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33화 (33/83)

33화. 그 남자가 봐주는 법 <2>2016.10.27.

주양이 구두를 막 신은 그때였다.

기와집 모퉁이를 돈 최혜란이 뒤늦게 별채에 도착했다.

가려는 그를 발견했고 서둘러 달려왔다.

“어째 벌써 일어나세요.”안 놓아주는 손님들을 뿌리치고 왔는데. 혜란은 전전긍긍했다.

해수는 풍성한 한복치마를 갈무리하며 옆을 지켰다.

구두주걱을 걸어놓은 주양이 삭막한 낯바닥으로 별채 후원을 감상했다.

전통한옥과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소나무들이 굽이굽이 뻗어났고 물레방아가 덜커덩, 물줄기를 따라냈다.

점심부터 손님들이 몰려와 정신없이 바빴는데 어째서인지 별채만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동떨어진 다른 세계처럼.

“여름이군요.”주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혜란이 조용히 맞장구쳤다.

“네. 벌써 여름이네요.”매미가 울어댔다. 파란 나뭇잎사귀들은 그물망을 이루어 햇살을 부드럽게 잘랐다.

수풀이 우거진 정원을 감상하던 주양이 대뜸 말했다.

“가게 손질을 보셔야겠습니다.”생뚱맞은 지적에 최혜란이 조금 장난스럽게 미소를 내보냈다.

“저번 주에 정원사를 불러 다듬었는데. 금세 수풀이 무성해지네요.”“좋은 곳입니다. 중요한 시기고.”혜란이 ‘중요한 시기’라는 경고성 멘트에 주양을 봤다.

“그게 무슨…….”“김 회장하고 멀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 가게, 계속 손질하고 싶으면.”주양의 눈길이 곧장 직진해왔다.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흉포함을 감춘 채였다.

꺾일 줄 모르는 그의 성미대로 구태여 겸손 떨려 하지 않는 솔직한 모습이었다.

적당히 자기 힘을 과시할 줄 아는 남자다.

예상치 못한 경고를 맞닥뜨리고 최혜란은 머릿속에서 오작동이 일었다.

주양은 최혜란이 충분히 되새김질 할 수 있게 느긋하게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주었다.

이번엔 삭막한 비즈니스 말고 개인적인 취향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 화단엔 데이지를 심는 게 좋겠습니다. 김 회장님이 데이지를 좋아하셨죠. 데이지 꽃말이 ‘희망’이라던가. 출소하시고 재기를 염원하는 바람으로.” 주양이 짧게 말을 던지고 발을 내디뎠다.

최혜란은 정원 구석에 듬성듬성 어설프게 꽃이 심긴 화단을 보다가 해수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차가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았다.

해수가 참지 못하고 최혜란에게 물었다.

“옆에서 제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아세요? 사람은 불러다 놓고 그냥 가게 만들었잖아요.”주양은 꽤 오래 기다렸다.

바쁜 사람을 불러다놓고 최혜란은 다른 방에서 다른 손님들 시중을 들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기업이란 갈대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순응해서 실리를 따져야 했다.

어디 한 곳을 지지한다고 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한신그룹이 현재 한국당 이중모 후보를 민다는 건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였다.

한국당에는 파벌이 두 개로 나뉘었다.

대통령 사람들과 김한식 전 총리의 사람들.

비서실장은 대통령 쪽이고 주양은 김 전 총리의 사람을 밀었다.

그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

그걸 알면서 보란 듯이 최혜란은 주양을 제쳐두고 비서실장의 시중을 들었다.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빈정이 상하기 마련이었다.

오늘 최혜란의 행동은 마치 불벼락 맞길 바란 사람이었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세요. 사장님, 어머니!”최혜란은 주양이 사라진 길을 예리하게 쳐다봤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은 들쑤셔서 화내게 하는 수밖에.”해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부러 화를 돋운 거라고요? 대체 왜요? 그리고 김 회장님 말은 또 뭐죠?”“말 그대로 까불지 말란 경고겠지. 그 짝 나고 싶지 않다면.” 최혜란은 조바심이 들끓었다.

