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40화 (40/83)
  • 40화. 실종 13일째2016.11.20.

    “타시죠.”장 경감은 수행인의 안내를 받아 검은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세요.”진주양의 명령에 차는 그들을 태우고 매끄럽게 움직였다.

    장 경감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백미러를 살폈다.

    차는 어느 비포장 길에서 멈춰 섰다.

    세 대의 차량에서 경호원들이 내려서 차를 감쌌다. 혹시 CCTV에 촬영될 수도 있어서 그런 건가.

    “제가 직접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장 경감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일단 의뢰인인 만큼 중간보고는 거쳐야 할 과정이다.

    하지만 하필 왜 오늘인가.

    그것도 진두영의 집 앞에서 맞닥뜨린 건가.

    진두영은 주양의 적이었다. 진두영과 자신이 내통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번처럼 아이 병실에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아이를 인질로 자신을 짓밟는 건…….

    “아이 일은 유감입니다.”몹시 정중한 목소리를 두르고 주양이 말했다.

    장 경감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아이를 가지고 또 협박하려는 거다. 이판사판이라는 결심이 굳었다.

    “내가 진 이사님의 돈을 받고 일한다지만, 서로 입장 정리를 하는 게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아이, 돌려드리죠.”장 경감의 말을 자르고 진두양이 들어왔다. 순간 믿기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장 경감님의 아이. 예후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리를 담당의한테 들었습니다.”의사는 장기기증을 권유했다.

    “한입으로 두 말 같은 거 안 합니다. 아이, 돌려드리죠.”생각지도 못했다. 진주양이 아량을 베풀 거라고는.

    “왭니까?”“그게 중요합니까?”“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냐는 중요하겠죠.”장 경감이 주양에게 휘둘리는 건 아이가 9할이었다. 아이는 장 경감을 채운 족쇄였다.

    아이만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진주양의 뒤통수를 치고 진두영에게 빌붙을 수 있다.

    아이를 돌려받으면 운신의 폭이 넓어지겠지.

    이 순간, 장 경감이 무엇보다 원하는 게 그것인데 진주양은 지금 순순히 그걸 해주겠다고?

    장 경감은 진주양이 무얼 하려는지 깨달았다.

    편 가르기.

    진주양은 자신이 진두영에게 모든 사실을 들었다는 걸 이미 파악하고 선수 치는 거다.

    진두영인지 자신인지, 이쪽에 설지 저쪽에 설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아아,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장 경감은 비열한 남자의 결론을 눈치 빠르게 도출했다.

    자신을 간보려는 거다.

    진두영을 택하면 바로 자신을 김 회장처럼 만들어버리겠지.

    분노가 치밀어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진주양은 여러모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파트너지만 분명한 건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부류다.

    진두영보다 진주양이 그는 더 무서웠다.

    “원본입니다. 복사본 없습니다.”주양이 장 경감이 내민 USB를 봤다. 김 회장의 동영상과 김인택 살인 녹음 파일이 담겨 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충성은 없을 거였다.

    개자식.

    진주양이 USB를 천천히 받았다.

    기분 탓인지 살펴보는 눈빛이 어쩐지 무관심해 보였다.

    “이게 장영범 씨가 말한 입장 정리입니까?”“숙부님과는 어떤 거래도 없었어요. 그러니 괜한 오해는…….”“어설픈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해.”애초에 이딴 걸 획득할 마음이 없었다는 얼굴로 주양이 차창 밖으로 USB를 휙 버렸다.

    “지금 무슨! 그게 어떤 건데 그렇게……!“그래서, 내가 김 회장을 죽였다고 말합니까? 숙부가.”장 경감은 굳어서 말하지 않았다.

    “아님, 당신 생각이?”가차 없는 성미답게 진주양은 단도직입적으로 쳐들어왔다.

    마치 관심사가 USB 파일이 아니었다는 투였다.

    순수하게 신부실종 의뢰 중간보고를 들으러 온 거였다.

