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3화 (13/83)
  • 13화. 패션의 완성은 구두2016.08.18.

    주양은 손목을 들추더니 시간을 가늠했다.

    “1분.”영원이 머뭇대는 사이 시간이 지났다.

    “방금 2초 지났습니다.”“뭐가?”“사장단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요.”그가 다시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파티에 올 때 입고 올 드레스일 것이다.

    그 세 초대장 중 하나는 영원의 것이었다.

    “소용없어. 난 파티에 안 가.” 그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그가 드레스를 선물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상관이 없어졌다. 다 포기했으니까.

    피식…….

    신랄한 비웃음에 영원의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재밌어. 신영원.”“…….”“너는 성모마리아쯤 되나 보지?” 그가 사나운 이빨을 다시 드러내며 영원에게 눈동자를 꽂았다.

    “최 사장이 아침에 전화가 왔더군. 안타깝게도 셋째 딸은 감기에 걸려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짓밟히면 짓밟히는 대로, 빼앗기면 빼앗기는 대로, 계모와 신해수에게 순순히 양보하는 순종성에 환멸을 느낀 것이리라.

    “아니. 별로. 그냥 내가 양보한 것뿐이야.”자존심이 상해 거짓말을 해버렸다. 영원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그런데 가봐야 여자주인공 들러리만 서줄 게 뻔한 걸.”그는 완벽하게 무표정이 되어 영원을 응시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신랄한 목소리가 귓등을 베었다.

    “맞아. 아무리 날고 기려고 해도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 법이지.” 영원은 싸늘하게 안면이 가라앉았다.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주양은 미련 없이 일어났다. 나가려던 그가 멈춰 섰다.

    “아까 양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귀찮지만 굳이 그녀에게 정정해준다.

    “틀렸어.”……뭐?

    “양보가 아니야.”무슨 말을 하는 건가.

    “양보는 더 가진 사람이 아랫사람한테 내리사랑 하는 거고, 네가 하는 건 도망이야. 너 같은 건 그냥 평생을…… 찌질하게 도망이나 치다가…….”그가 어두운 방구석을 가리켰다.

    “구석에 짱 박혀, 숨만 쉬고 살다 죽으면 돼.”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영원은 믿기지 않은 얼굴로 주양을 보았다.

    그에게서 인간애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를 경멸하며, 한심스러워하는 것마저 아깝다는 표정. 가차 없는 독설…….

    그는 모두가 탐내는 황금 사과였다.

    많은 여자들이 그의 관심을 갈구한다.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그는 그 영화의 남자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와 걸맞은 아리따운 여자주인공이 붙겠지.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의 열등감 따위 그 알 바 아니었다.

    영원은 모욕감에 달아올랐고, 굴욕에 떠는 엑스트라를 주양은 버리고 갔다.

    그녀는 싸움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겁쟁이일 뿐이다.

    양보란, 패자가 하다하다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으니, 최후에 갖다 붙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

    .

    .

    하지만 역시 그렇게까지 아픈 곳을 후벼 팔 필요는 없었다.

    영원은 기와집을 박차고 나왔다.

    초대장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진주양의 면전에 던져 주리라 마음먹는데 계모가 바깥까지 나와 주양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바늘과 실처럼 언제나 신해수가 따라붙어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그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해수를 향해 얇게 속삭이는 입술.

    천천히. 천천히. 잠시 시간이 고인 듯, 그의 말에 멈춰선 해수의 눈동자가 파문으로 일렁이더니, 곧 온순한 요조숙녀처럼 조용히 수줍어했다.

    이가 들끓듯 고통이 예리하게 스쳤다. 영원은 충동으로 마음이 심란해졌다.

    ‘너 같은 건 그냥 평생을 찌질하게 도망이나 치다가, 구석에 짱 박혀 숨만 쉬고 살다 죽으면 돼.’어째서 그런 말로 자신을 흔들어대는 걸까. 저렇게 신해수와 친밀하게 어울리면서.

    포기도 맘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가 미웠다.

    *

    무도회 당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딸들은 분주해졌다.

    “너, 만약에 그 남자가 너한테 청혼하면 어쩔 거냐?”첫째 딸 성원이 해수에게 물었다. 해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누가 듣고 비웃어.”“까고 있네. 진주양이 너한테 파티에 꼭 오라고 했다며? 명백한 ‘간택’ 아니야?”“그런 거 아냐.”“한신가 사람 되면 나 무시하기 없기다?”해수는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뜰 뿐 완강하게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 계집을 보면서 영원은 속이 들끓었다. 변기를 솔로 빡빡 문질렀다.

