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5화 (15/83)
  • 15화. 실종 7일째 <1>2016.08.25.

    너 남자하고

    얘기해본 적 없지?

    [영화 신데렐라 中]

    -실종 7일째

    양치기 소년, 빨간 망토. 이들의 공통점은 늑대가 나온다.

    그것도 아주 나쁜 늑대.

    기본적으로 늑대는 잔인하다. 양이건 어린아이건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니까.

    양들은 자신을 ‘선’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을 잡아먹는 늑대를 손가락질한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악’이 존재할 수 있지? 신은 벌 안 주고 뭘 하나 몰라.’이런 비극적인 짝사랑이 어디 있을까.

    양들은 모른다. 늑대가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양들이 사라지면 제일로 슬퍼할 종족이 늑대들이란 것도.

    늑대들은 말한다.

    늑대는 양을 사랑한다.

    그야,

    “제일 맛있으니까.”장 경감은 저절로 잠에서 깼다.

    “…….” 늦은 오후였다. 잿빛 구름이 창가에 둥지를 트고 있었다.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지독한 악몽에 비지땀이 겨드랑이에 찼다.

    차갑게 식은 수건과 세숫대야.

    침대 맡에서 꾸벅꾸벅 졸던 수진이 잠기운을 몰아내다가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들어요? 린치를 심하게 당했어요. 사무소 앞에 버려져 있던 걸 데리고 올라왔어요. 꼬박 하루를 잠만 잤습니다.”어쩐지 수진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전화가 왔어요. 한신에서 아이를 특실로 옮겨갔다던데, 의뢰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수진의 말을 듣고 장 경감은 식물인간 같은 모습으로 멍하니 넋을 놓았다.

    꿈에서 늑대가 아이를 물어갔다.

    늑대 형상을 한 그림자가 병실에 길게 뻗어나더니, 커다랗게 찢어진 아가리로 단숨에 아들 머리를 집어삼켰다.

    더없이 인자한 얼굴로 늑대는 더 맛있는 양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그러니까 찾아내요. 여기서 찌질대지 말고.’신부를 제물로 바칠 때까지 늑대는 아이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인질이었다.

    *

    “신영원을 만나봐야겠어.” 장 경감은 어긋난 갈비뼈를 추스르고 옷을 챙겨 입었다.

    최고의 주치가 곁에 있을 것이다. 특실에서 실시간으로 간호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꿀꿀할 일도 없지 않은가.

    파주로 가는 내내 그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우려스런 상황을 긍정으로 뒤집을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 그 여자.

    신영원이라면 필시 나의 기대에 부응할 뭔가를 내놓을지도 모른다. 반신반의한 기대감이었다.

    “그나저나, 놀라운데요. 형부와 처제의 통정이라.”수진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엄청난 스캔들이네요. 근데 신영원한테 가봐야 뭐가 나올까요? 소득도 없을 거 같은데.”신영원은 정신병원에 갇혔다.

    둘이 어떤 내연관계였건, 결승지점에서 진주양은 신영원을 버리고 신해수의 손을 들어줬단 소리였다.

    “그런데 신해수는 도망쳤지.”신부의 결정을 백번 이해한다는 듯 수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비위가 아무리 좋아도, 자기 여동생이랑 붙어먹은 남자를 받아줄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장 경감은 신문을 펼쳤다. 때마침 스포츠 신문 일면을 한신그룹 신데렐라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었다. 판타지성에 힘입어 스토리는 연일 화제였다.

    세상은 그저 밝고 허황된 면만 비추고 있었다.

    하늘정신병원을 이틀 만에 재방문했다.

    지방 시골에 위치한 외딴 병원의 복도는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간호사를 뒤따라 특실 병동에 다다랐다. 입원실은 보안이 철통같았다.

    장 경감이 신기하게 물었다.

    “도대체 여긴 뭐하는 뎁니까?”“5호실이에요.”“5호실?”차트를 품에 안은 수간호사는 냉정할 뿐 더 이상의 말은 삼갔다.

    마침내 어떤 병실에 다다랐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검은 양복 사내들. 무자비한 폭력이 있던 그날 밤 일이 갈비뼈의 고통으로 솟았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에게 수간호사와 수진의 시선이 걱정스레 쏠렸다.

    장 경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수간호사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마지막 관문 앞에서 지문인식을 했다.

