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12화 (12/83)

12화. 복수를 꿈꾸는 신데렐라2016.08.14.

영원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다.

주양은 계속 당구에 몰입 중이었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영원은 굳은 채로 그에게 되물었다.

“고, 고맙다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 이제 가도 되는 거 아냐?” 주양이 영원을 흘깃 일별했지만 철저하게 무시로 일관했다.

영원은 애써 태연하게 기다렸지만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갈 거야.” “…….”“집에서 걱정할 거야.”그녀는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 대여섯이 서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재지하지 않았다.

멋대로 집 안을 휘젓고 다니게 놔뒀다. 헛된 몸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원은 괜히 문을 당겨보았다. 꿈쩍도 않는다.

“열어줘.”“…….”“내가 한 게 아니야…….”영원은 쉰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다가 모래알처럼 바스러졌다.

“내, 내가 한 게…….”곧장 돌아와 그의 곁에 섰다. 신영원이라는 인간을 잊은 것처럼 그는 팔까지 걷어붙이고 공이 늘어진 판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소문을 낸 건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이 의도하지 하지 않은 상황에 두려움이 번졌다.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열어줘……, 열어!”다급함에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가 그가 그녀의 손을 불쾌하게 쳐냈다. 거부당한 채 그녀는 끔찍해졌다.

떨려오던 손의 경련조차 망연함에 턱, 막혔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문…… 열어. 날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이 망할 자식아!”폭발해서 주양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서 스틱을 빼앗으려 했다.

덥석 스틱을 잡기가 무섭게 폭풍 같은 거친 힘이 저항해왔다.

영원은 그의 품으로 꼬꾸라지듯 넘어졌다.

아……!

그의 배에 머리를 들이박은 영원을 그가 한심한 듯 어깻죽지 부분을 잡아 끄집어냈다.

황망하게 휘둘린 몸이 끌려갔다. 두 얼굴이 바짝 근거리에서 대어졌다.

눈동자끼리 맞부딪혔다.

“지라시가 퍼진 다음 날, 김보경이 회사로 나를 찾아왔지.” 낯선 눈빛이 뚫어버릴 듯 영원을 겨눴다.

“바보천치가 아니고서야 그 여자 스스로 자기 치부를 까발릴 리는 없고. 다만, 되레 그쪽에서 나를 의심해오지 않았겠어? 글쎄. 회사로 찾아와서는…….”“…….”“내 뺨을 후려갈겼어.”그가 스틱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타앙-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줄이 끊어졌다. 영원은 맥이 풀려 꼼짝할 수 없었다.

호흡이 후들거렸다.

이제야 본심을 보이는 것이다. 누가 봐도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것일 줄 알았다. 나를 불러서 치욕을 되갚아주기라도 하고픈 건가.

여자에게 매 맞은 값을 내게 혹독하게 되돌려주려고.

이를 사려 물고 붉어진 눈으로 영원은 그를 올려다봤다. 컴컴한 방 안에서 우뚝 선 남자의 존재는 위압적이었다.

“정말 아니야. 내가 아니야.”“…….”“나, 날 내보내줘!”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허술해진 틈을 타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잡아.” 그 한마디 명령에 뒷덜미가 잡혔다.

“이거 놔!”비좁은 현관문으로 다시 밀어 넣어졌다.

“아파! 놔아!”검은 양복들에게 영원의 양팔이 포박당했다. 그 순간 실낱같던 이성도 끝을 봤다. 곧바로 어깨가 잡혀 바닥에 눌렸다. 눈물 젖은 뺨이 카펫에 짓이겨졌다.

“아아악!” 영원이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버둥거렸다. 남자들이 영원을 누르려고 했지만 발작적인 힘은 완강했다.

검은 양복들이 고전했다.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던 주양이 곁에 서 있던 수행원에게 손짓했다.

수행원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벗어 주양에게 건네었다.

그는 그대로 영원에 입속에 그것을 쑤셔 넣었다.

영원이 일순 몸부림을 멈췄다.

입주변이 가늘게 떨렸다.

올려다 본 주양은 독재자처럼 몹시 잔혹했다.

재갈처럼 입에 물린 것은, 신던 양말이었다.

“내가 널 언제까지 인간적으로 대해줄 거라고 생각해.”사나운 눈빛이 영원의 시야를 도려내었다. 혈맥을 얼어붙게 하고, 심장부에서 뻗어난 잔가지들이 부러트리는 파괴력이었다.

