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7화 (17/83)

17화. 실종 7일째 <2>2016.09.01.

숨죽이고 주양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영원은 그의 본질이 다시금 되새겨졌다.

일종의 가학성이었다.

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침투해오며 쫓길 대로 쫓다가 수고로움을 더하지 않고 포획하는 것.

섹스 프렌드라니.

“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베스트 프렌드야, 섹스 프렌드야?”그는 한 치의 죄책감 없이 내뱉었다. 조롱하는 투였다.

“복수는 핑계고, 내가 널…… 꼬시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럼 재미없고.”“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해주기 싫으면 말 것이지. 화내고 있지만 그가 조롱한 45센티미터는 그 모욕을 견딜 만큼 매력적인 거리였다.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고, 희박하다해도 그를 무릎 꿇릴 가능성의 지푸라기라도 쥘 수 있는 관계.

문득 영원은 자신이 육체적 관계를 원한다고 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졌다.

일반인 축에도 못 드는 남루한 계집애를 경멸할 거다. 가차 없이 내던져 버리리라.

“내가 원한 건 둘 다 아니야.”“복종도, 사심도 아니다?”“악어와 악어새 같은 거야.”영원의 느닷없는 말에 그가 비릿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악어와 악어새?”“공생관계 몰라? 악어는 강인한 동물이지. 악어새는 그에 비해 작고 초라해.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야. 놀랍게도 누구 하나에게 복종하지 않고 공존하며 지내지.” 품위가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상상했다.

섹시한 갑옷을 두른 악어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위이면서 가장 큰 무기를 믿고 맡기는 존재라니.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마. 입만 벌리고 가만히 있으면 돼. 그저 그 날카로운 이빨만 내게 내어줘. 나는 그 이빨로 내 명예를 회복할 테니.”해수와 춤을 추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완벽한 한 쌍이었다.

의심하지 못할 만큼 둘은 잘 어울렸다.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만큼.

이건 영원 혼자만의 복수가 아니었다.

외롭게 죽어나간 자신의 모친을 대신한 처단이고 응징이었다.

자신은 다르다.

절대 모친의 전철을 밟지 않은 거다.

주양이 반박했다.

“악어가 이빨을 내줬다고 악어와 악어새가 친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아이러니하게도 악어새는 살기 위해 악어의 입에 머리통을 들이밀고 있으니.”“그러나 분명한 건, 위험한 포식자 악어에게 유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악어새뿐이라는 거야.”영원이 한 번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당돌한 영원에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복종도, 사심으로 접근한 것도 아닌 제3의 존재는 그의 구미를 당겼다.

주양이 오래도록 불가해한 눈초리로 영원을 보더니, 괘씸한 듯 그녀의 이마를 툭툭 손끝으로 쳤다.

그렇게 행동하지만 상당히 즐기고 있는 표정이었다.

“좋아. 계속 그렇게 해. 내가 너에 대해 답을 빨리 내리게 만들지 마. 네가 어려운 여자로 있는 한 내가 널 놓는 일은 없어. 그럼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협력을 할지 말지는 앞으로 당신 행동에 따라 결정합니다. 신영원 씨. 알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기대되는군요.”그는 영원을 시험하고 또 시험할 것이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심을 말하는지, 적인지 동지인지, 본질을 꿰뚫려 들 거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유혹해 올 것이다.

유혹에 넘어가면 영원은 그가 말한 대로, ‘사심’을 가진 여자가 된다.

그럼 간단히 그는 영원에게 관심이 식겠지.

그가 원하는 지점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흥미가 줄어드는 것. 시시한 여자임을 확인하는 것.

그러나 영원은 그것에 응해줄 마음이 한 톨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가장 비상식적인 여자로 남는 한이 있어도 그의 시선을 붙들고 싶었다.

각자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파트너십, 은밀한 공모.

분위기는 몹시 좋게 흘렀다. 분명 그랬었다.

그와 술을 나눠먹고 필름이 끊기기 전까지만 해도.

.

.

.

어째서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저 계모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영원은 끊어질 듯 희미해진 시야를 붙잡았다.

주양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가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깨진 살점에서 흐른 피딱지가 루비처럼 붉게 반짝였다.

쾌락보다 더 예술적이다.