    55호실이에요. 저희는 그냥 편하게 ‘5호실’이라고 불러요.”반투명문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유리문이 열리자 순간 찌르는 듯한 설맹에 질끈 감았다.

    벽과 바닥이 구분되지 않는 새하얀 방이었다.

    병실은 매직미러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살균처리가 된 것 같은 섬뜩한 방에는 침대뿐이었다.

    ‘저 여자가 신영원인가…….’긴 머리를 풀어 헤친 신영원은 늘어진 시체였다. 온몸이 포박된 채로 엎어진 여자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심각한 인권 유린 아닙니까?” “안 그러면 혀를 깨물고 자해를 하거든요.”수간호사가 익숙한 살풍경을 무덤덤하게 눈에 담았다. 너무 비정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

    “얼마 전에 집도의를 공격하고 탈출 소동까지 일으켰어요. 워낙 중증망상에 공격성까지 심한 환자라. 불가피하게 묶어놨어요.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도 그때뿐이죠.”신영원은 병원에서 아주 골칫거리였다. 뻑 하면 자살시도에 의료진을 공격하기 일쑤였다.

    환자의 보호자는 VIP여서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는 환자와 병원을 통제하는 보호자라.

    원장보다 저 여자 비위를 더 맞춰야 하는 직원들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장 경감은 흔들의자 앉아 뜨개를 뜨는 나이 지긋한 여인을 가리켰다.

    “위험하다면서 저 간병인은 괜찮은 겁니까?”“저분은 간병인이 아니라 본가에서 오신 노 집사님이세요. 전직 간호사 출신이라 링거도 다 저분이 놓아주세요. 원장님을 제외한 모든 직원은 저 안에 접근이 허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환자가…… 낯을 많이 가려요.”최대한 신영원의 허물을 죽이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대책 없이 폭력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VIP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모습에서 애환이 느껴졌다. 접근을 못 한다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도 거절당한 거네요?”장 경감의 말에 수간호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접견인 명단에 없으시네요. 면회는 불가합니다.” 경찰이 이미 이틀 전에 다녀가고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는 게 그들 입장이었다.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된다는 뻔한 미명 아래, 공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수 없었다.

    그러니 수확이 없던 것만은 아니다.

    이로써, 신영원을 꼭 만나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진주양이 저토록 저 여자를 철통 보안하는 이유, 그것이 이번 신부 실종 사건의 열쇠가 될 것이다.

    “솔직히 신해수가 신데렐라는 아니잖아요?”집에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붙든 수진이 말했다.

    “재벌하고 결혼만 하면 신데렐라인가? 한신그룹과 견주어 그렇다는 거지. 백운당이면 거의 웬만한 매출이 중소기업급이고. 신해수야말로 금수저였어요. 부잣집 딸내미들의 특권이라는 음악전공에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자란 온실 속 화초.”“…….”“그에 반해 신영원은 신데렐라 그 자체였죠. 무서운 어머니와 두 언니들 밑에서 치여 사는 재투성이 셋째 딸.”“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백운당에 괴물이 산대요. 하나는 <말을 하는 꽃>이고 다른 하나는 <얼굴 없는 귀신>.”“…….”“신해수와 신영원을 가리키는 말이래요. 같은 자매인데 누구는 꽃으로 불리고, 누구는 귀신으로 취급당하고.”마을을 탐문하면서 주워들은 정보가 꽤 쏠쏠했다. 유명한 이야기였다.

    “신영원이 의붓언니 신해수에게 유감이 많았겠군. 동갑에 자매 사이니 비교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고.” 언니의 남자와 정을 통했다. 제대로 된 자매라고 볼 수 없다.

    “어느 글에서 본 이야기인데요. 신데렐라는 겉과 속이 다른 여자였대요.”“겉과 속이 달라?”“생각해봐요. 신데렐라는 계모의 모진 구박에도 질기게 버틴 독한 여자예요.”“…….”“마법사 할머니를 자신의 성공에 ?이용할 줄 아는 발칙한 여자였고,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유리 구두를 버리고 가는 치밀한 여자였죠.”“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우리가 생각하는 신데렐라 판타지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백조의 우아한 모습 아래엔,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쳐대는 발악이 있다.

    장 경감은 <진술조서> 파일을 열었다.

    본청에 잡혀간 날 책상에 허술하게 놓인 문서 몇 장을 몰래 바지 뒤에 꾸겨 넣었다.

    참고인들을 불러다 타이핑 해놓은 조서의 주인공은 마침 노 집사였다. 신영원의 병실에 유일하게 허락된 늙은 여인.

