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27화 (27/83)
  • 27화. 2라운드2016.10.06.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푸른 밤 ? 나희덕]

    -1년 전, 영원 26세.

    바로크풍 분수대였다. 깨끗하고 투명한 물이 쉼 없이 분수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하얀 파라솔이 씌워진 카페 테이블에 앉아 주양은 진 회장을 바라봤다.

    갑작스런 호출에 예정된 스케줄을 취소하고 본가에 왔다.

    북한산의 정기를 물려받은 경치 좋은 부촌 한가운데였다.

    얼마 전 증축을 끝낸 본가에서 회장은 요양을 하고 있었다.

    로즈마리 차향이 그득했다.

    정원에서 짧게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은 개들 보는 재미로 살아. 쟤들은 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 줄밖에 모르거든.” 헥헥 혀를 길게 빼던 개들이 진 회장이 공을 던지자 득달같이 튀어나갔다.

    나이가 들고 회장이 부쩍 적적해 했다.

    스위스 왕실 족보가 있다는 버니즈 마운틴 독 두 마리를 안겨주었다.

    휠체어에 앉은 진 회장 주변으로 집사를 포함한 고용인 다섯이 대기 중이었다.

    “오늘이 김 회장 아들 49재라며.”진 회장의 물음에 주양이 답했다.

    “김 회장은 교도소에 있고, 막내딸이 혼자 치른다고 합니다.”“애비는 빵에서 말년을, 아들은 타지에서 비명횡사, 그 집안도 참 겹겹이 흉사가 겹쳐. 네가 얼굴이 그래가지고 온 게 언제지?”진 회장이 주양을 살폈다.

    핏기는 거의 가셨지만 광대 부분은 아직 푸르스름했다.

    의사가 2-3일 정도면 수월하게 낫는다고 했다.

    불가피하게 4년 동안 안 쓴 월차를 한 번에 몰아서 자택 근무를 했다.

    주양이 답했다.

    “딱 49일째입니다.”  진 회장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양은 양심의 가책 없이 빳빳이 고개를 들 뿐이었다.

    진 회장이 애써 평온하게 입을 떼었다.

    “자식 먼저 보낸 심정은 나도 잘 알지. 옛정도 있는데 마지막 인사치레는 해줘라. 뒷말 나오지 않게.”주양이 그러겠다는 듯 살짝 고개 숙였다. 잠시 뒤에 주양의 삼촌인 진두영이 합류했다.

    상기된 얼굴은 희소식을 안고 붉었다.

    “좀 늦었습니다.”“지각생 주제에 늦은 게 자랑이다.” “경하 드립니다, 회장님. 집안에 후손을 하나 더 보게 되었습니다.”공개적인 고백에 일순 테이블에 모호한 긴장감이 돌았다. 희비가 엇갈렸다.

    진두영은 서늘한 미소를 품었고 진 회장은 침묵을 지켰으며 주양은 입가에 댄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진 회장이 “아들이냐?” 하고 물었다.

    진두영은 한 차례 머뭇거렸지만 대답은 확고했다.

    “아들일 겁니다. 반드시.”악착같은 집념이 누덕누덕 기워진 허름한 미련이었다.

    “대주주 나부랭이들이 안 그래도 너 벼르고 있는 거 알지.”진 회장의 말에 진두영이 고개 숙였다.

    “불효가 막심합니다.”“내가 너 내 아들이니까, 동정심 때문에 그 자리 유지시키는 거야. 이번에도 꽝이면, 너한테 회장직 못 넘겨.” 딸은 회장에게 제비뽑기의 꽝과 같은 의미였다.

    아들에 대한 회장의 집념은 회사 사랑만큼이나 대단했다.

    남호선호사상이 뼛속까지 박힌 보수적인 노인이었다.

    왕좌를 걸고 회장이 못 박자 진두영이 더욱 긴장했다.

    진두영은 이번까지 합하면 4번째였다.

    숙모의 나이도 있고 3번째까지 딸이라서 포기할 줄 알았건만 또 애를 가졌다.

    그 집념만큼은 칭찬해줘도 모자라다. 불굴의 의지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진두영이 다음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진 회장이 기력이 쇠진해 인상 쓰더니 손을 흔들었다.

    “둘 다 그만 꺼져. 피곤해.”집사가 회장의 휠체어를 밀고 사라졌다.

