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37화 (37/83)

37화. 실종 11일째 <1>2016.11.10.

-실종 11일째

진두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떼었다.

‘금성회’라고 들어봤어요? 일명, 비자금 조성 모임의 줄임말이죠.

“나, 김 회장, 이중모. 이 셋이 주축으로 시작했어요.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돈을 굴리고, 주식을 풀어 개미들 잡아다 족치고, 그 돈은 자연히 정치권에 흘러들어갔죠.”“…….”“그즈음이었어요. ‘그 사건’이 터진 것이.”그렇게 말하는 진두영은 몹시 착잡한 표정이었다.

“백운당에서 어린 22살 여종업원이 자살을 했죠. 지저분한 성추행 때문에. 그 동영상을 빌미로 김 회장이 이중모 의원을 손아귀에 틀어쥐었어요. 김 회장은 날 빼고 둘이 세탁방을 돌려 이익금을 더 많이 나눠 가지자고 회유했죠. 이중모 의원이 굴리던 막대한 자금이 실은 김한식 전 총리의 비자금이었거든요.” 김한식 전 총리라니. 여기서 언급되는 모든 인물들이 뉴스에서나 보던 까마득한 세계의 사람들이라 장 경감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김 회장이 이중모를 협박한 뒤에 어떻게 됐지?

장 경감의 표정을 본 진두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김 회장의 협박에 못 이겨, 이중모가 날 토사구팽한 거예요.”재미로 시작한 돈놀이였다.

한신의 차남 진두영을 원하는 상류모임을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그게 진 회장 귀까지 들어갔다는 거였다.

진 회장은 고작 3선 국회의원과 대산물산 김 회장 따위에게 토사구팽 당한 두영을 한심해 했다.

그리고 또 그쯤이었다.

존재감 없이 살던 조카, ‘주양’이 유학에서 돌아온 것이.

“주양은 판세를 뒤엎었어요. 진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 내 실책을 이용하기로 한 거죠. 이중모 의원을 설득해서 자신을 ‘금성회’에 넣어달라고 청탁했어요. 김 회장의 팔다리를 묶어 놓을 수 있다면서.”   진두영의 무능함이 진 회장에게 더 까발려진 셈이 된 것이다.

“무능력하게 쫓겨난 내 자리를 주양이 차지했어요. 진 회장이 주양을 눈여겨보게 된 계기였죠. 후계자로서의 재목 같은 거랄까? 주양은 능력을 인정받아 1년 만에 고속승진을 하게 되고, 지금의 한신을 장악했습니다.”그리고 5년이 흐른 지금 한신의 지원을 받아 이중모는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김 회장이 호락호락하진 않았을 텐데요. 진주양의 회원 가입을 반대하지 않았나요?”“아뇨. 주양은 자신의 매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이용했어요. 난 애 딸린 유부남이었고, 그 앤 딸 가진 재벌가라면 탐낼 미혼 남성이었으니까.”김 회장이 진주양을 사위로 탐냈다?

친해지기 위해 그의 가입을 허락한 것이다. 자신의 딸이 한신그룹 며느리가 된다면 그보다 더한 횡재는 없다.

덫인 줄도 모르고 덥석 문격이다.

진두영이 물었다.

“김 회장이 신부를 납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장 경감은 이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5년 전, 여종업원이 연못에 빠져 질식사 했다. 그리고 김 회장은 여종업원과 유사하게 물속에서 죽었다.

물과 질식사.

마치 오마주라도 한 것처럼 빼다 박아 있다.

김 회장은 그 일에 줄곧 죄책감이 있던 걸까. 아니면…… 그와 비슷하게 살해당한 걸까.

뒤에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김 회장이 자살을 했건, 타살 당했건 장 경감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신부였다.

“신부가 죽었다는 것에 손가락을 건다는 말…… 진심입니까?”장 경감이 물었다.

신부는 살아 있나? 신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신부가 살해당한 것처럼 장 경감을 뒤흔들었던 진두영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유모로 보이는 여자가 강보에 아기를 안고 왔다.

진두영이 아기를 달랬다.

“예쁜 공주님인가요?”장 경감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물자 진두양이 날카롭게 그를 봤다.

“뭔 거 같습니까.”“네?”“아들인 것 같습니까? 딸인 것 같습니까?”이 대목에 그게 중요한 건가?

“뭐, 딸인 거 같기도 하고, 아들인 거 같기도 합니다.” 아기가 금세 잠잠해졌다. 진두영이 하던 얘기를 마저 진행시켰다.