    ‘대체 진주양은 해수한테 뭐라고 한 걸까?’단순히 파티에 오란 소리 치고 신해수의 얼굴이 너무 수줍어졌다.

    그때, 성원이 영원의 방에서 달려 나왔다.

    “엄마! 여기 있어! 해수가 신을 구두 필요하댔지!”몰래 방을 뒤져서 구두를 빼내왔다.

    영원의 죽은 모친이 유산으로 남긴 구두였다.

    아끼고 아끼느라 영원도 한 번도 신지 못했다. 고이고이 간직해온 것인데 성원이 해수에게 갖다 바쳤다.

    “음. 스타일이 해수 드레스와 딱 어울려.”계모가 모친의 구두를 해수에게 신겼다. 새하얀 발등. 빛나는 드레스. 너무 잘 어울렸다.

    영원은 폭발했다.

    “안 돼!”해수를 밀어트렸다. 무서운 계모에게 눈을 부릅뜨면서 대항했다.

    “이건 안 돼. 죽어도 안 돼. 엄마가 남긴 유품이란 말이야!”어째서인지 계모는 죽은 망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오래 유지되지 못했지만 해수의 발에서 성급하게 구두를 벗겨 던졌다.

    “구두는 중요하지 않아.”계모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가는 길에 숍에 들려 하나 사자.”안방으로 들어간 계모는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너 별채에 서빙 들어갔다며?”영원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굳었다. 외박하고 들어온 성원은 클럽 복장 그대로였다.

    계모의 화냥기를 첫째 딸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아쉬운 것은 외양이었다. 박색을 숨기려 화장을 덧칠했지만 호박이 수박이 되진 않는다.

    “꺼져.”“언니라고 불러라.”“꺼지라 했지.”  “네가 별채 손님한테 서빙을 한 거, 엄마한테 이를까?”영원은 성원을 노려봤다.

    “들어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야. 직원이 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어. 거기 나밖에 없었어.”“그럴 리가. 우리 가게에 직원이 몇인데.”별채에서 만난 사람이 주양인 것까진 모르나 보다. 초대장을 전해 받았다는 사실도.

    영원은 묵묵히 구두를 주워 화장실로 갔다.

    하지만 성원은 옆에서 비위 거슬리게 빙빙 돌며 화를 돋웠다.

    “네가 왜 별채에 들어갔을까. 너는 너 자신한테 이득이 되거나, 엄마가 시킨 일이 아니면 꿈쩍도 안 하는 말 안 듣는 애지.” 남을 대신해서 서빙을 해준 영원을 성원이 미심쩍어 했다.

    “알아낼 거야. 네가 왜 별채에 들어갔는지.”성원은 영원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계집이었다.

    영원은 언제나처럼 무표정을 가장했다. 발끈할수록 의심을 사는 법이다.

    영원의 싱거운 반응에 심드렁해졌는지 박색이 치맛자락을 질끈 밟고 떠났다.

    “말병신.”변기를 헹구던 영원은 어느새 멍해졌다.

    저 호박이 들쑤시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을 복잡했다.

    새파랗게 벼려진 독설을 쏟아내던 주양이 떠올랐다.

    ‘너 같은 건…….’‘찌질하게…….’‘구석에 짱 박혀…….’‘숨만 쉬다가…… 죽어.’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남자는 조금씩 조금씩 좀먹어가듯 그녀를 괴사시키고 싶은 게 분명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잖아!

    그녀가 끼고 있는 건 실크 장갑이 아닌 빨간 고무장갑이었고, 손에 들고 있는 건 요술봉이 아닌 변기 닦던 솔이었다.

    동화 속에서는 신데렐라가 왕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현실의 신데렐라는 그냥 평생을 허드렛일을 하다 병에 걸려 죽을 뿐이다. 원래 현실은 환멸스럽다.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못 보던 선물상자가 놓여 있었다.

    영원은 떨리는 손길로 상자를 개봉했다.

    새하얀 드레스가 고급스런 한지와 함께 담겨 있었다. 소재는 향기로웠고 무척 부드러웠다.

