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32화 (32/83)

32화. 그 남자가 봐주는 법 <1>2016.10.23.

풀들이 붙잡아오는 손가락처럼 영원의 하얀 종아리를 스쳤다.

바람이 불어와 들판을 쓸고 갔다. 향긋한 풀냄새는 노래하듯 짙어졌다.

백운당은 산새에 둘러싸인 요새였다. 그 아래에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 있었다.

영원은 항상 지름길을 통해 이곳으로 놀러왔다.

활엽수가 빽빽하게 그늘을 드리운 숲을 벗어나면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무성하게 자란 풀들은 허리춤까지 뒤덮었다. 멀쩡한 길이 있었지만 영원은 들판 속을 헤쳤다.

푸른 물결을 보면 몸을 던지고 싶은 기이한 충동에 시달렸다.

영원은 들판을 빠져나와 쉬지 않고 양재슈퍼까지 달렸다.

“하아…… 하아…….”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내뿜었다. 슈퍼라곤 늙은 노인네가 운영하는 여기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집어 계산했다.

“쭈쭈바는 하나에 천 원이여.”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영원이 주인을 노려봤다.

“어이 할멈. 저번엔 팔백 원이었잖아.”“이년이 어따 눈깔을 치떠?”“눈을 떠야 할 건 할멈이고. 앞이 어두워? 계산은 똑바로 하라구.” “더러운 계집애. 그려. 팔백 원이여.”천원을 내어 이백 원을 거슬러 받았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이 노인은 가끔 바가지를 씌웠다.

어쩔 땐 오백 원에 받을 때도 있는데 물론 그땐 영원은 아무 말 없이 값을 치렀다.

어쨌든 영악한 노인네였다.

초여름. 찌는 더위에 슈퍼 평상 위에 뻗고 말았다.

“언니, 베트남이 뭐야?”양재슈퍼 손녀, 양혜가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다. 평상에 누운 영원은 파란 하늘을 응시하며 쭈쭈바를 빨았다.

“나라 이름이야.”“나라?”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묻는다.

“언니 집보다 멀어?”“북한보다도 멀지.”양혜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얘는 북한이 어딘지 알긴 할까?

양혜는 마을에서 흔한 말로 ‘꽃 꽂은 미친년.’ ‘모지리.’ 등으로 불렸다.

그리고 영원은 백운당의 ‘얼굴 없는 귀신’이었다.

미친년과 귀신의 조합이라니. 썩 훈훈하진 않다.

양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실은 우리 오빠 장가갈 거래.”은밀한 속삭임에 코웃음이 쳐졌다.

“신부 만나러 베트남 갔다더니 기어이 국수 마네?”“국수?”“이제 너한테도 널 구박할 올케가 생긴다는 소리야.”양혜의 오빠는 노인만 가득한 이 마을에서 가장 프레쉬한 총각이었다. 그래봐야 45살 노총각일 뿐이지만.

매향을 짝사랑해 끊임없이 소심한 추파를 던졌지만 무참하게 깨졌다.

가난한 남자는 백운당에 입성하지 못한다.

돈이 많다고 드나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백운당은 그런 곳이다.

돈이 있다고 방석 깔고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더 특별한 곳.

특권층만을 위한 쉼터.

매향은 그 아방궁의 화중왕, 꽃 중의 왕이었다.

그나저나 베트남 여자는 몇 살일까. 나이 어린 꽃다운 신부겠지.

“파렴치한 놈.”인간은 어째서 결혼을 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그녀가 주양을 흠모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걸까.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제 얼굴처럼 잘 빠진 몸매를 슈트 안에 차려입고서 자기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서 잘나빠진 인생을 즐기고 있겠지.

영원이 범오사에서 돌아오고 며칠이 흘렀다. 그 뒤로 쭉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불현듯 현실을 깨닫자니 실소가 다물어졌다.

영원이 그 남자를 흠모하는 것은 노총각이 어린 신부를 탐하는 것과 진배없다.

파렴치한 짓이었다.