“신부가 납치당했다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죠.”장 경감이 얼른 수첩을 펼쳤다.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신부는 예식 당일, 잠시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려는 도중에 납치된 것 같습니다.”“…….”“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신부가 갑자기 예정에 없이 바깥에 나갔다는 것.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고 나갔다는 건데. 이 연락한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신부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확인해보니, 결혼식 직전에 누군가와 통화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축하 메시지였을 수도 있지만 유독 이상한 번호였다.

“공중전화.”요즘 시대엔 공중전화를 찾아서 전화 거는 게 더 힘들다.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왜 신원을 밝히고 싶지 않아 했을까.

“신부는 결혼식 당일 꽤 곤란한 전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식 올리기 1시간 전에 다 갖춰 입은 웨딩드레스마저 벗고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그때 진두영이 장 경감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신부는 협박전화를 받았습니다.”장 경감은 돌이 되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신부 실종 사건 최초 신고자가 납니다.”신고자가 진주양이 아니라고? 당연히 진주양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말이 되었다. 진주양은 신부를 찾지 않길 원하는 남자다.

굳이 경찰까지 개입시켜 일을 크게 벌일 이유가 없다.

한신의 정보력은 국정원과 맞먹는단 소문이 있다. 이미 모든 사실을 알면서 한신은 경찰에게 그런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거다.

신부의 가출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에.

진두영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주양이와 사돈처녀의 내연관계도 알고 있어요.”어이지는 연타. 장 경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두영이 느긋하게 장 경감을 봤다.

“사돈처녀가 억울하게 병원에 갇혀 있는 것도…….”진두영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부가 살해되었을 거란 것에 내 손가락을 걸 수 있냐고 물었죠.”진두영이 설핏 웃었다.

“신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그때 죽지 않았어도, 오늘 죽을 거고,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 죽을 겁니다.”“…….”“바로,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신부는 납치된 게 아닙니다. ‘도망’을 친 겁니다. ‘그’에게서.”“…….”“사돈처녀…… 아니, 영원이를 직접 만나본 적 있습니까? 그녀가 왜 5호실에 갇혀 있는 줄 압니까?”진두영이 몰아치듯 장 경감에게 캐물었다.

영원이……. 마치 무척 가까운 사이인 듯한 부름이었다.

신영원이 5호실에 갇힌 이유. 진두영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진두영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장 경감은 왠지 간담이 서늘했다.

“당신 역시 단순히 선택된 아닐 거예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그’의 손바닥 아래서 우리는 장기 말처럼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당신, 이 사건에 발을 들인 이상, 쉽게 빠져나가진 못할 겁니다.” 진두영의 말이 굉장히 섬뜩하게 다가왔다. 장 경감은 덫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진두영은 품에 안긴 자신의 아기를 보았다.

“난 그놈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놈인지 잘 알아요. 그는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개 다 가질 방법을 고안하는 놈입니다. 보세요. 신영원을 버리고 신해수와 결혼을 했으니.” 필요한 여자와 비즈니스 결혼을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놓아주지 않고 가둬놓았다.

장 경감이 떨리는 입을 열었다.

“신영원 씨와 친하셨나요?”“아들이에요.”진두영은 딴소리를 했다. 그는 아이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잠든 아이의 뺨을 안타깝게 쓸어내라며 진두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진가를 먼저 알아본 건 나였습니다.”몹시 슬픈 목소리였다. 눈이 마주쳤다.

장 경감이 그의 눈동자에서 본 것은 분노였다.

단순히 왕좌를 빼앗긴 데서 오는 것이 아닌, 그 이상으로 처절한 패배감이 덧칠되어 있었다.

어째서 화를 내는 걸까.

무엇에 저토록 비열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걸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질투 같았다.

여자를 빼앗기고 자존심에 금이 간 남자의 절규.

.

.

.

진두영의 집에서 나오자 검은 세단 3대가 장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뭇거뭇하게 선팅된 내부는 보이지 않지만 주양이라는 걸 장 경감은 직감했다.

‘그런 영원이를 버리고 신해수 씨와 결혼을 했으니. 주양이는 자격이 없는 놈이에요.’차장이 내려갔다. 장 경감과 주양은 서로를 응시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 남자를 볼 때면 아득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숨 막힘이 밀려왔다.

공포,

그리고 먹먹한 어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신영원과 신해수, 그 둘 사이에서 저 남자의 본심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있는가.

