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22화 (22/83)
  • 22화. 영혼 없는 왕자2016.09.18.

    양 비서가 주치의를 데리러 떠난 동안 주양은 영원을 내려다봤다.

    침대에 누운 여자는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영원의 입술은 시리도록 빨갰다. 새빨간 그녀의 복수심처럼.

    그녀는 계모를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소모적인 짓을 벌이고 있었다.

    복수가 아닌 투쟁으로. 어리광 같은 투정으로.

    4년이나 전, 비밀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경찰에 신고를 했던 모양이야. 최 사장이 셋째 딸을 그렇게 학대한다고 하더군. 그걸 입 막으려고 최혜란이가 짜바리들한테 돈깨나 먹였다지.’ 주양과 부쩍 친해졌다고 믿던 L모 의원이 그런 말을 떠들어댔다.

    대산물산 김 회장과 L모 의원, 주양은 그 비밀 모임의 회원이었다.

    김 회장이 파산하고 지금은 L모 의원 둘만이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주양은 미국에서 석사를 갓 마치고 돌아온 새파란 사업가였다.

    매월 마지막 주마다 갖는 비밀모임은 단 세 명의 회원을 주축으로, 주로 돈을 불리고 조세를 회피하고, 페이퍼 컴퍼니를 만드는 비자금 횡령에 관련했다.

    ‘최 사장 그년, 그렇게 안 봤는데 독종이야. 만신창이로 학대할 줄 누가 알았냐고. 이 마을이 폐쇄적이잖아. 경찰들이 입만 닫으면 뭐, 사람 하나 죽여도 자살로 꾸미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봐라. 딸년 시체 나오면 자살로 꾸며질 테니.’L모 의원이 비밀리에 우스갯소리로 소스를 던져주었지만 주양은 폭력에 무감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때 주양은 두 가지 가정을 내렸다.

    신영원이 계모를 살해하거나, 계모의 폭력을 못 견뎌 집을 나가거나.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도, 가출하지도 않았다.

    그때도 계모한테 학대를 당했다는 걸로 아는데, 지금도 변함없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책에서는 봤지만 스톡홀름증후군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4년 후, 신영원이 그에게 복수를 제안했을 때 오히려 놀랐다.

    머리가 빈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때로, 복종은 자유보다 더 안락함을 느끼게 한다. 맞고 사는 것도 당연시 여기면 찌그러져 살 만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치밀한 연기였나.

    최혜란 몰래 키워왔던 영원의 복수심이 경이로웠다.

    그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결국 새빨갛게 어린 계집애에게 그는 갖고 놀아졌다.

    그건 복수도, 뭣도 아니었다.

    흐지부지한 미움과 갈팡질팡하는 애증.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집에서 내쫓겠다고. 복수의 이름을 빌려 쓰기엔 턱없이 모자란 분노.

    복수는 폭주다. 순도 높은 폭력이라는 점에서 복수는 광기에 가까웠다. 복수엔 이성을 챙길 여유 같은 건 없다.

    그녀는 단지 최혜란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유부단한 햄릿도 복수를 원치 않았다. 그의 우유부단함은 강요된 복수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영원의 복수를 충동질하는 유령은 누구인가.

    그녀의 죽은 친모가 부리는 환영일까.

    복수를 빙자한 사랑이라……,

    폭력을 당하면 폭력으로 되갚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었다.

    가해자를 사랑하는 피해자라니. 그녀의 방식은 납득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대화 도중 주양이 문득 신영원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지?’‘사랑?’‘사랑을 압니까?’‘잘 알지. 사랑은 공기야. 삶이야. 우주고 세상이야.’신영원의 착각은 그에게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에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는 종족들은 종종 그에게 짙은 피로감을 주었다.

    그가 아는 사랑은 오직 하나였다.

    나비부인 제2장 2막 클라이맥스.

    남자에게 버림받고 여인을 할복이라는 폭력으로 이끈 비참한 사랑.

    ‘근데, 아까 그 말…… 친구 해주겠다는 거, 정말이야?’ 대화 내내 쑥스럽다는 듯 부끄럽게 더듬거리던 얼굴이 새빨개졌었다. 터질 것 같이 부풀었었다.

