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9화 (19/83)
  • 19화. 사건의 재구성 <2>2016.09.08.

    “그래서 못 하겠다고.”“하지만 살인자 낙인찍히면…….”“아니. 넌 최혜란을 죽이는 게 두려운 거야.”정곡을 찌른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 사장을 사랑하나?”“장난해?”“그럼 뭐가 문제지.”영원은 굳었다.

    “복수란 교활하며 냉정하고, 무서운 살의다. 복수대상이 여기는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시키는 살인 방법이지.”몰라서 훈수 받는 게 아니었다.

    “그게 바로 백운당이잖아! 최 사장의 과거가 깃든 것. 최 사장의 정체성. 그녀의 인생을 걸고 쏟아부은 정성이 맺은 결실.” 백운당을 빼앗는다. 이보다 완벽한 결말이 있나. 그런 영원의 안일한 발상을 비웃듯 주양이 말했다.

    “복수를 완성시키겠다? 겨우 집에서 내쫓는 걸로?” 말문이 막혔다.

    “빼앗아? 하녀처럼 부려먹어? 시답잖은 어린애들은 이래서 성가셔. 복수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야.”“…….”“저녁식사 때 우리가 먹은 그 스시, 왜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던 걸까.”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원이 먼저 형편없다고 욕했었으니까.

    “간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야.”“…….”“복수도 그래. 간이 안 된 복수는 맹탕이야. 맛없는 복수는 아무 감동도 없어. 보람도 없이, 그저 갈팡질팡. 막연히 무언가 달라졌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저 그뿐.”“…….”“사실은.”“…….”“하려는 의지가 없지.”주양이 영원의 정곡을 찔렀다.

    “딱 네 복수가 그래.”“…….”“대의는 없는데…… 명분만 화려해.”주양이 그 장식만 화려한 초밥을 어떻게 처리했던가. 쓰레기통에 쓸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하듯 그릇도 안에 같이 처박았다.

    그 예언대로, 맛없는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감동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대박 영화인 줄 알았는데 개봉해보니 B급 영화였다. 실망한 관객의 모습이었다.

    “신영원 씨 당신의 복수는 무척 흥미로웠어. 복수라. 그 어떤 드라마보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권선징악의 결말이지. 그런데 그 복수의 대상이 가족이라니. 너무 궁금했어. 과연 어떤 복수가 될 것인가.”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그들을 비추고 있는 전신거울을 응시했다.

    거울에는 영원의 처참한 꼴이 담겨 있었다.

    귀신같이 헝클어진 머리, 떨고 있는 어깨, 차갑게 얼어붙은 입술.

    순간, 쓰라린 낭패감이 주양의 표정에 스쳤다.

    말로 내뱉는 것보다 그것은 더 노골적으로 심장을 관통했다.

    영원은 비참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는 영원을 이 방에 데려온 것을 뼈저린 실수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네 복수……, 나를 굉장히 실망시켰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한 신파였어.”조금도 아쉬워하는 기미 없이 주양은 돌아섰다.

    볼일은 마쳤다는 듯, 퇴장을 선언하고 한순간에 차가운 얼굴색이었다.

    영원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외출 준비를 하는 주양을 멍청하게 보기만 했다.

    “누구 멋대로.”지구의 중력이 온통 발밑에서 무너졌다. 그녀의 복수는 그를 실망시켰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한 신파였기 때문에.

    실망? 내 복수가 시시해? 내 고통이 우스워?

    그는 영원에게 그야말로 오물을 뒤집어 씌웠다. 영원은 그에게 가서 따졌다.

    “네가 뭘 알아?”“적어도 복수가 아니라 투정이라는 것. 당신이 최 사장을 용서해주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지. 처음부터 복수심 따윈 없었어.”그가 슈트 소매를 잠그며 차갑게 일갈했다.

    그녀가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비웃고 독설을 퍼부어도 계모를 죽이지 못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한 복수의 종착역이 바로 패륜이었고, 더 비참한 것은 영원은 계모를 죽이지 못하리란 걸 제일 잘 알았다.

    그때 깨달았다. 이 남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듯 극적인 희열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

    이 남자에게 영원의 복수는 그저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원은 단순히 그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녀의 복수는 그를 실망시켰으며, 그것으로 그는 그녀에 대해 답을 내렸다. 폐기처분하기로.

