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 남자, 인간이 아니래……2016.10.30.
신입 기생은 자존심이 있지 쉽게 굽히지 않았다.
몇 번 매향에게 악악대다가 고참 기생들에게 머리채가 잡혀 끌려 나갔다.
구경꾼들이 물러가고 정원에서의 소란이 소강상태에 들었다.
매향이 마루에 영원을 앉혀놓고 뜨거운 수건을 할퀴어진 목덜미에 대줬다. 얼굴에 묻은 흙들을 닦아줬다.
영원이 손길을 피했다.
“내가 백운당 딸이라고 콩고물 얻어먹으려는 거라면 꿈 깨.”매향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뭐라고?”영원은 무릎을 모아 품에 끌어안았다.
“아, 아무도 날 안 좋아해. 동정 따윈 필요 없어.”세상을 거부하는 영원에 매향이 애틋한 얼굴을 해보였다.
매향의 손길이 야생동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닿아왔다. 뺨을 지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영원이 주춤했다. 이내, 어깨를 늘어트리고 얼굴을 맡겼다.
매향은 처음 이 백운당에 왔을 때부터 그랬다.
편견 없이 영원을 대했고 유일하게 그녀에게 말을 섞어주는 사람이다.
백운당의 퀸이 백운당의 추녀에게 내려주는 관심이라니.
그러나 둘은 외로움이란 동의어로 묶여 있었다.
세상에 혈육 하나 없는……
매향이 영원의 입술에 촉촉한 뭔가를 덧칠했다.
“웬 거야?”“외국 간 기념. 첫눈에 알아봤지. 네 입술에 어울릴 거라고. 가져. 선물이야.”매향이 영원에게 립스틱을 쥐여 주었다. 외제였다.
아까 그 못된 기생년 것보다 훨씬 값나가고 색감과 발림성도 훌륭했다.
그 늙은이에게 받은 돈으로 산 걸까? 그 늙은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좀 핼쑥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이를 낳아주고 왔다는 소문 같은 게 사실일 리가 없다.
매향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매향이 곰방대를 뻐끔 빨았다.
“내가 없던 새에 백운당이 아주 시끄러웠다던데?”“김 회장이 망했어. 백운당 젖줄이 말랐으니 최 사장이 다른 끈을 잡으려고 혈안이지.”“해수가 진주양의 간택을 받았다며? 그년, 내숭 떨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장담했었지? 꼬리 아홉 개는 숨긴 구미호라고. 유력한 후보는 역시 진…….”매향이 우스갯소리로 말을 잇다가 눈에 띄게 굳은 영원을 발견했다.
영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엊그제도 해수를 보고 가더라구.” “그 남자한테 마음 주지 마.”매향이 영원을 꿰뚫어보았다. 영원은 꼼짝도 안 했다.
“네가 산채로 씹어 먹힐까 봐 그래.”매향이 동생 같은 영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들키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매향의 예리함은 피할 수 없는 건가.
“씹어 먹혀?”“소문에 의하면 그 남자…… 인간이 아니래.”매향의 서늘한 어조 끝자락에 긴 여운이 남았다.
영원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런 남자와 동침을 했다. 아이를 가진 줄 알고 미래를 고민하기도 했다.
인간이 아니면? 그럼 괴물이냐?
농담에도 영원이 우울 모드를 풀지 않자 매향이 어깨동무했다.
“이따 밤에 드라이브 시켜줄까?”“집안일 끝내고 짐 싸려면 잠자는 시간도 빠듯해.”“짐?”매향이 의아하게 봤다. 영원이 한숨 쉬었다.
“내일 제주도에 가기로 했어.”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세 자매는 차를 올라탔다. 계모가 두 딸의 수발을 들라고 해수의 제주도 거문고 기행에 영원도 딸려 보냈다.
해수의 거문고 스승은 계모가 따로 리무진 서비스를 보낸 상태였다.
운전기사가 알아서 편안하게 공항으로 모실 거다. 극진하게.
제주에 도착해 렌터카를 받을 때까지는 평탄했다.
예약해둔 호텔로 향하는데 문제가 터졌다.