    스케줄을 취소하고 온 거라 일이 밀렸다.

    주양이 일어나는데 침착한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3일 뒤에 있을 형님 제사 때문에 부르신 거니.”주양이 천천히 진두영을 돌아봤다.

    벌써 아들을 가진 양, 진두영은 호기롭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건 무정한 양반이어도, 먼저 죽은 첫째 아들 제사는 자기 귀 빠진 날보다 챙기시는 분이잖니.” 한층 여유를 부리듯 눈길이 온화하게 주양을 어루만졌다.

    부처 같고 보살같이 인자한 모양새였다.

    진두영과 소소하게 일상을 나눌 만큼 친분을 나눈 기억이 없다. 주양이 최대한의 예의만 갖추고 돌아서는 그때였다.

    “나는 가끔 널 보며 상상해. 형님이 네 나이였다면, 지금의 너 같았을까?”평상심을 가장한 목소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양의 뱃속을 긁어댔다.

    고작 10살 차밖에 안 나는 다 큰 조카를 걱정하는 삼촌의 심정으로, 진두영이 입가에 쌉싸름한 자조를 곁들였다.

    “네 아버지시다. 이번 제사엔 친척들 앞에서 슬픈 기색 정돈 내비치는 게…….” “죽은 김인택이가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던데.”칼 같은 어조가 도 넘는 오지랖을 잘라냈다.

    김인택. 죽은 망자의 이름에 진두영이 흙빛을 뒤집어썼다.

    “방금…….”마치 들어선 안 되는 걸 들은 사람처럼 경직됐다.

    주양은 조소했다. 자신이 싸지른 똥을 감당 못 하고 스스로가 친 덫에 걸린 꼴이었다.

    “김인택이 무슨…… 얘기를 했다는 거냐.”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주양은 진두영을 끝 간 데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트려놓고 발을 떼었다.

    “삼촌이 묻는데 돌아서?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가려는 어깨를 진두영이 험악하게 움켜잡았다. 피어오른 초조와 불안에 음성이 높아졌다.

    주양이 어깨를 내리누른 손을 싸늘하게 훑었다.

    “생일에 죽으라고 사람을 보내? 것도 예의는 아니지.”차가운 일갈에 진두영이 손끝을 움츠러트렸다.

    단독으로 김인택 혼자 그런 일을 벌였다고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작고 응축된 그것은 처음엔 그저 티끌 같은 불안함이었을 것이다.

    야금야금 자기 자리까지 치고 올라오는 존재에 두려움이 엄습했을 거고, 질투는 이젠 자기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게 된 졸렬함으로 전락해 버렸다.

    유순해 보이는 저 겉껍질에서 한 꺼풀만 벗겨내도 놀라울 정도로 검은 속내가 들끓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김인택을 사주한 게 한 가족이라고 떠들 마음은 없습니다. 내 얼굴에 침 뱉기니까. 하지만 회사 갖고 분탕질하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면, 그야말로 불효입니다.”“…….”“해줄 때 새겨들으세요. 조카의 충고를.”완벽하게 패색이 짙어진 진두영을 놔두고 주양이 물러났다.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진두영의 사람이 마주 올라왔다.

    사내는 주양을 지나쳐 진두영에게 무언가 귓속말로 전했다.

    “범오사 성철스님이 오늘 조계사 간부 회의에서 돌아오셨답니다.” 그들이 대화하다가 멈춰 있는 주양을 의식했다. 주양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범오사에 뭐가 있습니까?”차에 올라타며 주양은 양 비서에게 물었다.

    “갑자기 범오사는 왜 물으십니까.” “요즘 진두영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범오사에 출근도장 찍는데. 가까운 곳도 아니고, 2시간 거리의 사찰을 이틀 연속으로 찾아가야 할 이유가 뭡니까.” “범오사 스님과의 면담이라면 뻔하지 않습니까?”주양은 심상하게 답을 맞혔다.

    “아들 점지.”“더 파봐야겠지만 숙모님이 아들 낳을 비책을 찾은 게 아닐까요?”양 비서의 말에 미간을 쓸며 주양이 미끈하게 입술을 꿈틀거렸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더니.

