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8화 (18/83)
  • 18화. 사건의 재구성 <1>2016.09.04.

    엄마와 아빠에게 약속했거든.

    행복했던 그 집을

    반드시 지켜내기로.

    [영화 신데렐라 中]

    -1년 전, 영원 26세

    “어젯밤 날 실컷 덮쳐놓고, 모르쇠로 나오면 곤란하지” 주양이 욕실에서 충격적인 말을 터트린 후, 두 사람은 거실로 나와 마주 앉아 있었다.

    주양이 영원을 몰아붙였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듣고 있습니까?”“…….”“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신영원 씨.”굳은 목소리는 어제와 다르게 무척 냉정하게 영원의 이름을 불렀다. 채무자를 다그치는 사채업자의 경멸감과도 같았다.

    적어도 친구를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루 만에 끝난 바람, 그런 관계.

    영원은 얼어붙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항변하려 했지만 기억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단 하나도.

    *

    8시간 전.

    ‘좋아. 계속 그렇게 해. 내가 너에 대해 답을 빨리 내리게 만들지 마. 네가 어려운 여자로 있는 한 내가 널 놓는 일은 없어. 그럼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신영원 씨. 알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기대되는군요.’영원은 그가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다 테이블에 실신하듯 엎어졌었다. 와인 한 병을 몽땅 마신 것 같았다.

    불현듯, 객실에 두런두런 울려 퍼지는 말소리에 영원이 깬 것은 밤 10시쯤이었다.

    “그럼 지시하신대로 일은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희미하게 사람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양 비서였다.

    밤에도 업무보고를 하는지 그는 주양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주양은 맞은편에 앉아 잠이 깨는 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영원은 상체를 세워 흩어진 눈 초점을 모았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거실엔 영원은 혼자뿐이었다.

    현재 시각 10시 20분.

    꿈결이었나.

    주로 계모에게 복수를 할 방법들을 이야기했다. 주양은 영원이 쏟아내는 말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다.

    ‘최 사장에게서 다 빼앗을 거야. 집도, 절도 오갈 수 없는 처지로, 자존심마저 바닥나게. 그 여자한테 남는 것은 내게 꿇을 무릎밖에 없게 될 거야.’‘사과해야 할걸? 백운당을 제 목숨줄처럼 부여잡고 안 놓는 여자니까.’‘거지꼴을 면치 못하게 해주지. 구걸하게 할 거야.’‘내 가게에서 하녀처럼 부려줄 거야. 처참하게.’ 주로 그는 듣는 입장이었다.

    백운당을 빼앗아서 사과를 받아낼 거다. 애원하면 하녀로 부려줄 거다.

    허무맹랑하고 유치찬란한 그녀의 복수극을 전혀 지루해하는 반응도 없이 아주 진중하게 경청했다.

    잔인하다가도 저렇게 정중할 때보면 그의 진짜 모습이 헛갈렸다.

    “으…….”깨질 듯 아파오는 골을 붙잡았다. 영원은 잠시 그대로 아이스 버킷에 있는 얼음을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었다.

    가까스로 가출했던 정신을 돌려놓고 그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미로 같은 복도를 한참 따라갔다. 물소리가 가까워지는 어떤 방에 다다랐다.

    욕실 딸린 그의 침실 같았다. 문지방에서 망설였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개인적인 공간에 멋대로 침범하는 걸 극도로 치를 떠는 부류가 있다.

    영원 역시 그러했다.

    뭉그적거리던 그녀는 어색하게 금을 넘었다. 한 번 어기니 죄악감도 흐릿해졌다.

    동굴을 탐사하듯 신중하게 방을 살펴보다 거울 달린 콘솔에 등을 부딪쳤다.

    몇 가지 기초 화장품들이 있었다. 신기하게 보다가 그 중 푸른 유리병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그의 몸에서 나던 향과 같았다.

    향기에도 제각각 이름이 있다던데 이건 뭐라고 부를까?

    궁금했다. 회사 브랜드를 읽었지만 영어인 듯 영어가 아닌, 꼬부라지는 외국어에 힘 빠졌다.

    그림처럼 머릿속에 박아뒀다가 나중에 인터넷으로 주문해야겠다.

    새로운 하나가 보물함에 추가된다 여기니 설렜다. 영원은 샤워부스 소리가 어느새 멈춘 것도 잊고 몰두했다.

    주인 허락도 안 받고 유리병들을 만지작거리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서 바짝 콘솔에 몸을 붙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파블로프 개처럼 변명부터 찾아졌다.