“예약이 전날 취소됐다고요?”“성수기라 금세 방이 찼어요. 숙박은 불가능하십니다.”해수는 당황해 했다. 스승이 곧 도착하면 호텔부터 찾을 거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옆에 있던 성원이 심드렁하게 외워 뱉은 듯한 대사를 흘렸다.
“어쩔 수 없네. 제주에서 힘 좀 쓰는 높으신 양반한테 도움 받는 수밖에. 제주에 한신호텔이 그렇게 유명하다네?”꿍꿍이가 낀 얼굴에 해수가 일그러졌다.
최혜란에게 은밀히 지령을 받고 온 성원이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부탁이나 해보자.”“어머니 짓이야?”성원은 혜란에게 언질 받았던 대로 뻔뻔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해수에게 넘겼다.
“뭐하는 거야! 전화를 걸면 어떡해!”그사이 양 비서에게 곧바로 연락이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 받는 신해수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영원이 그 모습을 어둡게 지켜봤다.
*
양 비서는 전화 통화를 끝내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를 빠져나오자, 15m짜리 인공암벽이 사방을 에워쌌다.
아파트 4층 높이의 아찔한 벽에 매달려 주양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홀드를 짚었다.
조금씩 고지를 향해 낮게 포복하듯 벽을 타고 올라갔다.
몸이 열기를 내뿜어댔다. 잔뜩 부푼 등 근육에 비지땀이 송골송곳 맺혔다.
주양이 암벽을 오르는 동안 아래서 양 비서가 PC화면을 넘기며 사업 진척을 보고했다.
“한국당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한 후보들은 총 8명으로 압축됐습니다. 7월에 있을 당 예비경선에서 1차로 몇 명 간추리고, 9월쯤에 단독후보를 정하겠다고 합니다.”12월대선이 코앞이었다.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재미있군요.”주양이 답했다.
“보통 당 예비경선으로 최후의 1인을 정하는데, 9월에 다시 후보를 가려낸다?” “현재 여당을 향한 국민의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그 불신을 잠재우기 위해 이번 대선 후보는 국민경선을 통해 정하겠다고 합니다.” “국민경선?”“투명성을 강조하려고 나름대로 자구책을 고한 거겠죠. 모바일 투표, 혹은 서울에서만 단적으로 인기투표를 치러서 후보를 가리겠다는 소리 같습니다. 광고 효과도 꽤 높을 것 같습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선진적인 정치를 보이겠다 이거죠.”한마디로 국민 눈길을 사로잡을 서커스였다.
주양이 홀더에 오른 발을 얹고 숨을 참았다. 힘주어 이동했다.
“우리 쪽 선수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이중모 후보, 선호도 80퍼센트 가량으로 여론조사에서 현재까지는 압도적입니다.” “다른 후보들과 견주어 그 경쟁력이 뭐라고 판단합니까.”“독립투사의 후손으로 검찰수장의 자리까지 오른 점, 보수의 껍데기만 두른 현 정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에게 진짜 보수 애국자로 시원한 사이다를 선사한 점, 김한식 전 총리의 후광을 입고 당내 입지도 탄탄합니다.”현재 여당인 한국당은 파벌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현직 대통령의 사람들과, 과거 선진적인 정치로 이름을 떨쳤던 김한식 전 총리의 사람들이었다.
김한식 전 총리는 은퇴 후 뒷방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의 실세였다.
주양은 김한식의 사람을 밀고 있었다.
“이 후보가 당 예비경선에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간단히 승리할 거라고 점쳐집니다.”“당내 경선 승리나 하자고 우리가 그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게 아닙니다. 최종 목표인 대선에서 고꾸라지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정치 인생이 고꾸라지는 이유는 대게 엇비슷하다.
비리, 여자, 혼외자, 말실수.
대선후보가 선행이 아닌 더러운 일로 남들 이목 끌어서 좋을 건 없다.
티끌 하나라도 상대편에게 내줘서는 안 되었다.