그날 있었던 기억이 밀려오면서 영원은 의식의 밑바닥으로 보내졌다.

.

.

.

탕! 링거대가 옆으로 쓰러졌다.

주사바늘이 연결된 손등에서 바늘을 분리해 내던졌다.

영원은 들숨과 날숨으로 흉포하게 가슴을 들썩였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정색하며 차갑게 그를 노려봤다. 불안하게 그는 말이 없었다.

“설마 애를 어떻게 한 건 아니겠지.”영원이 배를 감싸 쥐며 덜덜 떨었지만 주양은 뻔뻔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네 아이야. 나와 네 아이라고.”“왜 울지?”주양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영원은 주양을 혐오하듯 봤다.

“진심이야?” “너야 말로 제정신인가. 내 아이를 낳아서 뭘 어쩌려고.”그가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진심으로 되물으며 다가왔다. 그것은 이질감이었다. 감정이 없는 남자의 섬뜩한 표정.

구조적으로 다른 존재에 영원은 겁이 났다.

곧장 의사가 그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면서 일단락되었다.

“장에 탈이 났네요. 요사 심하게 스트레스 받는 일 있었나 봐요? 임신이요? 피검사 결과 임신의 소견은 없습니다. 생리는 스트레스 때문에 호르몬 변화가 오면 그럴 수 있어요.” 차트를 대강 넘겨보던 의사가 레지던트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병실에 커다란 구덩이가 패여 돌이킬 수 없게 된 후였다.

영원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 괴괴한 분위기를 먼저 깨부순 건 주양이었다.

옷장으로 간 주양이 영원의 옷을 꺼내 침대에 올려놨다.

환자복을 입은 영원을 훑으며 내뱉는다.

“갈아입고 나오도록 해요.”마치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가 등을 돌렸다.

영원이 거칠게 입을 놀렸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진짜 네 아이를 가졌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발소리가 문지방에서 멈췄다.

영원은 고개를 떨궜다.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대답이 나올까 두려웠다.

드르륵- 쾅 ! 열렸던 문이 도로 닫혔다.

빠르게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

몸이 돌려지면서 주양과 시선이 얽혔다. 그가 영원의 떨리는 동공과 눈빛을 뒤섞었다.

영원의 뺨에는 방금 전 흘리다만 눈물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영원의 뺨에 묻은 눈물을 엄지로 꾹 누르더니 혀에 옮겨 맛을 음미했다.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그러면서 영원을 깊게 봤다.

비정하기까지 한 영원의 모습에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 찌라시, 최 사장이 퍼트린 게 아니던데.” 갑작스런 말에 영원은 멈칫했다.

“그걸 알면서 너는 나한테 거짓으로 고자질했지.”찌라시는 노 집사가 팔아넘긴 것이었다. 계모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 미워서 거짓말을 했다.

한번 당해보라고.

그 뒤로는 일이 유야무야 넘어갔고 주양은 누구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영원의 비겁한 본심.

“어설픈 머리로 수작부리지 마.”경고를 내리박는 목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아주 나쁜 새끼라…… 봐주는 법을 모르거든.”그가 저열한 영원의 속마음을 향해 검게 눈동자를 떴다.

아이를 뱄다면 찢어 긁어냈으리라.

그가 영원의 어깨를 치고 갔다.

.

.

.

영원은 뺨에 떨어진 차가운 감각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뜨거운 날씨에 녹은 쭈쭈바가 국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산만한 정신을 수습하고 휴대전화 시계를 봤다.

“헉.”점심시간이 끝나간다. 다 빨아 먹은 쭈쭈바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일어났다.

곧 저녁타임이 될 것이고 손님이 몰려오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신발을 구겨 신는 그때였다. 검은 자동차 넉 대가 빠르게 시골길을 지나갔다. 백운당을 향해서.

영원은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차 뒤꽁무니를 의아하게 눈으로 쫓았다.

백운당에 무슨 일이 있나?

