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운명예감2016.10.09.
검은 차량 행렬이 조촐한 산사의 아침을 깨웠다.
한신 오너 일가와 각 계열사 장을 맡고 있는 사장단 60여 명이 사찰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평소에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복장을 갖춰 입었다.
얼마 안 있어 범오사 주지승이 경내로 들어왔다.
진 회장은 이 사찰에서 가장 큰 어른인 주지보다 더 늦게 도착했다.
수행인들의 부축을 받고 진 회장이 법당에 앉고서야 식이 거행되었다.
노승의 염불이 경내에 엄숙하게 퍼졌다.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 아약향…… 나모라 다나다라……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향나무 위패에 붓으로 쓴 이름.
亡子 진준영.
이름 앞에 덧붙인 한자는 ‘망자’라는 뜻이었다.
주양의 아버지이자 진 회장의 장자, 故 진준영의 제사였다.
진 회장은 노쇠한 몸을 끌고 비서의 부축을 받으면서 죽은 혼에게 끊임없이 절을 올렸다.
모두들 숙연하게 임하는 가운데 주양은 홀로 풍경 울리는 산사의 밖을 응시했다.
“어쩜. 눈물 한 점 안 보이는 것 봐.”뒤에서 친척들이 수군거렸다.
“아무리 일면식 없는 아비라도 감정이 안 느껴지나?”“에이. 애비가 애비 같겠어?”촛대 위에서 넘실대는 수십 개의 불덩이들.
머리 네 개 달린 신들은 성난 도깨비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삼존불상은 나란히 앉아, 여섯 개의 눈알로 서늘히 주양을 주시했다.
네 죄를 알고 있다는 듯.
인간의 검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압도했다. 탱화들은 어김없이 그를 매질하고 훈계했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나무천수보살마하살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니라간타 나막하리나야 마발다이사미 살발타
살생하여 지은 죄를 참회하겠습니다.
투도하여 지은 죄를 참회하겠습니다.
마음이 사라지고 죄업 또한 같이 사라지네.
죄와 마음이 사라져서 두 가지 모두 사라지면
이 경지를 참회라 하나이다.
마음을 달리하면 있던 죄도 씻겨진다니.
현자의 가르침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알아들을 턱이 없다. 저 또한 현실성 없는 개소리였다.
인간에게 ‘탐욕’을 갖지 말란 것과 ‘욕망’을 꿈꾸지 말라는 것만큼 멍청한 소리가 또 있을까.
참회한다고 죽어 극락정토에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가.
불교에서는 지은 업은 수십억 년이 흘러도 다른 생에서도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알 게 무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죽음 다음 생 같은 것.
인간에게 바로 이곳이 극락인데.
탐욕으로 건설된 성에서 극락을 맛볼 수 있는데.
재가 끝나고 남자고 여자 할 것 없이 한신 일가들이 그룹 총수에게 90도 직각으로 인사를 했다.
진 회장은 기업 총수가 아닌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 같았다.
부처에 절을 한 지 10분도 안 되어서 저들은 속세로 돌아가 또다시 남을 짓밟을 것이다.
불교에서 행하지 말라던 살생과 투도하여 지은 죄로 저렇게 극락을 얻어갈 것이다.
회장은 일가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긴장이 한층 풀렸는지 친척들이 담아두고 있던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곧 초상 치를 준비하라더니, 웬걸. 10년은 더 누릴 것 같은데?”“진 회장이 후계자 자리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둘까.”“진두영 사장 있잖아.”“진두영은 오너가 되기엔 많이 유약하지. 천출의 핏줄이라 그런가. 회장을 전혀 안 닮았어.” “그렇게 따지면 죽은 장남도 외탁했지. 애가 골골했잖아. 근데 그 장남한테 태어난 진주양이가 진 회장을 빼다 막았으니, 웃긴 일이지.”“유전자가 한 대에 걸러 나타난다는 걸 입증하는 셈인가.”“진 회장도 대책 없긴. 손자를 왜 태어나게 했나 몰라. 대 이을 아들이 없던 것도 아니고.”“시팔. 괜히 후계구도만 복잡해져서 우리만 힘들어지고. 뭐, 결과적으론 진 이사가 태어난 게 한신그룹 50년 미래를 내다봤을 때 잘된 일이 되었지만. 아니, 진 회장이 선견지명이 있던 건가?”담배를 구둣발로 지진 그들이 법당을 돌아 나가려다가 주양을 마주쳤다.
