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프랑켄슈타인2016.11.03.
영원은 시계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10시가 되도록 신해수가 깜깜무소식이었다.
화려하게 화장을 찍어 바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섰다. 예상가는 지점이 있었다.
주양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층수는 3층.
해수 일행이 영원을 빼놓고 간 곳도 3층이었다.
그 순간에 운명처럼 둘이 만나지 못했으리란 법은 없다.
범오사에서 주양과 재회했을 때 세상이 손바닥만 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으니까.
시계를 거의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자 성원이 의욕 없이 대꾸했다.
“해수 오늘 늦어. 어쩌면 오늘 못 들어올지도 몰라.”“못 들어…… 온다고?”“자선의 밤인가 뭐시깽이에 초대받았대.”침대헤드에 기댄 성원이 책자를 넘기며 말했다. 영원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거랑 못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굶주린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지나치나.”“해수가 고양이라는 거야? 생선은 누군데?”영원이 세모꼴로 눈에 각을 세웠다.
그런 영원을 빤히 쳐다보던 성원이 별안간 피식, 힘 빠진 소리를 내며 침대에 늘어졌다.
점잖지 못한 표정으로 전부 설명되었다. 주양이었다.
“신체 건강한 남녀가, 밤에 술을 나눠 마시다 보면 사고가 불명확해지고, 한창 물올랐겠다, 장소는 때마침 호텔이네? 아아. 하늘이 감응하지 않고는 두 번 다시없을 기회지.”어쩌면 주양이 굶주린 고양이고 생선이 해수일 수도 있다.
신사의 탈을 쓰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도덕한 남자였다. 그는.
“거기 어디야?”“아서라. 우리 같은 찌꺼기들은 민폐니까 방구석에 잠자코 있어야 해. 잠깐, 찌꺼기? 스스로 비하할 필욘 없잖아. 내가 말했지만 은근 기분 나쁘네.”혼자 말하고 혼자 떠드는 성원을 보다 못 참고 소리쳤다.
“그래서 왜 초대한 건데!”“아우 씨. 너는 가나다라 설명 늘어줘야 알아먹어?”“빨리!”“실리도 챙기고, 명분도 찾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심산이지, 그 남자. 한신이랑 조 선생이란 관계가 좀 껄끄러웠잖냐.” 영원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상심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해수의 전화 한 통에 바로 방을 대령했다.
주양은 누구에게나 정중했고 그것은 곧 공평함을 의미했다.
그의 원칙이 영원에게는 예외였다. 그녀한테만은 차가웠다.
볼꼴 못 볼꼴 다 본 20년 지기 부부도 그보다는 인색하지 않을 거다.
성원이 이어폰을 크게 틀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돼지 멱따는 소리 같았다.
영원이 시끄러워! 하고 베개를 집어던졌다.
“너만 이 방 써? 에티켓 좀 지켜!”옆에 있다 괜히 돌 맞은 성원이 황당해 했다. 배를 잡고 영혼 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하. 하. 하. 하. 네가 에티켓 운운하니까 쫌 웃긴다?”“하고 많은 방 중에 여기서 뭉개는 이유가 뭐야. 제길.”스위트룸이라 방이 여러 개였다. 각자 한 방씩 차지해도 되었다.
그리고 여긴 영원의 방이다.
성원이 귀에서 이어폰 빼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수발 들어줄 사람이 너밖에 없잖니.”뻔뻔하게 발가락으로 옷을 집어 영원에게 던진다.
“가서 이거나 빨아와.”“여기서 빨래를 어떻게 해?” “호텔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셀프 세탁실이 마련되어 있어.”“그렇게 살고 싶냐?”“내일 해변 패션은 그 옷으로 정했어. 집에서 매일 엄마한테 구르다 간만에 풀어주니까 심심해서 그러나 본데. 가서 옷이나 빨아.”영원은 씩씩대면서도 몸에 밴 하녀 근성 때문에 말을 잘 들었다.
“참, 여기 귀신 나온다는 소문 있더라.”영원은 성원의 장난에 움찔했다.
빨래더미를 트렁크 가방에 싣고 방을 나왔다.
1층 안내데스크로 내려가자 컨시어지가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원은 방 키를 보여주며 이 호텔에 어떤 혜택들이 있냐고 물었다.
“오션 스위트룸은 상위 1프로를 위한 객실로, 연회비 3억의 소수 회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실내수영장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영원은 심드렁했다.
어릴 적에 물에 잘못 빠진 트라우마 때문에 물이 두려웠다. 물이라면 치가 떨렸다.
깊은 웅덩이만 보면 구역질이 나고 식은땀이 흐르면서 몸이 뻣뻣해져서 말이 안 들었다.
