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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신데렐라-25화 (25/83)

25화. 사랑과 폭력의 차이2016.09.29.

영원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상처가 되었다.

창고라니. 폐기처분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건가.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비친 즉각적인 반응은 무참했다.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실 그 자체라는 걸 말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하자 영원은 속이 들끓었다.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나도 알아…….”“안다고?”“어머니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얘기했어. 재수가 없는 눈빛이라고.”“…….”“싸구려 술집여자 같다고.” 해수 곁에 있으면 영원의 천박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해수에게는 건드릴 수 없는 기품 같은 게 있었다. 수녀 같은, 우아함.

참을 수 없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영원은 엿볼 수 없는 성역이었다.

그녀를 보면 ‘구원’이 찾아졌다. 그에 반해 영원은 어딘가 불길하고 경멸감을 불러일으킨다.

계모는 아버지가 죽은 것이 영원이 재수가 없어서라고 했다. 영원의 엄마는 영원을 낳고 몸이 쇠약해져서 요절했다.

아버지가 실족사한 것도 산행 당일에 영원이 아파 다음 날로 예정이 미루어져서였다.

해수처럼 생겼다면 계모가 자신을 덜 혐오했을까.

그렇다면 이 남자의 눈에 그녀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이마에 새겨진 저주처럼 천박한 눈빛을 가진 그녀를 보고 치를 떨리라. 두려웠다.

“갈 거야.”도망치려 하는데 목덜미가 잡혔다.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오뚝이처럼 일어나자 영원을 그가 도로 잡아 눕혔다.

“갈 거야.”발버둥을 쳤다. 바르작거림 밖에 안 되는 일련의 행동들을 그는 간단히 제압했다. 더 그악스럽게 되돌려주었다.

갈 거야. 놔!

두 숨소리가 폭발할 듯 치열하게 룸을 들썩였다.

영원의 반항이 그 안의 본성을 자극하는지 그가 흥분한 어조로 씹어 뱉었다.

“왜 도망치는 겁니까. 내가 신해수에게 가는 게 싫지 않습니까?”“이제 아니야. 다 필요 없어. 그, 그만할 거야.”형편없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그럴수록 그녀를 더욱더 집요하게 눌렀다. 눈앞이 흐려졌다.

남자의 몸 아래에 깔린 채 숨이 후들거렸다.

포기한 채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뉘자 입이 딱딱하게 돌아갔다.

“너도 내가 경멸스럽잖아…….”영원은 눈을 손등으로 가린 채 말을 이었다.

“네 눈에도 내가 싸구려 같지……?”남자들이 결국에 찾는 건 꽃이다.

누구도 창녀에게 꽃다운 아름다움을 바라지 않는다.

백운당에서 소리 소문 없이 버림당하는 기생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기생에게 애정을 느끼는 남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도 다를 게 없는 예쁜 꽃에 홀리는 평범한 남자였다.

이렇게까지 항복을 받아내고 마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누구보다 그녀의 비참한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야 할 남자인데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영원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는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정제되지 않은 숨결에서 난폭한 욕망을 읽었다.

그가 그녀와 자고 싶어 한다는 것. 그가 오늘 그녀를 보내지 않으려는 것을 깨달았다.

“다람쥐, 토끼, 작은 새…… 순진한 것들……. 살이 연해서 발라먹기 아주 쉬운 것들. 이들에겐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기가, 쉽다.”“…….”“살기 꽤 각박해 보입니다? 물어뜯기 바쁜 맹수들 사이에서.”마치 구애를 하듯, 그가 그녀의 귓가에서 혀를 달싹였다.

“나도 맹수입니다. 근데 난…… 조무래기는 취급 안 해요. 나는 맹수들을 잡아먹습니다.”“…….”“같은 종족을 잡아먹는 포식자라.”“…….”“이만하면 나 꽤 점잖은 거 아닙니까? 당신한데.”맹수를 잡아먹는 그가 한입거리도 안 되는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계속 나를 경멸했잖아.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영원은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심장의 두근거림이 거세어졌다. 웃기지 못할 상황이었다.

“나를 우습게보지 마.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그런 여자?”“너도 내 얼굴을 보고,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여자 같으니까 이러는 거지? 아,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귀찮아했으면서.” 시선을 내리 깐 주양이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두 얼굴이 맞닿을 것 같이 가까워졌다.

“귀찮을 때는 내 심장이 멋대로 뛰지 못하게 겁을 주었으면서…….”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밀착되었다. 한 발짝 잘못 내딛으면 부딪힌다.

“이기적이야.”입술은 아주 짧게 부딪쳤다.

섬광이 터지듯, 아찔함에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데워진 숨결과 함께 그의 입술을 밀려져왔다가 떼어졌다.

짧은 키스의 여운에 영원은 숨이 가팔랐다. 이기적이게도 자신이 필요한 순간, 그녀의 심장을 다시금 쥐려 하고 있다.