    “아무것도 안 만졌…….”새카만 눈이 무심하게 방문자를 직시했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닦았다. 평소 딱딱하게 정돈되었던 까만 머리칼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앳된 모습에 영원은 가슴이 선덕거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물방울이 선명하게 파인 가슴 근육을 지나, 허리 아래 치골에 고였다.

    최소한의 양해도 없이 그의 몸을 맞닥트렸다.

    영원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눈동자를 수직으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머릿속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옷을…… 옷을…….” 그 혼돈을 헤집고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녀를 고문하는 행위였다.

    자비심 없는 남자는 거침없이 코 닿을 거리에 당도했다.

    그가 허리 숙이고, 가까워진 바디워시 향이 숨을 간질인 순간 영원은 눈을 감았다.

    “……!”

    미동 않는 공백 속에서 대기는 고요하고 더디게 흘러갔다.

    그가 아주 가까이 접근해 있다. 놀랄 만큼 가까이.

    됐었다 생각하면 아직도였다. 1초가 억겁을 지낸 듯 요원해졌다.

    더 이상 영원이 참지 못하겠다고 몸부림치려는 순간 가운을 재빠르게 집어 든 그가 미련 없이 떨어졌다.

    그제야 숨이 터졌다.

    주양이 목욕 가운을 동여매고 평탄한 어조로 묻는다.

    “술은 좀 깼습니까? 직원 시켜서 술 깨는 약 올리도록 하죠. 그거 먹고 좀 안정 찾으면 집에 가도록 해요. 차 대기시켜 줄 테니.”  그는 방 옆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영원이 마음을 추슬렀을 땐 이미 그는 슈트로 완벽하게 갈아입은 후였다.

    “또 외출하려고?”“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잠을 자려는 게 아닌데 씻다니. 샤워를 저렇게 자주하니까 그한테서는 항상 청량한 향만 나는 구나 싶었다.

    그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영원은 눈앞의 풍경에 입을 벌렸다.

    넥타이는 브랜드별 종류별로 구비해놨고 소지품들, 손목시계만도 몇십 종류가 넘었다.

    영원은 유리선반 아래 있는 시계를 경이롭게 눈에 담았다.

    그가 손목에 시계를 찼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까 봤던 그의 나신이 떠올라 그녀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눌렀다.

    “내가 술김에 헛소리 지껄인 건 아니지. 띄엄띄엄 기억이 안 나.”“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겁니까?”“……내가 허튼소리라도 했어? 어떤 말?”“인심도 후하지. 내가 시키면 뭐든 팔 걷어붙이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겠습니까.”뭐든, 이라는 대목에서 당황했지만 그녀는 평정을 찾았다.

    복수를 도와주는 대신 그도 그녀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게 정당했다.

    그래봐야 계모의 정재계 인사들의 비리장부일 게 뻔하지만.

    “최 사장 장부라면 내 선에서 얼마든지 몰래 빼내올 수 있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처리할 사람이 필요한 거지?”주양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내민 건 행커치프였다.

    영원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이것부터.”접으라는 듯 조용히 대화를 잘라내는 목소리는 비리장부는 No라는 투였다.

    고작 백운당 하나 어쩌지 못할 남자가 아니다.

    영원은 행커치프를 받았다.

    한식당에서 일하면 테이블 냅킨을 일일이 다 접어야 하기 때문에 별의별 걸 다 접는 기술을 익힌다.

    매일 같이 몇백 석이나 되는 자리에 학을 접어 놓는 그녀였다.

    하도 접다보면 종이접기의 신동이 된다. 웬만한 건 눈대중으로 접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뭔데? 백운당 비리장부일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복수만 궁금했던 거야? 너도. 하하.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네. 그렇게 따분하다면 복수 방식을 네가 정해보는 건 어때? 나는 선택장애가 도졌는지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잘 못 고르겠어.”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인 건 착각일까?

    “이를 테면?”“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만 빼고 전부.” 싱거운 복수는 복수가 아니다.

    “차라리 너 죽고 나 죽고가 낫지.”  마치 햄릿처럼 말이야.

    하지만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 영원은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는데 긴 공백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거 좋군요.”확성기를 틀은 듯 유난히 도드라진 음성이 단숨에 고막을 가르고 들어왔다.

    “당신 손으로 최 사장을 죽이는 것도 별미겠어. 그 피날레의 유일한 관객이 돼보는 것도.”영원이 어색하게 표정 관리했다.