기억이 안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는 모르나 어떤 트라우마가 작용한 거 같았다.
그다지 신통치 않아 원래 계획대로 셀프 세탁실로 가기로 했다.
“셀프 세탁실은 서쪽 별관으로 가시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시계를 보니 밤 10시를 훌쩍 넘었다.
“그 세탁실 지금 이용할 수 있을까?”컨시어지가 고객 응대용 미소를 그리며 물론이라고 답했다.
코인 세탁실은 사우나, 수영장, 헬스클럽 등이 모여 있는 피트니스 별관에 있었다.
본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코인 세탁실에 도착했다.
터덜터덜 옷가지가 든 가방을 끌고 갔다. 속옷과 일반 옷을 구별해 세탁기를 돌렸다.
가만히 기다리는데 신경질이 났다. 왜 그러는지 알기 싫었다.
아무도 없는 오밤중이었다. 우웅. 첨벙. 우웅. 첨벙. 세탁기 소리가 고단하게 이어졌다.
세탁실에 그녀 혼자 앉아 있는데 공기가 싸늘해졌다.
순간 영원은 문을 봤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었다.
잠시 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영원은 벽에 등을 기대었다.
경계를 늦추는 순간 또 이상한 소리가 고막을 뒤적였다.
‘여기 귀신 나온다는 소문 있더라.’영원은 세탁이 끝나자마자 옷가지를 얼른 둘둘 말아 걸음을 서둘렀다.
통상 호텔의 영업시간이 10시가 끝이라는데 지금은 10시 4분이었다.
폐관했을 텐데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건 귀신밖에 없을 거다.
코너를 도는 그때였다. 어두운 복도에 검은 그림자가 불쑥 눈앞을 가로막았다.
영원은 비명도 못 지르고 주저앉았다.
우당탕탕! 호텔 안내판이 쓰러졌다.
“뭔 소리야!”사람들이 달려왔다. 영원은 긴장을 풀었다.
직원들이 아닌 까만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었다.
그리고 길목을 가로막았던 검은 그림자의 정체.
“신영원 씨?” 양 비서였다.
호텔 직원들이 허리를 굽혔다. 양 비서가 뭐라고 지시했다.
“보안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사님이 계십니다. 매월 둘째 주 월요일은 휴무라 하지 않았습니까?”“저 그게, 몇몇 부대시설들은 규정에서 포함되지 않고 있습니다.” 안일한 대처에 양 비서가 인상을 찡그리다 영원을 봤다. 그가 얼른 표정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안 다치셨습니까?”영원은 귀신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뻘쭘해서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 불이 너무 어두운 거 아냐? 놀랐잖아.”그런데 그가 여기에 있는 걸까? 양 비서가 방금 주양이 있다고…….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양 비서가 적극적으로 영원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와서도 하녀 짓을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워 주변을 둘러봤다.
몇몇 시설들이 층수마다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사우나, 골프, 스파, 뷰티숍, 피트니스, 수영장.
달밤에 수영할 리는 없고 사우나나 스파에 있을까?
“수, 수영을 하려고.”영원은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수영장 따위 발도 담그기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양 비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 그러십니까.”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원은 무시하는 거 같아서 골드카드를 보여줬다.
“나도 카드 있어! 도금된 카드 키가 골드바 같이 번쩍거렸다.
“연회비 3억의 소수 회원들만 이용할 수 있다며? 당신 상사한테는 고맙다고 전해줘. 이런 호사를 언제 또 누려보겠어.”직원에게 당당히 수영장 위치를 물어봤다.
영원은 당당하게 프런트에서 사물함 키를 받아 여자 탈의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직원이 양 비서와 무언가 이야기 하는 거 같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수영복 따윈 없어서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어두운 데다가 물 가까이 가는 것만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돌아가려는데, 천장이 감동스러워 그녀도 모르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유리로 된 천장에 밤하늘이 그대로 쏟아졌다.
선 베드가 딱 일곱 개밖에 비치되지 않은 1퍼센트 고객들만을 위한 수영장이었다.
프라이버시 때문에 선 베드마다 기둥을 세워 놨다.
채도 낮은 조명은 어둡지만 은은하게 푸른 수영장 물결을 비추었다.
아까 정원을 지나오면서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을 봤다.
성원이 한 말대로 ‘자선의 밤’에 초대된 셀럽들인 모양이었다.
영화 시상식에 참가라도 하듯, 구두부터 그들이 지닌 귀중품까지 불운과는 멀어 보이는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해수는 그런 이들과 식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한데 섞인 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계모는 그런 순간들을 위해 해수를 철저히 교육시켜왔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
반면에 영원은 모습이 아닌 꼬라지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어두운 수면 위에 영원의 얼굴이 비쳤다.
