”눈앞에 봬는 게 없어지는 사람은 짐승이 된다.

주양은 언제나 영원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가 그녀에게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은 그때뿐이었다. 그녀를 죽이겠다는…….

“미, 미워……! 미워!” 내가 더 먼저 좋아했는데. 해수는 이 남자한테 관심도 없었다.

항상 모든 사람들이 해수를 선택했다.

해수. 해수. 해수!

나한테 잘해줬으면서. 나랑 잤으면서! 어째서 해수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항상 해수는 되고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사실들. 그런 것들이 영원의 열등감에 불을 지폈다.

항상 그랬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 모녀가 들어오고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사랑도 해수가 빼앗아갔다.

내 유일한 집이었던 백운당도 이제는 최혜란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 빼앗아갔다.

그리고 유일하게 내가 잡고 있던 이 남자마저.

“넌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지? 기억하지도 못할 거야. 할 턱이 없지.”그때도 딴 여자랑 키스하고 있던 주제에.

그러고 보면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는 남자에게 이토록 마음 쓰는 것이 웃기다.

주양이 곧장 영원에게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이것.”“…….”“4년 만에 다시 돌려주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결코 봐주지 않겠다는 듯 주양이 빠르게 추궁했다. 금단추였다.

영원의 목에 가시가 걸렸다. 더 큰 멘붕이 찾아왔다.

그가 4년 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 돌려준 적 없어.”“신해수 말로는 직원이 이걸 주웠다고 하던데. 거짓말이야. 실은 네가 버린 거야. 그렇지?”그는 영원이 해수에게 이걸 돌려주라고 시킨 줄 오해하고 있었다.

해수와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영원이 그에 대한 마음을 끊어내려고.

“멋대로 오해하지 마! 나, 나는 돌려주라고 한 적이 없어!” “그럼 신해수는 이걸 어떻게 갖고 있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혀를 쥐어짰지만 정신만 산만해졌다.

주양은 더욱 사납게 단추를 들이밀었다.

“말해.”“그 계집애가 멋대로 내 보물함에서 꺼내간 거야. 네가 몰라서 그래! 그 계집애가 얼마나 이중적인 년인데!”그가 어떻게 기억하지? 그 겨울밤을 어떻게 알고 있지?

언제 기억이 난 걸까? 최근에 알게 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녀를 알면서 모른 척했던 걸까?

“자기가 원하는 거라면 남의 것은 함부로 훔칠 수 있는 게 신해수야!” 하지만 주양은 다른 부분을 더 귀담아들었다.

“보물함? 이게 너의 보물인가?”영원은 마음을 들킨 게 되어서 당황했다.

좋은 놀림거리라도 생긴 듯 그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어딘가 만족감이 짙게 배어나는 표정이었다.

영원은 항변하려 했지만 강제로 차단되었다.

그가 자기 소매에 달린 단추를 전부 뜯었다.

손바닥 위에 사탕처럼 단추를 한가득 올려주며 어처구니없게도 영원을 얼렀다.

“많아. 그러니까 투정 부리지 마.” 넋 놓고 있는 영원의 팔목을 그가 잡아끌었다.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휴대폰은 처참하게 두 동강이 났다. 구형 폴더 폰이지만 아껴 쓰느라고 애지중지했던 거였다.

동영상이 찍혔기 때문에 주양은 휴대폰을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새 휴대폰을 사주겠다고 했다.

어쩐지 싸운 게 어영부영 넘어간 느낌이었지만 이제 와 도발해봤자, 였다.

그녀만 뒤끝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휴대폰 가게를 찾아 걷는 동안에도 여자들이 쉴 틈 없이 주양을 쳐다보았다.

단둘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남들과 있으니 더욱 괴리감이 커졌다.

어울리지 않다는 괴리감.

영원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다.

구두 가게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도발적인 빨간 하이힐은 매향을 닮아 있었다.

백색 순결한 플랫슈즈는 해수를 닮았고, 진열장 위에 전시된 모든 구두가 아름다웠다.

저런 구두는 예쁜 여자에게 어울리겠지. 영원에게는 가당치 않는 것들이었다.

쇼윈도는 어두컴컴하고 귀신같은 그녀를 더욱 또렷하게 비추었다.

휴대폰을 구입하고 백운당으로 돌아왔다.

한 번도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영원은 마음이 이상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마을 입구까지 금세였다.

영원이 그를 잡아당겼다.

“여기서 내려줘.”“입구까지는 한참이야.”“입구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기생들 눈에 띌 수도 있어.”곤란하다고 영원이 툴툴거렸다.

주양이 창밖을 보았다. 동네는 가로등 불빛 한 점 없이 칠흑 같았다.

