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21화 (21/83)
  • 21화. 실종 9일째 <1>2016.09.15.

    손님을 잡아먹으면 안 돼.

    [영화 신데렐라 中]

    -실종 9일째

    “소장님이 찾아보라던, 그 검은 세단 말입니다.”기태의 목소리가 장 경감의 낮잠을 파고들었다.

    얼굴을 덮은 신문을 치우자 미행에서 돌아온 기태가 복잡 미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장 경감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 미안. 차적 조회 해봤어?”“하긴 했는데…….”말꼬리를 흐리며 기태가 밀착 카메라를 반납했다.

    장 경감은 집요하게 자신을 감시하던 검은 자동차를 조사해보라고 시켰다.

    쪽지 하나만 덜렁 던져놓고 가면 다인가.

    진주양 쪽 사람일 게 분명했다.

    “왜? 문제 있어?”장 경감의 질문에 답을 미룬 기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진주양. 어떤 사람입니까?”역시 진주양인가.

    대수롭지 않게 장 경감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하루 동안 진주양의 행적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수사본부를 염탐하다 이미 걸린 신세였다. 얼굴 다 까발려진 놈에게 진주양 뒤나 캐라고 지시했다.

    “미행하면서 봤을 거 아냐. 어떤 인간인지.” “평판하고 영 달라요. 원한 산 사람들이 제법 되나 본데요? 미행하는 사람이 우리만이 아니었어요.”“누가 또 미행을 했는데.”“남도 아닌 그것도 가족이요.”카메라를 돌려보던 장 경감 손이 잠시 떨렸다.

    “조회해보니 그 차량, 소장님을 뒤쫓던 차와 소유주가 같았어요.”“…….”“진주양이 소장님을 미행한 게 아니었어요.” 새삼스레 장 경감은 기태를 눈여겨 응시했다.

    천천히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반면, 또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포화는 단단한 먼지바람을 헤치고 기어 나왔다.

    “한신중공업 법인 리스 차량으로 뜨던데요. 진주양 숙부 아닙니까?”한 꺼풀, 가려진 그 껍데기를 들추면 어디에나 추한 가족사는 있기 마련이다.

    *

    숲이 흐느꼈다.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려 양평의 한 저수지에 바퀴를 세웠다.

    장 경감은 담배 한 개비를 빼 물며 주변을 둘러봤다.

    호수는 자욱한 안개에 사방이 꽉 틀어 막혀 있었다.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음산한 공기에서 시체 썩는 내가 날 것 같았다.

    비린내가 코끝을 시큼하게 적셨다.

    장 경감은 수풀로 발을 내디뎠다. 이슬이 마르지 않아 바짓단이 금세 축축해졌다.

    궂은 날씨에도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길게 뻗어놓고 있었다.

    장 경감은 낚시터 관리자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관리자가 물가에 둥둥 떠 있는 다리를 가리켰다.

    저수지를 반으로 가른 부교 위에는 낚시꾼들 몇몇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이 저수지에 부교는 저거 하나야. 17이란 건 17번째 자리를 뜻하는 거 같은데?” 관리자에게 인사하고는 부교로 향했다.

    낚싯대를 걸어놓고 낚시꾼들은 무연히 수면 위를 눈길로 걸어 다녔다. 하나같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철썩. 철썩. 갑판에 밀려든 물소리만 간간히 귓가를 조였다.

    장 경감은 사람을 일일이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열다섯, 열여섯.’17번째로 추정되는 자리로 다가가는 그때였다.

    바로 옆, 뒤에 앉아 있던 낚시꾼들이 일동 기립했다.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뭐, 뭐야!”버둥거리는 장 경감을 낚시꾼들이 끌어내렸다. 헉. 힘이 장사였다.

    단순 백수들인 줄 알았는데 뱀 같은 눈빛들이 챙모자 아래에 도사렸다.

    팔을 비트는 손아귀 힘에 그들이 전문 경호원임을 깨달았다.

    “거 쉬엄쉬엄 합시다.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 글쎄 이것 좀 놓고 말로……!”“차가 많이 막혔나요?”시장바닥 같은 혼잡과 동떨어진 유쾌한 성량이었다.

    경호원들과 뒤얽히던 장 경감은 엉거주춤, 목소리 주인을 봤다.

    17번 자리의 미남자는 유랑이라도 즐기는지 캐주얼한 아웃도어를 입고 있었다.

    미남자는 어깨 너머로 장 경감을 힐끗 보더니 한가로운 시선을 다시 호수로 던졌다.