    “그 범생이가 약은 수를 다 쓰고. 어지간히 똥줄이 탔나 보군요.”   아직 성별이 정해지지 않은 태아를 아들로 바꿔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발전된 문명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무슨 수로 바꾼단 말인가.

    “스님의 부적? 그깟 종이쪼가리로 뭘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양 비서는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었다.

    “꼭 그렇게만 보실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법무법인 다무 얘기 유명하잖습니다. 꼴통 아들 오수 끝에 사법시험 붙인 거. 그 집도 삼고초려 끝에 그 스님한테 시주해서 됐다고 합니다. 또, 김 차관 댁 불임 딸이 10년 만에 후손 이은 것. 그것 역시 그 스님 부적 덕이라고 합니다.”  “숙모님 올해 나이가?” “서른여덟 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아직 애 하나는 충분히 더 생산할 수 있는 나이군요.”주양이 앞좌석 양 비서의 뒤통수를 보았다. 우드득, 우드득, 목 관절을 풀었다.

    “정말 아들이라도 덜컥 낳으면, 그거야말로 닭 쫓던 개, 낙동강 오리알 짝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아들을 낳는다고 못 뺏을 왕좌는 아니지만, 기왕이면 예쁜 길로 꽃가마 타고 가는 게 그림이 좋다.

    주양은 그렇게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타이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타이였다.

    그러나 그는 위치를 바로 잡다가 어렴풋한 기시감에 조용히 타이를 들어봤다.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체크 패턴 타이는 심해 바다 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쪽빛……

    그때 그 ‘넥타이’였다.

    주양은 덧그리듯 엄지로 타이 끝부분을 한 번 쓸었다.

    향기만큼이나 깊게 박혀 있다.

    그러자 한 여자의 목덜미가 떠올랐다.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목덜미…….

    그녀가 이 쪽빛 타이로 머리를 동여매면 어떨지 상상해봤다.

    이 실크 소재처럼 머리카락도 부드러웠다.

    그가 다가가 손으로 타이를 풀자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허리를 덮는 긴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에서 놀았다.

    고개를 숙여 향을 맡아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코끝에 머리카락의 관능이 짙게 배어 있다.

    마침내, 여자가 그를 돌아봤다. 여자 얼굴이 드러나려는 순간, 주양은 타이를 반사적으로 꽉 움켜쥐었다.

    더 이상의 진행을 막듯.

    영상은 급속히 허물어졌고, 향기와 체취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는 현실감을 되찾았다.

    주양은 피가 통하지 않게 타이를 쥔 손바닥을 폈다.

    미처 제어하지 못한 힘에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수석 양 비서와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병원 검사 결과 나올 때 되지 않았습니까?”주양의 물음에 양 비서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4주에 임신이 아님을 확진받기로 한 걸 떠올리고 답했다.

    “신영원 씨, 그날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직원이 몇 번 백운당에 찾아갔지만 이리저리 도망을 다녀서.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합니다.”비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가 굳었다.

    백미러로 보스의 날선 눈초리가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정색하는 눈빛이 매서웠다.

    “죄송합니다.”“이번 주 안으로 해결보세요.”

    *

    영원은 샤워를 끝냈다. 세면대 거울을 쓱쓱 닦았다.

    뿌옇게 서린 김을 지우자 음산한 얼굴이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영원은 오늘은 왜인지 새삼스레 자기 얼굴을 뜯어봤다.

    새침하게 치켜 올라간 눈동자는 불만이 가득했고, 샤워를 한 기가 남은 홍조 어린 뺨과 입술은 한층 발그레했다.

    ‘그냥 그저 그런데 주양은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몹시 이 얼굴이 마음에 드는 듯 감겨왔던 목소리가 의아했다.

    회로신경 마디마디가 찌릿찌릿해질 만큼.

    ‘최 사장이 정말 널 망가트리려 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조롱에 가까운 말엔 만족감이 짙게 배어났다. 주양은 이 얼굴을 오래도록 뜯어봤다.

    ‘무언가 전과 달라진 걸까?’ 시간이 흐르자 그저 무표정한 눈동자가 변질되어갔다.

    여자는 처음엔 담담하게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번들거리더니 기름져진 동공이 전보다 음탕해졌다.

    왈칵. 경멸이 그대로 영원 안에서 돋았다. 나른하게 젖은 눈매는 어딘가 타락해 있었다.

