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23화 (23/83)

23화. 무도회는 쇼일 뿐. 영화는 각본대로2016.09.22.

살짝 구두 뒤축을 움직이자 후드득, 깨진 유리 파편들이 54층 아래로 수직으로 부서져 내렸다. 현기증 날 만한 높이였다.

위층에서는 호화로운 파티가 한창이었다.

비극을 예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는 행복한 웃음소리가 클래식 선율에 묻혔다.

선율은 희미하게 바람에 섞여 아래층까지 흘러 내려왔다.

도살자들은 긴장해서 주양과 주양이 인질로 붙잡고 있는 그들의 물주, 김인택을 보았다.

초조한 낯빛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김인택이 주양과 같이 내일 아침 시신으로 발견되면 그들로서도 꽤 곤란할 터였다.

살 떨리는 긴장감을 끊어낸 건 주양이었다.

“저 위에 CCTV가 보입니까.”다들 뒤돌아 천장을 주목했다.

“열감지 센서가 부착돼 있습니다. 평상시 작동이 안 되다가 이 집에 갑자기 사람이 4명 이상이 들어오는, 유사시에 불이 들어옵니다.” “…….”“10분 이상 이곳에 있으면 센서가 작동되고, 지금쯤 1층 보안실에 보고되었을 겁니다. 당신들이 내게 위해를 가했던 순간, 이 빌딩의 모든 출입구가 폐쇄되었어. 보안팀으로 그쪽 몽타주가 뿌려졌을 거고, 여기까지 엘리베이터로 5분. 5분 안에 모든 게 결판나야 할 겁니다.”“누구 맘대로!”자기 넥타이에 목덜미가 붙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분한지 김인택이 심하게 반항했다.

주양이 바짝 귀에 입술을 붙여 속삭였다.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니까 동생 말 잘 들어.”“…….”“그러니까 네 인생이 5분밖에 안 남았다는 건, 내가 널 끝까지 살려두었을 때 5분이라는 거지, 2분이 될지, 20초가 될지 알 수가 없단 소리야.”주양은 주저 않고 김인택에서 창 아래 높이를 보여주었다.

김인택이 현실감 없는 높이에 눈을 뒤집어 깠다.

주양이 김인택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지만 김인택은 창틀을 간신히 붙잡고 발광했다.

“으아악! 시팔! 시팔!”54층의 위엄을 실감케 해주고자 함이었다.

“버둥거리지 마.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고 싶어?”김인택이 소리칠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몸이 중심을 잃었다.

주양은 자폭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니 이 손을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죽임당한 게 아니라, 죽임을 스스로가 한 게 될 수 있다는 걸 김인택은 알아야 했다.

자신의 목숨 줄을 누가 쥐고 있는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위협이 잘 먹혀들었는지 다행히 김인택은 한층 풀이 죽었다.

“너네들 나한테서 조금도 눈 떼지 마. 이 새끼가 손 놓으면 바로 달려와서 날 잡아야 해! 어차피 나 저세상 뜨면 나머지 미수금 못 받아!”“기생충은 숙주가 있어야만 살지. 숙주가 죽으면…… 자멸인가.” 주양이 숙주의 목숨 줄을 손에서 놓으려고 겁을 주자 놈들이 꼼짝도 못 했다.

슬며시 입술을 끌어당긴 주양이 찡그리듯 웃었다.

“썩어빠진 기생충들.”안달 내는 처지가 짜증스러운지 도살자 중에 참을성 없는 어린놈이 외쳤다.

“시발! 보초 서는 것들 믿고 이러나 본데, 걔들 뜀박질이 빠를 것 같아, 이 회칼로 네 내장 발라주는 속도가 빠를 것 같아? 형님. 이러지 말고 저 재수 없는 새끼 입부터 다물게 합시다. 뱃떼지에 깔끔하게 빵꾸 하나 내주죠.”“가만히 있어.”“형님!”“가만히 있으란 말 못 들었어!”벌써부터 내분의 조짐을 보이는 건가.