    “그러시던가.”장난이지만 농담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꼼지락대다가 행커치프를 그의 가슴팍에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주의하며 모양 잡는데 문득, 엊그제 일이 떠올랐다.

    배웅하던 해수와 차 안에 앉아 계집에게 뭔가 속삭여주던. 뭔가를 말하자 해수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말을 했기에 그 도도한 계집애가 낯짝을 붉힌 거지?

    좋아한다고 말하기라도 한 거면 어떡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금 영원이 복수하겠다고 설쳐대는 이 그림은 그에게 몹시 못마땅할 터였다.

    “내가 최 사장한테 복수해도 되겠어?”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다.

    “미래의 장모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네 말대로 내가 최 사장 망가트리면 해수한테도 타격이 막심하잖아.”슬퍼할 거다. 마음만 슬플까. 걔 인생도 엄청 슬퍼질 거다.

    계모는 그를 해수와 이어주고 싶어 한다. 해수도 그가 좋다면 분명 마다하지 않을 거고.

    그렇다면 그는……? 그는 어떻지?

    어째서인지 가슴이 죄어들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해수…… 예쁘지?”“…….”“남자들 다 그래. 해수라면 껌뻑 죽어. 막상 해수가 들이대니까 거부 못 했던 거 이해해.”영원은 그가 아니라고 해주길 바라지만 그는 긍정하듯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고집스런 침묵이 황폐하게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제멋대로 말들이 미어져 나왔다.

    “요구 말이야. 어차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한정될 테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네가 원하는 거라면 하나밖에 없을 거 같은데. 이를 테면 이런 걸 부탁해보지 그래? 해수가 좋아하는 음식, 취미, 자주 가는 곳이 어딘지.”자신의 입을 인두로 지져 버리고 싶었다. 신영원 멍청하긴.

    부탁하지도 않은 향단이 노릇을 해주겠다고 하고 있다.

    “해수랑 결혼하면 내가 당신 처제가 되는 건 알아?”영원은 애꿎은 손수건 모양만 건드렸다.

    “피차 껄끄러운 사이…….”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끝내 가련한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짓눌렸다.

    뭔가에 쫓기듯 장황하게 늘어놓는 영원을 그가 허리 숙여 눈을 얽었다.

    그녀의 뱃속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조롱 섞인 태도였다.

    “다 끝났나?”영원은 부끄러움에 목덜미가 달라 올랐다. 본심을 들킬 것 같아 숨이 가빴다.

    샤워를 갓 끝낸 몸에서 코롱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슈트 안에 감춰져 있지만 육식동물 같던 몸체가 성적 텐션을 끌어올렸다.

    기이한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다 턱, 허리가 잡혔다.

    그가 훌쩍 그녀를 가슴께로 끌어 당겼다. 두 몸뚱이가 한 몸처럼 밀착됐다.

    주양은 늑장 피우지 않고 직진했다.

    “살아온 환경도 종도 다른 두 개체에 대해 생각해봤지. 말도 안 통하는 두 개체가 어떻게 약속을 하고 합의를 이행할까. 악어와 악어새가 과연 이상적인 파트너일까?”“…….”“생각해봐, 둘 사이에 약속 같은 건 없어. 지켜야 할 도리도.” “…….”“사실 악어는 이미 포식을 끝내고, 입 벌리고 배부른 휴식을 취하는 것뿐이야.”그의 손이 그녀의 귀밑을 파고들었다. 귓불을 지분대던 손끝이 옮겨와 얼굴을 만지려 했다.

    영원은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는 무안해진 손을 봤다.

    얼굴이 보일까 봐 철벽 치는 그녀를 불쾌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흥겨운 눈동자로 머금는다.

    “그래서 악어새는 매번,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면서도 잡아먹힐까 봐 전전긍긍이지.” 악어새는 언제 잡아먹힐지 몰라 악어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

    애초에 친구 따위가 가능할 리 없는 종들이었다.

    지금 그녀가 그러하듯이.

    그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영원의 속눈썹을 만지작거렸다.

    “그만 떨어.”“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갈래.”영원은 두렵게 쏴붙이고 나가려 했다.

    간결하고 주저 없는 동작으로 그가 영원을 다시 옷장에 처박았다.

    “아앗!”그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영원은 창백하게 숨을 허덕거리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호흡이 무수히 떨렸다. 자극받은 듯 주양의 눈빛이 생생했다.