    “별로 안 놀란 얼굴이네. 아니, 별로 놀라기엔 내 꼴이 말이 아니게 한심한가.”장 경감은 현실감각이 점차 뚜렷해졌다. 완성되지 못한 짧은 단어들이 혀끝에서 아지랑이처럼 증발했다.

    한신그룹 전 후계자이자,

    폐위당한 사도세자,

    진주양의 숙부,

    진두영…….

    “조카 때문에 고초가 크시다고요. 장영범 씨.”“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그게 우선은 아닐 텐데요?”나무랄 데 없는 매끄러운 진행이었다.

    조카의 덫에 걸린 장 경감의 상황을 훤히 꿰고, 진두영은 단숨에 그를 움켜잡았다.

    혈육은 닮지 않았다.

    한 번 엮이는 것만으로 진주양이 잊을 수 없는 숨 막힘을 선사하는 반면, 사내는 연장자다운 유연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얗고 기름한 이목구비에 다갈색 눈동자.

    그의 눈빛에선 살점을 베는 듯한 진주양 특유의 살의는 뻗지 않았다.

    그러나 암울한 우수가 젖어 있었다.

    어린 조카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폐위당한 억울함.

    진두영이 가볍게 손짓했다. 사내들이 그를 놔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 경감이 외투를 바로 잡으며 진두영을 노려봤다.

    “제게 용무가 있습니까?” 그를 미행하도록 지시한 장본인인 진두영이 뻔뻔하게 웃었다.

    “그 애가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걔가 워낙 떠받들어져 커서, 사람 보기를 개떡으로 알아요. 무례한 조카를 대신해 삼촌인 내가 사과드립니다.”“꽤 말이 길어지는군요. 에누리 없이 본론부터 꺼내 놓으시죠. 사과하려고 부른 게 아니잖습니까. 절 왜 미행한 겁니까? 아니.”“…….” “절 왜 초대하신 겁니까.”저들 세계에 자꾸 깊이 발을 담그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저들은 상위포식자였다. 자기 잇속 채울 때만 움직인다.

    형태가 변했을 뿐이었다. 본질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진주양에서 진두영으로 상위 포식자가 뒤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장 경감이 이곳에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실마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끌고 왔다.

    진주양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오롯이 저 남자뿐이었다.

    신부 실종과 관련해 진두영은 그에게 해줄 말이 있다.

    “대답해주시죠. 제가 맞춰볼까요? 이번 신부 실종 사건과 관련해…….”“납치 살인이라는 생각, 안 해봤습니까?”진두영의 물음에 장 경감은 입이 안 떼어졌다.

    진두영이 몸을 늘어트리고 의미심장하게 손가락을 깍지 꼈다. 장 경감의 생각을 그대로 꿰어 읽은 듯.

    “나는 지금쯤 신부가 살해되었다는 데에 내 손가락을 걸죠. 당신은?”진두영이 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화였다.

    납치…… 살인.

    그저 심증일 뿐이었는데…….

    소름이 내달리며 팔뚝을 할퀴었다.

    *

    서재에 오페라가 가득 울려 퍼졌다.

    Con onor muore chi non puo serbar vita con onore ……

    Tu? tu?

    piccolo Iddio……!

    Amore, …… Non saperlo mai per te, pei tuoi puri occhi, muor Butterfly.

    “날이 춥습니다.”양 비서가 등 뒤로 다가왔다.

    주양은 테라스에 서서 표정 없이 물었다.

    “양평 쪽 움직임은 어떻습니까.”“별다를 거 없습니다. 유배당한 처지에 뭘 어쩌겠습니까.”“유배당한 처지에, 우리가 가짜 신부를 내세워 결혼했다는 걸 알아내고, 경찰에 신고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신부가 실종되고, 주양은 조용히 무마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진두영이 신부가 실종되었다고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숙부가 나 때문에 먹은 똥이 꽤 되죠, 아마? 어떻게든 그 똥, 나한테 되먹이려고 혈안일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감시 24시간 풀가동하겠습니다.”고개 숙이며 다가온 양 비서가 어깨에 가운을 얹어주었다.

    주양은 어두운 강을 내려다보았다.

    차들은 빠른 속도로 새벽의 한강 위를 질주했다. 푸른 강물은 기억을 망각한 것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죽음 같았다.

    죽음이라.

    주양은 사람을 죽인 적도 있지만 죄책감을 느낀 적은 없다.

    폭력을 남용하거나 남을 해하는 데에 심취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가오는 폭력에 반격을 해주다 보니 심심찮게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왔다.