“나를 좋아해?”주양이 그녀와 눈을 뒤얽었다. 그는 아주 가까웠다.

그녀의 어디가 그의 욕망을 부추겼나.

“나를…… 사랑해?”뻔히 알면서 물었다.

그가 차갑게 비웃었다.

길게 흩어지는 숨소리…….

그의 말과 표정은 언제나 순서 없이, 예외도 없이, 그녀를 떨리게 했다.

가슴에 꽂히는 형태로, 언어로.

“널, 망가뜨릴 거야.”   폭력에 가까운 말은 사랑한다는 달콤한 언어보다 더 지독하게 영원에게 각인되었다.

그것과 동시에 두 입술이 부딪혔다. 영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입맞춤은 심장의 파열 너머에서 완성되었다.

터진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짐승 같은 격정. 두려워지는 키스에 거칠어지는 숨결이 그의 흉포함을 일깨웠다.

흥분과 키스가 몰아쳤다. 부드럽다가도 거칠게…… 기어이 의식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는 배려가 없었고 영원은 정신이 없었다.

“아프니?”그는 간악하게 귀에 속살대었다.

“아파?”영원의 얼굴에 그의 호흡이 부딪혔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해.”“…….”“아이러니하게도, 미움 때문에 최 사장은 의도치 않게 너를 구하고, 너는 복수를 하겠다고 설쳐댔지만 실은 최 사장에게 평생을 감사해야 했지.”그가 영원의 얼굴을 감상했다.

“최 사장이 정말 널 망가트리려 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하…… 하아. 덥수룩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안, 가려져 있던 외모를 그가 꼼꼼히 살피며 내뱉었다.

조금 감탄을 하는 것처럼 보여 화가 치밀었다.

“날 함부로 대하지, 마.”영원이 이를 악물고 끝까지 내뱉자 그의 이마에 땀이 맞혔다. 그가 비웃었다.

“왜?”“흑……!”고상하지 못한 쾌락에 수치스러워졌다.

오롯이 욕정과 욕망이 선명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젠틀해? 네……가?”너의 어디가. 어디가 젠틀하다는 거야. 미친 새끼……들.

못 믿겠어서 물으려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근육이 단단하게 일어선 상체가 그녀를 덮었다. 그녀의 심장이 으르렁대는 남자의 심장 아래에 포개어졌다.

미칠 것, 같았다.

그가 속삭였다.

“사람들은 이런 내게서 젠틀함을 느끼지.”커다란 손바닥은 온화함을 담고 그녀를 쓰다듬어 내렸다.

“내가 그러한 순간에도 정중하기 때문일까.”정말 온화하기라도 한 남자처럼.

“폭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그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가는 목을 부러트릴 듯 쥐었다.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해.”“…….”“이성을 상실한 폭력은 복수도 뭣도 안 돼. 여긴 동화 속이 아니야. 두 눈을 똑바로 떠.”“…….”“그래야 제대로 도살할 수가 있으니까.”귓가에서 그가 지겹도록 속삭였다.

“알아들어?”그가 그녀와 입을 얽었다. 짙은 키스에 숨이 차올랐다. 심장이 아프도록 크게 뛰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왜, 나도 죽이게……?

“내가 널…… 살려둘 거 같아?”그의 찢어진 눈가에서 흐린 피가, 그녀의 쇄골에 고였다.

“잊어. 내일 확인할 거야.”핏물이 다시 그의 턱 아래서 땀과 섞여 떨어졌다.

선을 긋고 쇄골 아래로 나아갔다. 쇄골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고상한 거짓 뒤로 온갖 더러움을 묻히고 다니는 그를 향해 심장이 뛸 때면 이 사랑은 분명 기형일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 남자의 본질을 알고도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가 입술을 귓가에 밀착시키는 것만으로도 입김이 뜨거워지고, 속눈썹은 부끄러운 듯 가냘프게 떨린다.

영원은 그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 이십대 후반의 새파란 사업가였다.

그가 적선해준 골든 버튼. 너무 찬란하고 예뻐서 그것을 몰래 주머니에 감춰뒀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싸고 귀중한 것이었다.

그만을 위해, 그의 이니셜이 박힌 맞춤 제작된 단추였다.

그것을 영원은 상의 주머니에 지니고 다녔었다.

심장과 맞닿은 곳에.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그 사람과 똑같은 단추를, 심장 가장 가깝게 맞닿은 곳에…….

송두리째 훔쳤다.

송두리째 그는 훔쳐갔다.

송두리째 그녀는 훔쳐졌다.

1년, 2년, 3년…… 4년부터.

언제 자연스럽게 그 마음이 흠모라는 걸 깨달았는지 기억도 아득한 시간들이었다.

‘흠모’ 기쁜 마음으로 공경하며 사모함. 신음할 음(欽)에 그릴 모(慕). 님을 그리며 신음하다.

그녀의 사랑은 ‘한탄’이고 ‘탄식’이며 ‘그리움’이었다.