    진술내용은 ‘문답형식’으로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저는 집사입니다. 노 집사라고 불러주세요.-노 집사님께선 최혜란 사장을 20년 가까이 보필해 오셨다구요? -제 원래 주인은 돌아가신 전대 사장님이십니다. 최혜란 사장님은 전대 사장님과의 재혼으로 집안사람이 되시고부터 모셨습니다. 세 아가씨들도 모두 제 손으로 키웠습니다.-그럼 집안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겠군요. 평소 신랑과 신부의 교류가 자주 있었나요?-진 이사님은 신부님을 목숨처럼 아끼셨습니다. 그분처럼 차가운 분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주변에서 모두가 놀랐었죠.-…….-둘은 완벽한 한 쌍이었어요.-혹 신랑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거나, 요 근래에 큰 실수를 해서 신부를 실망시켰을 가능성은 없습니까?-(언짢은 목소리로) 방금 말씀 드렸을 텐데요. 진 이사님은 신부를 목숨처럼 아꼈다고. 둘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고.-그들을 곁에서 지켜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제가 모르는 건 없습니다. -언론에서 말하길 굉장한 로맨스던데.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재벌가 왕자님과 처음에 신부가 어떻게 사랑에 빠졌나요?  -(웃음) 1년 전, 이사님의 32주년 파티가 있던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모든 게 시작되었어요.

    -1년 전, 영원 26세

    퍼엉 ?? ! 퍼엉 ?? !

    폭죽이 하얗게 망막을 물들였다.

    타워가 위치한 한강변, 불꽃 쇼가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밤하늘을 수놓는 환상적인 광경에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 모두 창가에 몰려들었다.

    그 시각, 영원은 인적 없는 어두운 비상구였다.

    계단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모친이 남긴 구두를 빤히 응시했다. 마법의 구두인 줄 알았던 것은 엉터리 환상이었다.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저 불꽃놀이처럼.

    ‘맞아. 아무리 날고 기려고 해도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 법이지.’삼류 코미디 같은 상황에 허탈한 웃음이 샜다. 싸구려 모조품 같은 건성웃음은 곧 바닥나고, 얼굴엔 씻은 듯 무표정이 자리했다.

    제일 가슴 아픈 건, 구두가 맞아서 파티에 갈 수 있었다 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을 거란 사실이었다.

    자신이었다면 감히 주양에게 춤을 신청할 엄두도 못 냈겠지.

    여자들 틈에서 찌그러져 있다 허무하게 돌아왔을 거다.

    그걸 해수는 해냈다.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함이었다.

    영원은 오래도록 구두를 눈에 담다가 비상구를 떠났다.

    구두는 챙겨가지 않았다.

    복도 모퉁이를 도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가까워졌다.

    “하여튼 신해수. 난 년은 난 년이야. 내숭 떨면서 재더니 여봐란 듯이 다른 계집들 묵사발 만드는 것 봐.” 낯설지 않은 불길함에 소름이 돋았다. 성원의 목소리였다.

    영원은 종종걸음 치다가 야자나무 뒤로 숨었다.

    살 떨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계모와 성원이 팔짱을 끼고 눈앞을 지나갔다.

    “이렇게 재밌을 줄 알았으면 신영원 데려오는 건데.”“영원이는 왜.”“구경시켜줘야지. 지 주제에 진주양을 상대로 헛물켜는 게 가당키나 해? 걔야말로 병풍 노릇이 딱이야.”춤을 춘 건 해수인데 성원이 더 기고만장해서 떠들어댔다.

    저 호박이 내가 파티 장소에 와 있다는 걸 알면 일이 아주 재미있어질 거다.

    영원은 전방을 초조하게 응시하다 다행히 테라스로 빠지는 샛길을 발견했다.

    나무가 심어져 있는 친환경 옥외 테라스는 적막했다. 밤공기가 아직 쌀쌀한 탓이었다.

    어두운 난간을 짚으며 걸음을 서두르다가 영원은 나무에 팔을 긁혔다.

    “아.”팔등에서 피 몇 점이 몽글몽글 솟았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조바심에 흡사 좀 먹힌 사람의 행동이었다.

    가출을 해도 관심 같은 걸 쏟아줄 사람은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이상했다. 집에 가봐야 반겨줄 식구도 없는데 기를 쓰고 가려는 걸까.