    영원은 그것을 넋을 놓고 매만졌다. 모친이 유품으로 남긴 구두와 몹시 잘 어울릴 듯했다.

    문제는 주인이었다. 얼굴…… 귀신같은 머리카락에 가려놓은 얼굴…….

    드레스에 대한 모독이었다. 영원이 이것을 입는다는 것은.

    “사장님은 아직 모르십니다.”그때 등 뒤에서 노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은 재빠르게 돌아봤다. 어둡게 버티고 선 노 집사가 선물상자를 눈짓했다.

    “아침에 인편으로 배달이 왔어요.” 노 집사가 갖다 놓은 것이었다.

    깊게 캐물어오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노파는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관여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했을 뿐.

    “뜻밖인데. 어머니에게 일러바칠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은 거야?”“아가씨 스스로가 더 잘 알 테니까요.”영원은 움찔했다.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백운당이 번창할 때도, 얼마 안 가 문 닫을 거란 시절에도, 유능한 많은 직원들이 가게 문턱을 거쳐 갔지만 그 오랜 세월 나 혼자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던 비결이 뭔지 압니까?”노 집사가 영원을 노골적으로 보았다.

    “자기 분수를 빨리 깨닫는 것.”“…….”“전대 사장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사장 자리를 꿰차려고 욕심 부렸다면 지금 여기 있을 수 있었을까요?”“…….”“사람에겐 그에 걸맞은 자리가 있는 겁니다. 해수 아가씨가 저 안에 있고 아가씨가 화장실 청소나 하는 것처럼.”죽은 사람에 대고 다시 한 번 확인 사살하는 격이었다. 찢어진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고 있었다. 영원은 눈물을 흘렸다.

    노 집사는 냉정하게 뒤돌았다. 차갑게 등 돌리는 노파를 향해 영원이 외쳤다.

    “진주양이 지라시 퍼트린 사람을 찾고 있어. 나를 끌고 가서 쥐 잡듯이 묻더라고.”“…….”“궁금하지 않아? 내가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는지.”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노파는 어째서인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굉장히 궁금해 하는 사람처럼.

    영원은 주양에게 했던 대로 똑같이 말했다.

    “최혜란 사장이야.”“…….”“내가 별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사람은, 그 여자뿐이야.”“…….”“그 여자 말고 그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해.”노 집사가 영원을 돌아봤다.

    집에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백운당 사장실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

    일제 때부터 백운당 사장만이 전대 사장으로부터 물려받게 되어 있는 그 통로는 여러 가지를 은닉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아버지와 계모, 나, 그리고 노 집사만이 알았다.

    지라시가 퍼졌을 때 영원이 의심한 사람은 두 명이었다.

    최혜란과 함께 이 집에 가장 오래 있었으며, 누구보다 그 사정을 꿰뚫고 있는.

    심어지는 최혜란보다 집 안 구조를 잘 아는.

    “매번 훔쳐봤지?”노 집사가 한순간에 뻣뻣해졌다.

    “아들이 도박 빚으로 날린 돈이 꽤 된다지? 기자한테 받은 푼돈으로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나?” 노파의 뺨이 바들바들 떨렸다. 독기가 번져가는 눈빛이 노파에 대고 잔혹하게 속삭였다.

    “걱정 마.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나 역시 원하는 건 ‘진실’ 따위가 아니야.”계모가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인생은 산산이 조각났다. 정직함은 생존을 위해 버려야 할 도구다.

    주양에게 거짓말한 것은 유감이었지만, 그 정도 거짓말은 계모와 그 딸이 내게 준 상처에 비하면 아주 미세한 흠집에 불과했다.

    번민하던 마음이 확실해졌다. 역시 파티에 가야겠다.

    모두가 숍으로 출발하고 집이 텅 비었다.

    영원은 오랜만에 거울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었다.

    한참을 망설다가 유리 구두 위에 올라탔다.

    *

    두 여자가 부티크에서 수다를 떨었다.