주양이 비웃자 무리의 우두머리가 한 발 다가왔다.

“원하는 게 뭐야.”“그건 알아서 판단해.”“당신 말을 잘 들으면 되나?” “내 영화의 엑스트라로 하차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협상을 원하는 건가?”“협상?”주양의 날선 눈빛에 문득 건방지다는 감정이 일었다.

넥타이를 한 번 더 풀었다. 김인택의 비명이 난무했다.

우두머리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납득할 수 없는지 당혹스러워 했다.

“또다시 협상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 김인택 다음은 네 혀를 잘라버릴 거야. 난 네 친구가 아니야. 다시 정중한 단어로 말해.”협상은 동등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주양은 하등한 것과 합의란 걸 할 만큼 넉넉한 심성을 소유하지 못했다.

여지를 주면 기어오르려는 게 잔챙이들의 습성이었다.

방금도 주양이 매달리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았나. 협상이란 걸 제안해오면서.

그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기회……를 주려는 건가?” 우두머리, 째진 눈은 협상에서 재빨리 다른 단어로 정정했다. 흡족하게 변하는 주양의 표정을 살피면서.

그렇다. 주양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협상이 아닌, 그들이 살 마지막 기회.

주양은 선선하게 대꾸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들은 내 말을 아주 잘 따라야 해. 안 그러면 가차 없이 내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하차시켜버릴 테니까.” 주양이 다시 김인택을 쥐고 위협했다.

54층의 높이에 기가 질린 김인택이 숨을 헐떡였다.

엑스트라는 비참하고 끔찍하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기 때문이 아니라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존재조차 남기지 않고 남들의 시야에서,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엑스트라만큼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인생도 없다.

“대체 당신이 찍고자 하는 영화가 뭔데.”우두머리가 물었다.

“슬픈 성장 드라마라고 하지.”그렇게 답하며 주양이 비웃었다.

“정의의 사도인 주인공이 탑 꼭대기에 사는 악당을 무찌르는 영웅물이기도 해. 하지만 이 영화는 슬픈, 이 붙어. 왜? 주인공이 믿었던 같은 편에게 배반당하고 장렬히 전사하기 때문이지.” 주양은 적절한 타이밍에 제안을 하나 던졌다.

“악당이 바로 이런 명대사를 날리기 때문이야.”“…….”“김인택 씨를 죽이는 분께, 1억 원을 지급해드리겠습니다.”주양의 입에서 목소리는 되새기듯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김.인.택. 씨.를. 죽이는 분께, 1. 억. 원. 을. 지급해드리겠습니다.”

순간 조용해졌다.

당사자인 김인택은 아직 사태를 깨닫지 못한 듯 멍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차차 충격을 먹고 당황한 표정을 했다.

“미친. 뭐하자는 거야?”“인간이 말이야. 돈에 환장을 하면, 제가 돈의 주인인지 돈이 제 주인이지 구별도 못 하더란 말이야.” “뭐?”“직원들이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지 알아? 내가 돈으로 샀거든. 네가 한신 황태자면 나도 대산의 황태자였어. 망했어도 내가 그 정도 동원력 없겠어? 한신 식구들도 돈 좀 쥐여주니까 별거 아니데. 주인도 팔아먹고.”“…….”“……영혼도 팔아먹고.” 김인택의 눈동자가 무수히 많이 혼란으로 일렁였다.

주양이 바로 김인택이 했던 말 그대로를 외어 읊은 것이었다.

“내가 종교는 안 믿어도 유일하게 믿는 게 딱 하나가 있지.”“…….”“인간.”“…….”“인간은 확실히 믿을 게 못되는 종자야.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 역시 인간이지. 나는 진솔한 사람들을 좋아해. 본능에 충실하고 니즈가 분명한. 그런 사람들은 다루기가 쉬워.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야박하지.”  김인택을 보며 신랄하게 쏘아붙인 주양이 일렬로 늘어선 사내들을 무감한 눈길로 쭉 훑다 불현듯 다시 제안했다.