.

.

.

“사람들은 항상 내게 일정수준 요구하는 게 있지.”“…….”“인간이 탐욕을 부리는 게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진주양이 영원의 입에서 양말을 빼냈다. 숨이 토해내지면서, 투명한 침이 길게 이어졌다.

허억…… 허억, 뇌관에서 파동이 일었다. 이명이 흐릿하게 둘러쌌다.

“돈이든, 직위든, 나는 해달라는 대로 해줄 권력을 갖고 있어. 금전, 힘, 섹스. 원하는 것을 뜯어내려면 있는 그대로 소문내기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흘리는 게 보다 위협적이었겠지.” 그깟 지라시 하나 퍼진다고 주양이 움직이진 않는다. 주양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사실과 다른 지라시 내용이었다.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미화해서 퍼트렸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실토하면 용서해주지. 11일 오후 2시. 나를 찾아오기 전, 김보경과 병원에서 접촉한 이유는?”“…….”“아니 그전에 지라시는 어떤 이유로 어떤 루트로 퍼트렸지?”“…….”“별채에서 마주친 건 우연이었나?”“…….”“그보다 구두 주인은 맞아?”영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심마저 의심 당하고 있는 건가.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던 건가. 이러라고 누가 시켰어?”한순간에 돌변한 남자가 빈틈없는 독선을 쏟아부었다.

“너 원하는 게 뭐야.”속사포처럼 쏴대지는 말들이 영원에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여졌다.

추궁하듯 닿아오는 눈길이 비참했다.

그는 광경을 한 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무엇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단호함이었다.

영원은 볼록 튀어나온 바지춤에서 묵직함을 느꼈다.

혹시나 해서 갖고 있었다. 구두에서 떼어져 나온 금붙이였다. 이것을 들이밀면 결백을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그가 바라는 대로 거짓으로라도 원하는 걸 꾸며대는 편이 덜 비참할지도.

투명한 물방울이 뺨을 베어내듯, 일자로 가로질렀다.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긴 할 거야?”헛된 희망은 처음부터 꿈꾸는 게 아니었다.

“그래. 다 뻥이었어. 지라시도 내 짓이구, 구두 주인이라 한 것도 가짜야. 도통 돈 있고 빽 있는 남자를 만날 수가 있어야지. 때마침 당신이 생명의 은인을 찾는다잖아. 주인이 안 나타나길래 내가 가로챘지.”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뚫어지게 그녀를 응시한 채였다.

맹인이 활자를 익히듯, 그는 알량한 눈물의 무게감을 무감각하게 더듬어왔다.

눈물 같은 것을 흘려본 적이 없어, 슬퍼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천박한 년. 넌 네 애미랑 똑 닮았어.’계모는 체벌할 때마다 영원의 얼굴을 거울에 들이밀고 저주했다. 눈물 젖은 뺨이 흉하게 유리에 짓눌렸다.

‘특히 이 눈! 봐라. 천박하다 못해 불길하지. 분명히 너한테는 죽은 네 애미의 망령이 따라다닐 거야.’저주처럼 퍼부어지는 목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거기 그대로, 주양이 서 있었다.

낭비라는 것을 모르는 듯, 경멸과 인생을 부정당한 채 살아가는 영원과는 삶의 위치가 다른 남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려놓고 살아가는 그녀를 주양은 무슨 생각을 하며 볼까? 구질구질하다 못해 기분 나쁘겠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녀의 삶을.

원하는 게 뭐냐고?

“사실…… 당신을 오래전부터 봐왔었어.”그녀의 고백 같은 말에 주양은 비웃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오래전부터…… 이런 날을 기다렸지.”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저의가 뭐냐고?

“복수를 해야 하는데…….”“…….”“처절하게 응징하고 싶은데.”“…….”“내겐 그럴 힘이 없어. 그래서 그 힘을 가진 당신에게 관심이 많았어.”그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영원을 최악으로 취급하고 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계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해수를 자랑스러워하며, 자기 것들을 빼앗기고 무능하게 빌빌대는 영원을 비웃겠지.

7살 이후로 영원에겐 엄마가 존재하지 않았다.

“복수할 거야.”금기어를 깨드리듯 영원은 내뱉었다.

“부숴버릴 거야.”그러려면 진주양이란 남자가 필요했다.

“당신 같은 친구만 있으면 난 천하무적이야.”영원은 주양을 올려다봤다.