    취기 오른 듯 상기된 뺨과 쓸데없이 더 천박해진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였다.

    꽤 질 나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그때, 얇은 입술 끝이 비열하게 치솟았다. 거울 속의 여자는 영원을 비웃는 듯했다.

    ‘밝히는 년.’어디선가 환청이 들렸다. 영원은 순간 깜짝 놀랐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얼른 욕실을 나왔다.

    발밑이 후들거렸다. 그녀는 타월에 얼굴을 파묻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신거울에 그녀가 비쳤다.

    영원은 타월을 던져 거울을 덮어버렸다.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영원은 평소대로 괴상망측한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렸다.

    “하아……하아…….”주양이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게 분명하다. 그날은 밤이 어두웠으니까.

    이런 눈동자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하다. 아니, 이미 후회하는지도 모른다.

    영원이 커튼을 쳤다.

    이른 새벽 창밖에 양복 입은 남자가 집 주변을 배회했다.

    주양이 그녀를 죽이려고 보낸 사자였다. 벌써 1주일째였다.

    한 달여 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같이 좀 가자고 잡아끌기에 눈치챘다.

    그날 있었던 살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영원뿐이었다.

    ‘눈엣가시 같겠지. 이제 모든 일이 정리가 되고 날 처리하려는 거다.’ 완전범죄를 달성하기 위하여.

    영원은 겁에 질려 얼른 짐을 쌌다.

    원래라면 백운당에 일찍 출근해서 동전을 주웠겠지만, 오늘은 멀리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범오사였다.

    엊그제 신해수가 알랑거리면서 부탁했다.

    ‘이미 한 달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시간 빼기가 힘들 것 같아서. 내일 당장 가달란 부탁 아니야. 너 시간 널널할 때. 네 마음 내킬 때, 내 대신 스님한테 좀 갔다 와 줄래? 대신에 네가 탐냈던 노란 원피스 줄게.’범오사는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사찰이었다.

    해수의 거문고 스승이 불교신자인데 거기 여스님과 막역했다.

    해수 스승은 그 여승의 장아찌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긴다더니.

    까탈스런 입맛 덕에 수고는 영원이 다 하게 생겼다.

    이번에도 그래왔듯이 해수인 척 조용히 받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맨입으로 좋은 일 해줄 마음은 없었다.

    ‘부탁하나 들어주면.’영원이 소심하게 바르작거리며 말했다.

    계모가 무서워 신해수의 뒤치다꺼리를 다 해줬지만 이번은 싫었다.

    그걸 아는 해수도 만만치 않은 걸 깨달았는지 난감해했다.

    ‘네가 부탁이라고 하니까 긴장되는데?’‘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려주면 대신 가주지.’‘그 사람?’‘네 남편 만들 거라고 새엄마가 노래 부르는 진 이사 말이야.’해수가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영원은 마음이 차게 식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젠 사양도 안 한다 이거지.

    견딜 수가 없어져서 다시 집요하게 캐묻고 말았다.

    ‘그날 봤어.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그가 파티 초대장을 전해주러 왔던 날, 차 안에서 해수에게 뭔가를 속삭이던 모습이 내내 신경 쓰여서 근질거렸다.

    수줍어하는 해수의 얼굴. 계속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해수가 가만히 있었다. 말해주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그 침묵조차 가증스러웠다.

    영원은 세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혹시 눈치 빠른 신해수가 영원의 짝사랑을 알아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 침묵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 됐어! 알려주기 싫으면 말아.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재수 없게 네가 얼굴 붉히길래…….’‘예쁘댔어.’영원은 뻣뻣해졌다.

    ‘꽃보다 예쁘대. 내가.’‘…….’‘그 사람…… 나한테 마음이 없진 않은 거지?’붉어진 얼굴로 동조를 구하는 신해수를 지켜보다가 증오스러워졌다.

    꽃이 싫었다. 왜 꽃을 짓밟고 다녔느냐고 누군가 이유를 찾아다니면,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겠다.

    그저, 그저 꽃이 증오스러웠을 뿐이라고. 태어나기를 증오하도록 만들어졌으니,

    ……평생 증오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영원은 외출 준비를 끝냈다.

    생리대를 챙길까 말까 고민했다. 달력을 보았다. 2주나 늦고 있다.

    대체 왜 안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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