    영원은 무연히 걸음을 되풀이하다가 제자리에 붙들렸다.

    그래.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 성을 빨리 떠나야 한다는 조바심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결국 해내는 계집을 보았을 때 데자뷰를 느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신해수는 아버지 꼬여낸 소싯적 계모를 빼닮았다.

    무력하게 뒤꽁무니 친 영원은 죽은 모친이었다.

    남편을 빼앗기고 영원의 모친은 안방까지 내어주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창백한 얼굴로 눈 감은 모친은 패배자였다.

    영원은 모친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낯선 공간에 바람이 진동했다.

    아득히 추락하는 빌딩 높이를 새삼 깨닫는데 이어지는 난간 끝이 주의를 잡아당겼다.

    밤바람을 쐬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빛과 어둠이 그려놓은 윤곽이 부드럽게 이마에서 콧날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옆선은 더욱 뚜렷했다.

    주양이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영원과 눈이 얽혔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남자는, 영원을 발견했으면서도 환영은커녕 인사조차 안 했다.

    반길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생무시 당하기 싫어 영원은 먼저 선수 쳤다.

    “파, 파티에 온 거 아니야. 어머니가 심부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야.”정작 주양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방관자의 표정이었다.

    영원은 침묵이 겸연쩍었다. 서둘러 아무 말이나 지껄이려다 입을 확 다물었다.

    시시콜콜 비위 맞추려는 꼬라지가 우습다.

    ‘이 남자가 뭐라고.’ 안 그래도 해수와 춤을 췄던 모습을 빙글빙글 뇌 언저리를 배회했다.

    ‘좋았어? 그 계집애랑 부둥키고 춤출 때 입이 아주 찢어지던데?’ 마음속으로 그를 미워하고 할퀴다가 관두었다.

    그는 헤프게 입이 찢어지지도 않았고 영원은 그가 싫어지지도 않았다. 그냥 해본 소리였다.

    오히려 찢겨진 건 그녀였다. 슬퍼서 가슴이 찢어졌다.

    그가 딴 여자랑 춤을 추고 있을 때 아무도 없는 비상구에 앉아 있었다.

    제발 안 좋았다고 해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근데 혼자 여기서 뭐해?”파티의 주인공이 왜 이런 외진 곳에 있는지 의아했다. 영원이야 주목 받지 못하는 엑스트라니까 상관없다지만 그는 다르다.

    지금쯤 둘이서 희희낙락 하면서 핑크빛 기류를 풍길 거라 생각했는데.

    대답이 없어 힐끔 곁눈질하자 주양의 눈길이 허름한 그녀의 옷에 닿아 있었다.

    “선물 전해 받지 못했습니까?”“받았어.”“옷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까?”“아니.”“그런데?”왜 파티에 안 왔냐고 묻고 있었다.

    “오겠다고 약속한 적 없어.”순간 그의 입술에 비릿한 감정이 긁고 지나갔다.

    “재미있군.”얼핏 비웃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게 처음이라서 빈정이 상한 걸까. 아니면 그 구차한 거짓말이 우스웠던 걸까.

    무엇이 되었건 영원이 그를 자극한 것은 확실했다.

    “나를 기다렸어?” 하고 묻고 싶었지만 미친 여자 취급당할까 봐 잠자코 있었다.

    주양이 난간을 두 팔로 짚고 야경을 깊게 응시했다.

    인간의 욕망이 밤에 가장 충실히 실현되고 있는 곳, 치열한 도심 야경이 멋지다.

    금빛으로 수놓은 것 같은 야경과 거만한 먹이사슬 미라피드의 정점.

    마천루에 약동하는 소음을 누르고, 그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매일 같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왕도 부럽지 않으리라.

    “그거 압니까? 폭스트롯이 네발짐승의 걸음걸이를 흉내 낸 춤이란 사실.”“폭스트롯? 네가 아까 해수랑 춘 춤 말하는 거야?”의외라는 듯 그가 봤다.

    비참하게 둘을 지켜봤다는 사실을 알린 꼴이 되었다. 후회됐다.

    신경 끈 주양이 이어 야경을 깊게 응시했다.

    “어렸을 땐 그게 의아했어요. 사람이 왜 짐승의 걸음걸이 따위를 따라하고 싶었을까.”“…….”“잔혹한 본성을 꾸밈없는 드러내는 게 부러웠던 걸까.”“…….”“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점잖은 얼굴을 뒤로 짐승의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요?”점잖음과 짐승 같은 욕망이라니. 누구보다 그와 걸맞은 말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영원이 주양을 봤다.