저 시린 낯짝은 좀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 내주었다.

주양은 무엇이든 건성이었다.

곁을 내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치고 빠진다.

혜란이 나름 자신하는 관심법도 저 남자한테선 무용지물이 되니 원.

대산 김 회장이 잘려나간 이런 때일수록 줄을 잘 잡아야 한다.

혜란은 어느 줄에 서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비서실장은 80퍼센트 넘어왔지만 문제는, 저 진주양이다.

도통 속내가 읽히지 않았다.

괜히 진주양 쪽에 헛물켜다가 비서실장을 놓치면 입지가 좁아졌다.

최혜란을 지켜보던 해수는 피곤한 기색을 지우고 내일 일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혜란에게서 확실하게 다짐받았다.

“이번 주 내내 저 스케줄 빼요. 스승님하고 제주도 기행 있어요. 딴소리 마세요.”“잠깐. 며칠부터 며칠까지라고 했지?”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최혜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날짜를 말하자, 최혜란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표정에 일순 전구가 반짝 켜진 건 착각일까. 혜란이 손끝을 까딱였다.

“그래. 알았다.”수락하는 목소리가 호쾌했다.

그녀의 긍정이 불안했다.

뒤에서 어떤 수상한 일을 꾸밀지 모르지만 해수는 놔두기로 했다.

최혜란이 해수의 발길을 붙잡았다.

“참, 오 마담이 왔다 갔는데, 범오사 쪽에서 은밀히 네 사주를 부탁했다더라.”“제 사주를요?”“아마 어느 집에서 너랑 자기 아들 궁합 좀 봐달라 했나 보지.”오 마담은 유명한 마담뚜였다.

범오사 성철스님 역시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법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내로라하는 국회의원이고, 연예인이고 한 달 넘게 줄서야 만날 수 있는 대단한 분이라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제 정보 주다가 곤란한 일에 엮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한신 진 회장의 첫째 아들, 그러니까 진 이사 아버지 말이다. 요절한 뒤로 쭉 범오사 성철스님에게 재를 맡기고 있다.”해수는 새로운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 집이 불교신자인 걸 알았지만 범오사와 인연이 닿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며칠 전에도 진 회장 일가가 다녀갔대. 성철스님 눈에 들면, 한신 진 회장한테 네 이야기가 귀띔이 될 수도 있잖니. 며느릿감으로. 그 양반 말이라면 진 회장이 그래도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해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최혜란이 딱딱하게 굳은 해수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너 안색이 왜 그러니?”범오사는 해수에게도 낯설지 않은 사찰이었다.

최혜란은 해수가 스승의 반찬을 나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운 딸이었다.

가뜩이나 거문고 배우는 것도 못 마땅히 여기는데, 스승 반찬 시중까지 알면 거문고를 두 쪽으로 쪼개버릴 거다.

매번 영원에게 부탁한 것엔 혜란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포함됐다.

그러나 해수의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킨 원인은 그게 아니었다.

“며칠 전이라면 정확히 날짜가…….”“글쎄. 자세한 날짜까지는 모르지만 저번 주였겠지.”저번 주. 영원이 자신을 대신해서 범오사에 다녀갔던 주다.

혹시 그날 영원과 주양이 서로 마주친 건 아니겠지.

해수는 완전히 방전된 걸음으로 최혜란을 지나쳤다.

간다는 소리도 없이 멀어지는 딸을 보다 최혜란이 직원들에게 화단을 가꾸라고 지시했다.

해수는 정체 없이 걸었다.

어느새 백운당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몇몇 직원들이 이미 치마를 걷어붙이고 호미로 화단의 돌을 걸러내고 있었다.

최혜란은 추진력이 좋았다.