내가 왜 널 도와야 하냐는 듯 보는 주양에게 영원은 비웃듯 말을 박았다.

비틀리는 입술 위로 눈물이 스몄다.

“지라시를 퍼트린 게 누군지 알아?”

몸속 독기가 혀끝에서 독처럼 번졌다.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게 하겠다.

“최혜란 사장이야.”“…….”“내가 별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사람은, 그 여자뿐이야.”“…….”“그 여자 말고 그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해.”주양은 영원을 보았다. 악의에 찬 영원을 보았다.

자신의 엄마를 일러바치는 영원의 처절한 얼굴을.

자신이 내리지 못해, 끝내 부당한 신에게 벌하란 듯이 악을 써대는.

그는 영원의 모습에서 깊고 오랜 증오를 읽어냈다.

계모가 집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영원의 인생은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계모와 두 딸들에게 복수를 끝낸 뒤야 했다.

*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기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을까.

김보경과의 일이 있던 날. 사장실로 영원을 끌고 간 계모가 추궁했다.

‘왜 거기에 있었던 거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모. 몰라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짜악-!

‘말해!’‘정말 몰라요. 으흑. 아,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악……!’영원은 한 번도 주양이 미웠던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필요 이상의 도덕성과 사회적 신분에 어울리는 수준 높은 의무감을 지니길 요구했다.

한신그룹의 차기 후계자.

그는 겸손할 줄 알아야 하면서도 품의를 잃지 않아야 하고, 행실에서도 결벽적일 만큼 깨끗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가 재벌답지 않은 인간미가 있다고 했지만 영원은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처럼 인간미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지금 그가 보여준 본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별채에서 보여준 폭력적인 모습 때문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영원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를 미워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4년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 여자가 옷을 벗었어요. 회사를 사, 살려달라고, 그를 곤란하게 했다고요. 위로하는데 내, 내가 거기 있었어요.’영원은 주양의 품위를 지켜주기로 했다.

그건 주양에 대한 의리이자,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았던 지난 4년에 대한 갈채였다.

영원이 꾸며댄 거짓말이 지라시에 그대로 번졌다. 그녀가 말한 사람은 계모뿐이었다.

범인은 계모였다.

예상대로 주양은 반응이 없었다.

“친구. 친구라…….”“…….”“우습군.”영원은 입술을 잘게 떨었다.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숨죽이고, 숨만 쉬고 사는 존재였다.

영원이 비수처럼 가슴에 복수심을 키우고 살았다는 것은 계모도 모르는 일이었다.

빤히 그녀를 들여다보던 주양이 손을 뻗어 앞머리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먼저 안면부터 익혀야지?”영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칼이 확, 까뒤집혀 일그러진 광경을 드러내놓았다. 머릿속이 빨갛게 채워지며 경고음이 찢어졌다.

천박한 년! 천박한 년!

계모의 욕설이 어지럽혔고 심장박동이 치솟았다.

영원은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며 손길을 거부했다.

“아악! 싫어! 보지 마!” 팔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자지러지는 손이 그의 뺨을 쳤다.

얼굴이 돌아간 그는 그 모양새로 굳어 있고, 영원도 올라간 손 그 상태로 정지했다.

영원은 겁에 질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백금 같은 조명이 그의 뺨을 찌르고 그는…… 그는 손을 더듬어 자신의 뺨을 내리 만졌다.

피가 맺힌 생채기.

묻어나는 핏기를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침묵이 두려웠다.

그들은 눈빛으로 침을 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빛으로 경멸하고 혐오하기 때문이었다.

경험 없는 우둔한 자들의 공통점은 멍청한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한다는 데 있었다.

그 끝을 알면서도 그날만 사는 생명체처럼 몹쓸 기대감을 품고 달린다.

현실은 이럴 진데 사랑을 꿈꾸다니.

네 자신을 착각하다니.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을 때 꿈도, 사랑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계모가 저주라고 말했던 이마에 새겨진 흉터처럼.

영원의 얼굴을 본 남자들은 대부분 동일했다. 영원이 보내는 음탕한 눈빛에 몹시 경멸하고 혐오했다.

고상한 그도 영원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와 살이 맞닿았던 순간마저 저주하며 치를 떨 것이다.

그 예언대로 감정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근데 어쩌지. 다른 건 다 되는데, 내가 친구는 필요가 없네.”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우악스런 손바닥이 영원의 입을 덥석 쥐었다. 윽! 그가 영원의 얼굴을 바싹 당겨 붙였다.

