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남자의 구두2016.11.13.
“나 있지. 기억난 거 같아. 당신.”영원은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미관상 좀 꺼려지는 모습이지만 두영에겐 그런 선입견은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손을 영원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은 원래부터 길게 하고 다녔을까.. 눈을…… 보고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호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동전 훔쳐서 뭐 사먹었어?”“…….”“이 도둑놈아.”두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말이에요?”영원이 불신에 찬 눈빛으로 두영을 노려봤다.
“집에 돌아와 세보니 분명 백 원이 비었어.”“엄연히 따지면 내가 훔친 게 아니라, 그쪽이 놓고 간 거죠.”“난 칠칠맞게 돈 안 흘리고 다녀.”칠칠맞게 돈을 흘리고 다닌 것만 본 게 오늘까지 합해 두 번째였다.
범오사에서 한 번, 낮에 주차장에서 한 번.
“내가 열심히 불렀는데. 기억나지 않나 보죠? 가져가라고.” 영원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한테서 주양의 얼굴이 떠올라 도망치듯 달아났던 것 같다.
기분 나쁘게 약간 닮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혀 아닌데 전체적인 어떤 분위기가 닮았다.
“한신그룹 사람이라며?”아까 양아치들과의 대화에서 눈앞의 이 남자가 한신 중공업 사장이라는 걸 들었다.
거기다가 같은 진 씨.
친인척이나 아마 사촌쯤 되나 보았다.
주양을 알겠지?
그러나 영원은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내 말 믿겠어요? 백 원짜리에 도둑놈 소리 들을 위치는 아니리는 거.” “나도 거기 아는 사람 있다 뭐.”진두영은 영원의 말을 흘려들었다.
대한민국에서 한신그룹 밑에서 밥 벌어 먹고사는 직원만 30만이었다.
몇 다리 건너 하나씩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남자한텐 어쩌다 차인 거예요? 참, 매너도 없군요.”그가 쫄딱 젖은 영원의 한심한 꼴을 훑어봤다.
“그러는 댁도 썩 훌륭해 보이진 않아. 쫓겨난 차람이잖아.”영원이 특유의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족집게 같이 집어냈다.
두영은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임신으로 아내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번엔 반드시 아들이어야 한다는 중압감,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 시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깊게 곪아 있던 원망이 임신 우울증으로 표출됐다.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영은 누구보다 영원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아내보다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는 만난 일이 없으리란 걸 알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쫓아갈 수 없는 사람. 심지어 그는 내 가족이에요. 어떨 거 같아요?”“가족? 최악이네. 나도 그 심정 알지.”아버지는 엄격하셨다. 두영은 아직도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그 애, 주양은 달랐다.
두영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아버지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 애한테는 한 수 져주었다. 뭐든 잘해내니까.
주양과 아버지 사이의 유대는 두영이 끼어들 수 없는 견고한 벽이었다.
사람을 끄는 카리스마란 것, 리더의 덕목이란 아량이라고 여겼다.
아랫사람을 따뜻하게 품는 인간애.
하지만 그 애를 보면 또 리더에게 그런 건 필요 없을지 모른다는 회의감도 든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주양에게 끌렸다. 인간적인 구석이라곤 한 톨도 없는 냉혈한에게.
아주 오래전이었다.
순진했던 시절, 그 애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자신의 인간적인 면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었다.
인간애는 두영의 약점이 되었다.
“그는 괴물 같아요. 죽을 만큼 쫓아가야 간신히 따라갈 수 있을까 말까. 그런 점이 날 미치게 해요. 아내도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이라, 내 패배감을 이해하지를 못해요.” 영원은 잠자코 듣다가 어떤 사람이 연상됐다.
괴물로 비유되는 능력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미지였다.
영원은 잠시 두영의 이름을 다시 외워보았다.
진두영, 진두영, 아. 그래.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주양과 승계구도를 두고 다툰다는 그의 숙부였다.
한신의 자선행사가 있으니 일가족이 총출동했을 거다.
좋아하는 남자의 숙적이라니. 영원은 당혹스러웠다.
조심스럽게 진두영을 떠봤다.
“그래서……? 그를 미워해?”온화하기만 했던 진두영이 미세하게 변화를 보였다.
그런 자신이 끔찍하게 싫다는 듯,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곧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영원은 심각했다.
주양을 죽이고 싶어 하는 남자.
그러나 영원은 두영을 비난할 수 없었다.
두영에게서 자신을 엿봤기 때문이었다. 해수를 죽도록 질투하는 자신.
잘난 것들은 2등의 서러움을 모른다. 심지어 영원은 2등조차 아니다.
“나도 알아. 그런 기분. 패배감 쩔지.”“…….”“누구한테 털어놓아도 동정밖에 더 받겠어? 속 좁다고 욕이나 먹지.”거친 언어유희에 두영은 웃었다.