    주양은 술이 깨는 독한 커피를 혀에 머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너머의 것들은 그의 호기심을 부르기도 했지만 그를 불쾌하게도 만들었다.

    좌절시키고 싶은 치졸한 욕망과 기이한 우월감이 오래 길들여 놓은 인내심을 좀먹어갔다.

    잔을 입가에 댄 채 여자를 직시했다.

    커피 향을 음미하며 깊게 보자 여자의 얼굴이 데인 것처럼 붉어져갔다.

    적어도 계모에게 폭행당하며 살아온 그녀는, 폭력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아는 그녀는 좀 다를 줄 알았다.

    당초 최혜란의 비밀 장부를 얻으려 했던 계획을 수정했다.

    그보다 더 보고 싶은 게 생겼다.

    ‘복수를 도와주면 내게 뭘 해줄 수 있습니까.’그의 물음에 방황하듯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원하는 게 있어?’그녀는 유리알처럼 연약해 보였고, 그는 그런 것 따윈 간단히 부실 수 있었다.

    ‘당신 손으로 최 사장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여자의 눈빛이 깡말랐다. 그 순간만큼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안 듯한 얼굴이었다.

    정중하고 신사적인, 그녀가 오래도록 소중하게 짝사랑해온 남자였다.

    산다는 것은 폭력이었다. 하물며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야…….

    사랑은 폭력이다. 충동이고, 파멸을 부른다.

    사랑은 논리와 상식을 거스른다.

    사랑은 분별력을 잃게 했다.

    고로, 사랑엔 품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은 오래 길들일수록 유용한 전술이었다.

    *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행위는 언제나 간단하고 일관적인 편이다.

    폭력. 폭력의 참맛을 경험하면 대개는 알아서 고개를 수그렸다.

    폭력을 아는 사람일수록 시기는 빨랐다.

    그러나 간혹 폭력에 내성이 없는 것들,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지 못하는 부류들은 유치한 치욕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불복해왔다. 반격을 가하는 것으로.

    바로 6시간 전, 이곳에서 있던 누군가의 죽음이, 한 살인이, 그러했다.

    .

    .

    .

    “당신 말대로 난 이중인격자야.”“…….”“그렇지만 분명 나는 젠틀하기도 해.”“…….”“하지만 이보다 불친절할 순 없지.”주양은 동화 속을 사는 여자에게 똑똑히 박아주었다.

    “내 불친절함엔 한계가 없어.”주양은 영원을 놓아주고 방을 나왔다.

    정전이 휩쓸고 간 집안은 곳곳에 비상등만이 미약하게 밝히고 있었다.

    타워 전체에 불이 나갈 정도로 허술하게 짓지 않았다. 54층 누전차단기를 고의적으로 누르지 않는 이상.

    주양은 미로 같은 복도를 하나씩 뒤졌다.

    급할 것은 없었다. 서재가 환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인간이 말이야. 돈에 환장을 하면, 제가 돈의 주인인지 돈이 제 주인이지 구별도 못 하더란 말이야.” 대산물산 사장이자 김 회장의 망나니 아들 김인택이었다.

    김인택이 어느새 그의 와인 바에서 꺼내온 병을 길게 따르며 느긋하게 말을 뺐다.

    “확실히 인간은 믿을 만한 게 못되는 종자야.”주양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직원들이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지 알아?”그렇게 물으며 김인택이 짧게 코웃음 쳤다.

    “내가 돈으로 샀거든. 네가 한신 황태자면 나도 대산의 황태자였어. 망했어도 내가 그 정도 동원력 없겠어? 한신 식구들도 돈 좀 쥐여주니까 별거 아니데. 주인도 팔아먹고. 영혼도 팔아먹고.” 김인택이 매수해놓은 직원에게서 받아놓은 키를 손으로 빙빙 돌렸다.

    “퇴근시키고 키 받아놨어. 바깥으로 연락하려면 애 먹을 거야. 너 하나 죽일 시간 정도는 되지.”주양은 손목시계를 봤다. 10시를 약간 넘었다.