*

영원이 서둘러 가게로 돌아오자 백운당이 시끄러웠다.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영원이 그들에 대고 외쳤다.

“이상한 차들이 들어오던데. 대체 무슨 일이야?”동료 1이 미간을 좁혔다.

“빨빨대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네 할 일은 끝내고 농땡이 피우는 거겠지.”“닥치고 무슨 일인지나 설명해.” “두 달 동안 유럽투어 갔던 매향이 돌아왔어.” 곁에 있던 동료 2가 설명했다. 영원이 빠르게 보았다.

“매향이 지금 백운당에 있다고?”“여행이 더 길어질 줄 알았는데. 사실 김 총리 애 낳아주러 갔다는 소문이 있었잖아.”김 총리는 이미 요직에서 물러난 재야의 인물이지만, 현존하는 한국 정치 실세였다. 매향은 그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애라니.

동료 1의 시답잖은 소리에 다른 동료가 펄쩍 뛰었다.

“미친. 그게 말이 돼? 두 달 만에 애를 어떻게 만드냐? 그전부터 임신이라도 했다는 거야?” “맞아, 맞아. 식당에 보는 눈이 몇인데. 산달 임박한 임산부를 몰라 볼 리가 없지.”순진한 반응일색에 동료 1이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들 세상물정을 몰라서야. 하는 한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한복의 장점이 뭔지 알아? 임신을 해도 모른다는 거야. 잘나가던 기생이 돌연 휴직하고 외국으로 떠나. 그리고 난데없이 두 달 만에 컴백. 이상하지?”“그야 그렇지만.”“매향이 김 총리 말고 다른 손님 수발드는 거 난 못 봤어.”오늘따라 손님들이 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두 달 간의 긴 휴가를 끝내고 매향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매향이 누군가. 백운당의 화중왕, 꽃 중의 왕이었다.

백운당 기생들도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는지 발걸음도 사뿐히 했다.

계모 다음으로 백운당 직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게 바로 매향이었다.

한가닥하는 기생들도 매향 앞에선 구루병 환자처럼 설설 기었다.

영원은 헐레벌떡 백운당 연못으로 달려갔다.

시원한 여름 향기가 안면으로 불어 닥쳤다.

보기만 해도 가슴 풀리는 탁 트인 백운당 중정 연못. 그곳에 자리한 취향각.

누각 위에선 상차림이 벌써 진행 중이었다.

열 명은 족히 되는 관료들이 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기생들이 호사스럽게 손님을 접대했다. 기름진 음식과 시원한 술.

풍경에 먼저 취하고, 술맛이 기가 막혀 다시 취한다는 백운당.

왕도 부럽지 않다. 그런데 꽃들의 왕, 매향이 술 따르는 인물은 좀 더 특권층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바닥 생리였다.

영원처럼 구경 온 누군가가 옆 사람과 수군거렸다.

“새파랗게 어린 양반이네. 이제 사십 줄 조금 넘겨 보이는데. 누구길래 저 매향이 친히 술까지 따라?”매향 옆에 깐깐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파란지붕에서 일한대.”“청와대?”신참 기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대통령 비서실장이야. 대통령 빽 등에 업고, 원님 덕에 나팔 불겠다 이거지.” 매향이 뒤에 김 총리가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간도 크네, 저 양반. 영원이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서려는 그때였다.

매니저가 모여 있는 직원들을 해산시켰다.

“뭐합니까! 일들 해요! 일들!”구경거리를 뺏긴 직원들이 입을 삐죽대며 뿔뿔이 흩어졌다. 영원도 별채 청소를 하러 갔다.

오후에 남는 자투리 시간에는 꽃들을 옮겨심기로 했다. 별채 후원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가꿔주지 않아 방치된 채였다.

영원은 힘을 줘 퍽퍽 모종삽으로 흙을 퍼냈다. 겨우내 화분에 옮겨 담았던 꽃들을 다시 땅으로 되돌려주는데 인기척이 기와집을 돌아서 왔다.

