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7화 (7/83)

7화. 왕자가 신데렐라를 길들이는 방식2016.07.28.

주양이 미동도 않고 영원을 응시했다.

꿰어 맞춘 듯, 투사해오는 그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뇌가 얼얼해지는 충격이었다.

매일같이 지겹도록 오가는 정원에 주양이 서 있는 걸 보고 영원은 넋을 빼고 말았다. 집을 잘못 들어왔나 잠시 식겁했다.

번지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멍청한 꼬락서니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이사님. 밤이 늦었습니다.”누군가가 영원의 등 뒤를 막아섰다. 양 비서였다.

차를 준비시켜놓은 충복은 영원을, 그리고 주양을 끊어놓았다.

“내일 일정이 빡빡합니다. 새벽에 일찍 준비하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주양은 거짓말처럼 그런 적 없다는 듯 영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충복의 오지랖에 주양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었고, 영원은 그의 관심을 빼앗겼다.

주양이 걸음을 떼었다. 영원은 대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엄연히 말하면 그녀가 아니라 대문을 지나려는 거지만, 어쨌든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가 접근해 올수록 그녀는 곤두섰다.

마침내 그가 앞까지 다다른 순간 영원이 먼저 참지 못하고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갔다.

후다닥- 집 안으로 도망쳐왔다.

쾅-!

현관문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으로 위험했다. 그가 구두 주인을 아직도 찾고 있다는 건 알았다.

안 나타나면 그만둘 거라 생각했는데.

직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한 번씩 신어볼 때마다 유혹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남은 미련의 한 톨도 쥐어짜갔다.

스스로도 보기 싫은 얼굴은 악몽 그 자체였다.

‘백운당의 귀신이 인공호흡을 했다고 하면 진주양의 그 젠틀한 미소도 엄청 썩어 들어가겠지.’ 그녀를 경멸하는 얼굴을 보일까 봐 무서웠다.

영원은 비상등이 꺼진 어두운 현관에서 숨죽이고 기다렸다.

잠시 뒤, 멀어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이제 그도 신발 주인을 찾지 않을 거다. 다시 잊혀지고 완벽한 타인이 되겠지.

바라던 바인데 가슴이 헛헛한 것은 왜일까.

시간이 흐르고 일상을 되찾아갔다.

영원은 동전 줍기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출근하는 건 누가 채가기 전에 백운당 흙바닥 전체를 샅샅이 뒤지기 위함이었다.

점심쯤엔 모은 동전들을 숨기기 위해 귀빈들만 모신다는 별채 청소를 하러 갔다.

아니, 청소를 자처했다.

‘남들 다 하기 싫다는 청소를 왜 굳이 마다 않는 건데?’ ‘솔직히 말해봐. 너 그 안에 꿀단지 숨겨놨지.’혼자만이 간직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백운당 별채는 보안을 위해 청소를 용역에 맡기지 않고 내부 직원으로 꾸려놓았기에 ‘보물’을 숨겨놓기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장식용 문갑 안에 돈을 숨겨놓았다.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민낯, 혹은 은밀한 쾌락을 탐하듯 그녀의 귀여운 돈들이 잘 있나 안부를 확인했다.

‘그동안 이쁜이들이 얼마나 모였을까?’사랑스런 돈들은 마지막에 봤던 그 자리 그대로 퍼석하게 저금통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영원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이 ‘보물’뿐이었다.

술에 취한 손님들이 지갑에서 만 원, 오만 원짜리를 떨어트리는 날은 횡재였다.

바쁘게 마당을 오고 가는 직원들도 동전을 떨어트려준다.

백운당 바닥을 쥐 잡듯이 훑고 다니면 하루에 천 원은 주울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성형을 할 수 있어.’이 괴상망측한 눈을 뜯어고칠 수만 있다면.

분노로 폐 안쪽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저절로 이가 물렸다.

저금통을 다시 고이 숨겨놓고 가려는 그때였다.

쨍그랑-!