    세계는 그에게 고결하게 살 수 있는 권위와 특권을 쥐어 주었지만 한 번도 이 삶에서 안락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깡패의 인생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집 자제들은 고결함을 지키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만, 그라서, 그이기 때문에 폭력이 생활에 익게 된 거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억울함은 티끌도 못 느낀다.

    주양은 폭력이란 방식이 꽤 만족스러웠다.

    권태로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뜨자 스피커에서 한스러운 여자의 아리아가 더욱 극성맞아졌다.

    나비부인 제2장 2막 클라이맥스. 그가 제일 즐겨 감상하는 부분이었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여인을 할복이라는 폭력으로 이끈 비참한 사랑.

    여자는 명예로운 삶을 살지 못할 바에야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며 스스로를 찔렀다.

    사랑을 폭력으로 되갚은 것이다.

    그가 아는 사랑은 오직 하나였다.

    예술사에서 많은 예술가들은 사랑보다 그 사랑이 주는 연민감에 젖어 죽어갔다.

    세상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다.

    나비부인, 로미오와 줄리엣, 팔리아치, 안나 카레니나, 글루미 선데이.

    사랑은 폭력이다. 사랑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외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파주 정신병원에 찾아간 그날 주양은 여자에게 순결한 신부의 상징, 웨딩드레스를 던졌다.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썩을 것이냐…….”“…….”“이 웨딩드레스를 입을 것이냐.” 절벽 앞에 선 그녀는 한길 낭떠러지 아래의 깊은 바다를 응시했다.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나는…… 병원에 남겠어.”신부가 되느니 차라리 병원에서 썩어가겠다.

    주양은 그녀의 의도를 읽고 조용히 보다가 턱을 잡아들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아 그의 시선을 피했다.

    “머리 굴리지 마.”주양이 낮게 속삭였다.

    “그래봐야 여기서 못 나가. 너 죽으면…… 네 송장 내가 거둬갈 거야.”그를 보던 그녀의 눈이 점차 커져가더니, 절망으로 얼룩져갔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폭력적으로 만드는가.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폭력이다. 충동이고, 파멸을 부른다.

    사랑은 논리와 상식을 거스른다. 사랑은 분별력을 잃게 했다.

    고로, 사랑엔 품위가 없다.

    -1년 전, 영원 26살.

    부우우- 뱃고동 소리가 굵고 힘차게 바다를 가르고 나아갔다.

    새벽 4시.

    출항하는 선박들로 인천항은 숨 가쁜 새벽을 열었다.

    양 비서는 짐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을 감시하며 담뱃불을 붙였다.

    옆에 있던 수하가 곧바로 라이터를 꺼냈다.

    퇴락한 니코틴 냄새에 섞여 코끝을 배회하는 바닷바람이 씁쓸했다.

    32주년 파티가 있었던 어젯밤,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 탓에 양 비서는 새벽부터 인천항에 내려와 은밀히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작업반장이 시계를 가리켰다.

    “반까지야. 빨리 실어. 빨리! 이봐! 거기!”관처럼 생긴 적하물을 운반하던 인부 둘의 스텝이 꼬였다. 그들이 넘어지면서 관이 엎어졌다.

    양 비서가 조용히 수하에게 눈짓했다. 살짝 새뜬 관 뚜껑 밖으로 내용물이 삐져나와 있었다.

    사람 손가락이었다.

    *

    새벽이 엷어져가고, 외로운 창유리엔 창백한 달 한 점 안 걸려 있었다.

    한강은 고요하게 물의 기척을 삼켰다.

    푸르스름한 안개는 만물을 둘러싸 흐릿하게 그들의 흔적을 지워갔다.

    고요한 새벽이었다.

    푸른 기운이 잠든 침실에 두 남자의 인기척이 어른거렸다.

    “여기 선적 증명서와 선장 프로필입니다.”새벽 5시.

    인천항에서 돌아온 양 비서는 54층에서 처리한 일을 보고 했다.

    주양은 비스듬히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면밀히 검토했다.

    나이트가운만 걸친 그는 선명한 어둠을 휘감고 있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흉근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양 비서는 피딱지가 내려앉은 주양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직 푸르른 밤, 열린 커튼에서 미명이 밝아오고 있다.

    바람이 불었다. 엿들어온 바람은 이불 밖으로 내밀어진 여자의 발등을 간질였다.

    검은 침대에 파묻혀 여자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 있었다.