-1년 전, 영원 26세

수영장에 빠지기 직전의 영원은 덜덜 떨며 애써 주양의 팔목을 쥐었다.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는 영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 맥주병이야. 여, 여기서 손 놓으면 너 이거 살인이야.”죽을 거야. 나를 죽일 거야…….

“날 죽이려는 의도로 받아들일 거야. 놔아……! 흐윽……. 그냥 내가 일어날 테니까 바닥에 놓으라고!”“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사는 거?”잠시간의 정적.

“그럼 난 너 안 살려.”믿을 수 없게도 주양이 손을 놔버렸다.

영원은 물거품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사라졌다.

풍덩?? !

영원은 물에 빠졌다.

그가 죽어가는 영원을 수면 위에서 감정 없이 응시했다.

팔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경직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버둥대었지만 주양은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죽어버려.’영원은 그의 바람을 전해 받았다. 죽길 원하는 거다.

통나무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어느 순간 삶의 의지를 잃었던 것 같다. 영원은 발버둥을 멈췄다.

수면 위로 주양의 얼굴이 넘실댔다. 흐릿한 잔상은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그것은 감정이 없는 맨얼굴이었다.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위협당할 줄 알면서 달려든 나는 불나방인가. 그렇다면 이제 죽는 건가.

시작을 했지만 사랑을 끝내는 법 같은 건 배운 적 없다.

사랑을 받아본 기억조차 없으니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기적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죽는 순간에 마음이 속삭였다.

상대를 괴롭히는 일방적인 사랑은 집착일 뿐이다. 그런 사랑을 알고 있다.

사랑이 아닌 집착을. 사랑을 빙자한 폭력을.

기도가 꽉 조이는 공포가 얼핏 과거 기억과 맞물렸다.

영원은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누군가 영원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데도 죽으라고, 죽으라고 뒤통수를 눌렀다.

‘흐……악! 우……욱.’그리고 돌부리 같은 것에 이마를 부딪혔다. 피가 염료처럼 느리게 퍼졌나갔다.

영원은 완벽하게 과거 기억을 더듬었다. 번져가는 피를 생생하게 떠올리는 그때였다.

“하악!”영원의 머리가 물 밖으로 꺼내졌다.

헤엄쳐온 주양이 영원을 수영장 밖으로 밀어 올렸다.

영원은 간신히 위로 올라와 천장을 보고 숨을 돌렸다.

물기를 뚝뚝 흘리면서 주양이 차갑게 영원을 내려다봤다.

“개미를 밟아 죽여서 희열 따위 못 느껴. 신영원 씨. 내가 당신을 구해주는 일 따윈 없을 거야.”송곳 같은 말이 영원의 갈비뼈를 찔렀다. 너는 나와 절대 어울릴 수 없어. 그렇게 단정 지었다.

다시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주양이 떠났다. 진정이 좀 되었을 때 영원은 주섬주섬 일어났다.

조리 슬리퍼도 어디선가 흘려 맨발이었다. 수영장을 나왔지만 방 카드가 푹 젖어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꼬라지로 꼬치꼬치 캐물을 성원을 맞닥뜨리기 싫었다.

호텔 정원 벤치에 앉았다.

‘그건 누구였을까?’과거에 누군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물속에 머리에 처박아 넣고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두통이 깨질 듯 몰려와서 관뒀다.

대체 그게 무슨 기억일까. 그건 누구였을까.

영원이 이마의 상처를 더듬는 그때였다. 동네 양아치 같은 놈들이 둘러쌌다.

“실연이라도 당하셨나?”“아주 바람직한 모습이네. 아가씨.” 그들이 젖어 속이 완전히 비치는 영원의 옷을 훑어 내렸다.

*

주양은 샤워꼭지를 닫았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와 양주로 입가심 했다.

야경이 펼쳐진 호텔 최상층은 멋졌다. 하지만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은 한심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요즘 필요 이상으로 화내는 이유는 오직 한 여자 때문이었다.

얼마 전, 백운당에서도 그랬다.

제일 먼저 그 구석에서 화단을 가꾸고 있는 영원을 발견한 건 그였다.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길이 갔다.

그가 발길을 옮기니 최혜란도 따라왔다. 시선이 먼저 그곳에 쏠렸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굳이 화단 이야기를 언급한 것도 그랬다.

여러모로 그녀가 그의 삶에 개입되는 것 같아 조심하려 하는데 다시 수영장에서 영원은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주양은 주먹을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따가웠다. 수영장에서 그녀를 끄집어 낼 때 할퀴어진 모양이다. 피가 비쳤다.

띵동-.

객실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각에 올 사람은 양 비서뿐이었다.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양 비서가 아니었다.