‘이래봬도 쓸모가 많을 거야. 백운당에 왔다간 정재계 인사들을 쥐고 흔들 만한 내역들. 어디에 숨겨 있는지 알아.’‘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베스트 프렌드야, 섹스 프렌드야?’‘당신이 나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기대되는군요.’영원은 육체가 주는 쾌감에만 몰입했다. 깊게 뿜어지는 숨에서 피비린내가 짙게 흘렀다.

그저 뜨거웠다.

현실인지 혼몽인지 정신을 잃었다.

*

다음 날 아침, 영원은 속이 메스꺼웠다.

순간 치미는 구역감에 욕실을 찾아 뛰어 들어갔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그대로 게워내졌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양변기를 부여잡고 토를 하는 그때였다.

찰방거리는 물소리에 의식이 명료해졌다.

놀라서 돌아보자 벗은 채로 욕조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는 주양이 보였다.

영원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멍청하게 있는 영원에게 주양이 젖은 머리를 넘기며 산뜻하게 묻는다.

“당신이 친구를 사귀는 법, 아주 놀랍더군요.”“무슨…….”“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발뺌하면 곤란해.”그가 고개를 돌려 영원을 눈에 담았다.

순간적으로 영원은 비명이 씹어 삼켜졌다.

그의 한쪽 얼굴을 처참했다. 피멍을 덧칠한 것처럼 상처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가 경멸조로 쏘아붙였다.

“어젯밤 날 실컷 덮쳐해놓고, 모르쇠로 나오면 곤란하지.” 덮쳐?

……

내가?

*

“남자가 여자한테 그런 일을 당했다고 어디 가서 쪽팔려서 이야기할 수도 없어요. 나의 사회적 지위와 위치, 내 커리어. 아마도 이제부터 내게는 여성에게 겁탈당한, 이란 수식어가 꼬리표로 따라붙겠죠.”“…….”“처음으로 좋은 친구가 생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욕실에서 충격적인 말을 터트린 후, 두 사람은 거실로 나와 마주 앉아 있었다.

주양이 영원을 몰아붙였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듣고 있습니까?”“…….”“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신영원 씨.”굳은 목소리는 어제와 다르게 무척 냉정하게 영원의 이름을 불렀다. 채무자를 다그치는 사채업자의 경멸감과도 같았다.

적어도 친구를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루 만에 끝난 바람, 그런 관계.

얼어붙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영원은 무언가를 항변하려 했지만 기억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단 하나도.

-실종 7일째

첫 단추를 잘못 끼면 두 번, 세 번째에 아무리 잘해도 되돌릴 수 없다.

그 남자와의 관계가 그랬다.

쏴아아 ??? !

영원은 샤워기 아래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리칼을 짓누르며 쏟아진 물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2평 남짓의 욕실은 간신히 사람 하나 서 있을 크기였다.

모든 시설은 자해 방지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딱딱한 타일은 방수 쿠션으로 둘러쌌고, 천장에 달린 샤워기는 손에 닿지도 않았다.

안에서 잠그지 못하게 문손잡이 역시 반대로 되어 있었다.

칫솔도 없다. 손으로 이를 닦는다. 칫솔을 목구멍으로 집어넣어 기도를 막으려 한 때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영원은 천장을 올라다보았다.

유리거울도 없는 이 욕실에 그녀를 비추는 건 천장에 달린 저 감시카메라였다.

어느 곳에, 무엇을 하건 눈이 쫓아다녔다. 하루 일거수일투족을 누가 감시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게 여자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쏴아아 ??? !

똑- 똑-

“아가씨, 들어갑니다.”바깥에서 문손잡이가 움직였다. 고무로 된 정량 컵에 노 집사가 샴푸와 바디제품을 덜어서 주었다.

영원은 그걸로 매일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처음엔 노 집사가 씻겨주었지만 이젠 누가 몸에 손대는 것도 싫어졌다.

사람들이 미워졌다. 씻겨주는 노 집사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가 노 집사 코피를 터친 적도 있었다.

기억은 드문드문 끊겼다. 진정제 과다투여 부작용이었다. 뇌가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것이다.

다 씻고 나오자 노 집사가 큰 타월로 몸을 감싸주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다 창가에 놓인 꽃다발을 발견했다.

“누가 왔다 갔어?”천진한 물음에 노 집사가 조용해졌다. 매번 똑같이 질문하는 영원을 낯설어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을 보듯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이젠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건가.

노 집사가 사다놓은 줄 알면서도 영원은 묻는다.

“그냥 물어봤어.”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누가 그녀를 찾아와주기를. 여기서 꺼내주기를.