    그런 은밀함까지 주양은 양 비서에게 숨기지 않고 드러내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체는 곧고 아름다웠다.

    그런 완성성에 얼굴에 난 파손당한 흔적은 오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동물에게 할퀸 듯한 결함이 불건전한 냄새를 발했다.

    여자와 주양의 얼굴에 난 흉터를 번갈아 보다 양 비서는 너무 오래 쳐다보는 게 아닌가 싶어 곧 눈을 내리 깔았다.

    주양이 서류 속 사진에 손끝을 가져다댔다.

    서류에는 중형급 선박을 찍은 사진 몇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양 비서가 알기 쉽게 설명했다.

    “호성실업 소속 신라 41호입니다. 남중국해를 거쳐 종착지인 인도양으로 참지조업을 나가는 원양어선입니다. 중국선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상하이에 하선해 2박을 체류한다고 합니다. 통나무는 그때 대기하고 있던 우리 측 직원들에게 즉시 인계될 예정입니다.”사진을 넘겨보며 주양이 물었다.

    “이 배를 선택한 이유는?” “호성실업은 중소 규모의 순수 어업회사입니다. 당연히 어획량과 그해의 시세에 실적 변동폭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6년 전부터 중국으로부터의 참치어선이 점차 늘어나더니, 3년 전부터는 중국정부에서 어선들에게 보조금을 뿌려대면서 본격적으로 어업을 육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에 따른 어획량 감소와, 맞물린 경제 둔화로 호성실업의 적자가 작년 대비 53%가까이 났습니다.”“…….”“이사님께서 트롤선 31척을 담보로 140억을 대출해줬지만, 현재 이자만 간신히 돌려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해 11월 만기로 원금상환이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때 타격을 입은 것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달 조건은?” “원금상환일 3년 연장과 1년 간 이자 면책을 조건으로 ‘통나무’ 배달을 약속 받았…….”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양이 서류를 앞에 던져놓았다.

    양 비서의 눈꺼풀이 안경 너머에서 당혹스럽게 커졌다.

    주양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느긋이 말을 박아 넣었다.

    “고작 통나무 운반에 우리 쪽이 손해가 막심하군요. 이럴 바엔, 전문 브로커한테 맡기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았겠습니까? 중소 규모라지만 엄연한 기업인데……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호성까지 끌어들여 일을 크게 벌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양 비서가 얼른 대답했다.

    “단순 밀항이라면 껌값 좀 쥐여주고 통통배에 맡겼겠지만, 냉동시설이 필요했습니다. 제대로 된 냉동고를 갖추고 있는 배는 멀리 나가는 원양어선뿐입니다.”‘통나무’가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썩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중국 공안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신선한 상태가 유지되어야 했다.

    고심에 잠긴 듯, 침묵하던 주양이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 번 건드렸다. 납득했다는 뜻이었다.

    양 비서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귀가 몇이나 됩니까.”“호성실업 사장과 운반해주는 배의 선장뿐입니다.”양 비서가 즉각 브리프 가방에서 사진 파일을 꺼내 주양에게 주었다.

    신라 41호의 선장의 비리 포착 장면이었다.

    그간 어획할 때마다 참치를 40마리씩 야금야금 빼돌려 팔아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현찰에 탐욕스럽지만 만용을 부리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진짜 통나무든, 막말로 사람 시체든 관여되고 싶진 않을 겁니다. 한신과의 연계성은 전혀 모르게 해뒀습니다. 사장 지인의 개인적인 용무쯤으로 압니다.” “밖으로 새어나갈 확률은?”“0.3퍼센트 미만입니다.”“그렇다면 저는 0.4퍼센트로 올려야겠군요.”양 비서가 다시 당황했다. 주양은 가차 없었다.

    “호성실업 사장은 청년시절, 청록교역 회장 밑에서 3년을 생활했습니다. 경쟁사처럼 보이지만 둘은 꽤 막역했던 과거를 곱씹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청록교역, 여긴 현재 한신중공업에 5000톤급 배 3척을 수주 맡기고 있는 회사입니다.”한신중공업.

    주양의 친삼촌이자 후계 구도를 두고 겨루고 있는 진두영이 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 그룹 계열사였다.

    그런데 ‘통나무’ 배달을 맡은 호성실업 사장이 진두영과 거래를 두고 있는 청록교역 회장과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니.

    뱀의 아가리에 먹이를 넣어준 것과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양 비서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스쳤다.