“너무 늦은 시각인가요?”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로 넘기며 해수가 수줍게 그를 봤다.

“들어오시죠.”주양은 해수를 안으로 들였다.

해수는 주양이 묶는 객실을 둘러봤다.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어디에도 눈 댈 곳은 없었다.

그가 문을 열어줬을 때 해수는 심장을 공격당했다.

그는 맨몸이었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벗은 가슴팍에 수건으로 아래만 둘러놨다.

물기가 그의 가슴을 타고 흘렀다. 해수가 얼굴을 붉혔다.

“옷 좀…….”주양은 날카롭게 해수를 봤다.

신해수가 그를 찾아온 이유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주양은 기분이 바닥을 쳐서 일일이 해수에게 젠틀하게 대해줄 수 없었다.

그는 무뚝뚝하게 방으로 가서 맨몸에 가운을 걸쳤다.

거실로 나가자 해수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양은 테라스가 내다보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시죠?”“자선의 밤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셔서요. 내일 서울로 가신다고 들었어요.”“휴가를 온 게 아니니까요.”“저도 급하게 일정이 잡혀서 내일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비행기 표는 구하셨고요?” “남는 좌석이 있겠죠.”“그럼 내일 저랑 같이 이동하시죠.”해수는 통 큰 그의 제안에 놀랐다. 한신은 전용기가 있다고 들었다.

“폐를 끼칠 순 없어요.” “어차피 혼자 타기엔 자리가 많이 널널합니다.” 본래 전용기는 유럽이나 미주 출장에만 이용되었다. 제주까지 끌고 오는 건 많이 낭비였다. 진 회장 때문이었다.

진 회장이 한 번 움직이면 주치의를 비롯한 간호사들이 포함된 전담팀이 대거 이동해서 전용기는 필수였다. 진 회장이 제주도에 남기로 하면서 자리가 텅 비었다.

“아…… 회장님은.”“한 달 정도 휴양하신다고. 회장님께서 이번 자선모임이 몹시 흡족하셨나 봅니다. 근래에 언제 한 번 회장님 모시고 백운당에 가게 될 것 같아요.”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신해수는 비행기는 사설이고 실은 본론이 따로 있는 모양새였다.

주양은 얼음을 띄운 양주잔을 마시며 해수의 속마음을 읽었다.

밤늦은 시각에 찾아온 이유. 은밀한 속내.

품평을 하자면 신해수는 최상급이었다. 남자의 입장에선 매력적인 여자였다.

백운당 딸이 아니었다면. 전에 같았다면 어쩌면 몇 번쯤은 장단에 못이기는 척 놀아줬을 지도 모른다.

주양은 문득 생각을 되짚었다.

전에 같았다면?

마치 지금은 안 된다는 투였다. 전과 달라진 게 무엇이기에?

주양의 답답한 마음에 테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7층 객실에서 정원이 바로 내다보였다. 주양은 미간을 찌푸렸다.

쫄딱 젖은 채 한심한 꼴의 영원이 방에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뭘 하나 보고 있는데 혈기 왕성한 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했다.

“얼마 전에 아버님 재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마음이 아프실 것 같아서……. 스승님께 의도치 않게 이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해수는 조심스럽게 주양을 위로했다.

주양의 귀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놈들이 영원에게 시비를 걸었다. 악악대며 대드는 영원을 주양이 아연하게 보았다.

자기 몸집의 두 배나 되는 사내의 팔을 그녀가 물었다.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앞뒤 재지 않고 들이박고 보는 저 성격이 황당하면서도 위태로워 눈이 갔다.

“전 그런 편견 없어요. 이사님이 어떻게 태어났고, 사람들이 이사님을 보고 뭐라 수군거리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이사님 어깨가 외로워 보여서…….”범오사에 다녀갔던 날 병원에서는 더 어이가 없었다.

영원 혼자 이상한 오해를 해서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고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러나 또 금세 풀이 죽어서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고슴도치였다. 위험이 다가오면 가시를 바짝 세우는.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

절대 구해주지 않기로 했는데 구해줘야 할 상황이 왔다. 그는 스님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좋은 징조요. 그 까마귀가 어디로, 누구에게 안내해줄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때맞춰 그를 시험하듯 일어나는 상황이 초초해 주양은 할퀴어진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혀끝에서 피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피는 비려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달콤했다. 오래도록 피를 혀끝에서 굴린 주양은 결국 해수에게 일렀다.

“용건만 간단히 할까요?”해수가 굳었다. 주양의 시선은 바깥에 붙박여 있었다.