    그가 난간을 매끈하게 손끝으로 쓸며, 한 발…… 두 발…… 접근해왔다.

    그 대척점 끝에 서 있는 영원을 향해.

    “당구 칠 줄 압니까?”어둡고 퇴폐적인 야경을 배경으로, 문득 눈을 치뜬 그가 쾌락적인 미소를 지었다.

    “본질만 알면 아주 쉬워요.”그제야 깨달았다. 이 마천루의 야경은 그가 가진 극히 사소한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 그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영원이었다.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그 순간, 그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과 더불어, 영원은 새삼 자신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이 남자에게 다 있음을.

    힘과 권력,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에 근접해 있는 남자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간 영원이 안 그는 백운당 내에서의 모습뿐이었다.

    바깥에서, 아니, 그가 사는 세계 안에서의 그를 알고 싶어졌다.

    강렬하게.

    *

    타워 펜트하우스, 54층. 그의 집이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거실. 당구를 겨루는 두 여자 프로선수 주위로 나른한 조명이 집중되고 있었다.

    영원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주양이 그녀를 고급스런 소파로 끌어가 앉혔다.

    그때부터 시합을 쭉 관전했다.

    와인 잔을 돌리며 마치 취미를 즐기듯, 여자들의 쇼를 지켜봤다.

    “파티 아직 안 끝나지 않았어? 사람들이 기다릴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쉬- 그가 방해하지 말라는 표시로 검지를 세웠다.

    영원은 입을 곧장 다물었다. 홀린 듯이 구경하다가 흠칫, 굳었다.

    가슴을 훤히 드러내낸 블랙의 이브닝드레스에 12센티의 높은 하이힐.

    한 사람은 역시 가슴을 드러내었지만 더욱 파격적으로 치마가 팬티처럼 짧았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여자 선수들이 야한 옷을 입고 자극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 오롯이 이 한 남자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섹슈얼한 매력을 보이려는 욕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몇 이닝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는 꼼짝도 안 하고 시합에만 열중했다.

    주양의 관심사는 공뿐이었다.

    영원은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가 눌러 붙여져서 주양의 눈치만 살폈다.

    그때 주양이 손가락을 쳐들었다. 당구를 치며 묘기하던 여자들이 시합을 멈추고 얌전히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둘만이 남겨졌다.

    그가 답답한 타이를 끌어내리며 한 손에는 영원을, 한 손에는 잔을 들고 당구대로 갔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 겁니다. 둘 중 하나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승부는 역시 거는 게 있어야 더 쫄깃해지지. 신영원 씨는 뭘 걸겠습니까. 난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죠.”“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그가 갑자기 뒤에서 영원을 안아왔다. 등이 가슴팍과 밀착 되었다.

    발밑이 꺼지듯, 심장이 스무 계단이나 무너져 내렸다.

    “뭐, 뭐하는 거야.”갑작스런 습격에 심장이 널을 뛰었다.

    “행운인 줄 알아요. 내가 직접 교습해주는 경우는 없으니까.” 스틱을 문지른 그가 바로 귓가에서 속삭였다.

    “쥐어봐요.”저주스러울 만치 섹시한 목소리였다.

    달큼하게 취기 섞인 포도주 향이 영원마저 취하게 만들었다.

    “자, 잘 모르겠어, 그냥 이거 놔.”그녀가 자신 없이 아무렇게나 손을 만들어 보이자 그가 손을 포개면서 변덕스럽게 재촉했다.

    “아니, 아니. 그렇게 우악스럽게가 아니라 남자랑 사랑하듯이.”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평소보다 그는 경계가 느슨해 것 같았다. 영원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뒤에서 안아온 채로 주양의 섬세한 손가락과 영원의 것이 가지처럼 얽힌다. 깍지 껴지는 손가락들.

    옅은 흥분이 심장을 물들였다.

    이윽고, 곱아든 그녀의 손끝을 하나하나 펴내며 영원의 귓가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남자랑 자본 적이 없습니까?”순간 놀라서 주양을 올려다보았다.

    사선으로 엉키는 욕망. 저열한 계산이 섞인 눈빛에 시선을 붙잡혔다.

    “그런 반응하지 말아요. 하고 싶어지니까.”노골적으로 찔러오는데 서슴없다. 쐐기. 한마디로 그는 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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