    “진두영 사장과 친분으로 엮일 경우의 수는 생각지 못했습니다.”“배달책을 잘못 선정했습니다.”거침없는 주양의 지적에 양 비서는 심장이 덜컥, 했다.

    “지금 당장 가서…….”“늦었습니다.”칼 같은 어조였다. 그 단호함이 양 비서를 더욱 기죽게 했다.

    초조해하는 양 비서에게 주양이 농담처럼 말했다.

    “외국에서는 배의 속도를 낮춰야 할 때 Ease Her, 이라고 한다면서요?” “…….”“지금은 기다릴 때입니다. 해결하려고 번잡하게 동분서주하는 게, 남들 눈에 더 튀는 꼴이 될 겁니다.”Ease Her.

    외국에서는 배를 여자로 취급한다.

    써니, 메리, 배의 이름을 여성스럽게 짓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이게도 여자가 배에 타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바닷사람들은 여자가 불경한 사건을 끌어들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자.

    주양은 평소 지나칠 만큼 여자관계가 결벽적이었다.

    치정 문제만큼 더러운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주양이 어째서 이번에는 여자를 끌어들인 걸까. 그것도 백운당 딸을.

    백운당 최혜란 사장은 딸 장사로 팔자 고치려는 가장 기피해야 할 악수였다.

    자기 딸과 주양이 그런 일로 엮였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빌미로 무언가를 더 큰 것을 얻으려 들 것이다.

    양 비서는 주양을 보았다.

    완벽하게 준비하고 실행한 자신의 플랜마저 허점을 지적해내는 상사의 철저함.

    ‘저토록 철두철미한 상사가 어째서…… 방에 여자를 끌어들인 걸까?’신영원과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양 비서가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봤을 때,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신영원은 만취해 있었고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양은 영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를 철저하게 의심하고 앞으로 그들이 가야 할 실크로드로 향하는 배에 승선시켜선 안 되는 ‘여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주양이 욕실로 걸어가는 것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양 비서는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양 비서가 객실로 돌아오니 두 사람은…….

    “그래서, 알아보라는 것들은 다 마쳤습니까?”생각에 잠겨 있는 양 비서의 귓전을 주양이 낮은 목소리로 노크했다.

    얼른 신영원에 관한 것을 늘어놓았다.

    “별 달리 미심쩍은 점은 없었습니다. 특이하다면 초중고교를 졸업하지 않고, 홈스쿨링을 한 정도.”“…….”“사회성이 제로여서 백운당 안에서도 고문관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사장 딸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붙박이 신세는 유지할 수는 있는 모양이지만.”양 비서는 그러면서 책상 앞에 마지막 서류를 내밀었다.

    아침에 신영원이 깨어나면 받아놓을 서약서였다.

    “혹시 모를 것에 대비해 서류에 사인을 받아두려고 합니다. 4주 뒤에 산부인과 진료를 동행하고, 임신이 아니라는 게 확실시 되면 그땐, 이 일에 대해 문제 삼지 않겠다는.” “수고했습니다.”하지만 양 비서는 무엇 때인지 뭉그적거렸다.

    주양이 그 꼴을 흘깃 보았다.

    “더 할 말이 남았습니까?”“그럼, 얼굴 상처는 스토커의 성폭행 시도로 일단락하면 될까요……?”“알리바이를 위해 그러기로 합의 보지 않았습니까?”“이사님의 사회적 커리어도 있고, 성폭행 보다는 성추행 쪽으로 가시는 게.” “이슈를 덮기 위해, 더 큰 이슈를 터트려라. 성추행은 너무 추잡합니다. 그리고 그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 검찰 쪽에서도 날 터치하지 못할 명분이 생길 겁니다.”검경은 이미 그들의 하수인이었다.

    다만, 김 회장 아들이 살해된 것이 뉴스를 타게 되면 세간의 관심이 일 것이다.

    망했어도 기업의 총수였다.

    검찰은 수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어느 정도 시나리오를 짜서 던져줘야 그들도 편하다.

    개인 프라이버시를 어떻게 파헤칠까? 그것도 한신 진주양의 사생활을.

    물론, 영원에게 덮쳐졌다는 것은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면서,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방법.

    하지만 차선일지언정 최선은 아니었고, 정답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주양은 어째서 그녀와 동침한 걸까.

    평소 상사답지 않은 무질서한 행동이었다.

    굳이 알리바이를 위해서였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알리바이를 위해서 신영원과 동침했다?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의 끝에 이르러, 오롯이 하나의 혼돈이 비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도대체 신영원은, 어떻게 그를 함락시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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