“지, 진 이사.” 주양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게…… 우린 진 이사가 떠난 줄 알고…….”주양은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바람결에 풍경이 흔들렸다.
그들의 목소리가 풍경 소리를 막았다. 입을 다문 그들이 짓궂게 된 상황을 얼버무리고 떠났다.
“그, 그럼 우린 갈게.”피차 서로가 불편해질 이야기라면 덮어두는 것도 센스였다.
풍경이 멈췄다. 주양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관심사는 풍경 소리가 아니었다.
불당 안이었다. 주지승이 안에서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처사님에 대한 걱정이 말이 아니십니다.”주지승의 우려에 진두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원이 욕이 되는 순간 괴로움은 처사님을 집어삼킬 겁니다.” “아비가 자식을 갖고 싶은 게 욕입니까? 전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겁니다.”며칠 전에 본가에 찾아와 아들이라고 호기롭게 장담하던 것과는 다르게 조급한 얼굴이었다.
주양은 느긋하게 문가에 기대어 앉아 대화를 엿들었다.
“이번에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아들이 아닐까 봐 염려됩니다, 스님. 저번에 말씀해주셨던 극귀상을 가진 관상이란 거 말입니다. 상대가 가진 관상의 도움을 받아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는…….”처사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수척해지길래 노승이 허튼소리를 했다.
절박한 사람에게 불을 지핀 게 아닌가 싶어 노승은 조금 후회됐다.
“그런 관상은 배우자의 기가 세야 합니다. 하지만 처사님은 기가 약하시니, 잡아먹힐 게 분명합니다. 처사님께는 처사님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줄 분이 필요합니다. 그런 분은 희귀할 뿐더러 찾는다 해도 처사님과의 궁합도 맞아야 하는데. 그런 여자를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찾기만 하면, 가능하단 소립니까?”“바늘구멍에 낙타 넣기입니다. 포기하십시오.”“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이미 가진 게 넘치는데 더 갖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 노승은 화가 났다.
“인연을 억지로 엮으려 하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다른 인연까지 잃는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인연이 끊길 수가 있어요!”관상에 극귀상이라는 것이 있다.
관상이 너무나도 좋은 나머지 상대방의 운명까지 바꾼다는.
만약 처사가 극귀상을 만난다면 그건 지금 부인이 아닌 다른 여인이었다.
아들을 낳게 된다면 다른 여인의 태를 빌려야 한다. 아내에게 크게 상처 주는 행동이었다.
크게 꾸짖어서라도 욕심을 떨쳐내길 바랐으나 진두영이 깨달은 건 노승의 바람과 달랐다.
“혹시, 이미 아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여자를……?”한순간 노승의 머뭇거림을 진두영은 거칠게 잡아챘다.
“그게 누굽니까. 그게……!”노승이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를 높이던 진두영도 단숨에 문가를 봤다.
주양이 일어났다. 전화 통화를 하느라 못 들은 척 안주머니에 폰을 넣으며 나타났다.
“큰소리가 나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주양의 등장에 진두영은 뻣뻣해졌다.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노승에게 차후 다시 찾아뵙기를 약속하고 진두영은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
영원은 버스정류장에서 또 택시를 탔다.
산속까지 기어들어와 108계단을 오르니 땀이 비 오듯 범벅이었다.
평소 저질 체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원은 범오사 일주문에서 숨을 골랐다. 주머니에 동전이 가득해 두 다리가 무거웠다.
택시기사가 가관이었다.
기사가 동전밖에 없다고 오백 원짜리로 거슬러줬다.
그마저도 잘못 계산할 수 있었다. 백 원짜리가 섞여 있을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번호판을 외워놓았다.
만약에 백 원이라도 비면 택시 협회를 고소해버릴 거다.
오면서 줄지어 선 검은 옷 사내들을 지나쳐 왔다.
남자들은 날카롭게 영원이 살피다가 위협적이지 않은 걸 알았는지 관심을 껐다.
오늘따라 연이어 고급 차들이 빠져나갔다. 중요한 행사가 있었나 보다.
일주문을 지나 마지막 층간을 앞두고, 남자 둘이 계단을 마주 내려왔다.