    후드득, 붉어진 눈시울에 눈물이 맺혔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영원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적당히 장단에 놀아나주는 척하다가 이렇게 나가떨어지게…….”영원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꽃병에서 떨어져 나온 장미꽃이 그의 가슴팍을 맞고 떨어졌다.

    “처음부터 나를 진지하게 상대해줄 생각도 없었으면서!”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봤다.

    그 한심한 눈길에 영원은 눈물마저 막혔다.

    뭔가 중대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말 못 할 이유가 있어서 그가 자신의 복수를 도와주려는 거라고.

    그만큼 영원은 진심이었고 진지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재미있을 거 같아서 복수극에 동참하려 했다. 심심풀이로. 장난으로.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 속엣말이 날 것 그대로 게워내졌다.

    “……이중인격자.”후드득, 붉어진 눈시울이 닭똥 같은 눈물을 떨궜다.

    옳지 않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마음은 짓이겨야 마땅했다.

    주체할 수가 없을 뿐이다. 주체가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주책인 것이다.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에게 그가 걸어와 무릎을 땅에 대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는 머리통을 끝내 자기 앞으로 끌어다놓고 만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내게 젠틀하다고 하지.”반박하듯 유감스러운 음성을 박아 넣은 그는 진실로 잔인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를 천진하게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소중하게 다뤄주는 듯한 행동에 심장이 바짝 당겼다.

    “당신 말대로 난 이중인격자야.”“…….”“그렇지만 분명 나는 젠틀하기도 해.”“…….”“하지만 이보다 불친절할 순 없지.”다정한 행동에 치솟았던 분노도, 후회도, 다 그의 손 아래서 식어 내렸다.

    사랑이라는 참된 감정을 살게 하는 것도, 사소한 한마디로 해치워버리는 것도 그였다.

    모든 사실은 하나로 이어졌다. 그를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수 없도록 그는 그녀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짐작키 어려운 말들로 그녀를 다시 흔들어대려 하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그가 눈매를 가늘게 떠 영원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시선은 빨아들이는 것처럼 깊고 정확했다.

    “내 불친절함엔 한계가 없어.”“…….”“나는 얼마든지 네게 이보다 더 불친절해질 수가 있지.”그는 자신의 본질을 빌미로 그녀를 겁주었다.

    환희가 비명으로 불식간에 전락하는 순간을. 얼마든지 그렇게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셔버릴 수 있는 그의 본질을.

    그의 위험성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둠이 눈앞을 뒤덮었다. 암전이었다.

    영원은 숨을 떨었다. 주양도 갑작스러웠는지 조금 동요했다.

    둘은 바로 앞에 두고 깜깜해서 서로가 보이지 않았다.

    고급 주상복합 타워에 느닷없는 정전이라는 상황은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 전체에 불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상황을 알아보려고…….

    일어나려던 그녀는 단단한 손바닥 힘에 그대로 눌러 앉혀졌다.

    그와 동시에 빨려가듯 그에게로 그의 품에 끌어당겨졌다.

    “쉿.”뭐라 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영원은 얼어 있었다.

    “뭐…… 하는 거야.”“…….”“이거 놔.”주양의 그럴수록 더 단단히 그녀의 뒤통수를 눌렀고, 옥죄어왔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나를 갖고 놀았으면서……!”“부탁이야. 이대로 있어.”입술이 주양의 목덜미 근처에서 갈피를 잃고 헤매었다.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머리가 뒤엉켰다.

    그가 나를?

    ………자기 품에?

    상상하기만 했던 일은 상상보다 더 비현실적인 형태로 거리낌 없이 가상을 찢고 나왔다.

    그녀를 꼭 끌어안은 팔도, 뒤통수를 덮고 있는 그의 손바닥도 뜨겁다. 뜨겁다 못해 그 안에서 부서질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볼과 가까웠다.

    변덕스런 남자의 면모는 죽음의 오케스트라처럼 그녀를 롤러코스터를 위의 천국과 지옥으로 끌어올렸다.

    흰 셔츠 깃에 묻어 있는 도착적인 체취와 살내음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나쁜 남자였다.

    옳지 못한 감정이란 걸 아는데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그의 말처럼 바보이기 때문일까.

