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9화 (9/83)

9화. 나를 기억해줘2016.08.04.

저는 공주도 아니고, 마차도 없답니다.

하지만 이런 저라도 괜찮을까요?

[영화 신데렐라 中]

-1년 전, 영원 26세

댕…… 댕…… 댕……

기이한 적막이었다.

시계 소리는 긴 궤적을 그리며 온 방 안을 돌았다.

육중한 가죽 소파에 앉은 주양을 휘돌아, 그가 표적처럼 시선을 겨누고 있는 영원에게 도착했다.

그와의 거리. 2미터 남짓.

그 존재감은 살이 떨릴 정도다.

“내 발로 찾아오길 기다렸다고? 그냥 가버렸으면 어쩌려고?”애써 떨림을 누르며 맹수의 우리에 발을 들였다.

영원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는 일련의 행동을 주양이 빠짐없이 관찰했다.

“비상구, 엘리베이터, 모두 관계자 카드가 없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이곳 복도 구조는 어디를 가든 내 방으로 이어지게 설계되어 있죠.”영원의 질문에 주양이 대답했다.

날고 기어봤자 남자의 손바닥 안이었다.

올 줄 알고 기다렸다. 놀림 당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다.

왜? CCTV로 찍지 않고.

속으로 꿍얼거리던 영원은 벽에 걸린 미술품 눈에서 초소형 카메라 렌즈를 발견했다.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읽은 주양이 능청스레 답했다.

“보안을 위해서라고 하죠.” 감시당하고 있었다. 분명 접객실에도 저런 그림이 있었다. 지나쳐온 복도에도.

구석에 짱 박혀서 그를 기다리던 얼빠진 모습을 구경하며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찌질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단둘이 마주보고 있는 것만도 충분히 심장판막이 너덜너덜했다. 지금쯤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문득 정수리 위가 조용해 고개를 드니, 남자의 시선이 메롱이 그려진 그녀의 후줄근한 티셔츠에 와 있었다.

근본 없는 영어프린트를 그가 제법 흥미롭게 본다.

영원은 부끄러워서 에코백으로 가려버렸다.

우습기도 하겠지. 적어도 그의 주변에 이런 유치찬란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없을 테니.

한참을 그렇게 입을 잠갔던 주양은, 비로소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되자 영원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송로버섯 좋아합니까?”

*

오성급 호텔의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18석밖에 되지 않는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되는 음식점이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외국계 비즈니스맨들이었다.

간간히 섞이는 잉글리시와 광둥어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원은 혼자만 동떨어진 옷차림이었다.

지배인이 입구에서부터 에스코트해주었다.

“이쪽입니다.”조용한 분위기에서 격식을 차릴 수 있는 구조는 훌륭했지만 까다로운 남자의 마음을 감명시키진 못했다.

프라이버시가 확실히 보장되었는데도 그것으론 부족한지 진주양은 단독 룸을 잡았다.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인 것도 뻘쭘한데,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의 등장에 담소를 나누던 손님들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영원은 슬쩍 앞서 걷고 있는 주양의 눈치를 살폈다.

별로 남의 이목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슈트 빨을 제대로 자랑하며 걸어가는 그를 보다가 잘근잘근 머리카락을 씹었다.

괜히 비싼 데 데려와 기죽이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룸에 앉아 그가 지배인과 코스 요리에 관해 상의했다.

“레드와인을 곁들인 저온 숙성 스테이크입니다.”잡생각에 기운 뺀 동안 정통 프렌치 코스 요리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영원이 어색하게 나이프를 들었다.

“요리가 아니라 작품을 그려놨네.”그와 한 테이블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상황이 무척 긴장되었다.

입을 벌릴 때 하마 같아 보이면 어쩌지? 먹는 모습이 추잡하게 보이진 않을까.

숨결 하나하나 신경이 곤두섰다.

정작 깨작거리고만 있자, 주양이 그릇을 앞으로 더 밀어 권했다.

“맛은 그 이상일 겁니다.”과연.

알알이 씹히는 재료와 부드러운 연두부(고기)가 혀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저 까다로운 남자 입맛을 사로잡은 곳이니 오죽할까 싶었다.