영원은 곤란하다는데도 뒤따라 내리는 그가 당혹스러웠지만 굳이 데려다주겠다는데 싫지 않았다.

.

.

.

물 좋고 공기 좋은 산동네에는 반딧불이가 유난히 극성이었다.

그와 나란히 숲속을 거닐었다. 영원은 주양을 흘깃했다.

남자는 지나치게 생동감 없이 정적이었다.

아무 표정도 덧씌우지 않고 있을 땐 박제인간처럼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남자에게 에스코트 받는 것은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모를 상황이다.

역시 이런 다정한 분위기가 어색했다.

영원은 넓적하고 커다란 전나무 앞에서 그를 돌아봤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거의 다 왔다고…….

그의 머리에 반딧불이가 앉아 있었다.

“반딧불이…….”영원은 눈으로 확인하고도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렸다.

석고상 같은 남자가 무심한 얼굴을 했다. 영원은 웃음이 났다.

그가 의아하게 눈을 치떴다.

“여기. 여기 말이야. 벌레를 붙이고 다니잖아.”그가 떼어달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뻣뻣한 통나무 같았다.

순간 그가 귀여워 웃음이 샜다.

영원이 까치발을 들었다. 두 손을 모아서 반딧불이를 감쌌다.

“이런 거 본 적 있어?”그에게 보여주고자 손을 가까이 내리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녀의 눈높이에서.

어쩌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한여름 밤의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숨 막힐 듯이 어색한 기류가 그들을 조였다.

전후과정을 생략하고 단숨에 도약해온 건 그였다.

그가 얼굴을 내렸다.

더운 여름 공기를 훅, 들이마셨다.

영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반딧불이를 손에서 놓쳤다.

뜨거운 살점이 입술 위로 떨어져 겹쳤다.

1g의 무게만큼도 나가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그저 붙었다 떨어지는 입맞춤일 뿐이었다.

주양의 손가락이 가볍게 추파를 던졌다. 우아한 집게손가락이 그녀의 목선을 오르내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영원은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포개었던 입술을 그가 턱에 뭉갰다. 영원은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열기 오른 입술이 다시 미끄러져 올라왔다. 하나로 밀착된 채 쉴 새 없이 숨을 교환했다.

흐릿해진 이성 너머로 그녀를 담고 있는 적막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는 까만 밤을 품고 있어 더 위험해 보였다.

흥분했는지 격렬함이 휘도는 눈빛이 적대자를 대하듯 강렬했다.

사랑이건 폭력이건 그에게 욕망은 하나로 다뤄졌다.

사랑 역시 살인처럼 무섭도록 몰입한다. 그리고 정복한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삼켰다. 거칠게 벌려져 헤집어졌다.

영원이 도망쳤다. 깊어지려는 순간 고개를 피했지만 그가 놔주지 않았다.

영원은 애원하듯 그를 봤다.

‘우린 이러면 안 돼.’  그는 해수랑 사귀는 사이였다. 원망 어린 눈초리에 그가 답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너야.”“…….”“이 순간 내가 키스하고 싶은 것도 너야.”“…….”“난 너랑 해야겠어.”일방적으로 통보되어 오는 말이 엉망진창으로 영원을 뒤흔들어놨다.

순간 풀벌레가 속눈썹을 스쳤다. 영원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밀어붙이듯 그가 입술을 짓눌렀다.

찌르찌르 - 풀벌레 울음소리가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깍지를 나눠 낀 서로의 손바닥에 차츰차츰 열기가 차올랐다.

그의 어깻죽지를 뜨겁게 움켜쥔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의 코드는 해석불가다.

난해한 남자는 때때로 그녀보다 더 단순명료하게 해답을 내리기도 했다.

‘지금 하고 싶으니까 너랑 할 거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멘트였다.

신해수에게 곁을 내어주면서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남자다.

해수에게 다정하게 꽃 같다고 속삭이면서 내게 제 단추를 몽땅 뜯어주는 남자다.

그리고 그 단추를 보관하기를 바라는 그의 다정함은 종잡을 수 없는 그 자신을 닮아 있다.

어떤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확신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만약 ‘사랑한다’는 말을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어설프고 주책 맞게 떨려 눈물까지 빨아먹은 짭짤한 입맞춤.

어째서 해수와 교제하기로 결정했는지 알 수 없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건 그의 진심이 아니고, 지금 나와의 키스만이 그의 진심이라고.

만약, 내가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내가 저 구두를 신을 날이 오면 그가 내 고백을 받아줄까?

립스틱을 덧바르며 꾹꾹 눌러왔던 여성성에 대한 욕망이 처음으로 발현되었다.

영원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

누가 봐도 그에 걸맞은 예쁜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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