    “눈을 맞춰. 참을 수 없다는 식으로. 이렇게 쥐새끼처럼 슬금슬금 간을 보는 게 아니라.”“…….”“십중팔구 그럼 넘어와. 충실한 관계는 그 뒤야.”“…….”“일단, 자빠트리고 보는 거지.”돌려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 남자는 수직으로 그녀의 본심을 후벼 파는 쪽을 택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꿰뚫고 있었다.

    노골적인 어조에 귀싸대기가 후려쳐진 것 같은 모멸감이 밀려왔다.

    그는 똑똑히 일러주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경고했었다. 공생의 관계를 넘지 말라고.

    육체적 관계를 선택하지 않은 건 영원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대한 부당함과 그녀의 집과 가족의 행복을 빼앗은 계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에게 손을 벌렸다.

    구걸하는 창녀처럼,

    거지에게 적선해달란 듯이.

    그리고 지금 그는 그녀에게 온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상황을 이렇게 끌고 온 것은 그녀였다.

    “지금 우리가 몇 센티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아?”“45……센티?”“15센티.”“…….”“사람과 사람 사이에 친밀함이 생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거리인 45센티미터보다 근접해. 네가 말한 악어와 악어새의 거리야. 악어와 악어새는 오롯이 각자 필요를 위해 공생을 한다. 악어는 입안의 거슬리는 찌꺼기를 청소하기 위해 악어새를 입안에 들인다. 자아. 나는 그보다 더 근접한 거리까지 널 들였어.” “…….”“나는 허락했어. 내 가시권 안에서 멋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당신이 나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기대되는군요.’그의 말엔 다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복종을 바라면서도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배반적인 마음, 기대감과 우위선점.

    이미 영원이 그를 설득해야 할 위치가 된 것부터 그는 이 거래의 주도권을 쥐었다.

    단박에 협상 테이블을 뒤집고 우위를 점령하는 남자는 가히 사업가다웠다.

    그러면서도 떡밥을 아직 다 풀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아직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하진 않았다.

    또한 자신의 요구조건도 드러내지 않았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표리부동한 면모는 비즈니스에 매우 능통했다.

    “이제 너도 뭔가를 보여줘야지?”그녀에게 똑바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그전에 네가 진짜 원하는 것부터 말해야지.”내가 원하는 것?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주긴 할 거야?

    말하지 못한 것은 말하지 않은 것보다 말할 기회가 없어서였다.

    고백하지 못한 것은 고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백하고 싶었던 남자와 사적으로 한 번도 엮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들켜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데서 보니 더없이 친절한 남자가 아닌가.

    상냥하게도 직접 물어와 주고 있다. 좋은 기회였다. 다시없을 요긴한 순간이 될 것이다.

    입술을 떼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간단하고, 그녀는 너무도 오래 그 말들을 간직해왔다.

    진력날 만큼. 그래서 마음이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로.

    건조한 입술은 지난 긴 여정을 마치듯 희미하게 몸체를 떨었다.

    그러나 그녀가 선전포고 한 것은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그거 알아? 최 사장이 해수를 제 목숨처럼 아낀다는 것.”그를 놀래키고 싶었지만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욕심내면 체하는 법이었다.

    이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는 유치함도 한몫했다.

    “복수의 방법엔 이런 것도 있어.”“말해봐.”“복수 대상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망가트리는 것.”뻔뻔한 낯짝과 눈동자를 맞대다가 그녀는 나직이 도발했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는 것.”“…….”“자매의 남자를, 빼앗는 것.”주양이 해수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그러라 하겠다. 해수가 그 없이 살 수 없게 된 순간, 그를 빼앗아 오면 되니까.

    비뚤어진 사랑 고백이 애처로웠다. 독설을 내뱉는데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나, 당신이나 그건 둘 다 원치 않는 일이잖아?”정확히는 그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당신의 베스트 프렌드도 섹스 프렌드도 할 마음이 없어. 그러니까 요구조건이나 빨리 말해. 눈앞에서 꺼져줄 테니까.”“말했을 텐데.” 그가 일축했다. 영원은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말장난…….” 천천히 굳었다. 설마……

    “나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아. 누구와 달리.”그가 그녀의 제안을 들어 줬을 땐,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단 소리였다.

    한가해서 그녀랑 놀아주는 게 아니다.

    ‘당신 손으로 최 사장을 죽이는 것도 별미겠어. 그 피날레의 유일한 관객이 돼보는 것도.’그 순간 영원은 소꿉장난이 끝났음을 느꼈다.

    “그건…… 살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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