“지금 심는 거 무슨 꽃이야?”하늘하늘한 한복을 입은 해수가 거문고를 등에 매고 다가왔다. 발을 디딜 때마다 치맛자락으로 꽃신이 머리를 내밀었다.

귀하신 몸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진 어인 일이신가. 기분이 잡쳤지만 시비 걸지 않기로 했다. 입만 아팠다.

“거문고 교습 시간 아냐?”“음. 취소됐어.”“그럼 다른 스케줄은? 딴 데 가서 놀아. 너 좋다는 애들 많잖아.”싫은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해수가 변죽 좋게 화단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쩐지 심심해 보였다. 아. 그런 건가. 스케줄이 없는 건가.

왜지? 이유를 끝까지 추적해낸 영원이 발칙하게 입매를 꿈틀거렸다.

“아하. 백운당 진짜 꽃께서 귀환하셨지. 이거 해어화 체면이 말이 아니네. 매향이 오자마자 바로 찬밥 신세라니.”조롱 섞인 야죽거림을 듣고서도 해수는 별로 아쉽지 않다는 무표정이었다. 자존심에 타격 받길 원했건만, 심드렁한 반응에 기운이 빠졌다.

오히려 역공을 당한 건 이쪽이었다. 해수는 당당하게 꾸밈없는 모습으로 소신을 밝혔다.

“난 기생이 아니니까.”영원의 표정 귀퉁이가 썩어서 나가떨어졌다.

“그들에게 연주는 했지만, 기생으로서는 아니었어. 어디까지나 예인으로서 사명을 다한 것뿐이야.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게 내가 성취감을 얻는 방법이고.”똑 부러지는 대답이 해수다웠다.

자기표현을 똑바로 할 줄 알고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함을 잃지 않는 해수의 모습은 영원에게 거북스런 질투심을 내보이게 했다.

이래서 꽃이 싫다니까. 영원은 퍽퍽 삽을 쑤셔 넣었다.

그러나 곧 관두었다.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기분을 표출할수록 비루해지는 건 영원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대고 확인 사살했다.

‘그냥 사실대로 인정해. 부럽다고. 너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꿈은 사치였다. 백운당에서 태어나고 고작 백운당 반경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하류인생에게,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감을 느낀다는 행위는 가당치도 않은 혜택이다.

영원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허드렛일이나 하고 가끔 화단에 꽃을 심는 걸로 한을 푸는 것뿐이다. 어차피 딱히 잘하는 것도 없었다.

“좁아터진 화분보다는 화단이 숨 쉬긴 편하겠지.” 해수가 영원의 혼잣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자유로운 새가 철장 안의 새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모종삽을 쥔 영원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해수가 삽을 빼앗으려 했다.

“어차피 올해 안에 죽을 텐데 하지 마.”“넌 남자들한테 그렇게 꽃 받아내고 어디다 두냐?” 해수가 당황했다.

“바로 쓰레기통 직행이지? 꽃도 생명이야. 놔.”영원은 심술을 부리며 괜히 해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오늘로서 여기도 끝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이라 좋아했는데 이렀듯 불청객이 난입했으니. 사사건건 부딪히는 계집이 짐스러웠다.

파헤친 화단을 놔두고 공구를 챙겨 떠나는데 누군가와 충돌했다. 영원은 발딱 일어섰다.

계모였다.

계모가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지만 대한민국 최고 한식당 사장답게 그녀는 냉철한 사업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손님을 대동하고 있었다.

“인사드려라. 진 이사님이시다.”영원은 긴장한 채 바위가 되었다. 꼿꼿해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수가 주양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섰다.

“오늘 오신다는 손님이…….”“대체 이게 무슨 꼴이라니?”계모가 영원의 더러운 꼴을 쏘아봤다. 뺨에도, 유니폼 치맛단도 흙으로 지저분했다. 해수가 영원이 곤란해질까 봐 해명했다.