그는 이미 옷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양아치들이 영원을 음흉하게 훑어 내렸다. 보아하니 얼굴도 옥동자같이 생긴 게 여자 구경도 못 해본 놈들 같았다. 영원에게까지 와서 추근거리는 것을 보면.

영원은 짜증이 나서 머리카락을 만졌다. 젖은 머리가 뭉쳐서 얼굴을 온전히 가려주지 못했다.

“여자가 궁하면 술집을 가. 여기서 병신 짓 하지 말고.”영원이 그들을 노려봤다.

“뭐야?”“목에 두른 그 돼지비계나 빼고 다녀. 돼지목살에 금목걸이 찬다고 네가 쇠고기보다 비싸지겠냐? 퉤.”“이 가스나 말본새 봐라.”그들이 혈압 오르는 뒷목을 잡았다. 영원이 조심스럽게 화단에 있는 돌을 주워들었다.

치한 취급을 당하자 놈들이 성질을 냈다. 머리채를 잡히자마자 놈의 비계 살을 이빨로 물었다.

“아아악!” 놈이 자지러졌다. 영원의 얼굴을 떼어내려고 두껍고 큰 손이 올라갔다.

맞는다. 영원이 질끈 눈을 감는 그 순간, 누군가 그 손을 저지했다.

영원은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구해준 왕자님을 봤다.

“그만두시죠. 여럿이서 여자 하나 데리고 뭐하는 겁니까.”왕자는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남자였다. 영원이 기다린 왕자는 아니었다.

“내가 임 전무님을 좀 아는데, 아들 교육을 아주 형편없이 시켰군요.”그들은 자선회에 참석한 한신그룹 간부 자식들이었다.

진두영을 알아보고 그들이 도망치듯 떠났다.

두영이 얼른 영원을 살폈다.

“괜찮아요?”그녀는 한신그룹이란 소리에 반짝반짝했다가 두영의 얼굴을 확인하고 실망했다.

두영은 당혹스러웠다.

한 번도 한신 일가인 것을 뽐낸 적은 없다. 그러나 우러러볼 만하지 않나.

그를 보고 누군가 대놓고 실망스러움을 내보인 건 난생처음이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신경 쓰지 마.”“하지만…….”“혼자 있고 싶어.”쫄딱 젖은 상태의 여자를 놔두고 갈 만큼 무정하지 않았다.

두영이 가지 않자 영원은 스스로 움직였다. 얼마 못 가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다리를 접질렸군요.”영원은 두영의 부축을 받아 얌전히 벤치에 앉았다.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그녀를 보다가 그가 자신의 남방을 벗어 걸쳐주었다.

“오지랖이 태평양이네. 모르는 여자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영원의 시니컬한 반응에 두영이 웃었다.

“버릇없다는 소리 이번엔 듣기 싫어서요.”“우리가…… 구면이야?” 두영은 두 번째 당황했다. 범오사에서의 만남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자신감으로 당연히 알아볼 거라 생각한 걸까? 사실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두영은 영원을 알았다.

‘성철스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 낳아줄 여자를 찾았다고 합니다.’낮에 김 부장에게서 연락을 받고 차에서 내리는데 주차장이 시끌벅적했다. 여자 셋이 휴가를 온 듯했다.

‘야! 신영원! 짐 조심히 들어. 내 아가들 기스 나면 다 네 책임이야.’일행인 듯 곁에 있던 여자가 영원에게 소리쳤다.

그때 영원의 이름을 알았다.

영원은 짐을 낑낑대며 짊어지고 갔다.

그는 영원이 짐을 내린 차 트렁크 아래서 동전을 주웠다.

특이한 외양, 긴 머리카락…… 범오사에서 만난 동전 아가씨였다.

두영은 속으로 반가웠다. 그때 영원이 놓고 간 백 원을 아직 보관하고 있었다.

혹시나 범오사에서 다시 만나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지갑 안에 있는 백 원이 민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거죠?”“남자한테 차였어.”두영은 세 번째로 당황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비참한 말을,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서슴없이 말할 줄이야.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을 볼 수는 없는 게 아쉬웠다.

영원이 어떤 심정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슬픈 걸까? 그때 영원이 자괴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쏠렸다.

곧은 콧날과 깨끗한 뺨,

문득 생각과 다르게 그는 그녀가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 있지.”대뜸 영원이 입을 뗐다.

“기억난 거 같아. 당신.”영원이 두영을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두영은 이미 홀린 듯 그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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