그녀는 신해수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그러나 신해수가 되길 바라는 열망이 커져가는 만큼 병원을 탈출하고자 하는 반항심도 발톱을 드러냈다.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썩을 것이냐. 이 웨딩드레스를 입을 것이냐. 네가 신해수가 되는 거야.’신해수가 되기를 원하지만 진주양의 방식대로는 아니었다.

그 남자는 좀 더 애간장이 탈 필요가 있다.

영원은 새 환의로 갈아입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환의에는 단추가 없었다. 단추를 잘못 꿰는 일 따윈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원은 줄을 질끈 묶고는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부터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

유명 연예인들이 포토 존에 서서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기자들이 포즈를 요구하며 플래시를 마구 터트려댔다. 화장품 론칭 쇼였다.

‘신영원을 순순히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 같은데, 어떡하죠?’낮에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장 경감과 수진은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무작정 신영원만 바라볼 수 없었다.

장 경감은 결단을 내렸다.

‘답이 막힐 때는 연산을 처음부터 다시 해보는 거야. 그럼 공식에 내가 놓쳤던 부분이 나와. 처음으로 돌아간다. 한신호텔부터 다시 시작해보자.’신부 실종 당일 결혼식이 열렸던 연회장.

한신호텔에서 최고로 비싸다는 임페리얼 홀이었다.

호텔 직원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안전하게 쇼가 끝나도록 통행을 관리했다.

임페리얼 홀은 제일 깊숙한 장소에 있었다.

장 경감은 보안이 산만해진 틈을 타서 훌쩍 바리게이트를 넘었다.

한 번 빌리는데 억 단위라서일까.

일 년에 몇 번 행사가 있을까 말까 한 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평소엔 값비싼 물건들이 도둑맞을까 봐 잠가놓는다고 들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나.”길 잃은 척 서성대다 신부대기실이 있는 복도에 다다랐다.

극비수사라 그 흔한 폴리스라인도 안 쳐져 있었다. 웬만한 단서들은 과학수사대에서 이미 수집해가서 허술한 상태였다.

만능키로 문을 딴 장 경감은 대기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살그머니 문을 닫고 본격적으로 신부 대기실 구조를 파헤쳤다.

20평이나 되는 커다란 신부대기실은 파우더 룸이 곁방 식으로 따로 붙어 있었다.

청소된 깔끔한 방은 그날의 긴박한 상황과는 다소 동떨어졌다.

지문이 남지 않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파우더 룸 서랍을 열었다.

일시적인 공간이라 딱히 신부가 남기고 갈 만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옷장 앞에 섰다.

손바닥 크기만 한 UV 랜턴을 비추었다.

파란 불빛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흔적조차 잡아냈다.

쇼핑백이 놓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흐릿하게 자국이 발견되었다.

‘이 옷장에 미리 평상복을 보관해둔 뒤에, 갈아입고 도주했다.’장 경감은 신부대기실을 나와 신부가 그대로 빠져나갔을 경로를 따라가며 시뮬레이션 해봤다. 임페리얼홀은 호텔 2층이었다.

‘2층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1층 로비로 이어지는 계단을 이용하는 길 두 가지뿐이다.’ 계단 옆에 붙은 에스컬레이터는 북적이는 하객들 통행을 수월하게 했지만, 올라오는 방향 하나여서 내려갈 때는 꼭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신부는 예식장이 위치한 2층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를 스쳐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신부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로비 중앙에 멈춰 선 장 경감은 천장을 봤다.

천장 곳곳에 보이는 감시카메라들.

CCTV 한 대가 로비를 순찰하다가 장 경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카메라가 숨죽이며 장 경감을 담았다.

아무도 신부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 순간 카메라만은 신부를 지켜보았다.

*

밤이슬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백운당 본가 대문을 조심스레 열고 누군가 빠져나왔다.

잠복하고 있던 장 경감은 대시보드 너머로 노 집사를 보고 기다렸다는 듯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앞길을 막아서는 낯선 방문자에 여인은 주위를 살폈다.

“누구시죠?”장 경감은 안심하라는 듯 두 손을 보였다.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여사님께 신영원 씨 일로 여쭐게 남아서.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었다.

“흥신소?”“전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고급 어휘로 사립탐정이라고들 하죠.”“그런데요.”“아직 언질이 없었나 보죠? 진주양 씨가 고용한 사립탐정입니다. 현재 실종되신 신부님을 찾고 있죠.”실종된 신부를 찾고 있다는 설명으로 모든 것은 충분해졌다.