집기 부서지는 소리가 허공을 그었다. 영원은 옆방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살려줘요.”한 여자가 가려는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녀의 앞섶은 거의 풀어헤쳐져 있었다.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3대가 물려온 회사예요. 허무하게 무너트릴 순 없어요.”영원은 옆방 창호지에 눈을 갖다 댔다. 구멍 속의 작은 세상을 훔쳐보았다.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하지 마세요. 아직 이사밖에 안 된다구요? 한신그룹은 사장보다 이사 파워가 더 센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그렇게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잖아요. 또 그렇게 해왔구요.”    “…….”“부탁해요. 제발 어음 풀어지는 것만은 막아줘요.” 여자는 대산물산 막내딸이었다. 김 회장이 애지중지하다 못해 너무 아껴서 시집도 안 보낼 정도라던.

대산물산이 파산한다더니 지금 저러고 있는 건가?

“무엇이든 다 드릴게요. 제 몸이라도”막장 드라마 속 대사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영원은 뒷모습의 남자를 봤다. 아마, 저 남자가 회사를 회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었다.

자아…… 이봐 아저씨, 당신은 뭐라고 말할 거지?

“저는 보경 씨 신체에 용건이 없습니다.”하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나온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매듭짓는 단호한 목소리에 영원은 멈칫했다.

“제가…… 매력이 없단 소린 가요?”남자는 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게 저 선을 지킬 줄 아는 절제된 태도라고 하지만, 영원은 반대다.

그는 침착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화려한 포장에 지나지 않고, 그는 오히려 신경질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짓밟아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는 동물을 닮았다.

포악한 발톱을 삼키고 저렇게 지독하게 점잖은 선비처럼 말하지 않는가.

“그룹 전체 채권의 값어치와 맞바꿔, 걸맞을 만한 것이라 할 순 없지요.” 진주양…….

그 목소리를 듣자 영원은 격침당한 듯 심장이 뛰었다.

비참함과 함께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던 대산 딸은, 주양이 자기 말을 들어줄 기미를 안 보이자 곧바로 표정을 바꿔 기어이 내뱉고 말았다.

“소리 지를 거예요.”“…….”“난잡한 재벌 4세들. 이런 지라시쯤 새나간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달라. 당신은 안 돼, 당신이기 때문에 나는 추잡해질 수 있고.”비열한 어조로 대산 딸이 빠르게 지껄였다.

“당신의 그 고상한 평판에도 흠이 가겠지.”이 싸움에서 우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판단한 사람의 여유였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벗겨진 대산 딸과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있던 주양뿐이었다.

사람이 달려오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 입 아픈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도 이런 식의 막무가내는 어쩔 도리가 없겠지.

장지문 뒤에 숨어 몰래 엿보는 영원의 검은자가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빠르게 오갔다.

주양이 천천히 대산 딸을 돌아봤다.

“이 집 오이냉국이 그렇게 시원하다고 하더군요.”놀랍게도 주양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나가면서 한 접시 주문하죠. 드시고 가세요.”끝까지 예의를 지키는 주양이 환멸스러운지 대산 딸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매정한 자식!”여자가 집어던진 물컵이 진주양의 등을 맞고 떨어졌다.

“냉수 먹고 지금 나더러 속 차리라고?”“…….”“나라고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아버지가 시키지만 않았으면 나도 구질구질하게 안 굴어!”물에 젖은 주양의 양복이 뚝뚝 물을 떨궜다.

등 뒤로 손을 뻗은 그는 찝찝한 자신의 등을 더듬었다.

칠판에 대고 손톱을 긁는 듯한 예리한 감각이 공기에 돋았다.

“3대째면, 해먹을 대로 해먹은 것 같은데 무슨 부귀영화를 더 누리겠다고…….”그가 서서히 뒤돌아 대산 딸을 보았다. 순간 송곳처럼 차가운 두려움이 여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주양은 젖은 양복 재킷을 천천히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난 말입니다. 싸구려는 싸구려 취급이 마땅하다 생각해요.”“…….”“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어요?”“…….”“너처럼 몸뚱이 하나로 타협 보려는 애들, 어떻게 입 다물게 하는지. 아주 잘 안다 이겁니다.”그가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비틀어 잡아 풀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의 움직임은 날렵했다.

벽에 밀쳐진 여자가 헉, 숨을 들이켰다. 팽팽하게 당겨진 넥타이가 여자의 목젖을 눌렀다.

“구걸하러 온 주제에 어디 눈 똑바로 뜨고 나랑 겸상이야. 건방지게.”형광등 불빛에 반사된 주양의 검은 눈동자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한순간에 돌변한 그에 대산 딸은 얼어붙었다.