“최 원장이 이번 출산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합니다.”두 사람은 심각하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말에 젊은 남자가 심각해졌다.
“그 정도입니까.”“임신중독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나타납니다. 세 번에 걸친 출산으로 자궁벽도 많이 약해졌고, 노산이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아내는 지난번보다 몸이 산뜻하다는데요.” “아들 욕심은 사모님이 더 크신 거 아시잖습니까. 무리하고 계십니다.”중년은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남자한테 존댓말을 썼다.
둘은 상하관계가 명확했다. 눈길이 젊은 남자 쪽에 자연히 고정되었다.
보기 드물게 고상해 보이는 미남자였다. 그는 이제 서른 초중반으로 밖에 안 보였다.
하얀 얼굴은 귀티가 흘렀고 색소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금세 상처 입을 것 같아 보였다.
서책만 파는 조선시대 선비가 딱 그의 이미지였다.
“김 부장도 성철스님처럼 내가 추해 보입니까.”하얀 얼굴의 말에 김 부장이란 중년이 순간 안타까운 표정을 얼굴에 스쳤다.
“성철스님 말씀은 괘념치 마세요. ……다만, 사모님이 어떠실지. 결국에 씨받이를 구하자는 건데. 장인 되시는 태평양일보 사주마저 돌아서면, 비빌 언덕 하나를 더 잃게 되는 셈입니다.” “성철스님은 의중에 둔 여자가 있긴 한 모양입니다. 사찰에 오는 불자 중 하나일 텐데. 잘 살펴보세요.”계단이 폭 1m 정도밖에 안 되는 돌계단이었다. 셋이 지나기엔 협소했다.
영원은 양손에 반찬통까지 낑낑대고 동전 개수를 헤아리고 올라가다가 하얀 얼굴과 부딪혔다.
동전 아홉 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충돌한 하얀 얼굴은 잠시 주춤했지만 무심히 갈 길을 떠났다.
충돌하고 사과도 안 한 것까지는 좋다 이거였다.
계단 아래에 있는 동전을 주우려고 손을 뻗는데, 하얀 얼굴의 구둣발에 차인 동전이 몇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108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야!”영원은 그들에 대고 삿대질했다.
그들은 설마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 당신 말이야! 당신!”그제야 몇 계단 내려간 남자 둘이 돌아보았다.
“사람 치고 그냥 가기냐?”영원은 무례한 하얀 얼굴한테 외쳤다.
계단 아래에 지키고 있던 장정들까지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덩치 큰 남자가 하나가 대략 내용을 파악하고 다가왔다.
“저랑 말하시죠.”“난 저 인간한테 말했는데. 넌 뭐야?”“저희 쪽에서 먼저 실례는 했지만, 함부로 저 인간 이 인간 할 분이 아닙니다.” 영원은 웃었다. 꼴에 경호원이라고 두둔하긴.
저런 인간들 하루에도 열댓 번도 상대하는 게 그녀 직업이었다.
목에 깁스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꼴불견이다.
“돈 좀 있으면 사람 치고 그냥 가도 되는 거야?” 영원이 이죽거렸다.
“그게 싫었으면 먼저 예의를 지켰어야지.”“서로 반말 찍찍 내뱉지 맙시다.”“나잇살 처먹고 버릇없는 것도 자랑이라고.”쥐방울만 한 영원에게 덩치가 쓴소리 하려는 그때였다.
“그만하세요.”조금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하얀 얼굴이 나섰다. 그가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길도 좁은데 내가 무례했어요.”부드러운 생김 그대로 무척 다정한 어조였다.
나 배운 사람이야. 라고 티를 내는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이런 부류들을 많이 겪어봤다. 웃는 얼굴 뒤로 칼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었다.
“잃어버린 돈이 얼마죠?”선심 쓰듯 물으며 그가 머니클립에서 수표 한 장을 빼냈다.
솔직담백하게 돈으로 해결 붙일 심산이다.
5백 원짜리 아홉 개면 벌써 사천 원이 넘는다.
그러면 새벽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발에 땀나도록 뛰어도 못 구하는 액수다.
돈 아끼려고 해수가 택시 타라고 쥐여준 돈으로 불편하게 시내버스에 끼어서 2시간을 왔는데.
영원은 입을 앙다물었다.
속물로 취급당하는 거 같아 부아가 치밀었지만, 견물생심.