그들은 시내에 위치한 유명 브랜드 24시간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하시는 겁니까?”“출퇴근하게 된 지 얼마 안 됩니다. 그전에는 상시 대기였죠. 영원 아가씨가 병원에 적응할 때까지 같이 먹고, 같이 입고, 같이 자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셀 수 없이 많은 자해 전적과 탈출 시도. 그나마 신영원이 의지하는 이는 노 집사뿐인 건가.

하지만 장 경감이 이렇게 그녀를 찾아온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진술조서 내용을 봤습니다. ‘그날 밤’이란 말을 유독 강조하시더군요.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진주양의 32주년 파티가 있던 날 밤, 모든 것은 그날 밤에 시작되었다, 로 끝나버린 진술 조서는 장 경감을 밤잠 못 이루게 했다.

“이미 형사님 앞에서 다 털어놨는데 거기까진 못 보셨나요?”뒷내용을 모른다는 장 경감의 말에 노 집사가 의구심을 표했다. 급하게 훔쳐 오다보니 손에 잡히는 대로 바지에 꾸겨 넣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거기서 딱 끊겼지 뭡니까.”노 집사는 어려울 거 없다는 얼굴로 뒷이야기를 해주었다.

신해수는 그날 파티에서 주양과 춤을 췄다. 그들의 역사가 그날 밤에 시작되었다는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었다.

“신영원 씨도 그날 파티에 있었습니까?”“영원 아가씨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왜죠?”“감기에 걸렸으니까요.”“왜 하필 그날 감기에 걸린 겁니까?”“왜 그렇게 영원 아가씨가 궁금하신 건지 먼저 여쭤도 될까요?”숨결 하나 높아지지 않고 여인은 허를 찔렀다.

대화가 일순간에 막혔다.

노 집사의 예리한 혀에 걸려 넘어진 장 경감은 인중을 검지로 쓸었다.

어쩔 수 없나. 들통 나느니 대놓고 떠보는 쪽이 유리했다.

“혹시 신영원 씨가 형부를 짝사랑했다는 소문 아십니까?”노 집사가 미세하게 입매를 굳혔다.

동요하고 있는 여자의 심리를 장 경감은 빠르게 읽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노 집사가 헐거운 입을 열었다.

“무슨 그런 입에 담기도 망측한 얘기를.”“모르십니까?”“모릅니다.”장 경감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신영원의 지독한 짝사랑을 넘어 둘의 내연관계를 자신이 안다는 사실이 진주양 귀까지 흘러들어 가면 장 경감은 죽은 목숨이었다.

장 경감은 능청스럽게 시답잖은 관심꾼 역할을 자처했다. 몸짓과 말투를 가볍게 연극했다.

“마을에 소문이 짜하더라고요. 신랑 때문에 가출을 했네, 정신병원을 그래서 보냈네, 평소 언니를 질투했네.”“다 남 얘기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헛소리죠. 백운당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에, 폐쇄적이다 보니 촌구석 노인네들이 시기심에 입방아 찧기 일쑤입니다. 농촌이 원래 그래요. 남 일에 관심 많고, 타지인들 배척하고, 편 가르고. 아가씨가 정신병원에 가서 이상한 말이 떠도나 본데, 아가씨가 치료 받는 건 망상성 치매 때문입니다. 신랑 때문이 아니라.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 듯싶은데. 한 번도 출근 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어서요.”노 집사는 이 이상의 대화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숨기고 있는 게 많을 때 나오는 행동들이었다.

장 경감은 만족스럽게 수첩을 닫았다.

“폐를 끼칠 순 없죠.”그녀와 카페에서 헤어지기 전, 돌아서는 여자 등에 대고 소리쳤다.

“참, 좋으시겠어요. 아드님이 돈 많이 버셔서 미국으로 온 가족이 해외이주 하셨다면서요?”노 집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 경감은 더욱더 웃음이 진해졌다.

“조만간 병원 다시 들르죠. 그땐 신영원 씨 컨디션이 오늘은 맑음이 되기를 기도하죠.”신영원의 기분은 하느님도 어쩌지 못할 기도였다. 그녀의 기분은 누군가의 변덕이 부리는 마술이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노파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문득, 장 경감은 도로로 시선을 던졌다.

