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6화 (16/83)
  • 16화. 그와 나의 45센티미터2016.08.28.

    “그런 반응 하지 말아요. 하고 싶어지니까.”노골적으로 찔러오는데 서슴없다. 쐐기. 한마디로 그는 쐐기였다.

    뭐…… 라고?

    분위기가 금세 어색해지자 흠결 없는 미소로 주양이 모든 걸 원위치 시켰다.

    “물론 당구를 말입니다. 신영원 씨와 빨리 공을 쳐보고 싶군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능청스럽게 그녀를 가지고 논다. 가출한 혼을 얼른 거둬들인 영원이 헛기침했다.

    “됐어. 이제 그만할래.” 빠져나가려 하지만 단숨에 제압당했다.

    그가 느긋하게 그녀의 어깨 부근을 훑어봤다. 파들파들 떨고 있다.

    힘껏 손을 움켜잡고, 영원에게 자세를 잡아주며 그가 말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하지. 누구한테 배우느냐, 처음에 누구 손을 탔느냐.”그가 공을 조준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가까워진 얼굴이 바로 귀 뒤에서 어른댔다.

    “이게 두뇌싸움이거든요. 하지만 사실 굉장한 육체전이기도 하죠.” 영원은 어느 순간에도 누군가와 이토록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다.

    맞닿은 몸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어댔고, 그 진한 울림이 그에게까지 전이될까 곤혹스러웠다.

    저항 한 번 못 하고 안겨 있는데 그가 입술을 귓전에 붙였다.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공에 집중을 하다 보면 볼일도 까먹어요.” “…….”“다리 사이에 힘이 들어가면서……, 입안이 바싹…… 바싹…….” 그의 숨이 영원의 귀에 닿아 있다.

    “타들어가곤 하죠.”진주양이 하얀 공을 타격했다.

    이리저리 빠르게 굴른 공이 판의 배열을 부산스럽게 흐트러트려놓았다.

    시선은 공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지만 온몸의 촉각은 오롯이 그를 향해 곤두서 있었다.

    바싹 밀착된 어깨와 허리 때문에 엉덩이에 단단히 힘이 몰렸다.

    마침내, 하얀 공이 다른 공과 충돌했다. 그가 속삭였다.

    “당구에선 이걸 키스(kiss)라고 하는데.”“…….”“이렇게 공과 공이 맞부딪혔을 때, 그 모양이 남자와 여자의 입술이 부딪혔을 때와 같다고 해서, 키스라고 부른다죠.”비스듬히 내리쬐는 의미심장한 숨결이 영원의 왼뺨을 어루만졌다.

    입술이 가까웠다. Kiss…… 위험한 성적욕망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마치 점잖지 못한 얼굴이 그녀를 시험하고 있는 듯했다.

    자, 이제 뭘 어쩔 거지? 나는 지금 아주 심심해. 나를 재미있게 해봐.

    영원은 주양의 도발에 숨을 크게 들이켜고 보란 듯이 내뱉었다.

    “내가 뭘 알겠어? 네 말대로 나는…….”말끝이 희미하게 분노에 찼다.

    “남자랑 자본 적도 없는 초짜인데.”영원의 비아냥에 그가 진하게 입술을 당겼다.

    “실망할 필요 없어요. 초짜 치고 바디감이 꽤 좋으니까. 소질 있겠어요.”영원에게 스틱을 넘긴 주양이 그녀를 놔주었다.

    당구에 소질이 있다는 건지 육체전에 소질이 있다는 건지 도통 불분명한 말이었다.

    그러나 일단 합격인가. 영원은 그가 자신한테 왜 이러는 건지 얼떨떨했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가 산뜻하게 되물었다.

    “저녁은 양식이 좋아요. 일식이 좋습니까.”“양……식?”어렵게 선택하자 날카롭게 시선을 준 그가 답했다.

    “그럼 일식으로 하죠.”처음부터 제멋대로 할 거였으면 왜 물어본 거야?

    벽으로 걸어간 그가 민첩한 동작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직통 전화를 넣어 음식을 주문하는 그를 다급하게 잡았다.