직원이 모여 투덜거렸다.

“제길. 이 땅은 후원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버려둔 땅 아니었어? 최 사장은 갑자기 왜 화단은 가꾸라는 거야.”“왕자님이 뒤뜰이 허전하시다잖아.”“진 이사가? 꽃에 취미를 둔 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이젠 하다하다 버려진 화단까지 참견이야?”“난들 아냐.”   해수는 화단에 관심을 두던 주양을 떠올렸다.

도대체 왜. 정말 김 회장 때문일까?

비스듬히 발길을 돌렸다.

미처 다가오던 사람을 감지하지 못하고 불시에 맞닥뜨렸다.

해수가 주춤 뒷걸음질 했다.

어둠을 뒤집어쓴 눈앞의 ‘존재’가 쏘아붙였다.

“너까지 그런 얼굴 하지 마. 귀신이라도 본 표정. 기분 나쁘니까.”백운당의 새카만 귀신.

영원이었다.

*

영원이 입으면 세련된 개량한복도 촌스러운 구한말풍이 되었고, 얼굴을 덮어버린 두터운 머리카락은 답답함과 불길함을 더했다.

영원이 주변을 기웃거리다 물었다.

“그 사람은…… 갔어?”해수가 의아하게 눈썹을 휘어 올렸다.

“네가 그게 왜 궁금해?”“난 그 사람한테 관심 가지면 안 돼?”“아파트 옥상에서 사람이 추락해도 콧방귀 끼고 관심 끄는 게 너잖아. 남한테 관심 갖는 게 이상해서.”해수는 유심히 영원을 살폈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차서 심드렁한 표정이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관심 가져서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게 영원이라면 역시 이상하다.

무엇이 의심스러워서……?

스스로에게 자문해봤지만 딱 답이 딱 안 떨어졌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남자의 고상한 취향에 부합하기에 영원은 몹시 남루하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혜란의 세뇌에 영원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남자를 홀리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딱히 경쟁심을 느낀 적은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 얹어진 돌덩이처럼 신경 쓰이곤 했다.

주양이 영원의 얼굴을 봤을까?

설마 그날 둘이 마주친 건 아니겠지? 그런 우연이 쉽진 않잖아. 아닐 거야.

해수가 긴 침묵 끝에 입을 뗐다.

“좋아하니?”생각지 못하게 영원이 당돌하게 눈싸움을 밀어붙였다.

“그렇다면?”해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영원이 직접적으로 맞받아칠 줄 몰랐다. 해수가 영원을 타일렀다.

“겉모습만 보고 혹 했나 본데, 보기와는 많이 다른 남자야.”“새삼스레 뭘.”“스캔들 한 번 없던 거 보면 모르니? 그런 사람은 둘 중 하나야. 치밀하거나, 입맛이 까다롭거나. 언니로서 충고하는데, 그 사람은 가망 없어.”“맞아.”“뭐?”“가망 없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날 좋아하겠어, 우리가 사귀기를 하겠어?”빤히 해수를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유리알같이 깨끗했다.

그대로 해수를 흡수해 담아냈다.

영원은 어수룩해 보여도 예리한 눈치를 갖고 있었다.

다년간 최혜란의 학대 속에서 꽃피운 능력이었다.

해수는 비겁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몸을 사렸다.

“뭘 정색이야.”“…….”“널 사귀겠지.”영원이 시니컬하게 응수했다.

해수는 침묵했다.

영원이 딱히 부정하지 않는 해수를 보고 칫, 빈정 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짜증나. 본전도 못 찾았네.”그 말에 해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영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해졌다.

“네가 짜증나게 진지 빨길래, 말해본 것뿐이야. 난 단순무식해서 그런 타입 별로야. 따지고 재는 남자들. 복잡해서 싫어. 오히려 난 그 남자가 널 마음에 둔 거 같던데?” 해수는 얼굴이 자연히 붉어졌다.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얼굴 비추잖아. 그 인간이 너 아니면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겠어?”그를 좋아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 건 단순 심술이었나.