“아, 영원이가 짬 내서 꽃을 심고 있었어요. 기특하게도.”듣기 싫다는 눈초리로 계모가 단번에 해수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좀 씻어야겠다. 저녁 장사 준비하려면 그 꼴로 돌아다닐 순 없잖니?”살뜰히 챙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산하게 찍어 누르는 음성이었다.

뒤에 있어서 주양이 표정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말하는 목소리 톤과 영원을 보는 눈빛이 사뭇 달랐다.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해내는 주제에, 누굴 닮았는지 궁상은 혼자 다 사서 떠는 꼴이야?

파편이 생생하게 날아들었다.

영원은 고개 숙였다. 언제나 계모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곱게 손을 가슴에 댄 계모가 주양을 별채로 안내했다.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순간, 영원은 주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길이 모래알이 꼬질꼬질하게 낀 영원의 손톱에 닿았다. 영원은 얼른 치마 뒤로 감췄다.

그 유명한 백운당 셋째 딸, 백운당에는 귀신이 산다. 얼굴이 없는 귀신이.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얼마나 못났는지 그 어미가 제 딸을 헌신짝 취급한다지 뭐야?’계모의 미간에 내 천 자를 새겨지게 만드는 못난이가 바로 영원이었다.

계모의 냉대를 봤으니 이제 그도 알겠지. 그녀가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어떤 위치인지.

영원은 집안의 ‘수치’였다.

주양이 무심하게 영원을 스쳐갔다.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사람인 게 더더욱 선명하게 찔러서 그녀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예전이 좋았다.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을 때는 몰랐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손이 이토록 부끄러운 것이란 것을.

감히 탐내선 안 되는 남자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재투성이 하녀…….

*

해수의 손가락이 거문고 줄 위에서 현란하게 노닐었다.

최혜란은 잠시 두 사람만 별채에 두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열심히 연주하던 해수는 무심결에 주양을 건너봤다.

평소 냉철하게 이지가 섰던 눈빛이 더 깊어져 있었다. 심각하게 무언가 상념에 빠진 것 같았다.

해수는 괘를 손바닥으로 눌러 소리를 죽였다. 귀로는 듣고 있지만 주양의 정신은 딴 곳에 팔려 있는데 더 이상 연주는 무의미했다.

그는 소리가 멈춘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해수는 직사각형의 검은색 돌 접시를 봤다. 주양의 눈길이 나란히 플레이팅 된 새우튀김에 붙박여 있었다.

딴 곳에 정신 팔려 있다고 생각한 주양이 말문을 연 건 그때였다.

“누가 그러더군요. 혼자 사는 남자는 새우를 먹어선 안 된다고.”해수가 웃음이 새려는 입술을 억눌렀다.

“이상한 논리네요.”“백운당 새우튀김은 얼마나 맛있어서 그랬나, 봤습니다.”“그게 무슨…….”“우리 회사에서 출시한 도시락이 형편없다고 초장에 욕을 하더군요.”주양은 그렇게 쏘아붙이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는 조금 화가 난 것같이 보였다.

대체 어떤 간 큰 인간이 진주양의 면전에 대놓고 비평을 할까. 아연했다.

“진 이사님 앞에서 주름 잡을 정도면, 음식평론가겠죠?”해수가 애써 분위기를 달래보려 했지만 주양은 입을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그는 묵묵히 이강주를 따라 마셨다.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해수는 거문고를 무릎 위에서 치우며 주양에게 몸을 틀었다.

“그래서 어떠세요?”그제야 주양이 고개를 들어 해수를 응시했다. 오늘 처음이었다.

“백운당 새우튀김, 인정할 만한가요?” 생각지 못했다는 듯 해수를 보던 주양이, 젓가락을 들어 튀김을 한입 베어 물었다.

튀김의 바삭함과 부드러운 새우의 식감을 느리게 혀에서 굴리며 음미했다.

문득, 그가 희미하게 입매를 휘었다.

그렇게 말한 당돌한 누군가를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우리 회사 도시락보다…… 맛있네요.”소박하게 미소 짓는 남자의 모습.

방금 전까지 화가 난 게 아니었나. 해수는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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