“나는 밀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영원 씨.”하관을 뒤덮은 손바닥은 흉기였다. 으스러질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예고 없는 프러포즈로 내 마음을 들뜨게 하면, 그땐 격한 애정의 표시로 이 눈에…….”주양이 공포에 질려 방황하는 그녀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섬세하게 눈가를 타고 오르던 검지가 그대로 각막을 쑤시고 들어오려던 순간, 영원은 숨을 삼켰다.

손끝은 정확하게 망막 바로 앞에 곤두서 있었다.

“구멍을 내줄 겁니다.” 영원은 섬뜩해져서 그를 봤다. 진주양이 ‘날 것’ 그대로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이 남자를 점잖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남자의 우아함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추종이란 단어보다 집요했고, 복수심보다 잔인한 면모를 지녔다.

존댓말이 예의가 바르게 느껴질 거라는 편견을 간단히 부수는 모습은, 언제 봐도 호러였다.

영원은 수행원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내팽개쳐지듯 바깥으로 내쳐졌다.

Rrrrr- Rrrrr-

휴대전화가 아까부터 계속 울려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냥 길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들어주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시답잖은 계집애 하나의 말을 들어줄 만큼 한가한 남자가 아니다. 오해 살 짓을 한 건 그녀였다.

눈물이 나진 않았다.

고작 이 정도에 눈물을 흘리기엔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 자체가 사치스러웠고, 미움을 넘어 증오해야 할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악의와 교활함. 세상은 이보다 훨씬 잔혹했다.

Rrrrr- Rrrrr- Rrrrr- Rrrrr- 액정이 계속해서 반짝였다.

“여보세요.”[너 어디야? 별일 없는 거지?]신해수.

나의 증오스러운 새언니.

계모와 더불어, 이 세상에서 나를 눈물 흘리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주양은 와인 저장고로 내려갔다. 하나를 빼내 생산지가 적힌 라벨을 읽어 내려갔다.

신영원이 보여준 복수심은 분명 놀라웠다.

신영원은 가족에게 살의에 가까운 증오를 품고 있고, 주양은 가족에게 살해당할 뻔했다.

가족과 살의란 점에서 그들은 공통분모가 있었다.

다만 입장이 반대된다는 것.

가족을 살해하고 싶어 하는 건 어떤 심정일까.

신영원을 이해하면,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숙부 진두영을 좀 더 인간적으로 품어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뿐이었다.

“신영원을 저대로 보내셔도 되겠습니까?”양 비서가 걱정스레 다가왔다.

“그럼 죽입니까.”주양은 무표정하게 마개를 땄다.

“김 회장과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김보경에게 협박당한 걸 겁니다. 보기와 달리 착실한 구석이 있어요.”주양이 그걸 알 줄 몰랐다. 양 비서가 신음했다.

“아시면서 왜…….”왜 진짜 구두 주인일지도 모르는 신영원을 몰아붙였냐……?

“그야말로 ‘일지도’니까. 양 비서도 그래서 그 얘긴 쏙 빼먹고 내게 보고한 게 아닙니까.”양 비서가 송구스럽게 고개 숙였다.

“경솔했습니다.”“사과는 확신이 생겼을 때 해도 늦지 않아요.”     “…….”“나 역시, 확신 없인 신영원에게 사과하지 않을 겁니다.”주양은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대답했다. 문득, 손에서 끈기를 느꼈다.

손바닥을 펼치자 정체불명의 분홍색 물질이 끈끈하게 늘어났다.

신영원의 입을 틀어막았을 때 옮겨진 것 같았다.

불쾌한 이물감을 주는 물질을 닦으려다가, 절묘한 우연에 립글로즈 향을 조심스럽게 맡아보았다.

‘죽지 마! 죽지 마, 제발……!’목소리는 흐릿하지만 향은 뚜렷하기 뇌리에 박혀 있다.

병원에서 가장 먼저 눈을 떴을 때 혀끝에 맴돌던 향이었다.

주양이 당혹스럽게 눈가를 매만졌다.

‘그래. 다 뻥이었어! 구두 주인이라 한 것도 가짜야!’제대로 얻어맞은 뒤통수가 뻐근했다.

*

“무도회?”“왈츠 같은 거 추는 파티 말이야. 왕자한테 간택되려고 부잣집 딸내미들이 줄을 섰다지.”이틀 있으면 열릴 진주양의 32주년 파티. 그것 때문에 백운당이 시끄러웠다.