그의 주변엔 국어책을 읽는 사람들뿐이었다.
자신을 이해하는 영원에게 뜻밖의 공감대를 느꼈다. 아내한테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었다.
역시 사람을 외모로만 차별하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았다.
두영은 영원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들어줘서 고마워요.” 지이이잉 - 지이이잉 -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내를 보필하는 수행 비서였다. 또 히스테리를 부린 것이다.
“아내가요? 알겠어요. 지금 가요.”
진두영이 떠나고 영원은 힘겹게 다리를 떼었다. 접질린 발목에 거의 제자리걸음하다시피였다.
얼마 못 가 가로막혔다. 낯익은 체취가 앞에 버티고 섰다.
가려는데 주양이 팔목을 붙잡았다. 말없이 아프도록 팔목을 죄어온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영원은 그걸 무연히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쳤고 그는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영원은 잔혹하게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냈다.
냉담한 거부.
주양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영원은 쩔뚝거리면서 그를 지나쳤다.
몇 발자국 못 도망가 세찬 힘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영원은 간신히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튀어나왔다.
“죽어도 미안하다 사과 못 하지?”“…….”“왜 나왔어? 아, 양심의 가책?”영원은 실컷 조롱했다.
아무리 냉혈한이어도 미안하긴 할 터다. 여자를 그런 식으로 밀어트리고 간 것.
주양은 대답이 없었다.
영원은 끝까지 잘난 척하는 그가 미웠다.
“내가 너 때문에 무슨 꼴을 당한지 알아?” 신발 한 짝은 어디에 잃어버려 찾지도 못한다. 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아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영원은 한 짝 남은 조리를 벗어 그에게 던졌다.
“내가 얼쩡댄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는데 네가 나타난 거야! 너야말로 얼쩡대지 마! 나도 짜증나니까! 아……!”갑자기 그가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멨다. 인적 드문 정원 벤치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무슨 꼴을 당했는데.”그가 따져 물었다.
“나한테 했듯이 몸을 주고, 이번엔 옷을 받았나?” 그가 영원이 걸치고 있는 남자 옷을 들어 보였다.
진두영이 걸쳐준 옷이었지만 주양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아, 아니야! 그 옷은!”“하지만 나한테는 그랬지.”대항할 수 없는 언변이었다. 논리적인 말발에 이미 말려들어 영원은 대꾸할 힘을 잃었다.
분명 잘못한 사람은 그인데 그녀가 추궁당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뀐 게 아닌가 싶다.
방금 전만 해도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절대로 말 같은 거 섞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머리가 멍청해졌다.
“왜, 왜 너는 나한테 매번 함부로 말하는 거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나건 너한테 추궁당할 이유 없어.”“지금. 내게 몹시 화가 난 듯한 음성이군.”영원은 입을 앙다물었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시위하자 그가 더 집요히 파고들었다.
“이젠 눈빛도 나를 미워하고 있어.”“그래. 너 같은 남자는 딱 질색이야.”영원이 억지를 부렸다. 그의 눈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너 같은…… 겉과 속이 다른 남자는…….”영원은 서러워서 닭똥 같이 눈물을 떨궜다.
“너를, 후회해.”눈물과 함께 말이 비어져 내렸다.
속에 담고, 억누르다 못해 진심까지 내보였다.
후회한다는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도 완전한 무표정이 되었다.
영원은 체념했다. 다 끝난 거야. 이제 다 끝났어. 이제 그는 가버리고 우리가 엮일 일은 없겠지.
시작도 먼저 했으니 끝도 그녀 혼자만 내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가 가지 않고 버텼다. 그녀의 발 언저리에 시선을 내릴 뿐이었다.
더러운 맨발은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었다.
이제 끝났으니 가면 되는 건데 주양도 영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원은 발목이 아파서라며 속으로 변명했다.
주양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영원은 흠칫했다.
그가 영원의 발을 그러쥐었다.
“뭐, 뭐야.”닿아오는 딱딱한 손가락의 뼈마디마디와 발을 감싸는 온기, 심장이 발에 달린 것처럼 발바닥 혈관들이 쿵쿵 뛰어댔다.
자신의 신을 벗은 그가 그 신을 영원에게 신겨주었다.
땅에 한쪽 무릎을 대고 그 위에 흙이 묻은 영원의 발을 딛게 했다.
섬세한 손길이고 정중한 자세였다.
영원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은 맨발이 돼서 휘적휘적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이진 일이라 영원은 주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았다.
*
아빠 구두를 훔쳐 신은 것처럼 질질 끌고 방에 도착했다.
영원은 곧장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서서 신기하게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이 구두는 어떤 의미일까. 그 나름대로 화해하자는 제스처였을까?
평소엔 남들을 혓바닥으로 갖고 노는 남자였다.
