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4화 (14/83)

14화. 실종 5일째 <3>2016.08.21.

혜란은 해수를 왕비로 만들어줄 남자 앞으로 데려갔다.

해수가 지나갈 때마다 여자들의 맹렬한 경계와 질투 어린 눈초리가 달라붙었다.

“환영사 정말 멋졌습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진 이사님, 혹시 스피치라이터를 따로 두고 계신 건 아니시죠?”최혜란이 비교적 가벼운 농담으로 주양에게 접근했다.

눈살 찌푸려지게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한껏 사람의 마음을 고취시킬 수 있는 아부성 멘트였다.

“스피치라이터는 없지만, 말발 탁월한 비서들을 두는 것도 한 방편이죠.”주양이 능구렁이 같은 여인의 말을 노련하게 되받아쳤다.

최혜란이 해수를 앞으로 밀며 은근히 지시했다.

“해수야 뭐하니? 전해드리고 싶은 게 있다 하지 않았니.”선물은 입구 앞에서 따로 받았다. 이름을 남기고 상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최혜란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방식이 경멸스러웠지만 해수는 생일선물을 내밀었다.

“와인을 수집하신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전문적으로 수집하신다면 제가 따를 게 없을 거 같고, 같은 술이라면 샴페인은 어떨까 해서 구입해봤습니다.”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는 것.

경멸하던 여자들처럼, 이 남자에게 여우처럼 꼬리를 쳐야 하는 현실.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은 싫었다.

혜란이 거문고 배우는 것을 못하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다.

해수는 주양에게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었다.

“듀발 르로아예요. 값비싼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무거우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끝 맛이 진 이사님 같더군요. 특히, 샴페인 병이……, 강렬하면서 정교한 검은 색상이 너무 잘 어울렸어요.”   주양이 조용히 샴페인 병을 꺼내 들어봤다. 라벨에서 생산지 정보를 확인한다.

“팜므 드 샴페인. 프레스티지 퀴베군요. 1996년산은 와인 매거지인 스펙데이터에서 그해에 최고점 97점을 받은 영광의 술이었죠.”프레스티지 퀴베는 최고의 샴페인에게 붙는 칭호였다.

“아직 제 컬렉션에 없는 거네요.”  주양이 보더니 간단히 답했다.

“귀한 걸 구하셨습니다. 아껴 마시도록 하겠습니다.”그가 손가락을 맞부딪히자 서빙 직원이 선물을 받아갔다.

연회장 한편에 사람들이 들고 온 생일선물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직원은 그중의 하나쯤으로 던져놓았다.

“그럼 즐기고 가십시오.”의례적인 인사를 덧붙인 주양이 그대로 떠났다.

최혜란은 당황했다. 생각지 못한 대우에 해수도 굳었다.

그는 그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손님들을 상대했다. 마치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듯이.

“뭐야. 이 썰렁한 반응은. 왜 벌써 가. 너한테 춤 파트너 되어 달라고 안 해?”잔뜩 음식을 챙겨온 성원이 캐물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지러이 교란되는 기억 속에서 주양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배웅하는 차 안에 앉아 그는 점잖게 말했었다.

‘해어화…… 말을 하는 꽃이라. 여인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겠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탐하게 할 정도로.’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았지만 모르는 척 해수가 웃었다.

‘해어화의 유례가 된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군요.’‘백운당에 핀 해어화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고 하던데, 저는 사람들이 떠드는 얼굴 모르는 양귀비보다, 눈앞의 꽃이 더 아름다운 것 같군요.’‘…….’‘언제 연주를 들으러 다시 들르겠습니다.’낮게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심장으로 침투했다.

‘기왕이면, 빠른 시일 내에.’명백한 호감이었다. 그 말에 가슴이 떨렸었다. 얼굴이 붉어졌고 그래서 그렇게 수줍은 목소리를 내었다.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요.’꼼짝도 않는 해수를 성원이 다그쳤다.

“분명 그때 관심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며! 네 연주 꼭 듣겠다고 했다며!” 종잡을 수 없는 남자는 읽기 어려웠다.

그저 인사치레일 뿐이었던가. 해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원래가 젠틀한 남자야. 그럼 면전에 대고 관심 없다고 하겠니?” 해수는 그렇게 애써 얼버무렸지만 호흡이 안정되지 않았다. 모친을 봤지만 혜란은 해수보다 더 싸늘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채였다.

떠돌이처럼 사교장에 혼자 서 있는데, 비웃음처럼 여자들의 원색적인 뒷말이 들려왔다.