    “사실 배가 별로 안 고파. 또 토할지도 모르고…….”그가 전화하다 말고 차갑게 돌아보았다. 영원은 그 눈빛이 시려서 숨이 멎었다.

    얼른 그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얌전히 돌아가 소파에 앉는 걸 환인한 후에야, 그가 다시 상대편에게 입을 떼었다.

    “정식 말고.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걸로. 우리 호텔에서 새로 론칭 들어갈 일식 도시락, 아직도 준비 단계입니까? 그럼 고등어구이가 들어가는 사바동을, 성게알을 올린 사시미로 대체하세요. 생와사비는 처음 먹는 사람은 역할 테니까, 강판에 갈지 말고 시중에서 파는 소스가 좋겠어요. 기노시타 선생이 5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자개 새겨 넣은 옻찬합 기억합니까? 음식은 거기에 담습니다. 사케?”돌아본 그가 앉아 있는 영원을 의미심장하게 훑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뜨겁게 데워서.”

    *

    주양은 꽃이 핀 스시를 입안에 넣었다.

    영원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씹는 행위가 주는 쾌락은 섹스와 비견할 만하다고 한다.

    인간은 음식으로 욕구를 충족한다. 먹는 순간에도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식사하는 남자의 얼굴에선 미각이 주는 감동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의 기계적인 행위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감흥을 느끼는 못하는 듯했다.

    그가 던진 변덕은 극히 사소한 형태로 반전을 불러 일으켰다.

    위층에서는 여전히 파티가 한창이었다.

    혓속에서 녹아내릴 것처럼 굴던 해수가 기다릴지언데, 이 순간 그를 차지한 것은 배부른 부르주아도, 잘난 지식인들도 아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하찮은 취급을 받으며 몸피를 옹송그리고 있던 영원이었다.

    ‘도대체 나를 여기에 앉혀 놓고 뭘 하는 거지. 사과라면 파티 초대로 끝난 거 아닌가?’영원이 파티에 오지 않아서 기분이 상한 거라면 더 이상하다. 그녀 따위는 관심 밖일 터였다.

    설마…… 내가 신경 쓰인 건가.

    잠시 지나가는 길에 눈길을 던지는 것뿐이라 해도 좋았다.

    개미 콧구멍만큼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영원은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스시가 성에 안 찹니까?”주양이 붉은 냅킨으로 깔끔하게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고객의 건강을 위해 양념 간을 줄이고 있습니다.”“원래 건강에 유난 떠는 것들이 담배 피우고 밤늦게까지 술은 마시더라?”영원은 비웃으며 초밥을 날름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밍숭맹숭했다.

    “맛없어.”“저염식이니까요.”“요즘 건강을 생각해서 사찰음식이니 뭐다 하던데, 그런 거 따라 한 거야?”음식은 간이 안 맞으면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여서 영원은 결국 빈 젓가락만 빨다 내려놓았다.

    “너네 회사에서는 어째서 이딴 도시락을 돈 받고 팔려는 거지? 그 가격에, 프리미엄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거면 타깃 층부터 까다로운 입맛일 텐데.”“물론 까다롭겠죠.”“너는 이게 맛있다는 거야?”“빈부격차에 따라 인간이 우선시 두는 방점은 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은 지금 당장 사는 즐거움에 몰두하는 반면, 부가 쌓일수록 인간은 미래와 건강한 삶의 질에 가치를 두게 되죠. 먹는 즐거움…… 그게 부족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언제든지 산해진미를 사먹을 수 있는 부를 갖고 있는데, 음식이 뭐 대수라고 그렇게 안달 내냐는 거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그래도 이 새우는 좋아. 기름 범벅이 아니라 맛이 깔끔해.”다락방에 갇혀 있을 때는 굶주림에 눈에 뵈는 것이 없어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었지만 원래가 미각이 예리하다.

    그새 새우를 다 씹어 먹은 영원은 젓가락을 빨며 주양의 것마저 탐냈다.

    그는 새우에 별 유감이 없어 보였다.