논리 정연한 것 빼면 시체인 남자가 말문을 잃은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진짜 사과라는 건 할 줄도 모르는 남자네.”목소리는 구두로 때우려는 남자가 괘씸하다는 투였지만 말과 달리 구두 품에 꼭 안았다.
얼굴이 빨갰다.
등 뒤에 구두를 감추고 문을 열었다.
성원이 잠도 안 자고 강시처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손은 왜 또 빈손이고. 내 트렁크랑 옷은?”“아…….”깜박했다. 코인 세탁실에서 끌고 오고서 행방이 묘연했다.
아무래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게 얼마짜린데!”성원이 길길이 날뛰었다.
해수가 조용히 하라고 나직이 경고하고서야 잠잠해졌다.
자선의 밤에 갔다 왔다 면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영원은 괜히 찔렸다. 임자 있는 남자와 바람을 피운 불륜녀의 심정이 이럴까.
휙, 침대에 들어가 잤다. 구두를 꼭 끌어안았다.
“야! 미친년아. 씻고 누워!”성원이 뭐라 뭐라 떠들었지만 영원은 눈을 감았다.
내일 재미있게 놀려면 일찍 자둬야 한다.
아침이 되었다. 해수가 바쁘게 영원을 깨웠다. 해수가 느닷없이 짐을 싸고 있었다.
“어머니 긴급 호출이야.”“백운당에 무슨 일 있어?”해수는 초조한 안색이었다.
“성원 언니는 여기 스승님과 남고, 영원이 넌 나랑 돌아가야겠다.”서울로 돌아갈 시각이 되었다.
*
주양과 양 비서가 공항에 들어섰다. 양 비서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백운당 압수수색 들어갔을 겁니다. 최 사장 정신이 한바탕 뒤집어졌을걸요?”“섭외해놓은 검사 믿을 만합니까.”주양이 물었다.
“강골 검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최 사장 특기인 뇌물, 향락 그런 것과 거리도 멀구요.” “우리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모릅니다.”누구도 믿을 수 없다. 압수수색을 담당하는 검사조차 그들의 존재를 몰라야 했다.
무성하던 최혜란의 비밀금고가 열릴 때다.
그곳에 김 회장이 꿍쳐놓은 이중모 후보 대외비 동영상이 있을 터였다.
비서실장 쪽으로 흘러들어가기 전에 선수 쳐야 했다.
주양은 여권 검사대 없이 공항 VIP 통로로 지나가며 말했다.
“김 회장 파일 반드시 빼내 와야 합니다. 검찰 내부에서도 눈치채지 못하게 진행하세요. 아, 그리고.”주양이 멈춰 섰다. 손목시계를 의아하게 확인했다.
“비행기 시간 다 됐는데, 진두영 사장은 탑승하지 않는 겁니까?”숙부 내외가 함께 떠나기로 했었다.
“회장님과 제주도에 며칠 더 요양하기로 했답니다.”뻔한 수법에 주양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고 역시…… 병원에 간 거겠죠?”지금쯤 검사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볼 때가 되었으니까요. 서울 병원은 아무래도 듣는 귀가 많아서…….”양 비서가 말끝을 흐렸다. 주양이 나직이 말을 뱉었다.
“살려고 저렇게 발버둥을 치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아이 성별, 알아보도록 하세요. 화룡점정. 마지막 점 하나를 찍읍시다.”잘 훈련된 스튜어디서의 안내에 따라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 이미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해수가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주양의 의식을 붙잡은 사람은 해수가 아니었다.
해수 옆에 얼떨떨한 얼굴로 붙어 있는,
“가족 한 명 더 태워도 될까요?”영원이었다.
*
기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스튜어디스가 자연히 무릎을 꿇고서 한층 낮은 자세에서 주문을 받았다.
“티를 준비해주세요.”주양이 먼저 주문하고 해수도 같은 것을 달라고 했다.
영원은 어제 일로 아직 주양과 있는 게 어색했다.
해수를 흘깃했다. 영원과 달리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다.
‘실은 자기도 처음이면서.’해수는 이런 특권에 익숙하다는 듯 고고하게 행동했다.
음료를 나눠 마시며 두 사람 사이에 어려운 말들이 오고 갔다. 기업 용어들이었다.
영원은 끼어들 틈도 없었다.
해수는 대학교수 과외선생에게 배운 대로 경제 용어와 나라 전반의 상황들에 대해 아주 능숙하게 말하며 그와 자연스럽게 섞였다.
잠자코 대화를 지켜보던 영원이 끼어들었다.
“한신 중공업에서 이번 크루즈 사업 유치했지 아마?”대화가 중단되었다.
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영원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끼어든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돈을 빌려갔는데 지금까지 꼴아박은 돈도 회수 못 한다면서?”주양의 시선이 영원에게 쏠렸다. 영원은 아는 상식을 자랑했다.