“지, 진주양 씨.”“만나자길래 그쪽 회장님이 직접 오셔서 내 앞에 머리라도 조아릴 줄 알았지. 근데 딸을 대신 보낸 걸 보고, 아직 살 만한가 했습니다. 차라리 오자마자 내 발바닥에 먼저 인사하지 그랬어요. 발바닥아라도 핥았으면 그 성의는 높이 사, 한 번 해줬을 텐데.” “지금 무슨…….”그가 넥타이에 더 힘을 주었다. 어…… 억, 벽에 부딪혀 목이 졸리는 여자가 눈을 뒤집어 깠다.

“나는 아가씨들 팁에 인색하지 않은 편이야.”“…….”“근데 넌 내가 돈을 요구해야할 판이야. 빚지는 장사 하는 게 어디 사업가야? 자원봉사자지.”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그가 대산 딸의 십자가 귀걸이를 기만하듯 툭, 손가락으로 튕겼다.

“자원봉사는 너의 그 하느님한테 빌어봐. 또 압니까. 버려진 영혼을 불쌍히 여겨 수태라도 시켜주실지.”  여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넥타이를 채우고 반듯하게 돌아섰다.

거친 숨을 들썩이던 대산 딸이 그를 노려봤다. 그녀 안에 다시 살아난 것은 포기가 아닌 치욕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그녀가 다시 물컵을 치켜들었다.

갈고리 같은 손가락으로 주양이 대산 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두피에서 찢어져 나갈 듯 여자의 머리채가 힘주어 당겨졌다. 주양이 턱에 힘을 주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그땐.”그가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양복을 대산 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그 예쁜 얼굴 이렇게 되는 겁니다.”파김치처럼 푹 젖어 너덜거리는 옷자락에 여자는 겁을 집어먹었다. 더 이상 아무 짓도 못 했다.

완벽하게 제압을 끝낸 그가 타이를 반듯하게 바로 잡고 걸음을 떼었다. 그쯤이었다.

불현듯 멈춰 선 그가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은.

영원은 바짝 긴장해 숨죽였다.

무표정한 등이 고요했다. 영원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다 테이블을 건드렸다.

빠른 발걸음 소리.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넓게 열리면서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영원이 드러났다.

“까아아악-!”곧 대산 딸의 찢어지는 비명이 별채를 뒤흔들었고, 파랗게 질린 영원의 얼굴이 검게 죽어버렸다.

한 발, 두 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주양에게 팔목을 틀어 잡혔다.

그가 영원을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이서 맞닥뜨려진 눈동자가 칼로 새겨지듯 겹쳐진다.

시선은 차가웠고, 날아와 단번에 꽂혔다.

파편처럼…….

*

“너 별채 출입 금지 당했다며?” “…….”“대체 뭔 뻘짓을 하면 청소마저 쫓겨나?”영원을 대신해 오늘부터 별채를 맡게 된 동료 1이 닦달했다.

영원은 마당 쓸기를 그만두었다.

동료 1을 피해 건물을 돌아 나오니 입구에 여종업원들이 난리가 나 있었다.

“아…… 오늘도 진사마께서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구나.” “나 잠깐 눈 마주친 것 같았어!”“눈빛만 마주쳐도 실신하겠어.”가게로 들어서고 있는 진주양이 보였다.

그는 오늘도 나폴리 슈트를 휘감고, 부정할 수 없는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너 그거 들었어? 직원 하나가 음식을 잘못 서빙해서 왕자 옷에 물 잔을 엎었는데, 직원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매니저에게 부탁까지 하고 갔대.”“진 이사 미담이 뭐 한두 개니? 새삼스레.”“또 언제는…….”모두 다 저 남자의 진짜 민낯을 모르고 깜박 속고 있다.

그날 영원은 보았다.

그의 옷에 물컵을 집어던진 대산물산 딸이 어떻게 잘근잘근 목이 졸렸는지를.

다행히 사태는 비명을 듣고 달려온 계모 최혜란에 의해 수습되었다. 일은 그저 영원이 손님의 심기를 거스른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누구도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언급하려 들지 않았다.

대산물산 딸과 진주양, 영원, 세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딱히 그가 비밀로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입단속을 해야 목숨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양과 몇 번 코앞에서 맞닥뜨린 적도 있지만 원래 그랬듯, 그는 일개 직원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다.