못지않게 수상한 검은 세단이, 냄새를 여지없이 풍기며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

봄 코트를 여미고 빠르게 길을 재촉하던 노 집사는 어느 순간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어느새 높아진 해가 눈부셨다. 노 집사는 고개를 틀었다. 꽃집이었다.

꽃다발 하나를 품에 안고 언제나처럼 VIP 병동에 도착하자 간호사들이 산뜻하게 인사를 해왔다.

지문 인식을 끝내고 병실에 들어갔다. 영원이 이미 일어나 침대 맡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창가를 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 보다가 문득 길어진 머리를 잘라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바깥은 벌써 여름이에요. 길가다가 꽃이 너무 예쁘길래 아가씨 생각나서 사 왔습니다.”노 집사는 꽃다발을 영원의 무릎에 올려주었다.

“보세요. 아가씨가 좋아하는 꽃이랍니다.”영원은 꽃다발에 관심을 보이는 듯싶더니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쓰다듬던 손길이 돌변했다.

꽃을 미친 듯이 마구 쥐어뜯었다. 끔찍한 광경에 노 집사가 굳었다.

“그만……. 뭐 하는 거예요.”영원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뿜으며 꽃을 짓이겼다.

노 집사가 영원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만하세요!”영원이 진저리쳤다. 노 집사 손을 뿌리쳤다.

“노 집사가 아직 나에 대해 너무 모르네. 누가 그래. 내가 꽃 좋아한다고.” 영원이 으르렁댔다.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 형형해서 귀신같은 몰골이었다.

“나는 꽃 싫어. 꽃이라면…… 치가 떨려.” “하지만 저번에도 꽃이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그래. 화분을 선물해줬지. 근데 그걸로 내가 뭘 했지?”동정심에 잠깐 흔들려 화분을 선물했다.

영원은 그걸로 손목을 그었다. 바로 일주일도 안 된 일이었다.

“내가 원한 건 꽃이 아니라 그걸 담은 화분이었어. 화분 사달라고 했으면 의심했을 거 아냐.”노 집사는 한숨지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기분이 저조한 걸까.

“또 뭐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으셨어요? 아침진지가 입맛에 맞지 않던 가요?” “혹시 나 찾아온 사람 있어?”노 집사는 말을 잃었다. 미친 여자처럼 날뛰더니 거짓말처럼 무관심해진다.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끝을 못 보고 어긋났다.

영원은 조울증 환자 같았다.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좋아졌다 종잡을 새 없이 돌변했다.

“아가씨를 찾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그러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저 질문. 찾아온 사람이 있냐고 매일 같이 똑같은 해 오는 질문.

대답은 한결 같은데도.

“그냥 물어봤어.”영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매트리스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 누가 나를 찾겠어.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수개월이 넘도록 안 찾을 수도 있지. 그래, 그렇고말고.”노 집사는 못 들은 척 꽃의 잔해를 주워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찢긴 꽃을 보다 멍해진 영원을 다시 일별했다.

알게 해서는 안 되었다. 세상 밖의 누군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오늘 아침에 영원을 만나겠다고 비장하게 선전포고 하던 장 경감이란 작자를 떠올렸다.

‘그날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무도회에 갔던 영원은 그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노 집사는 조마조마하게 밤을 지새우며 영원을 기다렸다. 파티에 간 것은 최 사장에게 비밀이었다.

노 집사는 스스로 철저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최혜란 사장에게 책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로 경고를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영원은 아침이 되서야 돌아왔다.

그녀를 본 순간 노 집사의 머리는 백짓장이 되었다.

‘그 남자가 이런 겁니까?’‘그 남자가 이런 겁니까?’그날의 대화가 귓가에 쟁쟁대었다. 갈피를 잃고 헤매듯 떨리던 영원의 입술.

‘아니야. 내가 그랬어.’‘그분은 해수 아가씨와 춤을 췄어요. 사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정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영원이 주양을 짝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두둔하다니. 이제 안 될 말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온몸을 멍투성이로 해 와서 아무 일도 없다고요?’‘글쎄 신경 끄래도. 언제부터 날 걱정했다고?’ ‘그에게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길바닥에 뒹구는 쓰레기만도 못하게,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아가씨를 가지고 논 겁니다.’얼마나 험악한 관계였는지 듣지 않아도 생생했다. 성한 곳이 없다.

여자들과 드잡이라도 한 것처럼 흰 피부 곳곳은 할퀴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은밀한 부위도.

영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노 집사는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영원이 당해온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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