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실종 10일째 <1>2016.10.13.
탑을 백 번을 돌며 영원은 소원을 빌었다.
‘그에게 닿게 해주세요.’개울에 발을 담그는데 꽃이 떨어졌다.
고개를 쳐든 그곳에 주양이 있었다. 진짜 눈앞에 그가 나타났다.
운명처럼.
화사한 꽃이 핀 나무. 햇볕을 쬐고 있는 자연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증발할 신기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원을 조용히 응시하던 주양이 다리를 내려왔다. 손을 뻗어 그가 꽃을 물에서 건졌다.
상념에 잠긴 듯 꽃을 손안에서 굴리던 그가 허공을 봤다. 역광이 눈부셨다.
그는 불보다는 얼음이었고, 빛보다는 어둠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는 태양이었다.
그를 보면 불행도 잊어버렸다.
그를 처음 만난 그 크리스마스 겨울, 영원은 죽으려고 몽유병 환자처럼 떠돌았었고, 지금은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기회가 주어졌다.
자살했다면 맞이하지 못했을 봄이었다.
어느새, 주양의 눈길이 꽃에서 그녀에게 올라앉아 있었다.
봄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그런 한 장의 사진 같은 장면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를 동경하고,
우러러보고,
닮고 싶고,
가져보고 싶고,
그를 처음 봤던 그날부터 쭉…… 그가 닿을 수 없는 태양 같아서,
그녀는 슬펐다고.
*
영원이 양손에 보자기를 낑낑 짊어지고 산사를 내려오는데 차 한 대가 부드럽게 그녀 곁에 섰다.
엠블럼이 박힌 외제차였다.
창문이 갈라진 틈으로 양 비서가 얼굴을 비쳤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태워다 드리죠.” 개울에서 주양은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단 한마디의 인사도 없이.
반가움보다 망설임이 찾아왔다.
안을 볼 수 없게 검게 처리한 뒷좌석에 주양이 앉아 있을 거다.
그의 허락이 떨어진 일인지 조심스러웠다.
영원은 사양하려다가 양손에 든 반찬통을 확인했다.
산중 입구에는 설상가상, 택시는커녕 개미새끼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버스정류장까지 족히 20분은 더 걸어야 하는데.
하긴, 의심의 여지조차 필요 없는 일일 거다.
지금 이 비서의 친절도 주양의 통제 아래서 지휘된 것일 테니.
“그럼 버스터미널까지만…….”곧장 운전석에서 기사가 내렸다. 트렁크에 짐을 옮겨주려는 걸 꿋꿋이 사수했다.
뒷좌석에 올라타다 중간에 주양을 보고 흠칫, 했다. 그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영원은 장아찌를 고이 품에 안았다.
분명 ‘그날’에 대해 협상하려 할 텐데 주양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하고 대체 나를 언제 죽일 셈이냐고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젖은 치맛단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차 카펫을 그대로 더럽혔다.
신경 쓰여 영원은 몸을 불편하게 들썩였다.
반찬통에도 코를 킁킁 대보았다. 냄새가 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해준다는 대로 할걸 그랬다.
이것저것 불결하게 여길까 봐 안절부절못하는데 주양이 서류를 내려놓고 운전석에 지시했다.
“병원으로 가죠.”간이 오그라들었다.
일순, 인적 드문 항구나 새우잡이 배,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영원이 날카롭게 주양을 향해 물었다.
“어디 아파?”그와 영원 사이에 존재하던 거리감이 빠르게 좁혀졌다.
화들짝 놀라는 음성에 그가 고개를 틀었다. 근 한 달 여 만에 눈과 눈이 뒤얽혔다.
오랜만이야…… 영원은 속마음으로 그렇게 인사했다.
덧붙여, 이젠 눈빛만 봐도 그가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삭막한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병원에 가게 될 이는 영원이었다.
.
.
.
시내에 있는 한 병원에 왔다. 접수를 끝낸 양 비서가 투명 용기를 받아 왔다. 여기에 소변을 받아 오라고 한다.
“왜?”“검사를 해야 한답니다.”“무슨 검사?”“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사로 알 수 있답니다.”“나 아픈데 없는데.”“그냥 하는 겁니다.”“그러니까 무슨 검사?”양 비서는 묵직하게 입에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그녀의 손에 컵을 욱여 쥐여주었다.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내였다.
영양가 없는 모든 질문들은 너무나 유연하게 쳐냈다. 과연 진주양의 사람이었다.
“근데 왜 그 사람은 안 와?”영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공간에 뚝 떨어트려놓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당연히 뒤따라 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병원 건물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건가.
“여기 있기 싫어. 나갈래.”“검사 받으셔야 합니다.”“기분 나쁘다고.”“검사 받으셔야 합니다.”“그 사람은……?”“안 오실 겁니다.”“왜?”영원은 끊임없이 캐물었다.