“안 그래도 이 후보가 ‘그 건’으로 고민이 많은 듯합니다. 어제 전화가 왔길래…….”“…….”“백운당 압수수색 시나리오를 넌지시 귀띔해줬더니, 흡족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김 회장을 감옥에 보낸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이중모는 김 회장에게 꽤 유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목숨 줄을 제3자가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 발 뻗고 잠을 자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숨이 한계까지 턱턱 막혔다. 오버행 구간이 나왔다. 경사도 90이 넘어서 허공에서 거의 눕듯이 매달려야 하는 구간이었다.
그는 로프를 고정시켜놓고, 잠시 쉬었다.
손 미끄럼 방지를 위해 초크 가루를 손에 잔뜩 묻히고 다시 홀더를 잡았다.
주양은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위로 향했다.
“……김 회장은?”“검찰 조사 이후, 교도소에 수감되고서 조용합니다. 패를 쥐고도 왜 행사를 안 하는 건지. 아예 처음부터 그런 ‘파일’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을까요?”그건 아닐 것이다.
김 회장하고 최혜란이 여우같은 족속들이어도 그럴 땐 찰떡궁합이었다.
분명 ‘파일’은 있다.
김 회장이 패를 쥐고도 옴짝달싹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린 거겠죠.”주양의 말에 양 비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가 제동을 걸었단 겁니까.”“동업의 단점이 뭔지 압니까? 인간은 배신을 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족속들이라는 거야. 교도소 밖에 있는 동업자가 혼자 독식할 수 있는 빅 찬스를 놓칠 리가 없죠.”문제가 생긴 거겠지. 최혜란이 김 회장을 배신했다든지.
끈 떨어진 연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양 비서가 말끝을 쳐올렸다.
“최혜란이 혼자 다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 주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선쯤 되어서 청와대에 딜을 시도하려고 할 겁니다.” 양 비서가 웃었다.
“늙은 여우가 큰 코 다칠 일을 벌이고 있군요.”“그 파일이 상대 진영에 넘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선수 쳐야 해요. 괜찮은 검사 하나 섭외해서 백운당 비리 좀 흘려줘요.” “검사를 움직이지만, 자신이 조종당하는 줄 모르게끔 말이죠?”“우리는 최대한 이건에 관여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해요. 검사는 성과에 급급해서 자발적으로 백운당을 뒤져줄 겁니다. 압수수색 들어가면 소문만 무성하던 그 비밀금고도 털리겠죠. 여럿 목숨줄 쥐고 흔들 비밀금고가 백운당에 숨겨져 있다면서요?” 그렇게 말하다가 주양은 생각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이 단단히 의식을 움켜잡았다.
뻣뻣해졌다. 암벽에서 떨어졌다.
비서가 놀라 달려왔다.
“이사님!”미리 걸어둔 로프가 팽팽하게 당겼다.
주양은 허공에 붕 떠 있었다.
비서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보였다.
주양은 줄을 타고 암벽에서 내려왔다.
“압수수색 때, 우리가 그 파일을 몰래 빼올 방도나 생각해놓으세요.” 건네주는 수건으로 목덜미 땀을 닦으며 주양이 빠르게 지시했다.
“회장님은 보다 먼저 공항으로 출발합니다.”
*
“비서라 해서 별거 없을 줄 알았더니, 한신 비서는 다르네! 스위트 층으로 잡아주고.”방에 들어오자마자 성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베란다로 달려가자 시리도록 푸른 바다 전경이 드넓게 펼쳐졌다.
6층 아래에 푸른 수영장이 내다보였다.
하얀 파라솔이 씌워진 선 베드가 유럽의 어느 휴양지처럼 늘어져 있었다.
밤에 야외 카페로 멋질 것 같았다.
들뜬 성원과 달리 해수는 짐을 풀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성수기라 방이 없다잖아. 괜히 비서님한테 부담 짊어드린 게 아닌가 싶어.”제주 한신호텔에서 3개밖에 없다는 오션 스위트룸을 두 개나 잡아줬다.
욕실 2개에 침실만 3개였다.
객실 2개 중 하나는 세 자매가 쓰고, 다른 하나는 조선정 선생에게 배정되었다.
사서 걱정하는 해수를 보고 성원이 혀를 끌끌 찼다.
“다 뒤에서 진주양이 조종하는 거야. 비서가 무슨 힘이 있어. 그리고 신영원, 넌 첫날인데 벌써 늘어지면 어떡해? 차 트렁크에 짐 더 있으니까 가져다 놔.”신성원이 차 키를 영원의 발치께에 던졌다.