처음 보는 백만 원짜리 수표에 사고가 얼어붙었다.
“뭐야…… 이거?”진심일까. 이렇게 큰돈을 아무렇지 않게?
말간 눈빛에 남자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
영원의 시선을 하얀 얼굴은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부끄러워했다.
무례하게 군것도 모자라 스스로 자기가 갑질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미안해요.”하얀 얼굴은 얼른 돈을 넣고, 동전을 주웠다. 중간중간 덩치들이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나 사장님이라며 돌아가시라고 말렸다. 하얀 얼굴은 손에 흙을 묻혔다.
“내가 잘못한 일이니까 내가 해결해요.” 고지식한 남자였다. 꿋꿋이 마지막 동전 하나까지 자신이 주웠다.
영원은 얼른 주우려다가 다가온 손과 얽혔다. 영원은 놀라 얼른 손길을 피했다.
과민 반응에 그가 예의상 웃어주었다.
영원은…… 그 얼굴에서 어렴풋이 주양을 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길에서 만난 타인인데.
이 정도면 병도 중증이다.
하얀 얼굴이 뭐라고 불렀지만 영원은 벌떡 일어나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쯔쯧. 정신 빠진 년.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영원은 장아찌를 받으러 여스님이 있는 곳에 왔지만 그녀는 없고, 도리어 땡중을 만났다.
만나면 잔소리로 귀찮게 하는 노인네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돼 비구니가 예불 드리러 간 모양이다.
“또 심부름인 게야?”땡중이 영원이 손에 든 반찬 통을 못 마땅하게 봤다.
영원이 듣는 척 마는 척 목이나 긁자 땡중이 죽비로 그녀를 때렸다.
딱!
“아! 왜 때려!”영원은 어깨를 맞고 찡그렸다.
“젊은 놈이 왜 가는귀가 먹었어! 머리를 귀신 산발하고 다니니 그렇지. 또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목청을 왜 그렇게 크누. 따라 오거라.”땡중이 뒷마당으로 영원을 데려갔다. 장아찌를 장독에 익혔다. 중간 중간 마주친 불자들이 땡중을 보고 몹시 공손히 합장했다.
땡중은 의아할 정도로 꽤 덕망이 높았다. 이 절의 제일 높은 주지승이라나 뭐라나.
땡중이 가는 길에 계속 버럭 성을 냈다.
“앞으로 네 스승에게도 일러야 할 것이야. 밥반찬 얻어가려거든, 시주를 지금보다 곱절은 넉넉히 하라고. 허구한 날 반찬 타령이야. 여기가 무료급식소 아니고.”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짠돌이.
땡중은 영원을 해수로 알고 있었다.
스승에게 아부 떨기 위해 해수는 자신이 매번 반찬을 대령하는 척했다.
“그리고 너는 다리 밑에서 주운 자식이냐? 말만 한 처녀 꼬라지가 옹색해. 그래서 시집은 가겠니?”“그놈의 단정, 단정, 단정, 내가 자기 딸도 아닌데 웬 참견?”영원이 꿍얼대면 주지승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애틋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너는 관상이 좋으니까 말만 좀 곱게 하면 좋을 것이다.”장독에서 취나물 장아찌를 퍼주며 땡중이 말했다. 영원은 비웃었다.
“눈이 삐었수? 산속에 틀어박혀 살더니, 심미안이 조선시대에 머무르셨나? 관상 따라 인생 풀리면 난 벌써 재벌가 시집 열두 번도 갔겠네.”“너는 네 못된 심보 때문에 팔자를 빌어먹고 있어. 본디 아주 귀한 관상을 타고났어.” 요즘 중들은 잿밥에 관심이 많다.
깊은 산중에 파고들어가 도나 닦을 것이지.
무당도 아닌 주제에 무당인 척, 부적도 써주고 관상도 봐주고.
그의 말대로 귀한 팔자인데 이러고 사는가?
남자 복?
26년 인생 동안 남자들이 다 그녀를 지뢰밭처럼 피해 다녔다. 무슨 소리.
영원은 보자기로 반찬통을 단단히 여몄다. 땡중이 영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허리를 꾸벅 숙이고 팽 하니 돌아섰다.
그런 영원을 보면서 그가 혼잣말했다.