양 비서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시 오류가 난 듯했다.
긴 고심 끝에 꺼내진 말은 기껏 초상권을 들먹이는 얘기였다.
“이런 곳에 얼굴 비치면 안 되시는 분입니다.”양 비서는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양 비서는 계속되는 질문에 지친 표정을 만들었다.
대충 영원의 성격을 파악한 듯했다. 그녀를 우습게보고 방치했다.
병원 대기실에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배부른 여자들이 돌아다녔다. 쓸모없어져 폐차장에서 폐기처분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영원은 꼼지락대다가 얌전히 화장실로 갔다.
하의를 벗지도 않은 채 칸막이 안에 앉았다.
갑자기 끌려와 뭘 하는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가만히 멍 때렸다.
1분이 2분이 되고 10분이 지체되자 간호사가 문을 두드렸다.
“산모님. 배뇨 끝나셨나요?”여자화장실에 남자인 양 비서가 들어오지 못하니 대신 온 거다.
안에서 반응이 없자 간호사가 나갔다. 바깥에서 작게 양 비서와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종종 산모께서 불안함을 느낄 때가 있으세요. 보호자께서 다정한 말로 다독여주시는 게 어떨까요.” 보호자? 양 비서가? 이름도 모르는 저 사내가?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보호자는 누구인가.
주양? 영원을 혼자 병원에 버려두고 고고하게 차 안에서 검진 기록이나 기다리는 남자?
지금 이 느낌은 뭐라 설명해야 덜 비참해질까. 영원은 잠금장치를 풀고 나가려고 했다.
차가운 변기 위에 한시도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일어나도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에 친히 주양이 올라왔을 때, 영원은 맨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가 텅 빈 용기를 확인했다. 저음이 무섭게 파고들었다.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영원은 주양이 묻는 말에 딴 소리를 내뱉었다.
“배 속 태아는 재산상속이 인정 안 되는 거 알아? 상속권을 받았다 하더라도 출생해야만 상속이 가능해. 법적으로도, 생명으로도, 인정하고 있지 않단 소리야.” “왜 이러고 있냐고 물었어.”“그것들이 사유를 하고, 공감을 하고, 사랑을 하고……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소멸할 거란 것은 알까? 죽음을 알까? 그냥 점일 뿐이야. 영혼도 없는 껍데기.” 그가 침묵했다. 영원이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귀찮은 짐짝 취급하지 않아 돼. 애를 빌미로 득 볼 마음 없어. 아이 같은 거 안 가졌어. 내 몸이니까 내가 알아.”“…….”“조금 쉽게 설명해주면 다 알아듣는다구.”영원도 이게 뭘 하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러워 눈물이 떨궈지는 것조차 진저리났다.
“무시하지 마.”“…….”“나는 개돼지가 아니야.” 영원은 그에게 투명 용기를 집어던졌다. 플라스틱 컵이 그의 몸을 맞고 떨어졌다,
바닥친 그녀의 자존심처럼.
아무 설명도 없이 오줌이나 싸라고 하면 싸오는 개돼지가 아니야.
구제역에 걸린 돼지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최소한의 설명을 해줘야 했다. 달랑 아랫사람 붙여 보내서 그녀를 무시하게 만들하고.
설명해줘도 멍청해서 알아먹지도 못할 테니까 설명은 대충 생략해도 된다는 그런 식의 태도.
본데없이 자랐지만 누가 나를 싫어하는지, 누가 나를 무시하는지 정도는 구분 가능하다.
그리고 생판 남인 그의 비서한테까지 깍두기 취급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게 없었다.
비서가 그녀를 깔본다면 그건 주인인 주양이 그녀를 하찮게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전적으로 주양의 탓이다.
그가 바닥에 있던 용기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영원은 옷자락을 꽉 쥐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어나.”영원이 가만히 있자, 쾅! 그가 칸막이를 내리쳤다.
거칠어진 그가 코끝에 호흡을 겨누었다. 전부터 억누르고 있던 화가 폭발한 듯했다.
“정중하게 사람을 보내면 똑바로 상대해. 도망치고 숨으니까 이쪽도 과격하게 나오게 되잖아.”며칠 간 그녀 주변을 배회하던 사람은 병원검진 때문이었다.
서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던 걸 깜박했다. 그랬지.
그러나 지금 와서 알게 뭔가.
“소리치지 마. 화내야 할 사람은 나야.”영원이 울부짖었다. 주양이 분노를 삭였다. 몇 가닥 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차갑게 명령했다.
“나와. 신영원.”“그렇게 귀찮으면 해치워버려. 그때 그 사람처럼. 너 그런 거 잘하잖아.”“못 할 거 같아?”영원의 턱을 움켜잡아 그가 똑똑히 말을 박았다.