온갖 심부름으로 영원은 파김치가 되었다. 악기들이었다.
“딜리버리 서비스 부탁하자.” 신해수가 내선전화를 들자 성원이 확 빼앗았다.
“벨 보이 돈 들어. 쟤 하는 일도 없는데 놀릴 거야? 밥값은 해야지. 자자, 네 그 성질머리 더러운 선생 기다려. 호텔 바뀐 것 때문에 날 섰잖아. 빨리 가자. 신영원 넌 와서 옷 정리도 끝내놔라?”허튼 생각할 새 없이 성원에게 정신없이 등 떠밀려 해수가 사라졌다.
그들이 뷔페를 먹으러 3층으로 내려가고, 영원은 주차장으로 나왔다.
마지막 거문고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깨에 짊어 멘 악기가 무거웠다.
확 이거 들고 튀어버릴까? 이를 가는 그때였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이용 안 하시고요.”닫히려던 문이 확, 재차 벌어졌다.
낯익은 목소리가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들어왔다.
“회장님 슬로건이 뭔지 압니까? 절대 복종입니다. 가뜩이나 임원들, 배에 비계 껴 다니는 꼴 싫어 물갈이 벼르고 계시는데.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전용, 전용 그러면, 주인 행세하려 든다고 안 좋게 보입니다.”사람 키 높이만 한 거문고에 영원은 수월히 가려졌다.
양 비서를 대동하고 주양이 바로 코앞에 섰다.
의도치 않게 영원은 거문고 뒤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조용해졌다.
그때 딸꾹질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양 비서가 뒤돌았다.
영원을 발견하고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원은 거문고 뒤에 숨으며 몸을 움츠렸다.
주양은 무표정하게 돌아보지 않았다.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 감도는 긴장감과 적막감.
영원은 계속 딸꾹질이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으레 궁금해서 뒤를 돌아볼 법도 한데.
주양은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띵! 어느새 층수에 다다랐다. 3층에서 그들이 내렸다.
영원은 어느새 엘리베이터에 혼자 남았다.
주양은 묵묵히 걸었다.
양 비서가 눈치를 살피다가 해수 일행 이야기를 했다.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습니다.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고. 시답잖은 일이라 판단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주양은 차갑게 잘라냈다.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양 비서는 무안해졌다.
오늘 진 회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3층 호텔 다이닝 라운지.
주양이 멈추었다. 그의 시선 끝에 신해수가 닿았다.
뷔페를 먹고 가는 길인 듯 신해수와 신성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포만감이 가득했다.
주양의 시선은 그러나 다른 곳에 머물렀다.
신해수 일행 외에 중년 여성이 뒤따랐다.
여자는 쪽진 머리를 틀어 올리고 여름 개량한복을 입고 우아하게 걸었다.
60대 초반의 여자는 몹시 깐깐해 보이는 낯바닥을 하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거문고 명장 조선정 선생……, 아.”양 비서는 당황해 말을 도중에 멈췄다. 주양이 칼 같은 어조로 양 비서의 말을 되짚었다.
“설마, SNS에 대고 한신그룹 명성에 똥칠한 조선정 선생은 아니겠죠.”양 비서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밤에 있을 자선의 밤 행사는 무척 중요했다.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자선 행사에 재능기부라는 명목으로 많은 유명인들이 초대되었다.
초청 명단에서 저 여자는 필히 빼라던 주양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신호텔 홍보실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해놓았는데.
설마 신해수 일행에 섞여 있을 줄이야.
신해수가 조선정 선생의 제자였던가?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한 양 비서는 당혹스러웠다.
오다 가다 진 회장이 조선정 선생을 보기라도 하면…….
정작 주양은 조용했다.
그는 불벼락 같은 호통을 치는 상사가 아니었다.
두껍게 쌓이는 침묵에 양 비서는 더욱 낭패스러웠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주양은 느긋하게 목을 풀며 물었다.
