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31화 (31/83)

31화. 실종 10일째 <3>2016.10.20.

-실종 10일째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녀의 어두운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은 후회였다.

영원은 창백한 발끝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 영원은 백운당 사가로 돌아와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무 바닥이 정겹게 삐거덕거리던,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전통식 마루 위였다.

낮이었지만 좁고 기다란 복도는 햇살이 들어오지 않아 그늘져 있었다.

그리운 집이었다.

영원은 이게 꿈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리하여 그녀가 이제부터 어디로 갈 것이며, 이 복도 끝에 누가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거문고 현 소리는 정갈했다.

그녀는 어느 방 앞에 섰다. 문을 열자 나른한 공기가 휘어 감았다.

햇살이 내려앉은 방에서 한 여자가 거문고 현을 뜯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뒤태가 기품이 있었다.

해수는 돌아보지도 않고 못 박았다.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나. 그. 사. 람. 하. 고. 결. 혼. 할. 거. 야.

영원은 해수가 할 말을 미리 알고 입속으로 따라 읽었다.

이다음 대사도 영원은 알았다.

“곧 내게 청혼할 거 같아.”“곧 내게 청혼할 거 같아.”영원의 말에 해수가 돌아보았다. 해수는 기묘한 눈빛으로 영원을 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해수는 관두었다.

영원은 가만히 해수를 응시하다 말을 덧붙였다.

“그 남자는 널 사랑하지 않아.”해수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받아쳤다.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인 거지.”그가 사랑하지 못하는 건 해수 잘못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가짐에 따라 상황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며 해수는 거문고 줄을 갈았다.

영원은 간신히 입술을 뗐다.

“관둬.”“도와주지 않을 거면 잠자코 있어.”“그런 결혼이 잘될 것 같아?”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수가 거문고를 벽에 집어던졌다. 우당탕-!

해수가 벌떡 일어서서 영원을 노려보았다.

해수가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네가 뭔데 나한테 충고질이야.”“미쳤……어?”“빼앗긴 사람이 잘못이야. 자기 걸 지키지도 못하고 빼앗긴 주제에…… 누구한테 감 놔라 배 놔라 참견이야.”  “나는 널 위해서……!”“닥쳐! 나는 너와 달라!”해수가 달려들어 영원을 넘어트렸다. 위에 올라타고 악귀 같은 모습으로 목을 졸랐다.

“으…… 억…….”“나를 비난하지 마. 왜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뻔뻔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있어. 심지어는 신의 이름으로 학살을 저지르고도 용서되지. 신의 이름으로…… 그 모든 일들이 납득돼. 내 인생엔 내가 신이야.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어! 나는…… 최고가 될 거야. 기생집 딸년 소리 따위 아무도 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영원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껄떡였다. 눈알이 뒤집어 까였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빼앗을 거야.”

이내, 참지 못하고 해수가 뺨을 어그러트렸다. 일그러진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설령, 그게 허울뿐인 신부라 해도.”거기까지였다.

영원은 꿈에서 깼다. 죽을 것 같던 질식감과 함께 눈물이 관자놀이로 쭉, 선을 그어 내렸다.

“하, 하아…….”다시 정신병동으로 돌아왔다.

영원이 침대에 누운 채 고개만 돌렸다. 체리나무로 깎아 만든 십자가 벽걸이가 바로 시선에 걸렸다.

십자가가 왜 이런 곳에 걸렸는지 알 길이 없다.

십자가는 이 절망 가득한 정신병동까지 잊지 않고 주님의 은총을 내려주었다.

자유를 강탈당한 영원을 눈앞에 두고도 온갖 유세를 부렸다.

신해수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일방적이고 통보되어오기까지 하는 상냥함엔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신념을 따르겠다는 아집이 묻어 있었다.

남의 기분 따위와 상관없이, 상냥함이란 얼굴을 두르고 상대의 살점을 도려냈다.

그 독선적인 태도가 마치 신의 의지와 같았다.

네팔에 지진이 덮쳤을 때,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가난하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나라.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그들을 택한 걸까.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신앙심이 너무 깊었다는 것이다.

기도에 재앙으로 응답해줄 거라고는…….