    “왜, 파티?”주양이 침묵하자 능청스럽게 김인택이 대답했다.

    “걱정 마. 어차피 너 저 방에서 한 년이랑 재미 보고 있었잖아. 신사답게 기다려줬으니까, 이젠 나랑 놀아줘.” 김인택이 선선하게 웃으며 손을 까딱했다.

    테라스에서 대여섯 되는 도살자들이 척척 발을 내디뎠다. 그중 하나의 손에는 전기톱이 들려 있었다.

    “우리 영감이 감방에서 못 나올 거래. 내 여동생은 자존심이 뿌리까지 뭉개졌고, 우리 회사는 산산이 휴지조각이 되었어.”“…….”“너는 내 원수야. 나는 오늘 너를 죽이고.”김인택이 울음을 간신히 참는 듯 목소리를 토해냈다.

    “죽을 각오로 여기서 살아나가려고.”한 놈이 전기톱을 당기자 와아아앙-! 거대한 소음이 방을 뒤흔들었다.

    김인택이 웃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라니까.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테니까.”

    ‘폭력’은 오래 길들일수록 유용한 전술이다.

    죽느냐……

    사느냐……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결론을 도출해낸다. 너그럽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그의 한결같은 취향처럼.

    *

    아비규환.

    서재는 그대로 팔열지옥이었다. 지독한 피비린내에 휩싸였다.

    흐…… 으악! 달려들고, 칼을 찔러 넣고, 한 사람에게 여러 명이 우글우글 달라붙었다.

    아악! 흐악! 흐악! 살상도구들이 쉼 없이 휘둘려졌다.

    씨발! 그냥 아무 데나 쑤셔 넣어! ……차가운 살육이 전신을 흘러내렸다.

    주양은 도살자의 머리를 처박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거품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도살자는 머리로 유리를 꿰뚫은 채 널브러졌다.

    뒤이어 다른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다.

    주양은 손바닥으로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꺾어 책상에 눌렀다.

    멈추지 않는 공격에 얼굴을 얻어맞아 몸이 뒤로 밀렸다. 회칼이 다시 파고들었다.

    주양은 겨드랑이에 놈의 팔을 잡아 껴 당황한 손에서 칼을 빼앗아 칼로 그의 팔, 어깨, 목을 찔렀다.

    순식간에 세 방을 맞은 놈이 피가 솟구치며 쓰러졌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놈을 집어던지기가 무섭게, 발길질이 날아와 금세 주양은 어깨를 맞고 바닥으로 자빠졌다.

    곧바로 일어나려 하지만 다시 발차기가 날아와 얼굴을 후려 맞았다.

    뇌수가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주양을 도살자가 일으켜 세웠다.

    다시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주양은 놈의 허리를 잡아 벽에 밀쳤다.

    “아아아악!” 자지러진 놈이 날아갔다. 주양은 놈을 친구들에게 던져주고 숨을 몰아쉬었다.

    도살자들이 품안에서 일제히 칼을 빼들고 그의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배회했다.

    하지만 주양에게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예상외로 주양이 너무 잘 버텨서 당황한 눈치였다.

    주양은 퇴로로 몰렸다.

    김인택이 뒤에서 재촉하며 지랄해댔다. 진창 같은 싸움이었다.

    “짐승 같은 새끼. 저게 인간이야?”김인택이 치를 떨었다.

    주양은 둔기로 맞은 눈가가 찢어져 피가 비어져 흘렀다.

    끈적끈적한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웃었다. 입술이 터졌고 광대뼈는 함몰된 것 같았다.

    그에게도 고통은 있었다. 아픔이 살을 저밀 때 그는 자신이 인간임을 느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최후의 탈출로. 발아래는 54층 낭떠러지, 저승행이었다.

    “마지막 유언이 있다면 말해도 좋아.”김인택이 답지 않게 자비를 베풀었다.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을까.”그 말에 김인택이 빈정대었다.

