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검은머리 짐승2016.08.11.
“하하. 이거 일이 이상하게 꼬이네.”“…….”“마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은 이 그지 같은 상황은 뭐지.”영원은 농담으로 상황을 풀어보려 했지만 주양은 싸늘해져 있었다. 구두가 없으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자명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설마…… 나를 못 믿는 건 아니지?”주양이 다가오며 답답하게 채운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당겼다. 영원은 뒷걸음질 쳤다.
“내가 그깟 걸로 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겠어?”능청스레 넘기려다 막다른 벽에 몰렸다. 숨이 훅, 치고 들어왔다.
영원을 어두운 복도로 몰아세운 그가 나직이 경고했다.
“일주일이야.”“…….”“그 안에 찾아내야 할 거야. 구두.”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무척 진지했다.
구두를 찾지 못하면 네 목을 대신 가지고 갈 거야. 그렇게 경고하는 듯해서 영원은 얼른 세차게 고개를 움직였다.
한 발 물러선 주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중하게 넥타이를 고쳐 매고 떠났다.
“없어, 없어!”방 안을 뒤집었지만 구두는 그림자조차 안 비쳤다.
도대체 구두가 어디로 갔지? 이를 초초하게 맞부딪혔다.
그와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영원은 두려움 속에 떨었다.
범인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진주양과 약속했던 일주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장실을 청소하던 영원은 소파 아래서 구두에 붙어 있던 금붙이를 발견했다. 천은 찢어진 듯 떨어져 나가 있었다.
마치 구두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낸 것처럼…….
이렇게 집요하고 원한서린 악의를 가진 이 오직 이 방 주인뿐이었다.
영원은 으스러지게 금붙이를 쥐었다. 사가로 돌아가 온 집 안을 헤집으며 계모를 찾아댔다.
놀란 노 집사가 달려 나와 저지했다.
“아가씨!”“계모가 구두를 숨겼어. 계모가 구두를 숨겼다고!”“천천히 말씀해보세요. 구두를 숨겼다니요!”“나,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어! 내가…… 그 남자를 구한 걸 알지 못하게 하려고……. 그 사람이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보는데…….”숨이 턱 막혔다. 영원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노 집사가 영원을 막았다.
“계모가 그런 거야.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어! 따질 거야!”눈치 빠른 노 집사는 대략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했다. 그러나 영원울 향해 곤란한 얼굴을 했다.
“가서 어쩌시게요.”“막지 마!”“그러다가 이 집에서 쫓겨나면요?”완고한 목소리가 발톱처럼 날카롭게 할퀴었다. 영원을 보는 노 집사의 시선은 단호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아가씨는 더 이상 백운당의 아가씨가 아닙니다.”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바짝 독기만 살아 있는 영원의 눈빛은 위력적으로 빛나고 있지만 아무런 위협도 안 되었다.
위엄을 박탈당한 동물원의 수사자는 땅바닥 돌멩이보다도 위협적이지 않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역시 지켜보는 아랫것들의 눈은 무섭다.
나는 이제…… 동정해야 할 대상인가? 그래서 막 충고질 해도 되는?
“그래서 당신은, 키워주던 주인도 버리고 개만도 못하게 원수에게 고개 조아리나 보지?”“…….” “고작 쫓겨나는 게 무서워서.”치기 어린 분노였다.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 있다니. 영원 스스로도 놀라운 참이다.
도움을 주려다 그야말로 봉변을 당한 노 집사는 흠집난 자존심을 삼켰다. 일말의 가책이 맴돌던 눈빛에선 동정마저 메말랐다.
노 집사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복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영원은 홀로 남았다.
‘우스운 것일 테지.’ 우습지 않다면 이렇게 끊임없이 기만당할 수는 없다.
계모는 화가 나는 날이면 차디찬 다락방에 영원을 가둬놓곤 했다.
‘이래서 널 예뻐할 수가 없어!’‘널 보면 내가 아주 더러운 계모가 된 것 같아!’계모의 폭력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상냥함이었다. 상냥함.
착한 울림이 피가 응고되고 배를 움켜쥐게 했다.
신해수. 상냥한 여자. 해수는 언제나 기묘한 죄책감이 뒤엉킨 얼굴로 영원을 대했다.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어……!’뼈아픈 고해를 토해내며 해수는 괴로운 눈을 똑바로 맞추고 영원의 동정심을 구했다.
자의가 아니었다고,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듯이, 무고한 척 상냥한 죄책감으로 파르르 뺨을 떨구고서 영원을 부숴갔다.