“김인택 씨를 죽이는 분께, 1억 원을 지급해드리겠습니다.”“말도 안 돼. 고작 1억에 뭘 하겠다고? 사람이 돈만으로 다 움직이는 줄 알아?” 비웃는 김인택에게 주양이 한 자씩 힘주어 발음했다.

“10억”눈이 커지는 김인택을 보며 또 내뱉었다.

“백억.”“……!”“내 전 재산이 얼마였더라?”“……시팔! 비열한 새끼! 뭐하자는 거야!”참지 못한 김인택이 소리를 질렀다. 뻣뻣해진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초조한 기색이 확연했다.

그는 저들이 배신을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인간은 확실히 믿을 게 못 되는 종자야……? 하고 먼저 말한 것은 김인택이었다.

실제로 내부는 김인택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김인택이 애원하는 눈으로 주양을 봤다.

주양은 여전히 김인택의 목숨 줄을 쥐고 있었다.

“걱정 마. 저들 손에 당신을 맡기지 않을 테니까. 대산의 황태자를.” 전쟁을 치러도 적국의 왕은 왕이 목을 치는 법이었다. 뇌물 같은 거 먹여서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김인택이 턱에 힘을 주었다.

“알아. 넌 누구에게 손 벌리는 성격이 못 되니까.”“그래. 언제나 내 선에서 처리했지.”“…….” “근데 그거 아나.”“…….”“방금 막 5분이 지났어.”그때, 공허해지던 김인택의 표정을 주양은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었다. 간절히.

침실 문고리가 덜그럭거렸다. 밖에서 쾅! 경호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54층 허공에 바람이 불었다. 팽팽하게 틀어 잡힌 넥타이를 쓸고 지나, 주양의 손목까지 이르렀다.

주양은 힘을 놓았다. 그의 손에서 스르르 넥타이가 빠져나갔다.

가볍고,

가볍게……

슬로모션처럼 느린 장면들.

김인택의 몸이 초고층 빌딩 낭떠러지 허공으로 기울었다.

사내들이 주양을 지나쳐 김인택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경호원들은 주양에게 덮치듯 뛰어왔다.

잡아! 이사님! 다양한 이해관계가 엉킨 사람들이 내는 외침으로 내부가 팽창, 폭발했다.

흐트러진 옷깃을 다잡은 주양이 뒤돌았다.

김인택은 지면 위로 올라와져 있었다.

켁. 켁. 그는 목을 움켜잡고 안도의 기침을 터트렸다.

*

피떡이 된 김인택이 쓰러졌다. 주양은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김인택에게 다가갔다.

촤악 - 김인택의 위로 물줄기가 퍼부어졌다. 얼음장 같은 물에 얼굴을 후려 맞은 그가 눈을 떴다.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김인택은 꽤 끈질겼다. 경호원들이 이미 그를 잡아 여러 차례 심문했다.

움켜쥔 머리를 완전히 젖혀 들었다. 자백을 강요하는 음성은 차분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습니까.”김인택이 경멸스런 눈빛을 숨기지 않고 퉤, 주양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내가 말할 것 같아?”뺨을 닦은 주양은 주먹으로 김인택을 후려갈겼다.

“허억!”그러고는 다시 정중하게 되물었다.

“나를 곧바로 죽이지 않은 다른 저의가 있습니까.”김인택은 얼마든지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다. 방에 여자와 있는 걸 알았으면서 곧장 덮치지 않았다.

방이 암전될 때까지 주양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것.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는 일에 잠시 당황했었다.

분노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신영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김인택이 봐주지 않았다면 그는 죽임을 당했다.

“나를 곧바로 죽이지 않은 다른 저의가 있습니까.”납득되지 않는 일에 관대하게 넘어갈 줄 모르는 모습마저도 진저리난다는 듯, 김인택이 이를 갈았다.