영원은 세상만사 귀찮은 얼굴로 귀를 쑤시고 갔다.

해수는 영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백운당 여종업원들 모두가 그를 왕자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판타지를 공유했다.

그를 향한 호감엔 그의 재력과 부수적인 것들이 따랐다.

해수도 그런 일환으로 그를 마음에 둔 것이었다.

그를 사랑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이런 게 사랑일 리 없다.

적어도 주양이 먼저 해수 자신에게 무릎을 꿇기 전까지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는 남자지. 그 남자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거야.’해수는 이 상황의 의미를 합리화했다.

영원이 걱정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아주 위험한 남자였다. 영원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자신도 그를 앞에 두면 긴장해서 발가락 끝이 저려오는데, 영원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버림당할 거다.

*

백운당은 오늘도 성황이었다.

오후가 되고, 저녁 장사 준비로 가게는 오늘도 숨 가빴다.

영원은 동료들과 어제 아침 드라이 맡긴 한복을 기생들에게 배달했다.

동료1과 애들은 옷걸이를 밀고 기생들 방으로 갔다. 기와 한 채에 따로 마련된 분장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장신구를 꾸미고 머리를 만지기 바빴다.

국악팀이 다른 한쪽에서는 목청을 틔우려고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악기를 닦기도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복을 두고 가려는데 기생 두 년이 그들을 불렀다.

“야, 너희들 이리 와봐.”기생들에게 찍히면 가게 생활하기 불편했다. 동료들은 찍소리도 못 하고 따랐다.

“언니. 애들 데려 왔어요.” 다섯 평짜리 안채에 난다 긴다 하는 기생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치마폭을 넓게 퍼트리고 허리가 짧은 저고리를 걸친 기생들은 한 떨기 꽃 같았다.

동료들이 쭈뼛쭈뼛 그들 앞에 섰다. 기생들이 둘러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애들은 바짝 졸아 두리번거렸다.

영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창호문에 기대어 정원을 내다봤다.

이번에 계모가 비싼 돈 주고 영입했다는 신입이 말문을 뗐다.

“얘들이야? 어우 촌티. 빈티. 싼티.”모두들 그 신입 기생에게 설설 기는 분위기였다. 신입 주제에 웬만한 고참 대우를 받고 있었다.

회원제 고급 술집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여자였다. 저 여자가 관리하는 고객들도 꽤 된다지.

그녀가 백운당으로 옮겨오면서 그 고객들도 끌어왔을 테니 계모가 굉장한 대우를 해줄 게 불 보듯 뻔하다.

사장까지 뒤를 봐주는데 어느 직원이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까.

신입 기생이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 내가 아주 중요한 손님을 모시기로 했거든? 너희들이 한 벌씩 입고 워킹 좀 해줬으면 좋겠어. 패션쇼처럼 말이야.”2주 전에 한복 가게에서 사람이 왔다.

새로 맞춘 한복이 온 날이었다.

오늘 장사에 어떤 한복을 입을지 고르려는 거다.

“아이 씨. 옷걸이를 해도 좀 반반한 애를 데려왔어야지.”“패션의 완성은 얼굴인데 영, 태가 안 나네.”기생들이 한복을 입은 동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가뜩이나 따까리 취급에 불만이 많았는데 동료들이 욱했지만 “참아, 참아. 여기서 잘리고 싶어?” 하고 서로를 다독였다.

영원은 은둔자답게 무신경하게 멍하니 서 있었다.

하든지 말든지 동떨어져서 목을 벅벅 긁고 있데 신입 기생과 때마침 눈이 마주쳤다.

“야! 너 와봐.”그러자 동료들이 절절매며 만류했다.