해수는 계모의 폭력이 있는 날마다 영원을 대신해 계모에게 항변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인간적으로!’‘그년이 그래?’‘제발!’‘엄마가 말 안 듣는 딸년 좀 혼냈기로서니, 그게 뭐가 문제라고.’‘딸? 정말 그렇게 생각해?’‘뭐야?’‘쟤가 엄마 딸이야?’ 해수의 물음에 계모가 멈칫했다.
‘엄마가 쟤 엄마야……?’신해수의 목소리는 경련하듯 희게 떨렸다. 처절한 물음과 함께 달싹여지는 입술은 배려가 없었다.
차디찬 다락방 안에서,
영원은 오도 가도 못한 채,
계모의 침묵은 그토록 가혹하게 집행되어왔다.
신해수의 상냥함에는 존중이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녀가 영원을 존중했다면 그토록 큰 소리로 따지지 못했으리라.
존중 없는 친절이란 뿔로 매순간 영원은 받쳐 죽었다.
그런 것은 터무니없는 폭력이었다. 오로지 당하는 사람만을 갈가리 찢어 부수어대는.
마음에도 없는 그래서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상냥함이 퍼부어지면, 강렬한 부당함이, 내장을 고통스럽게 휘저었다.
도저히 한데 뒤섞일 수 없는 족속들이다.
종이 다른 생명체, 서로의 몸을 밀어내는 물과 기름처럼 화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분노와 증오로 뒤범벅됐으면서도 기묘한 감정으로 술렁이고 마는 것은.
황폐해진 가슴에 더 이상 다른 감정이 낄 틈은 남아 있지 않을 터인데. 당혹스럽게도 영원은 고개가 숙여졌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단어가 눈물로 되새겨진다는 것.
감성이 이성을 배반하는 것일까. 이런 것은 정말 불공정했다.
어째서 자신만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만 외로워야 하는지, 일방적으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싫어, 손바닥으로 지워버렸다.
그러나 멈추질 않는 눈물에, 이내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착한 척하지 마.’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영원은 경련하듯 마디마디 타들어가 관절을 옹송그렸다. 창가가 게걸스럽게 후벼 파졌다. 신열이 살벌하게 들끓으며 희미한 의식 속에서 사지는 통곡했다.
시간은 흘러 약속한 다음 날이 되었다. 아랫마을에 갔다 오던 영원을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둘러쌌다.
“신영원 씨?”“누구야. 당신들.”“저희는 이사님의 지시로, 신영원 씨를 모시러 왔습니다.”그들의 웃음은 한결 같았다.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우웁……!”억지로 태워지고, 끼이익-! 차체가 비틀거리며 빠르게 백운당에서 멀어졌다.
*
해수는 거문고를 뜯다가 띵! 줄이 끊어졌다. 날카롭게 두 동강난 술대에 찍혀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신해수! 너 요즘 정신을 어따 빼놓고 다니니! 정신 못 차려!”스승인 조선정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스승님.”그녀는 매주 거문고 교습을 받고 있었다. 답지 않게 당황했지만 조선정은 이미 심사가 상할 대로 상한 뒤였다.
“너 요즘 딴생각에 빠져 있는 거 같아. 집중할 수 있을 때 다시 찾아와.”스승에게 혼난 해수를 파트너인 판소리 명창이 다독였다.
“무슨 걱정거리 있니?”해수는 혼란스럽게 이마를 쓸다가 거문고를 챙겨 나왔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발적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사장실로 피해 와 있었고, 손에는 구두를 들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 자괴하고 있을 때, 혜란이 들어왔다.
‘아직도 구두를 수거해가지 않은 거야?’구두를 보고 진저리를 친 최혜란이 가위를 가져와 구두를 마구 찢어냈다.
‘그만둬요!’‘너야말로 그 되지도 않는 위선 그만둬! 구두 주인이 네가 아니면 누가 되든 알게 뭐야!’사각사각, 가위는 서늘하고 거침없이 구두를 가로질렀다. 헤집어진 벌집은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넝마가 된 구두를 가져와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 감췄다.
해수는 거문고 가방에 보관해놓은 천 조각을 꺼내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럴 의도 따윈 없었어. 다시 돌려주려고 했어. 정말이야.’틱-! 틱-! 라이터를 켰다.
넝마 끝에 불이 붙었다.
남은 마지막까지 불태워 버렸다.
처음부터 모든 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
그러니까 이게 다,
엄마 탓이야.
*
조명이 내려앉은 공간은 몹시 어두웠다.