“조선정 선생 방이 몇 호실이죠?”“2006호입니다. 왜 그러십니까.”“만약 내가, 오늘 자선의 밤에 조 선생을 초청한다면, 회장님 뚜껑이 열릴까요. 안 열릴까요?”비서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여겼다.
상사가 농담하는 줄 알았지만 그는 무척 진지했다.
물은 엎질러졌고, 주워 담을 수 없다면, 태연하게 바닥을 닦아 실수처럼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주양은 나지막이 지시했다.
“초대된 기자명단 간추려서 보고 올리세요.”
*
자선의 밤이 열리는 가든파티 장소였다.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기부행사답게 입구에 커다란 모금함이 배치되어 있었다.
TV에서나 보는 거부들이 흰 봉투를 찔러 넣고 파티에 참석했다.
해수가 주변을 둘러봤을 때, 이미 도착한 조선정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두텁게 턱이 접힌 한신호텔 사장과 주양도 보였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그들 앞에 진을 쳤다.
한신호텔과 불화가 있은 지 얼마 안 됐는데 한신호텔에서 주최하는 자선의 밤에 참석했다.
기삿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조선정은 기자들에게 둘러 싸여 담담히 인터뷰했다.
“음, 뭐랄까. 돈과 명성을 떠나 저는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호텔에 한식당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이 솔선수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무늬만 사회지도층의 허울을 쓴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거침없는 비판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몇 시간 전에 그 이미지가 180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는 첫인상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양 씨는 굉장히 스페셜한 사람입니다.”조선정이 한신호텔 책임자, 그리고 주양과 산뜻하게 눈을 마주쳤다.
“제가 제주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굳이 초대를 해주셨지 뭐예요. 정중하게 제 방까지 찾아와 자선의 밤에 재능기부를 해달라고 허리를 굽혀 오는데, 다른 재벌들과 다르게 소탈하고 진솔한 모습에 반했습니다. 재벌이란 편견을 깬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제가 재능기부를 할 수 있게 초대해주신 진 이사님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조선정을 가운데 두고 주양과 한신호텔 책임자가 양쪽을 차지했다.
완벽한 화해 구도는 내일 아침 멋지게 포털에 도배가 될 터였다.
기사 마지막 줄 하단엔 한신호텔과 조선정의 화해를 주양이 주도했다고 빼먹지 않고 쓰일 것이다.
더불어, 매년 오너 일가가 개인적으로 주최하는 백혈병 어린이들을 위한 기부선행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광고효과도 노릴 수 있다.
해수는 멋지게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주양을 멀리서 응시했다.
나쁘게 말하면 무서운 기회주의자지만, 그게 또 굉장한 매력 포인트인 남자다.
저런 남자는 어떤 연애를 할까.
그를 여왕처럼 발아래 두고 굴리는 것을 상상해봤다.
그 어떤 우월감보다 짜릿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해수는 주양에게 다가갔다.
“얼마 안 되지만 저도 기부했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사님.”해수는 화기애애한 가든을 둘러보았다.
한신에서 이런 자선행사까지 할 줄은 몰랐다.
대뜸 주양이 유머 섞인 말을 던졌다.
“이번엔 두 사람 다 감기입니까?”그가 잘 손질이 된 미소를 지었다.
잡지 모델 같은 모습에 잠시 뇌 회로가 갈피를 잃었다. 해수는 금세 정신을 되찾았다.
지난번 무도회에서의 감기는 최혜란의 거짓말이었다. 영원이 괜히 무도회에서 누를 끼칠까 봐.
오늘은 해수가 거짓말을 했다.
성원과 영원에겐 그들이 초대되었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해수가 주양에게 웃으며 센스 있게 유머로 받아쳤다.
“그럴 수도 있구요.”성원에게 자선의 밤에 간다는 건 말했지만 으레 해수만 가는 줄 알고 신경 껐다.
최혜란이 해수에게만 무한정 애정을 퍼부을 때도 영원과 성원, 두 사람에게는 공평하게 몫을 나누려고 노력했다.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해수는 이런 곳까지 와서 자매들 뒤치다꺼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고상한 사람들 틈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이 통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얼마만인가.
“이사님은 보기보다 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어떤 부분에서?”“초대장이요. 매번 제 가족까지 신경 써 주시고.”“……그게 이상한 건가요?”“보통은, 영원이까지는 신경 쓰지 않거든요.”해수는 결국 항복했다.