그것이 신, 당신의 뜻입니까?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에게, 독재자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신은 일방적으로 통보할 뿐이다.

그것에 순응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

“Je repars a zero(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예요).”“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ca commence avec toi(내 삶과, 내 행복은,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시작될 겁니다).”장 경감은 비밀통로를 천천히 내려갔다. 말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Non ! Je ne regrette rien.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Non ! Je ne regrette rien.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C'est paye, balaye, oublie.

그것은 대가를 치렀고, 쓸어버렸고, 잊어버렸어요.

Je me fous du passe.

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아요.

Balayes les amours,

사랑들을 쓸어버렸고,

Et tous leurs tremolos.

그 사랑들의 전율도 전부 쓸어버렸어요.

Balayes pour toujours.

영원히 쓸어버렸어요.

장 경감의 입술에서 신음처럼 짧은 말이 흘렀다.

“에디뜨 피아프…….”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였다.

지금 듣고 있는 말소리는 [Non, Je ne regrette rien -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의 노래가사였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확연해졌다.

샹송은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리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기다란 벽돌 통로는 하나의 진공관이 되어서 노래를 공명시켰다.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예요. 내 삶, 내 행복은, 이제부터, 그대와 함께 시작될 거예요……!

음악이 돌아간다는 것은 누군가 안에 있다는 소리였다.

김 회장은 저 안에 신부와 있는 건가. 대체 이 비밀통로는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복수를 위해 지하 감옥이라도 건설해 놓으셨나? 김 회장.’ 노래 소리는 복도 끝 문에서 흘러나왔다. 장 경감은 안을 훔쳐봤다.

방은 지하 감옥도 음산한 실험실도 아니었다.

장 경감은 방 2층에 서 있는 거였다.

복층 구조 방의 나선형 계단 아래에 서재와 책상이 있었는데, LP판이 주인 없이 혼자만 돌아가고 있었다. 장 경감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김 회장은 없었고, 그의 욕망만은 충실하게 보였다.

장 경감은 계단을 내려가 방 중앙을 차지한 마호가니 책상 옆 레코드 기계를 멈췄다. 노래 소리가 뚝 끊기자 정적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 방은 김 회장 욕망의 집합체였다.

남자들이 으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장소였다. 그의 취미생활과 모든 취향들이 곳곳에 묻어났다.

책들이 빼곡한 서재. 그 책장 곳곳에 세워놓은 액자들엔 유명 국회의원, 기업회장들과 악수하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대통령 표창장과 경영인협회에서 받은 영광스런 상패들.

전형적인 과시형 인간이었다.

그러나 남들에게 완벽하게 공개된 위층 서재가 아닌 이렇게 혼자만의 비밀 방을 만들어 전시하는 형태는 그의 소심함을 엿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이어폰에 대고 수진과 교신했다.

“김 회장, 2층에 없나?”수진에게서 답이 왔다.

[2층 없습니다. 더 살펴본 뒤 내려가겠습니다.]‘대체 노래는 틀어놓고 어디로 내뺀 거지?’ 장 경감은 책상에서 작은 액자를 발견했다.

단란한 가족사진이었다.

장 경감에게도 가족사진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아들에게 사고가 나기 전에, 아내가 그를 떠나기 전까지.

장 경감이 김 회장 자택에 늦게 도착한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낮에 갑작스런 응급상황으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미 의사들이 아들 병실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장 경감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서 주저앉았다.

알고는 있었다. 더 이상 붙들고 있는 건 무가치한 일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잠시 뒤, 수습하고 나온 담당의가 그를 발견했다. 아들을 보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장 경감에게 의사가 말했다.

‘잠시 저체온 쇼크가 왔었습니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그제야 장 경감은 안도했다. 특진병동 의료진들이 신속하게 체크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기도에 가래가 잔뜩 껴서 석션으로 빼냈고, 약물 투여했으니 안정될 겁니다.’담당 교수실로 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담당의가 현재 아들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시다시피, 뇌사는 식물인간과 달리 자발 호흡이 불가능합니다. 산소호흡기로 억지로 연명하고 있지만, 사실상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 겁니다. 다음번엔 심정지가 올지도 모르고, 기존 심부정맥이 악화돼, 준비할 새 없이 떠나보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운이 좋았어요.’‘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장 경감의 물음에 의사가 침착하게 또래의 어린 환우들을 이야기했다. 수술만 하면 뛰어놀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실정이란 것.