주머니에서 손을 넣어 매향에게 선물 받은 립스틱을 꺼내봤다.
수영장 물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엄마 립스틱을 몰래 훔친 꼬마처럼, 영원은 조심스럽게 입술에 발라봤다.
강렬한 레드의 선명한 발색이 입술을 매혹으로 물들였다.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러나 흠칫 굳었다. 눈동자……
천박한 피를 물려받은 눈동자……
영원은 처참한 현실을 깨닫고 손으로 물을 마구 휘저어 흩트려놓았다.
그때, 물줄기가 크게 일어나고 물속에서 뭔가 떠올랐다.
영원은 눈이 커진 채 일순 정지했다.
주양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영원을 봤다.
*
영원은 무릎을 바닥에 댄 채 굳었다. 눈앞에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주양도 물속에 몸을 담그고 영원을 주시했다.
그의 호흡이 점차 차분해졌다.
그렇게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건만……
그의 눈길이 영원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하얀 이마, 눈, 코, 붉게 칠한 입술……
영원의 이목구비를 오래도록 더듬어 내렸다.
머리카락이 흘러내고서야 영원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파랗게 질린 영원이 다시 얼굴을 가리려는데 그보다 먼저 주양이 손을 뻗었다.
저지당한 채 얼굴이 끌려갔다.
키스할 것처럼 얼굴이 맞대어졌다.
그 순간, 숨이 멎었다. 그가 영원의 입술에 엄지를 대었다.
“좋지 않아.”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가 입술을 꾹 눌렀다.
그녀를 깊게 응시한 채였다.
엄지 끝이 그대로 지나가며 립스틱을 지워버렸다.
뜨겁게 뭉쳐 있던 피가 한꺼번에 심장에서 쓸려나가는 탈력감에 다리 힘이 풀렸다.
그는 날렵한 몸동작으로 바닥을 짚고 물속을 빠져나갔다.
영원은 정신을 차렸다. 부끄러움에 입술을 옷소매로 비볐다.
“뭐, 뭐야. 갑자기. 얼마나 공들여 칠한 건데.”아주 찰나일 뿐인데, 입술에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화끈거렸다.
수건을 꺼내 그가 머리를 닦았다.
헐벗고 있는 상체가 아름다웠다.
수상스포츠 마니아들이 입는 기능성 블랙 반신수영복이 그의 육감적인 하체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점잖게 양복 안에 숨겨놓은 몸은 야수.
검은 베스가운을 몸에 걸치고 그가 끈을 묶었다. 물병을 챙겨 나가려 했다.
자신 때문일까?
자신을 무슨 벌레 취급하듯 자리를 뜨려는 모습에 영원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영원이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됐어. 가도 내가 가.”그녀라고 만나고 싶은 줄 아는가. 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다.
사람 무안하게 하는 재주는 정말 타고났다.
그렇게 싫다는 티 팍팍 내지 마. 나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왜 나만 숨어야 해?
나만 널 피해야 하고 내가 왜 네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데?
영원은 차마 내뱉지 못한 원망을 삭이고 돌아섰다.
수영장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얇은 조리 슬리퍼가 엇갈렸다.
중심을 잃고 영원이 넘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아……!”자빠질 뻔한 영원을 그가 잡았다. 옷깃이 잡힌 채 배가 그에게 밀착됐다.
영원의 몸이 수영장 허공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맞물렸다.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심장을 멋대로 후벼 파고 들어왔다.
영원의 심장이 널을 뛰었다. 발아래는 수심 깊은 물이었다.
영원이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며 그의 가슴을 밀었다.
“가, 갈 거야. 빨리 일으켜줘.”그는 가만히 있었다. 영원을 멱살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영원은 그가 무얼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가 갈등한다는 것. 영원을 구해줄지 말지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황당함과 더불어 영원은 상처 입었다.
“뭐하는 거야.”“널 구해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넌 이대로 돌아가, 내가 조금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하겠지.”조금도 틀리지 않은 예측이 갈비뼈를 힘껏 파고들었다. 쿵, 심장이 무너졌다.
“네가 스스럼없이 나를 대하는 것, 조금도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나를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까지.”귓가에 새살대면서 그가 영원의 멱살을 으스러트릴 듯 쥐었다.
“난 그게 싫어.” 음성은 단호하게 뇌수를 쳤다. 진저리나도록 귓가에 쟁쟁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모른 척한 거였다.
영원이 버둥대자 그가 다시 한 번 힘껏 옷을 거머쥐었다.