    이미 빈정 상한 남자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이런 식으로는…… 그다음엔?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겁니까.” 아이를 빌미로 협박한 게 아니었어? 그럼 왜 아이를 돌려준다고 한 거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아이와, 그 애 때문에 열심히 사는 홀아비가 불쌍해서라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진주양이었다. 이 남자가 그럴 리가 없다.

    혼란스러웠지만 장 경감은 질문에 대답부터 했다.

    “이,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어쨌거나 김 회장이 위장살인이 의심되는 죽음을 맞은 건 사실이다.

    진두영은 자신이 주양이 쳐놓은 덫에 걸린 거라고 했다.

    모든 것이 주양의 계획이며 그의 손바닥 아래서 장기말처럼 모든 이들이 놀아나고 있다고.

    “이런 식?”“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껄끄러운 마음가짐으로 의뢰인을 대하는 것이 싫었다. 혼선을 빚어 이도저도 안 될 거다.

    그를 믿을 수 있어야 했다. 확신이 필요했다.

    이 남자가 내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보증.

    그리고 신부 실종에 얽힌 진실.

    “내게만은 진실을 털어놔주십시오.”피식. 주양이 비웃었다.

    “진실?”“대체 어떤 일이 있던 겁니까.”어떤 일이 사건의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건가.

    장 경감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왜 하필, 나였습니까.”잠시 뒤 주양이 말했다.

    “말했을 텐데. 특출 난 재주에, 큰돈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세상사람 중 돈 앞에서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 “지켜야 할 게 있는 사람은 책임의 무게를 견뎌내지. 무엇이든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한 건 당신이었어.”진주양이 압도하듯 장 경감을 깊게 들여다봤다.

    “난 그 말을 믿었을 뿐이고.” 장 경감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봤다.

    믿었다고? 나를?

    이런 남자가 믿음이란 단어를 입에 담아주는 것이 황송할 정도였다.

    “장영범 씨. 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주양이 친절히 하나씩 되짚어주었다.

    “세상에 진실 같은 건 없어. 보이는 것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제 색깔을 바꾸는 게 진실이야. 진실을 대체 누가 판단하지?”“…….”“설령 내가 진실을 말했다 치면, 내 입에서 나오는 그것들을 당신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진실과 거짓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방금 전 아이를 돌려주겠다는 주양의 순수한 제안도 장 경감은 의심하고 곡해했다.

    “하지만 믿음은 달라.”그 어둠 같은 숨 막힘은 여전한데 남자가 내뱉는 말들에 깊은 슬픔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당신은 해내야 해.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주양은 자신을 믿었고 그래서 자신이 실패하면 주양은 후회하게 된다.

    무엇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걸까.

    후회라는 단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왔다는 뜻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건 무언가가 있다는 거였고.

    진주양의 본심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장 경감은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러면 이 실부 실종 사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

    정말 그런 건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어서……

    그때였다.

    띵동 -

    메시지가 떴다. 노 집사의 휴대폰 번호였다.

    버튼을 누른 순간 실낱같던 기대가 곤두박질쳤다.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공포스런 글자들이 벌레처럼 뒤엉켰다.

    “안색이 안 좋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주양이 볼까 장 경감은 얼른 화면을 껐다. 심장이 파열할 듯 쿵쾅대었다.

    노 집사?

    아니. 그 노인네가 SOS를 칠 리 없다.

    ‘신영원’이다.

    진주양이 베푼 온정에 그도 인간이라도 믿고 싶었다. 잠시 흔들렸었다. 악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신영원은 아직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다. 그녀를 가둔 건 눈앞의 이 남자였다.

    그래.

    진실은 중요치 않다. 눈앞에 있는 게 진실이니까.

    그럴 리가 없다.

    이 남자에게 그래야만 하는 사정 따위가 있을 리가……

    장 경감은 다시 차갑게 마음을 닫아버리기로 했다.

    *

    영원은 철장 밖을 멀거니 응시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든 채였다.

    노 집사는 수면제를 탄 오렌지 주스를 먹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다.