‘통상적으로 뇌사환자의 경우, 장기기증으로 연결해주는 게 일반적입니다만, 장기기증에도 골든타임이란 게 있는데 아드님의 경우 그마저 많이 놓쳤습니다. 가능한 부분이 몇 개 없을 테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뇌사 상태로 몇 년을 버틴 것만도 기적이었다.

마음이 갑갑해져서 장 경감은 김 회장의 책상에 기대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자식의 죽음에 준비가 될 부모가 어디 있나. 10년 동안 누워 있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는 외국 사례 같은 것만 눈에 들어오는 심정을 의사 따위가 알까.

멀쩡히 걸어 다니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눈을 떠서 시선이라도 마주쳤으면 했다.

딱 한 번이라도.

딱 한 번……

장 경감은 넋 놓고 있다가 책상 다리를 건드렸다. 발등에 버튼 같은 것이 눌려 깜짝 놀라는데, 갑자기 책장 뒤가 열렸다.

감춰져 있던 비밀금고가 드러났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포기는 이르다. 여기서 비밀 은닉 장소라면 분명 구린 것들이 많을 터였다.

그중에는 한신 진주양과 관련된 것도 포함될 것이다.

장 경감은 바지춤에 달린 스프레이 통을 빼들었다.

키패드에 스프레이를 뿌리자 자주 누르는 숫자에 지문이 묻어났다.

숫자는 앞에서부터 34589로 이루어진 숫자 배열이었다.

‘문제는 이게 몇 자리 숫자 조합이냐는 건데.’ 이대로 다섯 자리도 어렵지만 요즘 추세로는 여섯 자리 숫자 배열일 가능성이 컸다. 장 경감은 34589를 눌러봤다. 당연히 실패였다.

김 회장 소재를 파악하면서 김 회장의 여자관계, 생일, 전화번호, 이메일 아이디 비밀번호부터 몸무게까지 모두 파악해 놨다.

그는 이어폰으로 직원에게 김 회장의 주민등록 뒷자리와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보라고 시켰다.

나름대로 여섯 숫자 조합으로 853394로 눌렀지만 또 틀렸다.

“아 씨…….” 이제 마지막 기회였다.

장 경감은 턱을 문지르며 방을 배회한다.

김 회장은 치밀하며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요새 같은 집에 칩거하는 점. 과도하게 많은 경호원들. 자기 안위에 굉장히 걱정이 많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죽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갇혀 사는 사람의 행동패턴을 보였다.

실제로 그를 죽일 만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는 진주양과도 척을 지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억울하게 죽임 당할 것을 대비해 가족들에게 무언가를 남겨놓게 된다. 대비책을 마련해 놓는다는 소리다. 아내는 일찍이 사별하고 아들마저 죽었다.

가족이라곤 딸뿐인데, 소문으론 딸과도 금이 간 지 오래란다.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수진과 무전했다.

“비밀금고 번호를 딸과 공유하기엔 부녀관계가 너무 나빠. 하지만 자신이 죽어도 딸이 쉽게 알만한 뭔가로 해놨을 거야.”[딸의 생일일까요?] 딸의 생일과 3495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숫자다.

[딸 전화번호, 자주 쓰는 사이트 비밀번호는 어떤가요.]방을 배회하며 장 경감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아니야.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돼. 딸 직업이 뭐지?” 그러다 그는 마호가니 책상에 나란히 놓인 화분 2개를 발견했다.

김 회장 같은 인물이 답지 않게 감성 떨며 꽃을 키울 리가 없다. 제각기 다른 꽃이었다. 해바라기와 데이지…… 뭘까.

장 경감은 책장에 꽂힌 수백 권의 책들을 살피다가 정작 중요하게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뒤늦게 발견했다.

『꽃, 그 신기한 수학』이라는 제목이었다.

경영이라든지, 온통 돈 버는 방법에 꽂혀 있는 김 회장 취향에서 유일하게 동떨어진 주제였다.