엄마와 아빠와 함께 행복했던 집. 죽어가던 엄마의 마지막 숨결이 묻어 있는 백운당.

멋대로 우리 집을 점거해버린 그 모녀들을 내쫒겠다고.

이 남자를 이용해서 내 지난날의 행복을 되찾고 말겠다고.

가련하게 죽어버린 엄마를…… 엄마를 위해서…….

하지만 아득하니 잡혀지지 않는 단어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듯, 더 이상 다짐의 말을 완성할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듯 말이 채 나오지 않아 영원은 눈물 나는 얼굴을 가려 버렸다.

다 이 남자 때문이다.

수치, 흠집 난 영혼. 용서되지 않는 지난 세월.

사랑을 아냐고 물었다. 그래. 나는 사랑을 안다.

뜨겁다 못해 지독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간사하다.

사랑은 비열하다.

사랑은 비겁하다.

너를 향하여.

너 하나 때문에……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피를 토하며 죽어간 모정의 죽음 따윈 나 몰라라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숨이 찼다. 뜨거운 손바닥, 손바닥 열기만으로 영원은 범해졌다.

주양이 숨을 억누르며 내뱉었다.

“인간은 점잖은 얼굴 뒤로 짐승의 욕망을 품는 존재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확, 코끝에서 그와 눈빛이 맞부딪혔다.

“네 눈엔 지금 뭐가 보이지.”“…….”“젠틀맨? 살인자?”“…….”“나는 살인을 사랑하듯이 하지. 네가 말하는 사랑에 이런 것도 포함된다면, 몇 번이고 널 사랑해주지.”“…….”“너를 열렬하게 도살해버리고 싶다.”“…….”“한 번만 더 내 주변에서 알짱대.”그것은 서슬 퍼런 위협이었다.

이것은 사랑인가? 아니면, 심장이 떨리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착각한 공포인가.

그는 지금 그것을 일깨워주려는 것이었다.

사랑과 폭력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심장소리가 쿵. 쿵. 쿵. 전이되며 극심한 고통이 그녀를 점염했다.

물 밖으로 나온 고기처럼 심장맥동이 펄떡펄떡 전율했다. 그도 느끼고 있다.

그녀가 진저리치면서도 느낀다는 것.

코끝에 닿아온 그의 숨은 무척 뜨거웠다.

*

네가…….

주양은 잠결에 입술을 달싹이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미워 죽, 겠어…….”미워죽겠다는 말과 달리 영원은 그를 한층 더 꽉 꽉 껴안는다.

“할, 수만, 있다면, 널 딴 년한테, 줘, 버리고 싶어.”‘폭행’하고 있는 것은 그인데 어째서일까……

“사랑해.”다른 여자한테 줘버리겠다가도 또 사랑한다고 한다.

여자의 한 서린 고백에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한테 환장해 있는 년들한테 너를…… 끊임없이 귓고막에 박힐 때마다, 사랑해. 심장이 조였다.

그는 그게 어쩐지 화가 났다.

“그렇게 잘난 넌, 얼마나, 사랑을 잘 알아서.”그렇게 물으면 또 그녀가 주양을 보았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눈으로. 주양을 보았고 그렇게 주양을 보며 답한다.

“알아.”……지금도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그 순간 그는 깨닫는다.

당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라는 것을.

*

다음 날,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쏟아내져 나왔다.

4주 후에 병원검진을 받는다. 어제 일을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입니다. 발설이 되면 법적조치가 취해질 것입니다. 협박과 강요와 같은 서약서였다.

영원은 소파에 앉혀진 채 그녀에게 당했다고 주장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기억을 아무것도 못 합니까?”영원은 주양의 입술을 주목했다.

한결같이 무미건조한. 앵무새처럼 영원은 대답했다.

“몰라. 아무것도.”“내게 무슨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습니까?”기억이 나지 않으니 대답할 수도 없다.

“술을,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몰라. 나도 왜 그랬는지.”몇 번을 물어도 영원의 대답은 한결 같았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이었다. 단 하나도 기억이…….

지장을 찍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을 지나가면서 그가 팔에 걸친 슈트 재킷이 영원의 팔뚝을 스쳤다.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해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 밤 그녀를 감쌌던 스킨 향이 익숙했다. 귓불을 발갛게 물들이며 눈이 감기려는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맹금류의 그것처럼, 엄지 손끝이 영원의 속눈썹을 빠르게 문질렀다 떨어졌다.

“어설퍼.”영원은 눈을 부릅떴다. 경고하듯 그가 짧게 영원을 일별했다.

거짓을 지적한 그는 그대로 수행원들을 이끌고 방을 떠났다.

홀로 남아 영원은 어깨를 웅크렸다. 어설퍼, 나지막이 움직이던 입술…… 얼굴이 빨갛게 터지려고 했다.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잊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녀에게 수치스러운 온갖 구정물 같은 말을 쏟아내고, 그녀의 살갗을 핥고, 비벼댔던 입술이었다.

내내 그 입술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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