여종업원들은 온통 다 그 얘기뿐이었다. 안 그래도 본가도 그 주제로 떠들썩했다.

계모는 해수에게 꽤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어제 가족회의에서 계모가 말했다.

‘이건 절호의 기회야. 너희들이 상류 커뮤니티에 입성하게 될 첫 관문이 되겠지. 특히, 해수. 넌 꼭 진 이사와 춤을 춰야 해.’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물론 영원은 논외였다. 그녀는 가지 않는다.

계모의 말이 곧 법이었다. 어째서인지 진주양은 초대장을 세 장을 보내왔지만, 영원에게 허락되지 않을 사치였다.

계모는 영원의 몫인 초대장을 사장실 책상 아래에 감췄다.

‘네 건 없어.’영원은 계모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면서 순종했다. 어차피 가고 싶지도 않았어.

그 남자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마 그 세 장 중 하나도 계모의 말대로 영원이 아니라 정말 계모의 것일 수 있다.

그 남자가 영원을 파티에 초대할 리가 없다.

백운당 직원들이 호들갑을 떨어도 영원은 어차피 못 갈 거라 그런가, 별로 현실감 같은 게 없었다.

파티를 하든, 거기서 그 남자의 ‘선택’을 받아 춤을 추든.

할 일 없이 뒷마당에서 농땡이 치고 있는데 매니저가 영원을 발견했다.

그녀는 계모의 충성스런 개였다. 이러고 있는 걸 계모에게 일러바칠까 봐 영원은 바짝 졸았다.

매니저는 뜻밖의 부탁을 했다.

“별채에 사람이 부족해서 그런데, 잠깐 서빙 좀 도와줘요. 신영원 씨.”서빙은커녕 손님들 눈앞에도 띄지 말아야 하는 게 원래 영원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최 사장님께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계모는 영원이 백운당의 품격을 떨어트린다고 싫어했다.

서빙을 맡아달라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땡땡이치던 것을 책잡을까 봐 죽은 듯이 따랐다.

매니저는 다과상을 들게 하고 영원을 방에 밀어 넣었다.

빨리 놓고 가야지. 그릇들을 내려놓고 고개를 드는데, 순간 가슴이 동요했다.

“양말이라도 또 먹은 얼굴이군요. 신영원 씨.”주양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영원을 그렇게나 진저리나게 뒤흔들었던 남자였다.

*

진주양이 좌식의자에 기대어 느긋하게 영원을 바라봤다. 미지의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고조되어갔다.

“대체 이번엔 또 뭐야? 우리 사이에 용건은 끝난 걸로 아는데. 날 스토커 취급하고 떨궈낸 건 너야.”살쾡이처럼 바짝 털을 세우고 있는 영원을 주양이 아랑곳 않고 훑었다.

“평소 선호하는 옷 취향이 특별히 있습니까?”“네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Haute couture? Pret A Porter?” 다짜고짜 외계어 같은 말들을 쏟아내 영원을 당황케 했다.

“똑똑한 거 자랑해?”“고급스러운 게 좋아요, 아니면 옷은 활동성이 편한 게 장땡입니까.”“옷은 뭐니 뭐니 해도 편한 게 최고지!”“프레타포르테군요.”“잠깐, 뭐하는 거야?”그가 태블릿 화면을 눌렀다.

“색상은 강렬한 레드가 나을까요? 블루가 좋겠습니까.”영원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물었다.

“그도 싫으면 화이트?”“지, 지금 뭐하는 거냐고.” 주양이 올 시즌 S/S 컬렉션 의상들이 나열된 태블릿 화면을 보여주며 선선히 답했다.

“사과를 하려는 겁니다.”“옷을 사주겠다는 거야? ……왜?”“왜? 라는 질문을 왜?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군요. 내가 난데없이 나타나, 바쁜 시간 쪼개며 그쪽에게 왜, 옷을 사주려는 거겠습니까.”설마…….

“기억이…… 돌아왔어?”그녀의 물음에 그가 답했다. 거의 기습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어투였다.

“신영원 씨가 내 입술을 열심히 빨아댔던 것, 말이죠.”민낯을 들킨 영원은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원색적인 말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쏟아내는 남자였다.

신영원 씨…….

그의 혀끝에서 굴림 되어 흘러나온 이름은 영원을 부르르 전율시켰다.

이 남자의 입을 통해 이름이 불려진다는 것은 굉장히 음란한 느낌을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