    매트리스 아래에 있는 하얀 가루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노 집사의 스마트폰에는 암호 장치가 걸려 있지 않았다. 스치듯 명함에서 본 폰 번호 뒷자리를 떠올리는 건 아주 쉬웠다.

    뒷자리에 5959가 들어간 번호를 찾아서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조차 남지 않게 증거 인멸했다. 삭제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노 집사의 외투에 집어넣기고 침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괴물의 하수인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샅샅이 뒤져!”그들이 쳐들어오자마자 체리나무 십자가 벽걸이를 살폈다.

    초소형 카메라에 젖은 물휴지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제길! 카메라를 막아놨어!” 영원은 모르는 척 이불 속에 있었다. 이불이 확 걷어졌다.

    검은 양복 하수인이 영원을 위협했다.

    “나와!”“놔아! 놔아!”“미친 계집!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아무 짓도 안 했어. 모르는 일이야!”“이사님은 너 같은 거 안중에도 없어. 살려두고 있는 것만도 감사히 여기라고! 네가 언제까지 안하무인으로 나올 수 있을 거 같은데!”“아아아아아악!”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저들이 그녀에게 다시 재갈을 물릴 거다.

    진정제를 과다로 투여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평생 그렇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노인네는 완전 맛이 갔는데요?”흔들의자에 앉아 졸도한 노 집사를 그들이 툭툭 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별다른 수상한 점을 발견 못 했는지, 그만 포기했다.

    실책을 상부에 보고하고 싶지 않은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만 더 장난치면, 디데이는 더 빨리질 거야.”영원은 몸을 떠는 척을 하다가 그들이 완전히 떠나고 서늘하게 웃었다.

    디데이라……. 디데이는 이미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빨라졌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분명 신부의 실종을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떤 음모가 이 사건에 숨어 있는지 경찰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흥신소 장영범이란 사람.

    노 집사에게 집요하게 자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들었다.

    만나기만 하면…… 그럼 모든 게 끝난다.

    물론 그 사람을 믿는 건 아니다. 아주 작은 균열에 둑은 무너지는 법.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틈새를 벌려나가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다.

    분명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

    -실종 15일째

    장 경감은 이틀째 흥신소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경찰 감시가 붙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저번 김 회장 사건 때문에 현기영이 꼬리를 붙였다.

    인간이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동물이다.

    감시가 잠시 소홀해질 기회를 기다렸다. 형사 생활을 할 때 가장 힘든 게 잠복이었다.

    보통 점심밥을 먹고 2~3시쯤 나른한 잠이 쏟아질 때가 그 타이밍이다.

    “저 새끼 잡아!”놈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장 경감은 흥신소를 탈출했다.

    피우던 담배를 야유하듯 놈들에게 던져주었다.

    쫒아오려는 놈들을 기태와 수진의 차가 가로막았다.

    끼이이익 ???? !

    부우우웅 ??????? !

    “여우 같은 자식!”놈들이 땅에 대고 화풀이하는 게 백미러에 보였다. 장 경감이 신 나서 핸들을 때렸다.

    “하하하! 이 장영범 아직 죽지 않았다고!”드디어 신영원에게 달려가게 되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번에는 신영원을 만날 것이다.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영원은 째깍째깍 시계초침 소리에 집중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이틀이 지났지만 무소식이었다.

    설마 멍청하게 메시지를 다시 보내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노 집사는 아직 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노 집사는 죽다 살아났다.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간신히 의식을 차리고 병실에 입원 중이었다.

    현재 5호실엔 영원 혼자뿐이었다. 노 집사가 모든 사실을 알고 돌아오면 말짱 도루묵이다. 장영범이란 작자는 대체 언제 와줄까.

    ‘올 거야. 아니 당신은 꼭 와야 해.’하루, 이틀, 확신은 불투명해져갔다. 이미 진주양에게 매수되었나. 기약 없는 기다림에 심신은 지쳐갔다.

    초조하게 물어뜯은 손톱이 엉망이었고,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초침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피가 말라갔다.