“넌 인간도 아니야.” “…….”“그러니까 가족도 널 버리는 것 아니겠어? 네가 공포스러워서, 공포스러운 네가 끔찍해서, 널 죽이겠다고!”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성은 공포에 집어삼켜졌다.

김인택은 분개한 나머지 시급하게 자백을 하고 말았다.

“콩가루 집안도 이럴 순 없는 거지. 낄낄낄. 네 숙부 말이야, 진두영. 샌님으로 봤는데 의외로 냉정한 구석이 있더라? 아무리 탐욕에 눈에 멀어도 그렇지, 어떻게 제 조카를 죽이고 싶어 하는 나하고 편을 먹어?”백운당에서 있었던 조리 실수.

예상대로 진두영과 김인택의 합작품이었다.

주양은 일어났다. 양 비서에게 칼을 건네받았다. 원하는 답을 들은 이상 살려둘 이유가 없다.

김인택은 벙어리가 되었다. 기세 좋게 퍼부어대던 입술이 얌전히 다물렸다.

백열등이 반사된 회칼이 더욱 예리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김인택이 들끓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이, 이봐. 진짜야?”“…….”“웃기지 마. 어이! 웃기지 말라고!”“…….” “이거 처음하고 말이 다르잖아. 영화는 주인공이 악당을 무찌르는 거 아닌가?”애써 공포심을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주양이 무표정하게 회칼을 소매에 잘 닦아내며 말했다.

“각본대로 가고 있어.”“어디가 각본대로 간다는 거야! 악당은 주인공 손에 죽는 거야!”김인택이 소리를 쥐어짰다.

“나는 주인공이야! 너는 악당이고.”주양은 김인택에게 다가가 그의 앞머리를 움켜잡았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사내에게 느긋하게 말을 박아 넣었다.

“나는 감독이야. 너는 악당이고.”김인택의 안면이 미라처럼 메말라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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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택을 처리할 사람은 주양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정해 놓았다.

그는 김인택이 데려온 우두머리에게 다가갔다.

“내가 아까 1억 주겠다는 말 기억합니까?”“허억. 허억.”우두머리 입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길게 핏덩이가 침과 함께 고였다.

“나를 믿습니까? 나를 믿어요?”우두머리가 겁에 질려 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이렇게 무너트린 건 그의 발톱이었다. 그는 이미 발톱이 다 빠지고 없었다.

눈앞에서 믿기 힘든 느린 속도로 하나씩 하나씩 떼어지는 발톱을 보는 건 치밀하게 교육받은 기관의 스파이들조차 견디기 힘든 공포일 터다.

처음엔 고통에 정신없이 허우적대지만 고통에 익숙해지면 차분하게 상황이 보인다.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목소리, 신체가 당하는 폭력의 촉각.

공포는 그때 뒤따른다. 발톱은 없어진다고 죽는 게 아니다.

발톱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다시 자란다.

하지만 발톱이 점진적으로 조금씩 발라지며, 촉각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몸서리쳐지게 느껴지는 순간, 진짜 고통은 육체가 아닌 불안과 공포로 나타나 정신을 붕괴시킨다.

그는 고작 발톱에 굴복했다.

주양은 우두머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억을 주겠다는 것. 그것은 진심이었다. 아직도 유효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과 나 사이엔 별로 유감이 없지 않습니까.” 오롯이 한 사람 때문에 우두머리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 사람만 없으면 우두머리는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주양은 우두머리에게 칼자루를 쥐여주었다.

“됐어요. 이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엑스트라에서 주연으로 파격 대우. 출연료는 1억입니다.”세상엔 범인과 그 범인을 움직이는 배후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주양은 판은 깔아두고, 장기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행관이었다. 집행을 내리면 말단들이 사형을 실행한다.

주양이 할 일은 배우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차도살인.’ 남의 칼로 죽여라.

주양은 그 말을 믿었다.

피는 남의 손에 묻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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