“얼굴에 도화살이 피었으니, 원든 원치 않든 피곤해지겠구나. 향기가 좋은 꽃에 수벌들이 꼬이는 건 자연의 이치요. 한바탕 악악대야 상욕상투가 끝나겠구만. 쯧쯧.”영원이 사찰에 오면 꼭 하는 일이 있다. 탑돌이였다. 탑을 백 번 돌면 소원을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신해수가 언젠가 큰 코 다치게 해주세요.’ 이번에도 그렇게 빌려고 했는데 심보 때문에 인생을 말아먹고 있다는 땡중의 말이 괜히 신경을 쿡쿡 쑤셨다.
남을 미워하는데 내 힘을 소진하기 싫어졌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영원은 바닥을 흡입하듯 노려보았다.
사찰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까 분명 떨어트린 동전이 많을 거다.
그러다 홍예다리 아래까지 갔다.
개울 바닥에 동전이 반짝거렸다.
*
주양은 한적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예다리 부근에서 섰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아래에 차가 있었다.
양 비서와 한적한 돌담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울렸다.
주양은 20분 전 노승과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내가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 하여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을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출생은 삶으로 치자면 극히 작은 요소일 뿐입니다.’노승은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 말했다.
주양은 어쭙잖은 충고가 가소로웠다.
‘이런 팔자 좋은 곳에 앉아 그런 얘기, 누구들 못 하겠습니까.’노승은 그의 눈동자에서 불신과 날카로운 감정을 보았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스님. 바깥은 이미 사람이 살 곳이 못 된 지 오랩니다. 부처의 진리도 좋지만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읽으시지요.’주양은 노승에게 충고를 되돌려주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느긋하게 뒷짐을 진 노승이 먼 산을 향해 대화했다.
‘가는 길에 까마귀를 만나겠구려. 좋은 징조요. 예로부터 까마귀는 길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길 안내를 한다는 설이 있다오.’주양이 노승을 돌아봤다.
노승이 한낱 어린 짐승인 주양에게 또 한 번 충고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라오. 그 까마귀가 어디로, 누구에게 안내해줄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 주양은 빠르게 그 말을 무시했다.
길을 잃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
말은 감사하지만 성미가 피하고 도망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가온다면 맞서겠다. 정공법이 그의 특기였다.
홍예다리 건너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가 멈춰선 것은 까마귀 때문이었다.
노승의 말이 귀 언저리에서 다시 재연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까마귀를 만나겠구려.’정말 시커먼 까마귀가 나무에 앉아 그를 맞이했다.
까마귀는 부리에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다.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댈 때마다 가지 끝에 달린 붉은 동백꽃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까마귀가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꽃이 툭, 다리 아래 개울에 떨어졌다. 몸을 피신시키지 못하고 물살에 등 떠밀린다.
주양은 돌아다니는 꽃을 눈으로 쫓았다. 꽃부리가 걸렸다. 누군가의 발끝에서.
시선을 들었다.
그 순간, 주양의 눈동자가 동요하며 일렁였다.
‘좋은 징조요. 예로부터 까마귀는 길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길 안내를 한다는 설이 있다오.’‘그 까마귀가 어디로, 누구에게 안내해줄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
영원은 차가운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난데없이 다가온 꽃을 보고 신기하게 물장구를 치는 모습은 천진했다.
그에게 그녀는 다람쥐나 고슴도치, 그런 작은 동물과를 연상시켰다. 애초에 그와 종이 달랐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건 그가 더 잘 알았다.
진즉부터 길을 잃고 있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남들은 이해하기도, 납득할 수도 없는 부분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혼돈을 껴안고 나왔고 그것은 그를 남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싫고 좋음이 뚜렷한 건 편리한 생활이었다.
난폭한 친절. 단순하게 선택하기로 하고서야 비로소 찾아온 평화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신영원, 저 여자로 인하여…….
숲과 숲에서 바람이 번져 하울링을 일으켰다. 거친 물살 같았다.
그의 세계를 흐트러트리기로 작정하고 달려드는.
고개를 든 그녀가 주양을 발견하고 뻣뻣해졌다.
본능이다. 영원이 그를 보고 몸을 움츠리는 것은.
심장이 뻐근하게 반응했다. 불쾌감 비슷한 저림이 걷잡을 수 없이 증식했다.
주양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다시 한 번 그녀와 종이 다르다는 걸 확인한다.
악어와 악어새.
그들에게 공생은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