부정하진 않겠다. 해수가 그에게 정말 묻고 말이 이것이었다.
절대 같은 선상에 설 수 없는 주양과 영원이 자꾸 연결되는 것만 같은 의구심을 해갈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이 많다고 말씀 드린 거예요. 영원에 대한 소문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순간 주양의 눈빛이 날카롭게 그녀를 짓눌렀다.
“그 말은, 신영원 씨가 남들에게 등한시 당해왔으니, 내게도 차별받는 게 당연하다는 뜻입니까?”그는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었다.
해수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은근히 영원을 무시해오던 그녀의 위선을 건드렸다.
해수는 발 빠르게 굳은 표정을 수습하고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애는 격식 따지는 공식적인 자리에 익숙하지도 않고…….”“연장 감기에 걸려 못 왔으니 별로 상관없지 않습니까.” 주양은 그렇게 대화를 끊었다. 그가 무심하게 와인을 들이켰다.
흥미를 잃은 눈빛을 보다 해수는 초조했다.
내내 신경 쓰이던 것을 이 기회에 묻기로 했다.
“영원이가 이사님과 호텔에서 식사를 했다고 하던데. ……김보경 씨 일은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목숨을 빚졌는데 이제와 차사하게 공치사 받고 싶진 않군요.”“목숨이요?”해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구두 주인이었어요.”솔직한 답변에 해수는 놀라지 않았다. 구두를 없애버린 것이 그녀였으니까.
베갯머리송사 이야기가 내내 뇌 언저리에서 거슬렸다.
구두의 주인.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알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는지.
“그 이후에 만난 적 있으세요?”하지만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주양이 해수를 똑바로 직시했다. 요철같이 맞물리는 섬뜩한 표정이었다.
조금의 생동감도 없는 동공은 그녀 안에 불쑥 침입해, 서늘하게 심장을 훑고 가는 저승사자의 손길 같았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파고드는.
1초가 1시간같이 흘렀다.
조선정이 “얘. 해수야!” 하고 불러 흐름을 끊지 않았다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해수는 강렬하게 수축된 긴장감으로 다리가 풀렸다.
주양을 지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조선정에게 갔다.
“날 좀 부축해다오.”조선정이 손등을 내밀며 해수에게 몸을 기대었다.
해수는 다시금 주양을 찾았지만 자리에 없었다. 정원 어디에서도.
껄끄러웠던 것이 풀리지 않은 채로 놓쳐버렸다.
조선정이 휘청거리며 술 냄새를 풍겼다.
“오늘은 취해야겠어. 나 말리지 마라. 웃기지도 않아. 증말.”조선정의 눈빛이 방금 전 카메라 앞에서와는 다르게 스산했다.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자선행사에 야지를 놓고 싶어 못 참겠다는 표정이다.
조선정이 한신에 유감이 많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같은 스승 아래서 동문수학했던 거문고 인간문화재 장인이 조선정의 친구였다.
진 회장의 첫째 부인.
조선정은 친구가 진 회장만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조선정이 꼬부라지는 혀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금쪽같던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을 줄은 몰랐을 거야.”“……백혈병이라뇨?”“그 독재자도, 어린애들만 보면 죽은 자기 아들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는구나.”해수는 탄식을 삼켰다.
그래서 진 회장이 매년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모금을 하는구나. 아들을 위해.
하지만 스승이 취해서 뭔가 착각한 것 같았다.
“첫째 아들이면, 진 이사님의 아버지인데……, 아니에요.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아요.” 아이라니. 유학생 시절에 병을 얻었다고 들었다.
창창했던 스물 초반에. 그 말에 조선정이 비릿하게 썩은 웃음을 풍겼다.
“그건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고. 실제론 훨씬 어렸지.”고등학생 때 사고라도 쳤나, 해수의 머릿속에 짓궂은 상상이 덧칠되어 억누르느라 혼났다.
“대체 진 이사님 아버지가 몇 살 때 돌아가셨는데요?”조선정이 냉소적으로 술을 마셨다.
나이를 전해 듣고 해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13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