    “그거 안 먹을 거야?”“먹고 싶습니까?”“별로. 하지만 그냥 버리는 것보다, 누구라도 먹는 게 환경보호 차원에서 낫지 않을까?”끝까지 도도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면서, 새우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영원에 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심술을 부릴지 알 수 없는 남자여서 영원은 얼른 새우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괜히 민망스러워 핑계를 만들었다.

    “혼자 사는 남자들한텐 새우가 안 좋대. 남자 정력에 좋거든. 오죽하면 비아그라가 아니라 새우그라라고 하겠어? 혼자 사는 남자는 밤이 괴로워질지도 모른다구.”빨리 치고 빠지려고 했는데 예상 밖의 난관이었다.

    앗, 새우가 젓가락질에서 자꾸 엇나갔다.

    “아, 이게 왜…….”문득, 새우가 위로 들어졌다. 그가 부드럽게 새우튀김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에서 뜬 새우가 탐스럽게 내려와 그녀의 그릇에 안착했다.

    “고, 고마워.”그가 입술 끝을 비스듬히 쳐올렸다. 불장난을 모의하는 아이처럼.

    “새우 먹고 곤란할 뻔했군요. 나처럼, 혼자 사는 남자는 밤에 말이죠.”조금만 방심하면 정신 줄을 놓는다. 정력이라니.

    그를 상대로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깨닫고 영원은 얼굴이 불타올랐다.

    주양이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이 영원은 눈을 깜박였다.

    역시 또다시 그와 식사하는 게 아니었다.

    영원은 또 폭식을 할까 봐 얼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침실로 사라졌던 그가 그녀의 무릎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그의 쪽빛 타이였다.

    “저번부터 보니 머리카락을 먹는 게 취미입니까? 묶도록 해요. 거추장스러워 보이니까.”영원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입 주변에서 떼었다. 치렁한 머리카락이 음식에도 빠져 있었다.

    “주는 거야?”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다.

    타이에서 그의 향기가 났다. 그의 목에 하루 종일 걸려 있었을. 그의 체취가 묻어 있을 거다.

    이거 집에 가져가도 되는 걸까?

    그녀의 동전들이 잠들어 있는 보물함에 숨겨놓고 싶었다. 금단추만 가지고는 아쉬웠다.

    부드러운 실크 타이 감촉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정신이 깨었다. 펄쩍 뛰었다.

    “아, 안 돼! 싫어.”영원은 타이를 바닥에 던졌다.

    “절대. 머리는 절대 안 돼.”“…….”“묶지 않을 거야.”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그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닥에 패대기쳐진 타이를 보았다. 패대기쳐진 그의 친절이었다.

    “신영원 씨 얼굴엔 흥미 없습니다.”주양이 삭막하게 찰랑이는 술잔을 둥글게 굴렸다. 흘려 뱉는 것 같지만 분명한 어조였다.

    “하지만 자꾸 감추려고 하는 걸 보니…….”영원의 머리카락 안 감춰진 조형물을 위험하게 더듬어 내리는 시선이 깊었다.

    “꼭 봐야겠다는 호기심이 드는 군요.”서슬 퍼런 말에 잘게 입술이 떨렸다. 농담 따윈 모르는 남자라는 걸 알기에 더 두려워졌다.

    *

    턱 밑까지 추격당한 것 같았다.

    영원의 낯빛이 새파래지자 그가 우스갯소리였다는 듯 말했다.

    “그거 압니까? 그 반응, 언제 봐도 재미있다는 거.”장난친 거였다. 영원은 화가 났다. 무심결에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

    “사람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각자 하나쯤은 있어.”“…….”“네가 네 비밀을 내게 보여주지 않을 계획이듯이, 나도 이 문제는 양보할 수 없어.” 그녀의 말에 그가 데운 정종을 입가에 대고 영원을 직시했다.

    그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말 더듬는 것, 컨트롤이 가능합니까? 방금, 말을 한 번도 더듬지 않았어요.”깍지 낀 손을 입술에 붙이고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생각보다 어수룩하진 않은가 보죠.”그가 관찰력을 발취해 그녀를 뚫어지게 봤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욕임을 알아듣고 침이 뱉어진 것처럼 확 얼굴이 붉어졌다.