“아이, 쟤는 안 돼요. 쟤는 활화산이야. 건드리면 물 불 안 가려서 피곤해져요. 그냥 저희로 하세요.”“쟤가 최 사장 딸이지? 이리 와봐. 얘.” 영원이 뭘 봐? 하는 식으로 눈썹을 휘어 올렸다. 신입 기생이 목청을 열고 깔깔거렸다.

“재밌네. 내 말 잘 들으면 장신구 하나 줄게.”“필요 없어.”영원이 단칼에 잘랐다. 모자라 보여도 백운당 사장 딸이었다. 신입 기생이 영원의 성격을 받아주었다.

“장신구 말고 그럼 뭐가 좋은데?”영원이 망설이다가 그녀의 입술을 흘낏거렸다.

“너 입에 바른 거, 그거 어디 거야?”“립스틱? 프랑스 제품이야. 국내에 안 팔아.”신입 기생이 긴 손가락으로 화장대에 있는 립스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원에게 흔들었다.

“내가 원하는 거 들어주면 줄게.”영원이 손을 뻗으려 하면 확 다시 가져졌다.

“내 말 잘 들으면.”누구의 말도 잘 듣는 건 싫었지만, 립스틱이 탐났다. 내내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해 립글로스로 만족하던 차였다. 하지만 역시 귀찮다.

“싫어.”영원은 거절했다.

“립스틱 갖기 싫어?”“갖고 싶어.”“근데 왜?”“그냥 그럴 기분이 아니야.”줄 듯 말 듯 밀당하는 영원에 신입 기생이 기분을 잡쳤는지 입술을 짓씹었다. 악랄함이 스쳤다.

“너 내놓은 자식이라며?”영원이 눈을 치켜떴다. 본 성깔을 드러낸 신입 기생이 비웃었다.

“최 사장한테 딸 대접도 못 받고 빌빌 댄다는 거 파다해.”“입 닥쳐.”“얼마나 글러먹게 생겼음 얼굴을 가려.”“낯바닥에 손톱자국 새겨줄까?”“구경 좀 하려 했는데, 비싸게 굴긴. 상판에 금칠이라도 했냐!”“죽여버릴 거야!”분노가 임계치를 넘은 영원이 달려들었다.

신입 기생의 머리채를 쥐기 무섭게 말리려는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기생들과 바깥에서 지켜보던 국악팀, 동료들까지 합세해 서로 불이 붙어 다들 아귀다툼으로 번졌다.

“야이! 기생년들! 유세 떠는 거 눈꼴 시렸는데 잘됐다! 퉤! 퉤!”그간 기생들에게 싸였던 분노를 동료들이 터트렸다. 기생들도 지지 않았다.

“꺄아아악!”창호 문이 부서지고 영원이 신입 기생과 함께 풀밭을 굴렀다.

신입 기생 위에 올라타 영원이 미친 듯이 싸대기를 날렸다. 하지만 곧 전세가 역전되었다.

드센 힘에 아래에 깔렸다. 영원은 머리를 보호했다. 무력하게 얻어맞기만 했다. 신입 기생이 머리에서 뒤꽂이를 뺐다. 비열하게 날카로운 날붙이를 영원을 향해 높이 치켜든 그때였다.

“뭐야!” 신입 기생이 자기 손을 낚아챈 누군가를 돌아봤다. 신입 기생의 얼굴이 곧 사색이 되었다.

하나둘, 싸움을 멈췄다. 순식간에 상황이 진압되고 모두들 눈치를 살폈다.

카리스마를 겸비한 고참 기생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봉에 선 여자.

“너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구니.”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로 신입 기생의 턱을 쳐들었다.

백운당에서 핀 꽃 중에서 가장 향기 짙은 매화꽃…….

정교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붉은 입술.

서늘하게 훑어 내리는 눈매.

고요하게 경고하는 음성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여긴 내 구역이야. 멋대로 설치고 다니지 마.”백운당의 화중왕, 매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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