“너 여기에 백운당 딸 온 거 알아?“그 거문고 명장 밑에서 수련한다는 애? 어때? 생긴 건 반반해?”“생긴 거? 뭐 쫌. 근데 외모 하나만 갖고 덤비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니?”“거문고 배우는 것도 그래. 있어 보이려고 음악계에서 껍죽대나 본데, 우리 중에 악기 안 만져본 사람이 어딨냐. 너 다음 달에 첼로 독주회 한다며?”  “말이 좋아 전통 한식사업이지, 요정이면 옛날로 치면 기생집 아니니? 어디 기생 딸년 주제에 세손을 넘봐?”“설마, 오늘 자기가 진 이사님 하고 춤을 출 주인공이라도 될 줄 안 건 아니겠지?”그제야 왜 이곳에 초대되었는지 해수는 깨달았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남자의 경고.

순간 주먹이 으스러지게 쥐어졌다.

*

“진짜 꼴좋더라. 진 이사한테 눈웃음을 살살 쳐다가 완전 까인 거.” “설마, 오늘 자기가 주인공이라도 될 줄 안 건 아니겠지?”실컷 떠들던 여자들이 화장실을 가려고 나오다가 흠칫, 영원을 보고 멈췄다.

눈살 찌푸려지는 혐오스러움.

염색이란 걸 모르는 까만 머리카락.

귀신처럼 길게 풀어헤친 음침하게 얼굴. 허름한 옷차림새.

거울에 비친 모습은 구한말 여자보다 더 촌스러웠다.

백운당의 ‘귀신’이라 불리는 기괴한 꼴 그대로였다.

“여기 보안 수준이 왜 이렇게 허접해졌어? 가드 불러야겠어. 저런 잡상인들이 출입하게 두다니. 가자.”파티가 열리는

층 타워 꼭대기. 영원은 홀 안을 들여다봤다.

자존심 세고 도도한 해수는 모욕을 씹어 삼키고 있는 듯했다.

상류층 멤버들 안에서 그녀는 완벽한 왕따였다.

우물 안의 공주는 우물 밖으로 나온 순간, 더 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보잘것없는 약소국의 공주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은 들고 온 쇼핑백을 봤다. 어미의 유품으로 남은 구두가 담겨 있었다.

정교하며 아름다운 구두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빛바래지 않은, 마법을 선사해줄 것만 같던 어미의 구두…….

그 마법은 허상에 불과했고, 구두는 이제 쓸모없다.

그녀는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볼품없이 큰 발은 구두로 들어가다 발뒤꿈치 부분에서 멈췄다. 발꿈치는 구두 뒤축을 넘어섰다.

아무리 쑤셔 넣어봐도 들어가지 않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시도해봤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하지만 구두는 그녀의 발에 맞지 않았다.

우습기 짝이 없는 운명의 장난, 이젠 환멸스럽지도 않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추락시켜야 만족할까.

다른 구두를 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걷잡을 수 없이 어두워지는 마음이 영원을 집어삼켰다.

완성에서 단 하나만을 남겨둔 순간, 그 완성의 끝자락에서 그녀가 확인한 것은 애초에 시작할 쓸모가 없던 시작들의 끝이었다.

지독하게 발을 욱여넣어도 구두에게 허락 받지 못한 여자라는 사실이 사형선고처럼 내려졌다.

그녀는 이 구두의 주인이 아니다.

오직 신데렐라만이 그 구두의 주인이었듯이.

‘맞아. 아무리 날고 기려고 해도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 법이지.’주양의 잔인한 음성이 그녀를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렇다면 누가 여자주인공인가.

그 울분에 응답하듯,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구석에서 모욕을 씹어 삼키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해수가 주양에게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고, 그것을 영원은 무표정하게 지켜봤다.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 멋졌다. 믿기 힘들게도 해수는 주양에게 똑바로 내뱉었다.

“왈츠 한 곡 추시겠어요?”웅성거림이 큰 연회장을 메웠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모두들 해수를 봤다. 여기저기서 피식거림이 터져 나왔다.

예상대로 주양은 무안할 정도로 빤히 해수를 보고 있었다.

여자들이 속살대며 해수를 비웃었다.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급할 대로 몰렸어도 그렇지. 먼저 춤을 청하다니…….” 그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비참한 결말이 앞당겨질 뿐이었다. 눈에 띄게 해수의 낯빛이 굳어갔다.

그러나 해수는 물러섬이 없었다. 더 한층 도도하게 반짝였다.