    영원은 불리해지거나 당황스러워지면 말을 더듬게 된다. 말을 더듬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너는 뭐 말짱한 줄 알아? 나는 욕할 수 있어. 누구, 누구는 그런 말 할 줄 몰라서 네 앞에서 쩔쩔매는 줄 알아?”“내게 쩔쩔매고 있습니까?”거추장스러운 질문들은 다 쳐내고 그는 직선적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아니. 아니야!”“하지만 내게 쩔쩔매야 할 입장일 텐데요.”몇 번도 더 그녀 마음을 들락거리는 날카로운 공격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왜? 왜 너한테 쩔쩔매야 하는데?”“당신의 니즈를 충족시켜줄지도 모르니까.”“필요 없어.”“그게 복수라도?”영원은 흠칫했다. 그는 진지해 보였다.

    왜 갑자기 복수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걸까. 해수와 단란하게 춤까지 췄으면서.

    영원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그와는 더더욱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도와줄 마음 없다고 딱 잘랐잖아.” “내게 줄곧 골 난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사과로는 부족했습니까?”“그거야! 그때 네가 입에 양말을…….”“양말을……?”그가 물었다.

    말해 입만 아파 그냥 분을 삭였다.

    뜻밖의 친절을 베푼다 했더니 목적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그녀를 집에 불러다 저녁까지 먹이고 있는 거였다.

    그나마 양말을 먹이는 게 아니라서 황송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처음이었어. 양말 맛 같은 거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너도 끔찍했을걸?”“상상도 하기 싫군요.”“모욕은 수없이 당해봤지만 단연 으뜸이었어.”“내가 죽일 놈입니다.”“내 복수에 네가 왜 관심을 가져? 최 사장한테…… 유감스러운 일 당한 적이라도 있어?”“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하죠.”문답이 질주를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보드라운 시선이 닿았다. 영원은 가만히 눈을 내리 깔았다.

    “화해하는 겁니까?”믿을 수 없게도 평소에 남들에겐 가시 돋던 자존심이 그에게는 물렁물렁해졌다.

    인간이 으레 갖는 자존감 같은 건 이미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물쭈물했다. 입술은 이미 오래 전에 식은 분노의 찌끄러기를 토해냈다.

    “다시는 양말 같은 거 안 집어넣으면.”주양이 흔쾌히 응했다. 누구 분부라고.

    인심 쓰듯 그녀 밥 위에 새우를 올려준다.

    영원은 어이가 없어서 그를 보았다.

    그는 몹시 잔혹한 고양이처럼 사람을 교활하게 어르고 달래 줄 아는 표정이었다.

    궁금했다. 그가 왜 복수에 발을 담그려는 건지.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건 내 복수극이 재미있어 보인다는 뜻일까.’ 그가 무엇 때문에 복수극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했는지 관심 끄기로 했다.

    그가 복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과, 그에게도 계모를 무너트릴 일이 필요해졌다는 것만 기억하면 되었다.

    이유가 어쨌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었다.

    “이래봬도 쓸모가 많을 거야. 백운당에 왔다 간 정재계 인사들을 쥐고 흔들 만한 내역들. 어디에 숨겨 있는지 알아. 최 사장은 그걸 은밀하게 모으고 있지.”영원이 쩔쩔맬 이유가 사라졌다. 더 이상 구걸하는 입장이 아니게 된 거다.

    그녀도 패를 쥐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댄 채 그녀가 거만하게 말했다.

    “대신 이쪽도 조건이 있어.”“명확하게 해놓는 게 좋겠죠. 말해봐요.”“우린 엄연한 파트너야. 한쪽한테 기우는 건 없어.” “파트너?”“예를 들어…… 친구 같은 거 말이야.”무모하게 쥐어짜낸 목소리는 가여울 만큼 기어들어갔다.

    조건이라고 해서 얼마나 거창한 것을 들이밀까 집중했건만 친구라니.