누가 봐도 김 회장의 책이 아니었다. 또,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올려놨다. 딸이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쉽게 알아챌 수 있게.

그는 책등 아래 하얀 면을 쓸었다. 검은 유성 매직으로 ‘청진고등학교 2학년 4반 김보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오래된 책이었다. 10년도 더 된 것 같은…….

책장을 넘기자 오래된 접착 부분이 쪼개져 있어 곧바로 페이지가 펼쳐졌다. 꽃잎과 ‘피보나치수열’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 회장이 친절히 파란 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혹시 꽃잎이 피보나치수열을 닮아 있다는 것은 아는가?

피보나치수열이란, 앞의 두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수의 나열을 뜻한다.

0, 1, 1, 2, 3, 5, 8, 13, 21, 34, 55, 89, ……

1+1=2가 된다. 2+3=5가 되고, 3+5=8이 된다. 5+8=13

이와 같은 수의 나열이 꽃잎에도 적용된다는 놀라운 사실!

대부분 꽃잎들을 세어보면 꽃잎은 3장, 4장, 8장의 피보나치수열 개수대로 자란다.

데이지는 13장의 꽃잎이, 나팔꽃은 3장, 아이리스는 5장, 기생초는 8장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피보나치수열이 씨앗의 개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

데이지의 씨는 34-55, 해바라기는 34-55-89의 배열을 따른다.

장 경감은 책상에 놓인 데이지와 해바라기 화분을 확인했다.

데이지는 34-55, 해바라기는 34-55-89.

……34589

장 경감은 키패드에 두 꽃의 공통 숫자인 34-55-89를 눌렀다. 띠릭. 금고잠금장치가 곧장 풀렸다. 장 경감은 희미하게 웃었다.

‘기업회장쯤 되니까 금두꺼비 정도는 들어 있겠지? 뭐, 그걸 어찌 해보겠다는 건 아니지만. 후후.’금고를 힘차게 열었다. 잠시 당황한 장 경감이 금고를 샅샅이 훑었다.

금고 위 칸을 더듬었다. 거액의 상품권 뭉치나 골드바라도 나올 줄 알았건만, 텅 비어 있었다.

고작 문서파일 하나가 손에 딸려 나왔다.

몇 장 되지도 않는 종잇장이 허망할 정도였다.

“뭐야. 이게 다야?”장 경감은 촉박한 시간에 일단 한 장씩 다 증거로 남겨놓기로 했다.

분명 진주양과 관련되어 있을 거다. 되는대로 휴대폰에 다 찍어 저장했다.

장 경감이 김 회장 저택을 빠져나왔을 때, 수진이 망을 보고 있었다.

“2층도 다 뒤져 봤는데 없었어요. 방에 틀어 막혀야 하는 거 아닌가요?”“신부 흔적은?”“신부는 이곳에 오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그래. 만약 데리고 있다 해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둬놨겠지.”요트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악……! 흐아악!”기태의 비명소리가 찢어졌다. 그들은 기태를 눕혀놨던 요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깨어난 기태가 뒤로 자빠져 벌벌 떨고 있었다.

장 경감이 기태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새끼야, 미쳤어?! 아주 그냥 동네방네 떠들어라!”“그, 그게 아니라 저, 저기…….” “뭐!”요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뭔가를 요트에 묶어 놓은 듯했다. 무언가를 담가놨는지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기태는 그걸 끄집어 올리려고 했었는지 말을 잃었다.

장 경감이 수진과 함께 밧줄을 당겼다.

“어우. 뭘 매달아놓은 거야.”엄청난 무게였다.

“이 정도면 거의 상어 수준인데요?” 모래주머니라도 매달아 놓은 걸까. 수진과 그것을 배 갑판으로 끌어올린 순간, 축 늘어진 뭔가가 위로 올라왔다.

순간 놀란 그들은 뒤로 물러났다.

……사람이었다.

장 경감은 얼른 달려가 엎어진 사람을 앞으로 돌렸다. 목에 손을 댔었다.

“김 회장이에요.”곁에 앉은 수진이 말했다. 장 경감도 그제야 시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드러운 김 회장의 팔뚝을 손에서 놓쳤다.