“보아하니, 이 홀에서는 마땅히 춤출 만한 영애가 없으신 거 같아, 제가 춰드리겠다고 제안하는 거예요.”그 말에 여자들이 싸늘해졌다. 몰려다니며 뒤에서 자신을 헐뜯던 여자들에게 해수는 멋지게 펀치를 날려주었다.

한신의 후광을 바라고 접근한다는 점에서 주양에겐 저 여자들이나 해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일깨운다.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영원은 알고 있다.

해수가 어째서 저토록 빛이 나는지.

영원이 갖지 못한 것을 다 얻어내는지.

어째서 항상 해수한테 질 수밖에 없는지도. 해수는 확실히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영원은 다른 여자들처럼 해수를 비웃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늘진 이곳에서 거세게 몰아닥칠 운명을 예감했다.

이제 곧 뒤바뀔 판도를, 한 여자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그것을 아는 듯, 해수는 당당하기만 했다.

“왈츠가 아니라면.”줄곧 침묵하던 주양이 입을 떼었다.

“왈츠를 출 거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다른 춤을 춘다. 왈츠는 역시 너무 뻔해.”“…….”“뻔한 건…….”주양이 해수를 예리하게 더듬어 내렸다.

“재미가 없지.”넘겨주는 게 아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런 순간이 왔을 뿐이었다.

관객들이 배경을 채우고 있는 엑스트라들을 눈에 담지 않듯이.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친구에게 마음이 홀리지 않듯.

주양이 그렇게 신해수란 여자를 새로이 인식한 눈빛으로 본 순간, 주변에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

“폭스트롯 어떻습니까.”주양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듯 해수가 말끔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제, 해수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한 것이다.

신데렐라는 용감했기에 가능했고,

구두는 해수가 신었어야 했다.

*

깊이와 무게감이 있는 춤사위는 우아하며 품위가 있었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동작. 원을 그리며 계속 돌고 돌았다.

우아한 춤이지만 미끄러지듯이 매끈한 스텝이 어딘가 끈적거리면서 퇴폐적이었다.

여자들의 질투와 부러움에 찬 시선들이 해수 곳곳에 꽂힌다.

이 순간만큼 해수는 기생집 딸년도, 유부남을 꼬신 화냥년의 딸도 아니었다.

여왕이었다. 그 모든 것이 저 남자 하나로 가능했다.

시리우스는 어째서 다른 별보다 백만 배나 더 밝은가.

우리들은 순리 앞에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리’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며, 작든 크든 무대 위에는 다양한 역할이 제게 주어진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걸 우리는 ‘주제 파악’이라고 한다.

연극에서 조역들은 절대 무대 중앙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른 이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주인공과 조연은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영원은 여주인공이 아니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해수와 있으면 언제나 해수에게 몰입했다.

영원은 해수 뒤에 달린 그림자처럼 그들의 시야에서 언제나 흐릿한 존재감을 부여잡았다.

이미 여러 차례 예고되었던 것을 믿고 싶지 않아 외면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오기를 부리듯 덤볐다.

조연도 아니고 단역밖에 안 되는 내가, 여주인공을 꿈꿨다.

4년이었다. 4년. 그 긴 시간을 돌아 이제야 고백할 수 있을 거 같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줄곧.

하지만 뻔히 예상되는 결말에 매번 주저했다.

지금 고백하려 한다.

그가 듣지 못하리란 걸 알기에.

나는 당신을……

당신을……

완벽한 한 쌍을 지켜보다가 영원은 연회장을 돌아 나왔다. 조연이 무대를 퇴장하듯.

찢어진 가슴에서, 꾹 누르고 있던 말이, 내내 입 안에서 맴돌았던 말이, 풍선처럼 부풀다 기어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사랑합니다.

해수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

1년 후.

‘한신그룹 진주양 씨가 오는 5월 품절남이 됩니다. 상대는 요식업체 차녀 신해수 씨로, 세간에서는 또 한 명의 신데렐라가 탄생했다고 들썩이고 있습니다.’

‘한신그룹 측은 신해수 씨가 국악을 전공한 아리따운 연주자이며, 1년 열애 끝에 두 선남선녀는 결혼에 골인했다고 전했다.’

‘얼굴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신부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라고 한다.’

‘결혼식은 한신그룹이 소유한 한신호텔 웨딩홀에서 비공개로 열릴 예정이며……’

.

.

.

결혼식 직전,

신부는 실종됐다.

*

-실종 5일째, PM 20:00

‘하느님을 찾고 있나? 이봐, 아가씨.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네.’‘오, 오지 마.’오지 마아아아아아아아아???!