“좋은 행동이 아냐. 내 신경을 무척 거슬리고 있다고.” 명령조에 영원은 입이 멋대로 돌아가 지껄이고 말았다.
“왜, 내가 네 신경에 거슬리는데?”하아…… 하아…… 날숨이 빠르게 나왔다 흩어졌다.
“내가 거슬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날카로운 지적에 주양은 가만히 입 다물었다.
주변에서 알짱대지 말라는 확실한 경고. 그러나 이전과는 좀 다른 협박이었다.
고운 정이든 미운 정이든 정이 든다는 건 무서운 것이었다.
영원이 계모에게 애증을 품고 있듯이 누군가가 눈에 밟히고 거슬린다는 것은 지겨운 정의 시작이다.
무관심한 남이라면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잖아? 왜 이렇게 곤두서 있어?
그렇게 묻고 싶어서 가슴이 쿵쾅댔다.
주양이 멱살만 간단히 잡은 채, 무표정하게 눈을 맞대었다.
그가 그녀의 눈동자에 이는 기묘한 떨림을 읽었다. 내려다보는 표정이 무서웠다.
“말했을 텐데. 다 잊으라고.”그날 밤의 여운이 아직 영원의 눈동자에 남아 있었다.
무참한 살인, 난폭했던 키스. 그들을 휩쌌던 짐승 같았던 섹스.
영원이 힘겹게 입을 떼었다.
“너 같으면 그게 간단히 잊혀지겠어?”“잊지 않으면 넌 죽어.”두려웠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에 억지를 부렸다.
“……시, 싫어.”기억을 지워라. 눈에 띄지도 마라. 이젠 유난스런 네 비위까지 맞춰야 해?
“싫어!”영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수영장 천장과 기둥을 타고 공명했다.
그들의 볼일은 그날 밤 끝났다.
범오사야 그렇다 치고 제주도까지 와서 그들은 엮일 이유가 없다.
질질 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녀 자신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 무리한 명령이었다. 그녀는 고개 숙였다.
“안 잊혀진단 말이야…….”억울했다.
“그걸 어떻게 잊어. 너도 못 잊겠으니까 나한테 지금 짜증내는 거잖아.”신경쇠약에 걸린 환자처럼 매일 밤마다 격정은 그녀의 심장을 두들겨 댔다.
내장이 뒤집히는 숨막힘이었다.
그렇게 단단히 잊혀질 거였으면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해서 영원이 고개 들었다.
영원의 표정에 두려움이 돋아났다.
주양이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붉은 노기가 서려갔다.
그가 얼굴에 저토록 인간다운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것은 반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을 영원이 건드린 거다.
덜덜 떨며 애써 남자의 팔목을 쥐었다.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는 영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 맥주병이야. 여, 여기서 손 놓으면 너 이거 살인이야.”죽을 거야. 나를 죽일 거야…….
“날 죽이려는 의도로 받아들일 거야. 놔아……! 흐윽……. 그냥 내가 일어날 테니까 바닥에 놓으라고!”“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사는 거?”잠시간의 정적.
믿을 수 없게도 주양이 손을 놔버렸다.
“그럼 난 너 안 살려.”영원은 물거품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사라졌다. 풍덩?? !
그가 죽어가는 영원을 수면 위에서 감정 없이 응시했다.
팔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경직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극심한 공포로 홍채가 조여들었고,
어김없이 숨막힘은 찾아왔다.
*
“13살.”해수는 전신이 뻣뻣해져서 조선정을 돌아봤다.
평범한 이야기를 풀어놓듯, 조선정은 대수롭지 않게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정자를 채취했대. 냉동보관 했다가, 아들 죽고 나서 대리모 자궁에 인공 수정했다는 거야.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지. 실제로 그렇게 불임부부 중에 그렇게 태어나는 애들도 있고. 하지만 이건 케이스가 달라. 부모도 모르는 자식이라니. 인조인간도 아니고 너무 그로테스크하잖아.”조선정의 믿을 수 없는 말에 해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주마등처럼 주양의 지난 행동들이 스쳐지나갔다.
그에게는 가끔씩 남들에게 없는 위화감 느껴졌다.
보통 사람하고 다르게 많이 침착한 구석이 있었다.
아예 감정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태생적 환경이 이래서 중요한 거야. 스스로가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지겠어. 부모의 사랑이 아닌, 인위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이라니.” 조선정의 말을 들으니 진주양이란 남자가 이제 이해 갔다. 그의 결여된 본질을 이제야 납득할 것 같았다
그럴싸한 껍데기를 두르고 안은 텅 빈,
그는 ‘인조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