    꼭 저같이 소심한 요구에 주양이 김빠진 헛웃음을 억눌렀다.

    “내가 말한 적 있습니까? 당신 힘들다고. 답이 안 내려지는 군요. 신영원 씨는.”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서없는 정신머리 탓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제약이 많았고, 대화의 핀트도 자주 어긋났다.

    우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녀와 친구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가 일언지하에 거절할까 봐 목이 탔다.

    “할 거야, 말 거야?”“좋습니다.”믿기지 않아 영원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진짜일까 뺨을 꼬집고 싶었다.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매향이가 휴가를 마치고 백운당에 돌아오면 당장 자랑해야겠다. 매향은 잘나가는 백운당 기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전에.”갑자기 치고 든 목소리에 잡생각을 몰아내고 그를 봤다.

    어느새 남자의 시선은 동물을 닮아 예리해져 있었다.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범처럼 주시해온다.

    “나 감당되겠습니까.”버릇없는 대산물산 딸을 길들이려 했을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자칫 눈길이라도 피하면 저 신사다움을 벗어던지고 목줄을 틀어쥐려고 달려들 거다.

    “나, 감당되겠습니까.”주양이 한 자 한 자 끊어 재차 물었다.

    주제에 감당할 재간이 있겠냐는 의구심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영원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인 순간, 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피하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돌연 멱살을 움켜잡혀 카펫에 패대기쳐졌다.

    아! 엎어진 몸을 곧바로 일으키려 했지만 구두가 덮치듯 착지했다.

    읏, 영원은 도로 카펫에 눌러졌다.

    어깨가 지르밟혔다. 드러누워진 채 흐트러진 숨을 뱉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영원은 주양의 발목을 쥐었다.

    “아, 아파.”그러자 완전히 짓밟아 놓아주겠다는 듯, 구두굽이 어깨를 더 세게 쑤시고 들어왔다.

    “과연. 구두 주인이면서 과감히 나타나지 않던 배포와, 사과의 의미로 파티에 초대한 내 성의를 짓밟는 용기가 쉬운 건 아니지. 그러면서 잔뜩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입구를 기웃거리던 찌질한 미덕까지 갖추기란. 절대 쉬운 캐릭터는 아니야.” 영원은 당황했다.

    입구를 기웃거린 걸 알고 있었나. 빼도 박도 못하고 본심을 들킬 위기에 처했다.

    짝사랑해온 걸 들키는 순간 그에게 얕보이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하악……! 거짓말쟁이. 친구라고 했잖아!”“친구……? 친구라. 내가 아는 친구가 세상에 딱 두 종류인데.”“…….”“이 세계에는 친구 대신 오른팔과 왼팔이란 개념이 있어. 상하, 혹은 주종의 관계. 그러니까 친구에게 간청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무릎을 꿇어라. 내게 복종부터 해. 나는 눈 똑바로 뜬 친구를 둔 적이 없어.”창끝처럼 찔러드는 고통과 더불어, 영원의 얼굴에 두려움이 부채꼴로 넓게 번져갔다.

    서늘한 그의 턱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너덜거렸다.

    그에게 친구란 복종을 약속받고 손가락 하나로 부리는 하인들에 지나지 않았다.

    ‘친구가 될 수 있느냐?’ 가 본질이 아니다.

    ‘그를 감당할 수 있는가?’ 이다. 영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다른, 친구는?”친구가 두 종류라고 했다.

    “나머지 하나는, 뭔데?” 그가 조용히 그녀를 주시했다. 먹잇감을 향해 낮게 포복한 짐승처럼.

    빨리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빨리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다고……,

    그가 테이블 위의 음식을 다 쓸어버렸다. 와장창! 팔목이 틀어 잡혔다.

    영원은 일으켜 세워졌다. 테이블에 그녀를 안착시키기가 무섭게 그가 얼굴부터 치고 들어왔다.

    입 맞출 듯 바짝 거리가 좁혀졌다.

    “45센티미터.”“…….”“사람과 사람 사이에 친밀함이 생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거리.”맞닿은 숨결이 교차했다.

    “섹스 프렌드.”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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