    *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장 경감은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앞길에서 접촉사고가 났다. 파주 병원까지만 2시간 거리였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일단 그는 신영원을 어떻게 만날지 생각해봤다.

    정식으로 면회를 요청하면 보기 좋게 거절당할 거다. 그렇다고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검은 양복 무리를 뚫을 순 없다.

    대체 어떻게 신영원을 만나지?

    “염병!”병원에 불을 질러버릴 수도 없고. 화풀이 하듯 핸들을 내치는 그때였다.

    웨에에에에엥 ??? !

    빨간 소방차 2대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장 경감을 먼저 추월했다.

    “어디에 화재가 크게 났나 본데?”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정신병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길은 꽉 막혔고, 불길한 예감은 장 경감을 꼼짝 못 하게 꽁꽁 묶어 맸다.

    *

    그녀는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 맛이 아픈 기억을 재생시켰다.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또 그 꿈이었다. 그 말을 끄집어내었던 순간.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녀의 어두운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은 ‘후회’였다.

    ‘그 남자는 널 사랑하지 않아.’그녀는 모르던 게 아니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밤 그 문장과, 그 순간을 되새김질하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은 자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였다. 그토록 당당하게 통보할 수 있던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빼앗을 거야.’원래가 상냥함이란 배려 없이 행해지는 것이다.

    친절이란 이름을 두르고 타인에게 자기 친절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상냥함이다.

    남의 기분 따위와 상관없이.

    때로, 상냥함은 상대에게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맛보게 한다.

    “불이야! 불이야!”바깥에서 사람들이 달아나는 소리가 5호실까지 전해져왔다.

    병원 전체에 화재경보가 울린 걸 막 들은 그때였다. 천장 스프링클러가 터지면서 갑자기 물이 쏟아졌다.

    쫘아아아악 ───── !

    물줄기가 환의를 걸친 전신을 적셨다. 갑작스런 긴급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맨발을 끌고 소리가 들리는 문으로 걸어갔다. 화재 시 병동 문은 자동개방 되게 설정됐다.

    5호실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장난처럼 바깥세상은 그녀에게 활짝 문을 열어주었다.

    “탈출이다! 우리가 병원을 점령하는 거야!”미친 환자들이 마구 날뛰어대고 있었다.

    물먹은 형광등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터졌다. 병원 전체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였다.

    뛰쳐나온 환자들로 병동 복도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병원 시스템에 불만이 많았던 환자들은 갇혀 있던 다른 환자들까지 탈출시켜줬다.

    “뭐하는 거야? 멍청하게 있지 말고 빨리 나와!”그녀는 막상 탈출기회가 주어지자 주저했다.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지면 어느 인간이라도 두려울 것이다.

    환자들은 통제를 벗어났고 폭동을 일으킨 환자들이 병원 직원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끝을 움직였다. 천천히 5호실 바깥으로 발을 내디디는데 간호사들이 스쳐지나갔다.

    “316호 환자가 라이터를 주웠대! 스프링클러에 불을 갔다 댔다나 봐!” “그래서 불이 났다는 거야, 안 났다는 거야!” “환자들 다 뛰쳐나와서 1층 통제 불능이래! 인원 요청 들어왔어!”그녀가 병원에 갇히는데 일조한 간호사들이었다.

    바깥세상을 맞이한 두려움은 금세 분노로 치환되었다.

    좁은 감옥에 갇혀 죽기만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건,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심판대에 올리고야 말겠다는 복수심.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만큼 커져가는 이 분노가 때로 양심 없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기적인 유전자 탓인지 한 푼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뻔뻔하게 잘 사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신의 이름으로 학살을 저지르고도 용서가 되지.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무작정 당하기만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실은 그녀는 후회 같은 거 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또 빼앗고 싶었다.

    도망치려던 그녀는 병실 앞에 걸린 표찰에 멈춰 섰다. 5555호실.

    입원 환자란에 조롱하듯 당연하게 박힌 이름.

    신. 영. 원.

    그녀는 표찰을 죽일 듯 노려보다 벽에서 떼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게 ‘그녀’가 내린 최후의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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