“감상은?”“글쎄. 서양식은 잘 못 먹어봐서. 이, 입구부터 되게 있는 체하길래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지. 난 또. 이 정도 맛은 백운당 숙수도 흉내 낼 수 있겠어.”마음과 다르게 영원은 까칠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가진 자의 여유라 이건가. 그는 기분 나빠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녀를 두둔했다. 알만하다는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당에서 일하다 보면, 아무래도 남들보다 음식 보는 눈이 엄격해지겠죠. 대한민국에서 그만한 곳을 찾기 어렵죠.”“백운당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 말투네?”백운당 칭찬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걸 눈치챌까 얼른 목소리 키를 죽였다.

“개인적으로 음식은 맛이 아닌 눈으로도 느낀다고 믿는 쪽이라. 백운당의 운치…… 풍류……, 어느 것 하나 빠짐없어요.”“풍류라니. 선비놀음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진 않던데.”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를 무척 잘 아는 것처럼 지껄이는 영원에게 물었다.

“그럼 신영원 씨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일순 기습을 당하고 영원은 당황했다.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직원들은 그쪽을 왕자라고 떠받들어. 한신그룹이란 거대한 왕국의 왕자님.”“아뇨. 나는 신영원 씨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겁니다.”진주양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영원의 안면에서 차차 표정이 걷혀갔다.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지 해독하기 어려웠다.

동시에 가슴이 설렜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니. 나한테 그런 걸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하는가.

“별로, 난 관심 없어.”그녀는 진실을 거짓말로 덧칠하고는 접시에 코 박았다. 마구 먹기만 했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도심의 야경이 경이롭게 물결쳤다.

영원은 안절부절못했다. 먼저 침묵을 못 견뎌 구걸한 건 영원이었다.

“그만 관찰해. 난 남이 허락도 없이 내 얼굴 자꾸 보는 거 안 좋아해.”밥 먹는 내내 그녀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불편했다.

불안과 초조함에 가시방석이었다. 도대체 이곳에 날 데려온 남자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목숨이 구해졌는데, 저녁 식사 정돈 대접하고 싶군요.’ 그렇게 말했지만 과잉 친절이란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때, 주양이 반대 쪽 소매의 커프스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4년 전 그가 소매 버튼을 떼어 영원에게 적선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행동이었다. 눈빛이 그것을 말하는 것 같아서 목이 탔다.

혹시 그가 나를 기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주양이 불을 지폈다.

“백운당 셋째 딸을 위하여.”그가 영원의 스파클링 잔에 셀프 건배를 한다. 제대로 그녀의 애간장을 태웠다.

최혜란 사장이 어머니라고 말한 기억이 없다.

“나를 알아?”그는 의뭉스러움을 유지했다. 혹시 4년 전 일을 그가 기억하고 있는가 싶어서 두근거렸다.

“나를…… 기억해?”“일전에 본가 정원에서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미적지근하게 눈을 맞춰온다. 영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이었다.

김빠진 어깨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4년 동안 혹시 그가 그녀를 기억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지만 멍청한 헛짓거리였다.

막상 백지처럼 그의 기억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당연하다. 지나가던 길에 거지 하나를 봤고 불쌍해서 적선한 것뿐이었다.

그가 일일이 기억해줄 만큼 특별한 사람들은 손에 꼽힐 정도일 거다.

아, 영원이 아는 사람 중에도 하나 있다.

‘신해수.’울컥 치미는 말을 삼켰다.

“우리 집엔 볼일이어서 왔던 것 같던데. 해수를 만나러 왔던 거야?”“내가 신해수 씨를 만났다고 어째서 확신하죠.”“유명하다고, 해수 팬인 거.” “팬?”“좋아하면 팬이지 다른 게 팬인가.”그는 대산물산 회장 못지않게 해수를 자주 찾는 사람 중 하나였다.

김 회장은 해수를 며느리 삼고 싶어서라 치고, 그렇다면 주양은?

단순히 연주가 좋아서였을까?

김 회장처럼 다른 마음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주양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이미지가 사람들한테 그런 식으로 비쳐졌을 줄 꿈에도 몰랐다는.

“물론 신해수 씨의 연주 솜씨는 높이 삽니다만.” “…….”“처세술이 더 기가 막히더군요.”“그 계집애가 뭐라고 해?”“현명하게 스스로를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처신 똑바로 하는 재능은 큰 선물이에요. 마음에 들어요.”이건 잔혹했다. 밥상머리 앞에서 그가 신해수를 칭찬하는 꼴을 봐야 하다니. 형벌이었다.