“이래서 금산분리를 해야 한다는 거야. 자칫 은행이 계열사 돈 대주다가 망하기라도 하는 날엔, 은행에 저금한 서민들 돈이 공중으로 날아가게 되는 거잖아.”정부에서 금융그룹이 자회사에 투자하는 것에 민감했다.
혹시 회사에 투자했다가 망하면 은행에 저금한 서민들 돈이 없어지는 거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 금산분리를 추진해야 한다고 과거 말들이 많았다.
“뭐, 국회에 포진해 있는 한신그룹 장학생들이 오죽 많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그가 빤히 영원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경제상식을 꽤 가지고 있는 영원이 흥미로운 듯했다.
영원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해수는 영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주양을 보다 초조함에 물 잔에 손을 가져갔다.
“아…….”영원이 급히 일어났다. 물컵이 쓰러져서 다리를 적셨다.
영원은 해수를 노려보았다.
“너 일부러 그랬지.”해수는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넌 항상 그래. 실은 다른 사람이 너보다 주목 받는 꼴은 못 보지.”스튜어디스가 와서 식탁을 정리해줬다.
양 비서가 다가와 주양에게 전화를 붙여주었다.
“본사입니다.”주양이 전화 통화를 핑계로 떠났다.
쏘아붙인 영원도 화장실로 갔다. 고급스런 통로를 쭉 따라가다 보니 이상한 회의실이 나왔다.
영원은 테이블을 건드려봤다.
기내다 보니 의자와 테이블이 위험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바닥에 고정된 불편한 구조였다.
“대체 화장실은 어디 있는 거지?”물기를 짜내려고 했는데 막상 긴장이 풀리자 오줌이 마려웠다.
발을 동동 구르다 반짝이는 금속 물체를 발견했다. 매 같은 눈썰미로 오백 원짜리 동전임을 맞췄다.
영원은 서둘러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돈이 좀만 모이면 성형외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혼자 시시덕거렸다.
학이 그려진 동전을 신 나게 줍고 무릎걸음으로 후진하는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닫혔다. 누군가 들어왔다.
“검사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목소리의 주인은 주양이었다.
그는 영원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상석 의자를 빼 앉았다.
그가 다리를 꼬았다. 영원은 숨을 틀어막았다. 그의 긴 다리가 영원과 근접했다.
“아들입니까? 딸?”전화 너머로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지는 침묵.
어쩐지 그가 웃고 있을 것 같다.
‘일단 숨죽이고 있다가 그가 나가면 그때 나도 나가야겠다.’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려는데 불쑥 그가 다리를 뻗었다.
순간 영원의 심장이 정지했다.
그녀의 얼굴까지 다다른 구두가 뺨에 닿았다가 목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예쁜 사촌여동생이 하나 더 늘어나겠군요.”나른하게 젖은 목소리는 테이블 아래에 숨은 쥐새끼를 알고 있었다.
오백 원을 쥔 손이 허공에 굳은 채 떴다.
새가슴이 벌렁거려 동전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밝은 곳까지 굴러간 동전이 바로 주양의 의자 옆에서 엎어졌다.
상체를 기울여 동전을 줍는 그의 손이 보였다.
“축하는 내가 아니라 삼촌내외께 해드려야죠. 요즘 아버지들은 딸 바보라는데, 딸이 넷이나 되니 얼마나 경사입니까.”책상 밖으로 쭈뼛쭈뼛 나오니 주양이 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며 그가 영원을 응시했다.
어제 있던 일이 자꾸 떠올라 어색했다. 시선을 피했다.
어서 오백 원짜리를 돌려주지 않는 그가 의아했다. 쓸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도, 돌려줘. 내 거야.
영원은 자신 없는 모습을 하다가 아무 말도 못 꺼냈다.
오백 원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터덜터덜 테이블 모서리를 지났을까. 뒤에서 잡아끄는 힘이 팔뚝에 달라붙었다.
영원은 그대로 끌려가 주양의 무릎 위에 앉혀졌다.
주양은 전화통화를 멈추지 않고 진하게 영원과 아이 컨택을 했다.
내내 애꿎은 바닥만 흡입하다 간만이었다.
“내 성미 잘 알잖아요. 난 기다리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영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영원은 심장을 억누르며 그를 봤다.
“증권가에 풀리는 게 그림상 좋을 것 같군요. 회장님 귀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가면 금상첨화고요.”그는 영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긴 걸 확인하고서야 동전을 돌려주었다.
손에 오백 원이 얹어졌다.
오백 원어치 값엔 다시는 눈을 피하지 말란 경고도 함께였다.
영원은 회의실을 나왔다.
요의도 잊고 어느새 홀려서 유령처럼 자리로 돌아오니 해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영원은 도대체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망연하기만 했다.
소파에 드러눕자 비행기는 금세 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