주양은 이쪽을 등지고 서서 타워 최상층에 펼쳐진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이솝 우화, 좋아합니까?”그가 돌아보지 않고 영원에게 물었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뒤에서 버티고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는 우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삶이 녹아 있고, 그 어떤 드라마보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죠.” 황금빛 조명 아래, 장엄한 얼굴은 드리워진 음영으로 옆선이 더욱더 깊어지고 날카로웠다.
“일례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양해를 구하듯 응시해오는 눈빛이 짙었다.
숨이 막혀 영원은 머릿속에서 할 말을 잃었지만, 본능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맘대로.” 그가 와인 잔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빙빙 돌리면서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한 농부와 독수리의 이야기예요.” “…….”“농부는 길을 가다 독사에게 공격 받고 있는 독수리를 봤어요. 독사가 어찌나 집요한지, 단단하게 독수리의 몸을 칭칭 감고 목을 조여 갔죠. 독수리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독사에게 그대로 먹잇감이 될 뻔한 상황이었어요. 그것을 보고 있던 농부가 독수리를 안타깝게 여겨, 독사를 목에서 떼어주었습니다. 독수리는 다행히 살 수 있었고 농부는 마음이 뿌듯했어요. 하지만 독사가 복수심에 농부의 물통에 독을 흘려 놓은 것은 몰랐지 뭡니까." 영원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농부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어요. 길을 걷다 보니 목이 말랐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통을 떠올렸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입을 데려는 순간, 아까 농부가 구해주었던 독수리가 그 물통을 낚아채갔습니다. 그리고 농부가 찾지 못할 곳에 버렸어요.” 독수리가 은혜를 갚는 이야기였다. 아주 기분 좋은.
“내가 전에 차 안에서 해줬던 이야기잖아.”주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압니다.”결말에서 더 있다고? 그는 메마른 어조로 끝나지 않은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어요. 농부는 길을 걷다가 눈 속에서 얼어 죽어가는 뱀을 봅니다. 모든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경건해지는 마음을 가진 착한 농부는, 독수리를 구해줬던 것처럼 뱀도 품어주었어요. 농부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가는 동안 농부의 몸에서는 더운 땀이 풍겼죠. 얼음이 되었던 뱀은 농부의 체온에 서서히 녹았어요. 농부는 주머니에서 꿈틀대는 뱀을 꺼내주었죠. 그는 기뻐했습니다. 뱀이 살아났으니까요. 그런데 그때."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양이 말을 끊고 영원을 응시했다.
“뱀이 농부의 목덜미를 물었어요.”마치 그가 그녀를 물어뜯을 듯해 영원은 꼼짝하지 않았다.
“농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왜 나를 문 거야. 뱀의 사특한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아…… 이 뱀은 알고 보니 지난여름, 내가 독수리를 구해주었던 그때 그 독사였구나.” 창백해진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농부는 전신에 독이 퍼졌고,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주양이 영원을 돌아봤다. 짧지만 강력한 두려움이었다.
영원은 손가락을 구부려 냉랭해진 손끝을 감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양이 느리게 덧붙였다.
“인간이 왜 검은머리 짐승이란 소리를 듣는 걸까 생각해봤습니다.”“…….”“그게 다, 함부로 친절을 베풀지 말란, 선조들의 뼈저린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말하는 검은 머리 짐승은 주양 자신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함.
“지금 이 순간, 나를 살린 걸 후회합니까?”그는 농부를 물어 죽인 독사였다. 그가 영원에게 와인을 내밀었다.
“마셔요.”
와인의 핏빛 물결이 어딘가 위험하게 출렁였다.
독이 든 성배, 농부를 물었던 독사의 독이 저러했을까. 타락한 위험이 아찔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 영원이 주저하자, 김샌 듯 그가 조소했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말을 내뱉는다.
“귀엽네.”“…….”“사람 경계할 줄도 알고.”남자의 친절한 면모가 설명할 수 없이 소름 끼쳤다.
그녀는 동물원의 사자. 그는 총을 든 포수.
이 남자의 본질은 사냥이다.
이보다 더 위험할 순 없었다.
*
검은 양복 남자들이 영원을 거실 소파에 눌러 앉혔다.
“아, 아파! 멍청이들아! 나도 다리 있어! 내가 앉을 테니까……!”주양은 거실 중앙에 놓은 당구대로 다가갔다. 아이보리 베스트가 바짝 채워진 뒤태는 곧고 우아했다.
소매를 위로 걷어 올린다. 힘의 증거처럼 손목에는 그와 닮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메탈의 브레게 시계가 노란 조명등에 반사돼 단단하고 힘 있게 빛났다.