내리깐 눈과 함께 마음도 가라앉았다.

“같은 자매인데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지 않아?”나와 그 애. 영원이 도발하듯 주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접시에 다시 코를 박았다.

비교하는 말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당신까지 보태지 마.

모든 대화가 ‘기-승-전-신해수’로 연결되는 상황이 거북했다.

연예 뉴스의 인터뷰와 같았다. 유명 연예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데려다 놓고 그 유명 연예인 소식만 묻는 비참한 상황.

배 속이 허했다.

입안이 미어터지도록 음식을 쑤셔 넣었다. 갑자기 돌변해 게걸스럽게 위장에 빵을 욱여넣는 영원을 주양이 별나라에서 온 사람인양 기이한 행각을 지켜본다.

‘어쩔 수 없잖아. 배가 고프다구.’불현듯, 주양이 방을 잡은 이유가 차갑게 뇌에 끼얹어졌다.

그는 유명인이니까 아마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게 분명하다. 여긴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테니 일일이 만나면 인사하기 귀찮기도 하겠지.

무엇보다 지인이 합석한 여성이 누구냐고 궁금해 하면 제일 곤란할 터였다.

같이 저급해지고 싶지 않다. 한데 묶이고 싶지 않다. 그의 진짜 속내였다. 이 모든 것이 이미지 추락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닌 척 포커페이스지만 역시 영원이 쪽팔린 거다.

영원은 먹던 걸 관두었다.

“이제 그만 먹는 겁니까?”“왜? 내가 많이 먹는 게 싫어?”의도치 않게 차갑게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영원은 이죽거렸다.

“서, 설마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신그룹 후계자가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겠지.” 못난이도 이런 상 못난이가 없다. 괜히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시비조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뚱딴지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후회가 밀려왔지만 영원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기 전에 본론을 어서 마쳐야겠다고 판단했다.

“생명의 은인인데, 소원 하나 들어주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겠지?”느닷없는 요구에 그가 모호한 얼굴로 영원을 응시했다.

“이참에 능력발휘 좀 해봐.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물고 왔으니까.”백운당에서 여직원들이 떠들던 걸 되짚어보면 그는 생명의 은인에게 예우를 다하려고 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이지만 빚을 완전히 탕감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잠시 기일을 늦춰달라는 영원의 부탁을 그가 못 들어줄 이유도 없다.

문제는 진주양이 예측 불허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대산물산에 기회를 줘. 어음인가 하는 거 말이야.”느닷없는 대산물산에 주양의 표정에 변화가 감지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럴 줄 알고 이런 저런 변명들을 준비해놨다. 어째서 대산물산 건에 개입하느냐고 물으면,

“지라시가 퍼졌어. 어쩌다가 김보경을 다치게 했는데 그 망아지 같은 계집애가 나를 협박한 거야. 딱히 대산물산을 위해서 일하는 건 아냐. 아. 물론 지라시도 내가 한 일이 아니야. 그건 분명히 알아둬.”지레 겁먹고 차곡차곡 속으로 해명거리들을 쌓아두는데 그가 입을 뗐다.

“대화를 할 땐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볼 수가 없어서야……. 그래서 그런가.”흔들림 없이 응시해오는 표정은 차가운 인물화를 보는 것 같았다.

“당신. 무척 힘들어.”심장 어귀가 덜컥, 내려앉았다.

그를 화나게 했다.

이어 그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더 뜻밖이었다.

“그러죠.”얼빠진 당혹감이 스쳤다.

“뭐?”“그렇게 하죠.”구차한 해명거리를 준비하고 있던 게 겸연쩍어질 정도로 단호박이었다.

“내 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순순히 답해줄 가벼운 사안은 아닐 텐데. 그야 김보경이 부탁했을 땐 머리채까지 잡았잖아.

진주양은 영원이 그를 찾아오기까지 했던 온갖 군걱정과 기우들을 쓸모없는 휴지조각으로 구겨버렸다.

다가온 그의 손가락이 영원의 입술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흠칫, 놀라울 만큼 냉기 어린 체온이었다.

부드러운 손놀림.

입술을 스치는 손끝,

영혼의 바닥까지 훑는 눈빛에 부르르, 전신이 격랑에 휩싸였다.