    “한신그룹 안에는 금융그룹이 따로 있어. 금융지주회사인 한신파이낸셜그룹이 그 예지.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50%가 돈을 예금한다는 JK은행 있잖아? 바로 그 은행이 한신파이낸셜의 대표 계열사야. 그 한신파이낸셜그룹을 꽉 쥐고 있는 게 바로 진주양이지.” “한신그룹 후계자는 진두영이지. 엄연히 둘째 아들이 살아 있는데 손자까지 순번이 가겠니?” “진두영이가 공식적인 후계자지만, 정작 한직으로 물러나 있는 신세인걸. 한신중공업이 한신에서 두 번째로 큰 계열사이긴 해. 하지만 JK은행을 따라잡을 순 없지.”“…….”“한신JK은행은 총 자산액이 1000조가 넘는, 세계 20대 은행에 속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은행이야.“…….”“즉, 대한민국 돈줄은 다 그 남자 손끝에서 이뤄진다 이거야.” “…….”“그의 공식적인 직책은 한신파이낸셜 JK금융 경영기획팀 총괄 본부장이야. 하지만 몇 달 전에 부행장보에서 부행장급으로 승진하면서 상임이사로 선임이 되었지. 그 뒤는 쭉 이사님으로 불리고 있어.”“본부장인데 왜 이사로 불리는 거야?”“왜냐고?”“그의 별명이 대표이사야. 대표이사, 한마디로 차기 회장님이시다…… 이거지.”“…….”“상임이사도 이사는 이사니. 이사님이라고 불러도 뭐 누가 뭐라 할까. 구색도 맞겠다 아부성 멘트로 그만한 적격은 없지. 그를 따르는 무리는 그를 이사님이라 부르고, 숙부인 진두영을 미는 사람들은 본부장이라고 부르고. 한신그룹 내에선 암묵적인 룰이야.”“…….”“그를 부르는 호칭으로 파벌이 나뉘는 거지.”JK은행이 한신그룹의 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룹 총 자산규모의 50%를 은행이 담당하고 있었다.

    금융지주회사로 시작했으니 당연했다. 중공업, 화학, 호텔은 그에 비하면 아직 세발의 피였다.

    진주양 세력이 다 장악하고 있었다.

    “한신그룹은 이사가 사장 파워를 능가한다는 말이 거기서 나오는 거야.”진 이사가 한신파이낸셜그룹을 꽉 잡고 있는 이상, 삼촌인 진두영은 거저먹기 식으로 후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너 얼마 전에 대산 2차 부도까지 떨어진 거 봤지. 난 김보경이가 그렇게까지 추잡하게 바닥칠지는 몰랐다. 어떻게 몸뚱이를 들이미니?”“…….”“김 회장이 명동 사채까지 끌어다 박은 모양인데,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지. 경쟁업체들이 인수를 안 해주면, 주식 휴지 조각되고 대산은 공중분해 될 거야.” “근데?”  “그게 다 이 남자 손가락 하나로 이뤄진 거 아냐. 은행들에 공문 보내 모든 자금줄을 틀어막아놓았단 소리가 파다해.”여자가 잡지에 실린 남자를 가리키기라도 하는 듯 말했다.

    살롱 직원의 안내에 옆방에 있던 그들이 떠나고, 이제야 조금 조용해져서 해수는 눈을 떴다.

    안대를 걷었다.

    1인 1실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고급 살롱은 미용실까지 끼고 있었다.

    “젊음이 좋긴 좋아. 바쁘네요. 나도 10년만 젊었으면 노려봤을 텐데.”들어온 조이스 최가 옆방 아가씨들의 이야기를 의식하듯 눈을 찡긋했다.

    “예뻐지려면 고통은 감수합시다. 머리 되려면 30분은 더 있어야 할 거예요. 해수 씨는 내가 미는 사람인데, 내 옷에 어울리는 헤어를 아무거나 매치할 순 없지.”그녀가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눈빛으로 지시하고 떠났다.

    손 마사지를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크림통을 열던 직원을 저지하고 해수는 간이 책장에 꽂혀 있는 잡지들을 대충 들췄다.

    “볼 게 이거밖에 없나요?” 직원이 어서 일어나 복도로 사라졌다.

    고객의 취향을 고려해 뷰티 잡지만 고집하지 않고 경제와 정치를 아우르고 있었다.

    어린 직원이 낑낑거리며 들고 오다 잡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유독 사람들이 많이 펼쳐본 페이지인 듯 양쪽으로 넓게 벌어진 잡지는 한 남자를 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그러나 해수가 한 발 빨랐다. 직원이 당황해서 집기도 전에 해수가 먼저 손을 뻗었다.

    머뭇대는 직원을 보내고 해수는 잡지를 무릎 위에 올려놨다.