영원은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허억…… 허억…….” 이마가 축축했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다가 손목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꿈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잔상은 집요하게 매달려 머릿속에서 그네를 탔다.

사람을 죽였다. 노숙자를 죽였다.

거스러미가 하얗게 일어난 입이 쉴 새 없이 빠르게 놀려졌다.

차라리…… 죽었으면. 내가 죽었어야 했어.

그런 뒤에 주양에게 잡혀 병원에 다시 처박히고 며칠이나 시간이 흐른 걸까.

창백해진 이마를 부여잡고 팔목을 보는데 가시권 끝에 누군가가 잡혔다.

이 방에 그녀 말고 또 누군가가 있었다.

태엽이 멈추고, 심장 소리는 그녀의 통제력 너머에서 구덩이에 파묻혔다.

무언가가 쓸려나가는 기분이 되었다. 이곳에 들어 올 수 있는 접견인은 한정되어 있다.

누구일지는 뻔했다.

“시신은 잘 처리되었어.”주양은 소파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영원은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는지 모르겠는데…….”느릿하게 굴러오는 눈동자가 그녀를 숨 막히게 주시했다.

“신부가 도망을 쳤어.”그건 물음도, 추궁도 아니었다.

결론이었다.

*

슈트 안쪽 포켓에 손을 집어넣은 주양은 길고 유려한 만년필을 빼들었다.

병문안 와중에도 서류에 사인을 멈추지 않는 남자는 섬뜩하리만치 태연함을 몸에 두르고, 조용히 균형을 깨트리고 있었다.

그는 지독한 어둠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깨트리며 사탄의 위에 앉아 있는 남자.

자기가 정신병원에 처박은 여자의 병실이라는 것을 잊은 걸까.

어떻게 저토록 태연할 수 있는 있는지 영원은 그를 보며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어째서 한 인간이 저런 모습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24시간, 꽉 막힌 방에 있는 거. 어떤 건지 알아?”퍼석한 마른 웃음이 단내와 함께 흘러 나왔다.

“미쳐 돌아버릴 것 같아…….”“…….”“차라리 날 죽여. 네가 자비롭다면…… 날 죽여줘.” “집이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영원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집? 이게 내 집이라고! 날 어서 진짜 내 집으로 돌려보내ㅈ……!”탁! 그가 서류를 소리 나게 덮었다.

그녀에게 걸어왔다.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턱이 낚아 채였다.

“네 집이 어딘데.”헉, 검게 이채가 이글대는 눈빛이 영원의 시야를 긁고 나타났다.

“너한텐 집이 없어. 알잖아.”영원은 호흡을 파르르 경련했다.

“네 집은 여기뿐이야.” 그의 말이 마치자마자 영원이 이를 악물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지독한 울부짖음이 그녀 안을 가르고 나왔다.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넥타이핀을 뽑았다.

정말 죽이겠다고, 죽이고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날카로운 장식품으로 목을 찌르려 했다.

하지만 간단하게 저지당했다.

힘겹게 밭아 오는 숨이 도려내며 그의 손이 영원의 꿰맨 팔목을 으스러지게 움켜잡았다.

영원은 고통에 찬 비명을 씹어 삼켰다. 그가 팔을 잡아당겼고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를 엿 먹이고 싶다면 좀 더 머리를 써.”“개…… 새끼.”붉어진 눈가에서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이 남자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나와 똑같은 고통의 단두대에 올려 지기를. 매일, 매일 기도를 한다.

연약하게, 여자처럼, 눈물을 흘려대는 영원을 보고 주양이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위로하는 어조는 비열하기 짝이 없다.

“울어야 할 사람은 나야.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는지 알아?”“개, 새, 끼.”“원한다면 다시는 여기 발 들이지 않을 수도 있어.”협박과 다름없는 말에 그녀는 멈칫했다.

노 집사는 주양에게로 갈아탄 지 오래였다.

병원에서 있으면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빤히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아무와도 이야기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돌아버리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이 남자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영원에게서 비참해서 억눌린 울음이 터졌다.

“너 나한테 왜 이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필요하니까.”고백 같은 말에 그 순간, 저주스럽게도 영원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그녀의 침대에 쇼핑백을 던졌다. 하얀 레이스 뭉치가 삐져나왔다.

웨딩드레스…….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썩을 것이냐…….”“…….”“이 웨딩드레스를 입을 것이냐.” 죽느냐…… 사느냐…….

결국에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신부가 도망을 쳤어.’라고 했을 때 그건 물음도, 추궁도 아니었다.

“네가 신해수가 되는 거야.”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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