    영원은 기대듯이 남자의 가슴에 귀를 붙였다. 몸을 맡기고 있는 그의 품이 편했다.

    사랑은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게임이라던가.

    아마도 그는 쭉 그녀에게 형편없는 짝사랑 상대로 남으리라.

    잠시 뒤, 자가 발전으로 전구가 까불거리더니 다시금 드레스룸에 환하게 불빛이 다시 들어왔다.

    물에 풀어진 듯 그녀는 눅진해진 눈을 깜박였다.

    영원은 어색하게 그에게 안겨 있었다.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이거 풀어. 집에 갈 거야.”풀려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완력이었지만 영원은 연약한 척 바르작거렸다.

    이상한 것은 그였다.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고 있다.

    그의 시선이 살짝 새 뜬 문틈으로 옮겨갔다.

    불현듯 벌떡 일어난 그가 재빠르게 드레스룸 문을 잠그고 귀를 대었다.

    조용히 바깥 동정을 살피더니 리모컨으로 오디오를 켰다.

    턴테이블이 돌아가면서 드레스 룸에 신 나는 재즈 풍 음악이 번졌다.

    주양은 옷장을 뒤졌다. 내용물들이 닥치는 대로 쏟아져 나왔다. 무언가 쓸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그는 대답하지 않고 문득, 자신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대충 집더니 거울에 대었다.

    그는 주먹으로 망설임 없이 유리를 내리쳤다.

    악! 귀를 틀어막았다.

    영원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무언가 짐작이 가서 속이 울렁거렸다.

    “뭐야. 바, 밖에 누가 왔어?”말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신속했다. 생활이 익숙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노련함이었다.

    깨진 거울 파편을 옷감에 둘둘 말아 손잡이를 만들었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려다 아연해진 영원을 깨닫고 돌아봤다.

    그처럼 나쁜 짓을 하고 살면 원한 사는 일이 많겠지.

    가령, 빈집에 든 도둑처럼 몰래 숨어드는 도살자들.

    “깬 거울은 왜 들고 나가?”“…….”“그걸로 뭘 하려고?”“…….”“죽일 거야?”서슴없이 내뱉어진 물음에, 그렇게 말한 그녀 스스로도 놀랐다.

    물음은 혓바닥 아래 깊숙이 침전되어 떨쳐지지 않을 것처럼 무겁게 고였다.

    주양은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기정사실화된 것같이 흐르는 상황이 섬뜩했다.

    직감은 본능에 의해 이루어졌다.

    본능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단호했다.

    “네 눈엔 내가 뭐로 보이지?”모호한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을 듣는 대신 무표정하게 잠금 핀을 누르고 떠났다.

    팅- 소리가 단단한 질감으로 그녀의 마음을 둔탁하게 되울려 쳤다.

    문을 잠그면 적어도 바깥에서는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바깥은 지옥이어도 이곳만은 성역이었다.

    영원은 닫히는 문 사이로, 조금씩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만 봤다. 그 뒷모습에서 영원이 본 것은 궁핍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 손바닥에 자리 잡힌 딱딱한 굳은살처럼 이제는 인이 박힌.

    그에게는 일상인데 이상하게 영원은 그것이 슬펐다.

    그는 왜 나쁜 짓을 많이 하는 걸까.

    나쁜 짓을 덜 하면 적이 줄어들 텐데.

    그러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그는 정말 나쁜 사람인가.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묻고 싶었다.

    문을 잠가준 것은 어떤 의미였냐고. 혹시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걱정해준 것이었냐고.

    눈을 감았다. 아득한 겨울 눈보라처럼 눈꺼풀 안에 어둠이 불어 닥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영원은 참을 수 없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끼익- 문은 경련하는 노인처럼 기이한 신음을 목구멍으로 끓고 열렸다.

    심장박동이 가팔랐다. 영원은 문밖으로 숨죽이고 머리를 내밀었다.

    실제로 비춰지고 있는 광경에 심장이 추락했다.

    복도는 한없이 고요했다. 완벽한 암야였다.

    기다란 복도에 유일한 빛은 그녀가 서 있는 침실뿐이었다.

    집어삼켜진 듯, 웅크린 어둠 속에 그녀는 홀로였다.

    바다 동물의 몸속처럼, 동굴처럼, 복도는 괴괴한 적막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원은 룸을 나왔다. 깊은 내부를 걸었다.