망가트리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 응시해온다.
한 달 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원은 분에 못 이겨 몸이 벌벌 떨렸다.
닭똥 같은 눈물을 쥐어짜내면서도 암상하게 눈을 치뜬 그녀에게, 그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내가 나쁜 자식인 거 새삼 몰랐다는 식으로 보지 마. 나를 정중하지 못하게 만든 건 너야.”“너는 내가 밉지?”그가 물음에 침묵했다.
“내가 밉지?”“…….”“죽여버리고 싶지?”“…….”“그래서 애한테 복수하는 거지?”그의 눈동자에 작게 파동이 일었다.
“애는 없어. 애는 없어…….” 애는 없다. 그건 그도 알 것이다. 애의 여부 따위와 상관없이 그냥 그녀가 싫은 거다.
잔인하게 짓밟아주고 싶은 거다. 화풀이를 하는 거다.
그가 죽이고 싶은 건 애가 아니라 그녀였다.
그녀가 싫어서,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잔혹하게 구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녀를 수십 번도 죽였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몰아붙여서 놀란 탓이다. 오한이 몰려왔다.
주변이 너무 추웠다. 상실감이 넘치면 몸살이 난다는데 일종의 그런 걸까.
그녀가 주양에게 느끼는 건 분노인데 심장이 딱딱해져갔다. 속에서 불길이 터지는 게 아니라 차갑게 화석이 되었다.
공포였다.
겁에 질려 그녀는 잔뜩 움츠렸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일에 완전히 패닉이 된 얼굴이 백짓장이었다.
임신이라니…… 그런 거 생각도 안 해봤는데.
공포는 가짜 분노를 삽시간에 얼려버렸다.
“나도 네가 미워.” 주양은 몇 번이고 되뇌는 영원을 봤다.
그가 영원의 손등에 그의 손을 포개었다.
바르작거리는 영원을 제압한 주양이 그녀의 손에 투명용기를 쥐여주었다.
영원은 그가 뭐하는 건가 눈물로 더러워진 얼굴로 멍하니 쳐다봤다.
그가 영원의 손을 둥글게 말아 용기를 우드득, 형체 없이 구겨버렸다. 영원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천만에.”그가 나직이 답했다.
“나는 누구를 미워할 만큼 감정을 쏟지 않아. 널 좋아하지도 않지만……, 미워하지도 않아.”어느새 전신을 휩쓸던 태풍 같은 떨림이 멎어 있었다. 갈비뼈를 가르고 철심이 박혀 들어오는 듯 했다.
그가 달라붙는 시선을 피하듯 곧바로 일어났다.
“검사는 다음에 하죠. 그쪽 마음이 준비가 되면 그때.”굳이 덧붙여줄 필요 없는 부연설명들이었다.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오롯이 영원을 위한 해명이었다.
그 정도까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돌아서려는 그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그가 멈추었다. 영원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혼자서 못 일어나겠어.”고르고 고른 말이 기껏 그거였다. 한심하다는 거 안다.
주양은 가지가지 한다는 식으로 돌아봤다.
그러나 아까처럼 위압적이고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영원은 그의 눈빛만 보면 이제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무섭게 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꽤 착한 구석이 있어서 손길을 뿌리칠 정도로 야박하진 않다는 것도.
영원은 결국에 들어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가 움직였다. 막상 기어오른 거 같아 영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영원 앞에 목을 숙였다. 영원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얌전히 팔 감아.”그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도도한 남자가 그러고 있는 것이 기묘해서 가슴이 간지러웠다.
영원은 그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얼른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떨어질세라 꽉 안았다. 그가 영원을 안아서 밖으로 나오자, 비서가 당황해서 달려왔다.
“제가 하겠습니다.”영원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옷에 코를 더 파묻었다.
주양은 그걸 보다가 저지했다. 그가 제스처를 취하고는 영원을 안아 차에 태웠다.
*
“다음 주에 제주도 백혈병 어린이 자선행사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꼭 참석하시라고 당부하셨습니다.”“회장님 심기가 요즘 불편해 보였는데 이유가 뭡니까.”“얼마 전에, SNS에 올라온 글이 문제되지 않았습니까?” “SNS?”“거문고 명장 조선정 선생이란 여자인데. 평소 소문난 한식 마니아랍니다. 이것저것 사회비판으로 제법 젊은 대학생들한테 인가 높습니다. 며칠 전에 한신호텔을 저격한 글을 올렸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신호텔에 한식당이 없는 게 말이 되냐면서 댓글로 비아냥거려서. 한신호텔 책임자가 사과문을 올렸고 현재 대한민국 최초로 외국인들을 위해 특급 한옥 호텔을 지을 예정이라, 식당이 이전하는 중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번 자선행사 초청 명단에서 빼도록 하세요.”태풍 뒤에 평화가 찾아왔다. 차는 언제 진저리나는 싸움이 지나갔냐는 듯, 평화롭게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영원은 멍하니 떠다니는 흰 구름을 쫓았다. 구김 한 점 없이 화창한 봄의 끝 무렵이었다.