그는 섬세한 눈길로 당구 스틱을 훑어 내렸다.
함부로 물건을 구입하지도,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도 않는 사람의 습성이었다.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까지 오랜 검증을 마친 뒤에야 기꺼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까다롭고 확고한 취향의 수집가.
아마도 저 스틱은 유럽 어딘가 출장을 다녀오던 도중에 단 한 개밖에 없는, 신중하게 고심해서 선택한 수집물일 것이다.
꼼꼼하게 물품을 살피는 남자의 얼굴에서 감정적 희비는 발견할 수 없었다. 고요하다 못해 건조했다.
아까, 한마디의 허락도 없이 영원을 샅샅이 살펴대었을 때도 저런 눈빛이었다.
사소한 말, 간결한 행동으로 그 사람의 뇌까지 스캔하고 분석하는 것.
그런 집요함과 뼛속까지 인이 박힌 치밀함.
“며칠새 빠르게도 퍼졌더군요. 재계의 스캔들. 파산 위기에 처한 D물산 K양이 은행가 장손 J씨의 발목을 붙들다…….” 그의 입에서 소문이 흘러나오자 머릿속이 백짓장이 되었다.
“가십에 오르내리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퍼트렸다면 문제가 되지.”검은 양복이 그녀 앞에 태블릿피시를 내려놓았다.
밝게 켜진 화면에 증권가에 나도는 지라시 원문이 메일로 발송되어 있었다.
< D물산 K양은 얼마 전, 고급 한식당에서 J씨와 점식 약속을 했다. 평소 그녀와 데면데면하게 알고 지냈던 J씨는 K양의 부탁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K양이 다짜고짜 옷을 벗은 것.
집안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다는 K양의 협박에 J씨는 성추행범이 될 뻔했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자제인 J씨는 K양의 민폐에 빛나는 매너로 대처했다.
자신을 흠집 내려 한 여성을 신사적으로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내었다고 한다. >
“그러니까 궁금하다는 거야. 하필 내 생명의 은인이 대산물산의 어음 만기일 연장을 요구하고, 어째서 지라시에 퍼진 얘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하는 걸까.”엘리베이터에서 그녀가 주양에게 위로랍시고 지껄였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선연하게 펼쳐졌다.
당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여자가 먼저 막무가내로 매너 없이 굴었으니까. 당신을 할퀴고 흠집 내려 했으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끝까지 신사적으로 참아줬으니까.
누가 봐도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오해야. 누명이야!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할 수 있어. 뭔가 단단히 꼬인 거야!”“보통 소문은 악의적이기 마련인데, 지나치게 미화되었더군요.”“…….”“내가.” 예리한 질문에 영원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 그건 사실은…….”“왜 그런 거짓말을 한 겁니까?”그가 깔끔하게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단호한 얼굴을 보다가 영원이 분노했다.
“말하면 믿어주긴 할 거고?”분명 지라시는 그날 일과 다르게 무척 주양을 잘 포장해놓고 있었다.
더 분명한 건 그가 소문과 다르게 김보경의 목을 졸랐다는 거였다.
그리고 더더더 분명한 건 그 모든 사실을 제치고, 진주양이 영원을 범인이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거 하나로 어떤 진실도 지금에 와선 무의미했다.
쭉, 눈물이 일직선으로 미끄러졌다.
“날 죽일…… 거야?”바닥난 자존심이 후회되었지만 생존의 기로에서 사는 욕구가 먼저였다.
주양이 영원을 연민의 정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깔봤다.
자비는 없다. 죽는 거구나, 싶은 그때였다.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가리고 있던 그가 손바닥을 얼굴에서 치웠다.
놀랍게도 입술은 웃고 있었다.
“역시 특이해. 대놓고 죽일 거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인데.”영원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추궁을 하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뭐?”“내가 아직 말을 안 했나?” 예상치 못하게도 험악해진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며 주양이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요.”“뭐라고?”“고맙다고요.”그가 당구대를 손끝으로 쓸었다. 초크 가루를 후, 하고 불어 날린다.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는 내 쪽에서 해야 할 판이에요. 덕분에 임원들의 나에 대한 신뢰도가 0.7포인트 상승했어요.”“…….”“다 신영원 씨 덕입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고마워요. 멋대로 소설을 써줘서.”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벙끗했지만 혼란스러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저것 역시 진심이긴 할까. 영원은 이제 도무지 저 남자의 의중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있으면 평온하지 않다. 비단 자신이 그를 짝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이었다.
진주양이란 남자를 도저히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예측 불가능한 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