“급할 거 없잖아요. 천천히 먹어요. 시간은 아주 많으니까.”모든 협상의 기본은 그라운드 장악이었다. 먼저 패를 까발리는 쪽이 지는 게임.

그런 의미에서 진주양은 탁월한 포커페이스였다.

*

그는 식사 내내 무척 정중했다. 백운당에서도 찌질한 영원한테 인간 대우를 해주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그녀 역시 저것이 철저한 가면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남자의 본성은 진즉에 파악 끝냈다.

하지만 이게 그의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갈비뼈 안에서 몸집을 부풀렸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까.

따지고 보면 김보경과의 일도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먼저 김보경이 그의 심사를 건드렸고, 주양은 그래도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고 했다.

아까도 그랬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 같은 인간하고 밥을 먹는 것이 몹시 쪽팔리겠지.’그냥 그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그쯤 되면 짜증이 날 텐데 주양은 인내심도 길었다. 모난 성격이 힘들 텐데 비위를 맞춰주었다.

덕지덕지 심술만 가득하고 꼴같잖은 열등감에 두더지처럼 땅만 파는 영원에게 친구는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병신 같은 계집애.’스스로가 더욱 형편없이 느껴졌다. 영원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려다가 완전히 닫아버렸다.

해수는 어떻게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을까?

인색한 노인네들도 그 애랑 있으면 할아버지처럼 인자해지고 즐거워하는데, 영원은 가뜩이나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더 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하고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해수라면 어땠을까?

아마, 야무진 계집은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양에게 자신을 확실히 각인시켰으리라.

이번 기회로 끝이 아니라 다음번 데이트를 청해올 수 있게 그의 마음에 자신의 향기를 일부분 남겨뒀겠지.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를.

입맛이 떨어졌다. 비참한 상태로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갈래.”식사를 끝내고 나왔다.

라운지 복도에서 마주 오던 누군가가 알은체를 했다.

“하하. 진 이사!”기업 간부쯤으로 되어 보이는 중년이 악수를 청했다.

“이번 부행장급으로 파격 승진 축하해.” “전무님도 곧 영전하셔야죠?”  “자네가 밀어주기만 한다면야, 나는 든든하지.”그러다가 옆에 있는 영원을 발견했다. 아,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모르는 행인 척 지나가려고 하는데 덥석 손목이 붙잡혔다.

꼼짝 없이 얼어붙었다.

주양이 영원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온 신경이 그와 잇닿은 팔목에 쏠렸다.

“일행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감사한 분이라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오. 그러시구만.”주양은 거리낌이 없었다. 전무가 떠나고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입을 꾹 다물어버린 채 영원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창피해하는 줄 알았다.’얼굴이 불타올랐다. 심장은 주책없게 벌렁거렸다.

룸을 잡은 것은 그저 조용한 식사를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혼자 삽질하다 못해 맨틀까지 파고들었다.

지인에게 당당히 소개까지 해줬다. 일행이라니. 영원은 일행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되짚었다.

<함께 길을 가는 사람>

길을 걷는다고? 함께?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인데도 그는 이렇게 또 한 번 그녀를 감동시켰고, 그라는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살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12층에서 쉬어갔다.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넘치게 밀려들었다.

영원은 비틀대다가 주양이 허리를 감싸서 중심을 잡아주었다. 그의 행동에서 친절함과 배려를 느꼈다.

주양과 밀착되었다. 숨결이 이마를 간질였다. 심장이 폭풍처럼 뛰었고 혈류가 빨라졌다.

올려다봤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숨이 닿는 것은 이마인데 심장이 간지러웠다. 순식간에 의지가 무장해제가 되었다.

내내 말하려다가 타이밍을 못 잡았던 말들…….

입술은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뱉어버렸다.

“당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별채에서 일이 내내 신경 쓰였다.

“그 여자가 먼저 막무가내로 매너 없이 굴었으니까.”주양이 영원을 빤히 보았다.

“그 여자가 먼저 잘못했으니까.”“…….”“당신을 할퀴고 흠집 내려 했으니까.”“…….”“그런데도 당신은…… 끝까지 신사적으로 참아줬으니까.”영원의 뺨이 희게 떨렸다.

“혹시나 신경 쓰인다면,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고.”고백과도 같은 말에 심장박동이 산산이 부셔져 내렸다.

영원은 그와 눈을 맞대었다. 그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무척 힘들어.’ 그렇게 말했을 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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