분명하게 느껴졌다.

“죽었어.”심지어 시체는 아직 따뜻했다.

*

투약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이루어졌다.

노 집사는 매일 정시에 간호사에게 약과 물 컵을 받아 영원에게 건네었다. 영원은 캡슐을 받아서 먹었다.

약을 삼켰다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 영원은 입을 아- 하고 크게 벌렸다.

노 집사는 철저하게 혀 밑바닥까지 들어보라고 했다. 혀 아래를 들췄다. 아무것도 없었다.

영원은 노 집사가 돌아서는 그때 자는 척 이불 속에 기어들어갔다.

영원은 입을 벌렸다. 영원은 음흉하게 웃으며 캡슐을 뱉었다. 아랫니와 입술이 닿는 공간에서 캡슐을 숨길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다.

손을 뻗어 매트리스 아래를 더듬자 종이 뭉치가 손끝에 만져졌다.

캡슐에서 털어낸 흰 가루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가루만 따로 털어내고 캡슐 껍데기는 증거인멸을 위해 삼켰다. 그간 모아둔 게 꽤 되었다.

언젠가 이걸 쓸 날이 올 거다.

“아가씨. 일어나세요.”노 집사였다. 매트리스 사이에 얼른 휴지뭉치를 쑤셔놓고 일어났다.

“왜?”“여름이라 금세 옷에서 냄새가 나요. 환의를 자주 갈아입어야겠어요.”영원은 두 팔을 벌렸다. 노 집사가 머리 위로 헌 환의를 끄집어냈다.

영원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응시했다. 십자가를 오랫동안 뚫어지게 보자 중앙에 작은 구멍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점 같기도 하고, 눈 같기도 했다.

초소형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었다.

경찰이 카메라를 발견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죄악을 신도 모르는데 형사 나부랭이들이 어떻게 알까.

영원은 배를 쓰다듬었다. 전에는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가벼웠던가. 전에는 있었지만 이제는 텅 빈 배였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기를 가진다는 건 어떤 거야? 노 집사는 알지?”물음에 노 집사가 잠시 딱딱해졌다. 영원은 헛헛한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게 뭔지 알아?”인간이 신의 소유물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지는 오롯이 내 소유다. 나는 내 인생의 신이다.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나는 신이다.

“그것들이 내 인생을 멋대로 재단해버렸다는 거야.”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영원은 노 집사를 보고 금세 얼굴을 풀었다.

“돈 떼먹은 사람은 찾았어? 그 흥신소 말이야.”노 집사가 대답하지 않고 영원의 환의를 갈아입혔다.

“좋은 소식 있음 좋겠네.” 영원은 간만에 웃을 수 있었다. 노 집사가 떼인 돈을 찾을 쯤엔, 영원은 이미 이곳을 탈출하고 없을 터였다.

-1년 전, 영원 26세

영원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천장을 보다 눈을 내리자 주양의 옆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VIP 병실 한 편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블라인드 쳐진 실내는 어두웠다.

깊게 상념에 잠긴 주양의 날카로운 옆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양 비서가 버스터미널에 그녀를 내려주는 것까지는 생생했다. 그 뒤로 필름이 끊겼다.

“머리가 아파.”영원이 쉰 소리를 내자 주양이 돌아봤다.

영원은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손등에 커다란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나 왜 이런 거야? 왜 갑자기…….”배가 아팠었다. 타들어가듯이 창자가 비틀렸다.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이 아래서 뜨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주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볼 뿐이었다.

영원은 분위기가 이상해서 말끝을 흐렸다.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내, 내가 왜…….”문득 그녀 안에서 송곳 같은 의심이 불쑥 뛰어올랐다.

지금은 배가 아프지 않다.

어째서 배가 아프지 않은 걸까.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

그가 믿지 못할 인간이라는 것도.

이 기나긴 침묵에 대해 영원은 해명이 필요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영원이 정색하며 물었다.

주양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가끔 그가 저런 얼굴을 할 때면 그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얼 보고 있는지.

닿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그가 다시 낯설게 느껴지는 시간, 지금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그녀일까?

……그 자신 안의 괴물일까.

어째서 그는 불안을 부추기며 말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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