    “하긴. 뭐라도 빨지 않곤 못 배길 거야? 급하긴 할 거야. 죽음이 턱 밑까지 추격해왔으니.” 김인택이 마지막 아량을 베풀어 테이블 끝으로 담배와 라이터를 밀어주었다.

    주양이 담배 한 개비를 물고는 라이터를 김인택 발치 아래에 던졌다.

    “와서 붙여봐.” 김인택이 이런 씨발새끼가, 하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양이 유리창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깨지기 쉬운 얄팍한 소리에 그들이 놀랐다.

    안전을 위해 강화유리로 설계해야 했지만 이런 순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일반 유리로 만들어놓았다.

    “네들 먹잇감으로 순순히 물어뜯길 거 같아? 내가 이대로 멋지게 자살하면 곤란할 텐데. 기껏 톱도 가져왔잖아?”빈정대며 주양이 그의 손가락을 들어 현란하게 움직였다.

    “필요할 텐데. 내 손가락.”이 집을 출입하는 건 다 그의 지문으로 통제되었다.

    들어왔던 것처럼 조용히 그를 죽이고 나가려면 그의 지문이 필요했다. 그의 지문이 없으면 나갈 수가 없다.

    손가락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그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그들은 경찰이 올 때까지 굴욕적으로 54층에 갇혀 있다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될 것이다.

    어이없는 콩트 같은 상황이었다.

    “마지막 길인데,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야지?” 김인택은 주양이 위협이 될 만한 것을 들고 있지 않은지 살폈다.

    “추잡하게 굴지 마.”주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택이 다가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최고급 마약도 이 담배 한 개비가 주는 짧은 휴식보다 지금을 로맨틱한 최후로 꾸며주지 못할 것이다.

    사막의 오아시스, 아프리카의 단비.

    짧고 충만한 휴식이었다. 만약 그가 흡연가였다면.

    “도둑놈처럼 왔다 가려면 내 손가락이 필요하다는 정보, 어디서 입수했습니까.”내부에 프락치가 있다.

    김인택은 의도적으로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펜대만 굴려서 그런가. 손가락도 계집애처럼 예뻐. 딱 약쟁이 그룹인데. 들어보니, 담배랑도 격조하며 지낸 사이라며?” 재벌 집 자제들이 마약을 안 하는 게 이상하다.

    주양은 담배와도 안 친하니 기이한 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들은 주양에게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때. 죽기 전에 니코틴 처음 빨아 본 감상이.”쓴 연기가 그의 기도를 메웠다.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담배를 이로 힘주어 물어 억눌렀다.

    “다시 피울 일은 없을 것 같아. 특히나 이 방에선. 자나 깨나 불조심합시다.”그 담배를 한 번 깊게 빨고는 콘센트 위에 떨어트렸다. 담배가 타들어갔다.

    불이 붙은 콘센트가 합선되면서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팡! 터졌다. 집 전체에 정전이 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콜록, 콜록.”커튼에 불이 옮겨 붙었다.

    순간 경보음이 순식간에 타워 전체에 울렸다.

    따르르르릉-!

    사내들이 당황했다. 자동분사기 센서에서 가루가 뿜어져 나와 불을 진압했다.

    기도가 막혀서 사내들이 흐트러졌다.

    대열이 깨진 순간 주양은 넥타이를 느긋하게 풀었다.

    “개자식이 술수 썼어! 창문! 환기 시켜!”의자를 집어던졌다. 유리창이 와장창창! 부서졌다.

    도살자들이 안도하는 것도 잠시, 가루가 걷히면서 주양이 보였다.

    김인택은 뒤로 두 팔이 결박된 채 주양에게 잡혀 있었다.

    김인택의 목을 조른 넥타이를 고삐처럼 주양이 바싹 얼굴에 당겨 붙였다.

    “산악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 많은 매듭을 고안해냈지. 절대 풀 수 없는 매듭들. 이제 이 게임은 나한테로 넘어왔어.”“…….”“말 잘 들어. 내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하차하고 싶지 않다면.”그에게도 고통은 있었다.

    문제는, 고통을 느끼는 껍데기가 있을 뿐, 영혼이 없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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