    손끝이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차세대 리더를 소개하는 기사 면이었다. 경제지인지 화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미남자는 블랙 소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인터뷰하는 기자를 응대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증시 동향과 대한민국이 글로벌 시장에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요?’명백한 기자의 오판이었다.

    글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트렌디한 더블 단추의 네이비 슈트 안에 행커치프를 꽂고 진주양은 남성미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스트랩 시계는 가죽부분만 생로랑으로 맞추었다.

    그야말로 유일하고, 독보적이었다.

    우월함과 자신감을 전면에 부각하고 있다.

    가진 자의 게으름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단단한 슈트 안에 쓸데없는 감정들을 감추고서 흠잡을 데 없는 완벽성을 이루고 있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미스터리한 인물처럼, 야누스적인 면모를 어둠의 저변에 감추고 있다.

    해수의 눈길이 알 수 없이 짙어졌다.

    *

    도심지, 높은 주상복합타워 최상층 펜트하우스의 꼭대기.

    수십 개의 테이블 주위가 초대된 손님들로 붐볐다.

    서빙 직원들은 날렵하게 그들 사이를 바람처럼 지나다니며 음료를 날랐다.

    연주자들은 가벼운 클래식으로 손님들의 기분을 전환시켰다.

    거창한 의미로 축하파티라기 보다, 인간들의 욕망을 충실히 집합해 놓은, 사교모임의 분위기를 띠었다.

    사람들을 보던 성원은 불안하게 입을 달싹였다.

    “왜 구두 안 뺐었어? 평소 엄마 특기잖아? 걔 반쯤 묵사발 내놓는 거.”성원은 옆에 있는 혜란을 들쑤셨다.

    “설마, 그 계집애 뒤에서 기분 나쁘게 뭔가 꾸미는 건 아니겠지?”혜란이 날카롭게 딸을 쏘아봤다. 성원이 능청스레 딴청을 피웠다.

    “아이고, 나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오늘 뷔페 메뉴가…….”설마 제 주제에 파티에 오려는 건 아니겠지.

    성원은 영원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혜란은 어둡게 잠긴 눈으로 앞을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그녀도 영원의 반항에 꽤 놀랐을 것이다.

    새아버지가 죽고 죽은 듯이 눌려 살던 영원이었다.

    처음으로 혜란에게 대들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사이 혜란의 시선이 주양을 향했다.

    주양은 한쪽 벽면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껏 치장한 여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양 비서가 다가왔다.

    “이사님. 누구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까? 말씀해주시면 방명록에서…….”“아니요. 됐습니다.”주양이 단상 쪽으로 걸어갔다.

    “환영사 준비하세요.”행사 프로그램이 중반을 향해 달려갈 쯤, 한 여자가 대연회장 중앙 문을 밀고 들어섰다.

    지각생에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곳으로 이끌렸다.

    강렬하게 뒤흔드는 존재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몇 초 동안 온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그들을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군계일학이군요.” 한 중년이 탄식처럼 뱉었다.

    “닭장 속에 그야말로 고고한 학 한 마리가 내려앉지 않았습니까?” 여자는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 신부처럼 순결함의 상장인 새하얀 시폰 드레스에 긴 생머리를 단아하게 늘어트리고서, 귀걸이와 목걸이, 화려하게 치장한 거기 있는 누구보다 찬란했다.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남자의 눈길을 잡을 수 있다면.

    이곳의 모든 여자들의 하나같이 공통된 열망을 그녀는 해낼 것이다.

    혜란은 그것을 아는 여자였다. 인생은 타이밍이고 기회를 찾는 자만이 스스로를 구한다는 것을.

    “제 딸 해수입니다.”혜란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갔다.

    치밀하게 계산된 등장. 절묘한 타이밍,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누구보다 아름다웠겠지만, 단독으로 두고 봤을 때 더 가치가 있었다.

    남자들이 죄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거운 산 같은 남자의 시선마저 움직였다.

    주양의 관심이 해수에게로 옮겨 박혔다.

    만약 이것이 한 편의 영화라면 해수는 명백한 여주인공이었다.

    *

    그 시각, 바깥에선 택시 한 대가 타워 앞에 멈춰 섰다. 값을 치른 영원은 조용히 택시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지나가는 영원을 쳐다보았다.

    영원은 파티가 열리는 높은 타워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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