조선정이라. 낯익은 이름이다.
해수의 거문고 스승……하다가 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배가 살살 아팠다. 막혔던 생리가 하려는 걸까.
그들은 그녀를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주었다. 입구까지 짐을 들어준 비서가 명함을 꺼내 건네었다.
“조속히 연락 바랍니다.”병원검진……. 영원은 창백하게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 비서는 누추한 버스터미널을 훑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양 비서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 돌아가면 회의에 늦지 않을 것이다. 빠르게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철퍼덕, 등 뒤에서 나무통이 옆으로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상한 느낌에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신영원 씨?”
*
죽어가는 사람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병원 응급실은 만원이었다.
의사가 베드에 누운 영원을 살폈다. 의식이 없었다.
환자가 언제부터 이런 겁니까?
주양을 대신해 병원까지 영원을 데려온 양 비서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갑작스런 복통…… 혼절.
급작스럽고 짜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똑바로 설명해야 했다.
“보호자 분?”의사의 재촉에 양 비서가 정신 차렸다. 막연히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 주저하다 결국 내뱉고 말았다.
“임신…… 임신 중일 수 있어요.”주양은 응급실 바깥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양 비서가 영원을 병실로 옮기고 돌아왔을 때 주양은 뭔가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비서는 당혹스러웠다. 좀 당황한 듯 보이는 상사의 모습이 낯설었다.
비서가 불렀지만 주양은 반응하지 않았다.
주양은 머릿속이 하얬다. 그의 귓가에 비서의 목소리가 의미 없이 메아리쳤다.
‘이사님.’‘이사님.’‘……정신 차리세요. 이사님.’1년이 지나, 신부가 실종되고, 처음 장 경감을 만나러 백운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주양은 문득 그날 일을 곱씹어보았다.
정신이 나갔다는 말의 의미를 주양은 그날 처음 배웠다. 정신이 반쯤 나갔다.
영원만이 아니었다.
주양도, 그런 주양을 보던 양 비서도.
그때, 그들은 각자 무언가에 잡혀간 것은 아니었을까? 귀신 같은 것에 홀려서…….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
-실종 10일째
누구도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 거라고 미리 알고 사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그저 견디는 존재이다. 불행한 일이 닥친 후 수습하는 존재이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지금의 불행이 있게 한 것은 아닌지. 후회하는 존재이다.
진주양은 과연 ‘후회’란 것을 알까?
진두영이 장 경감에게 넘긴 파일에는 김인택을 살인했다고 시인하는 주양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었다.
처음엔 김인택이 누군지 몰랐다.
수진이 인터넷 검색을 했고, 대산물산 사장이라고 포털에 떴다.
그의 프로필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같이 있었다.
1년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피살당해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진주양이…… 김인택을 살해했다니.”장 경감이 입을 힘겹게 떼자 수진이 심각하게 턱을 쓸며 말했다.
“언론에선 그쪽 마피아들하고 마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이 일겠는데요.” “대산물산이라. 그럼 이 녹음파일에 나오는 노인이…….”“김인택의 아버지, 대산 김 회장이겠죠.”“한신이 대산물산을 파산시켰다는 게 헛소문이 아니었어. 진주양이 대산물산 김 회장의 아들을 살해했어. 신부는 납치되었고. 진주양은 납치된 신부를 가출한 양 숨기기 급급하고 있고. 왜겠어?”“경찰이 신부를 찾겠다고 원한관계 들쑤시고 다니면, 자신의 살인이 드러날 테니까?”아귀가 척척 들어맞았다.
이제야 풀리는 실마리에 장 경감이 오랜만에 흥분했다.
“김 회장, 회사 부도나고 옥살이 하지 않나?”“출소했습니다.”“벌써?”“작년에 대선 끝나고, 올해부터 새 대통령이 취임하지 않습니까? 대통령 취임을 기념해 이번 3.1절에 경제인들을 대거 특별사면 했답니다. 김 회장도 그중 하나고요.”“결혼식 2달 전에 출소를 했단 말이지.”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그 정도면 납치하기에 충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시간이다.
감옥에서부터 자기 아들을 죽인 진주양에게 칼을 갈아왔을 테니.
“김 회장 소재 파악해.”그가 말하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신부실종사건의 유력용의자, 진주양이 아니라 김 회장이야.”세상사는 하나의 원이다.
돌고 돌아 결국 그 원의 시작점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한 남자가 시작한 악연은 원을 완주하게 되는 순간 다시 스타트를 끊게 될 것이다.
이번 출발주자는 살해당한 아들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원수의 신부를 납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