    빛도 얼마 걷자 끊겼다. 다행히 더듬더듬 벽에 의존하자 거실로 이어졌다.

    거실은 창가에서 흐른 달빛에 푸르스름했다.

    집이 너무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복도가 미로처럼 얽혀 있다.

    그녀가 아는 곳은 처음 이 거대한 사탄의 아가리로 발을 들였던 현관문뿐이었다.

    영원은 현관문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차갑게 식은 손끝에 희미한 고통이 얼은 것처럼 쑤셔댔다.

    현관문이 보였다. 이제 저기로만 가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곧 그것이 제일 큰 실수였음을 눈으로, 귀로, ……발바닥에 질척이는 촉감으로 영원은 깨달았다.

    한발 내디뎠다. 발바닥이 차가운 소리를 내며 피 웅덩이 속에 담가졌다.

    영원은 정신이 차츰 멀어져갔다가 되돌아왔다. 황폐한 감각들이 칼날같이 쭈뼛 섰다.

    달려든 손이 그녀의 발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영원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끄…… 어……억.”‘그것’은 피웅덩이에서 태어난 시체 같았다. 영원의 발목을 쥐고 놓지 않았다.

    영원은 비명을 내질렀다.

    “내 다리 놔. 내 다리 놔. 내 다리 놔?????!” 꺄아아악! 형언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복부를 칼에 찔린 그것은 위장에서 피 찌꺼기를 토하며 그녀 위로 올라오려 했다.

    걸음질 하던 심장이 맹렬하게 추격전을 벌였다. 피살당한 이성을 공포가 집어삼켰다. 숨통이 턱 막혔다.

    죽는다.

    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죽는다

    “이거 놔아아아아!”영원은 ‘그것’을 떼어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도망쳤다.

    룸 불빛이 눈앞이었다. 미친 듯이 뛰었다.

    문득 ‘그것’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주양을 지키던 경호원이었다.

    주양이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던 양말의 주인이었다.

    등 뒤에서 절규가 터져 나온 것은 그쯤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비명소리에 영원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재가 있는 반대편 복도였다.

    그녀는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그 방에서 도살자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흉포한 살기가 넘쳐났다.

    그녀는 얼른 룸에 숨었다. 옷장 속에 몸을 웅크렸다.

    사지가 마디마디 뒤틀리듯 진정되지 않았다.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파묻었다. 죽어가던 경호원의 모습이 파편처럼 각막을 찔렀다.

    경호원이 칼에 찔리면 주양은 지금 누가 지키고 있지.

    방금 전 그 비명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설마 주양의 것일까?’ 저 방에 있는 게 분명하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걸까.

    두서없는 질문들이 마구 섞였다. 실신하다시피 영원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고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진 것은 꽤 시간이 흐르고서였다.

    뚜벅뚜벅…… 소리는 문 앞에서 멈췄다.

    영원은 눈을 들었다.

    끼이익……

    문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열렸다.

    주양을 처음 봤을 때 턱시도가 참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화이트와 블랙이 한데 어울리긴 어렵다.

    두 색이 조화를 이룬 멋진 턱시도가 저토록 잘 어울리는 남자가 또 있을까.

    하지만 역시 그는 턱시도가 잘 어울린다.

    뛰어야만 사는 본능도 잊고, 심장 떨림도 그를 보고 멎지 않은가.

    그는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 피 묻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나머지 다른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죽음과 쾌락이라니.

    그런 순간에도 그의 턱시도는 순결하고 고결했다.

    칼자루가 타일 바닥에 던져졌다. 깨지는 소음을 낸 날붙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와 살점이 붙어 있었다.

    주양이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피를 갈구하는 흡혈귀처럼, 거침없이……

    다 마신 글라스를 그가 등 뒤로 던져 깨버렸다.

    문득, 쥐새끼처럼 공포에 질려 숨어 있는 영원을 발견하고는 그의 눈빛이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았다.

    아까 그 질문에 그는 해답을 찾는 듯했다.

    ‘네 눈엔 내가 뭐로 보이지?’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살인귀였다.

    통증이 살을 저몄다. 수직 낙하하는 눈물은 소나기처럼 뺨을 짓물렀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내 불친절함엔 한계가 없어.’이런 감당 못할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