분명 들켜선 안 되는 걸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반응은 실로 미적지근했다.

오히려 그날 이후로 영원이 더욱 그를 신경 쓰고, 불편해서 피하고 있다.

그날 영원을 똑바로 겨누었던 주양의 눈빛.

죽임 당할 줄 알았다.

“근데 그 대산물산 딸내미가 진주양한테 들이댔다가 까였다며?” 우뚝. 마당을 쓸다가 영원은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재벌가 체면이 있지 어떻게 대놓고 몸 로비를 해, 하길?”직원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별채에서 난동이 있고 사흘하고 다시 사흘이 흘렀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별채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영원이 대뜸 다가가 캐묻자 서빙 직원들이 낄낄거렸다.

직원 하나가 비웃음을 머금은 입술을 서늘하게 끌어당긴다.

“지금 증권가에 다 퍼졌어. 얼마 전에 파산한 D물산 딸하고, 은행가 장손 J씨가 김보경하고 진주양밖에 더 있니. 그 지라시에 나오는 모 고급 한정식 집이 설마…… 우리 백운당은 아니겠지? 뭐야. 진짜야?”별채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영원뿐이었다.

개인의 의지 따윈 묻지도 않고 지독한 현실이 사정없이 얼굴 앞에 까발려졌다.

인터넷을 켰다. 지라시가 이미 어마어마하게 돌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닌데…….

내가 소문 낸 게 아닌데. 괜찮겠……지?

괜찮지 않았다.

그날 문제가 터졌다. 지라시의 여주인공인 대산물산 딸 K양이 낮에 가게로 영원을 찾아왔다.

짜악????!

곧장 뺨부터 후려갈겼다. 엄청난 소리에 모두가 굳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했다. 영원은 따귀를 맞고 멍해져 있는데,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 듯 다시 공격이 날아왔다.

짜악????!

파열음이 귀청을 때렸고, 90도가 돌아간 왼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쓸 때라고 관리 받을 때 말고 없을 손에 옆얼굴이 나가떨어질 것 같다.

“거기가 어디라고…… 네까짓 게 감히…….”수치스러운 기억을 떠올린 K양, 김보경이 몸을 벌벌 떨었다.

별채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지라시 당사자들 빼고 영원뿐이었다.

김보경은 영원이 증권가에 정보를 돈 주고 팔았다고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이따위 음식점 내가 어떻게 못 할 거 같지?”망했어도 재벌이다. 그녀가 영원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백운당. 포클레인으로 다 밀어버릴 거야.”죽일 것처럼 영원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서였다.

“그전에 너부터 좀 씹자.”영원은 패대기쳐졌다. 김보경이 돌아나갔다. 사장실이 있는 쪽이었다.

계모를 만나서 담판을 지으려는 거다. 계모가 알면 죽은 목숨이다.

“자,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다급하게 손을 뻗었다가 그만 문턱에 발이 걸렸다. 영원은 그녀를 떠밀고 말았다.

아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김보경이 돌계단을 굴렀다.

*

계모가 고소장을 갈가리 찢어서 발겼다. 종래에 영원의 면전에 집어던졌다.

“도대체 너란 애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김보경은 상해죄로 백운당을 상대로 고소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라면 꿈 깨.” 김 회장과 막역한 사이인 계모는 불을 뿜어댔다.

“합의 받아 와야 할 거야.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

.

.

영원은 잠시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자복을 입고 태연히 리모컨을 돌리는 김보경을 보고서 헛웃음이 터졌다.

“회사 어음 만기일을 늦춰. 그럼 합의해줄게.”거금을 들여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찾아왔건만, 저쪽에서 도리어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다친 게 발목이 아니라 뇌야?”“뭐야?”“말이 되는 소리 해야지. 상식적으로 넌 내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냐?”그런 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김보경이 잔혹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은가 보네. 그래. 진주양을 찾아가.” “…….” “울며불며 그 남자 바짓가랑이를 붙잡든, 죽겠다고 자살쇼를 하든. 책임져.”“…….” “이 모든 게 다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네가 그 남자를 움직이면, 나도 너를 다시 한 번 보도록 할게.”결국에 사과를 못 받아주겠다는 어깃장이었다.

백운당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김보경에게 용서를 받아야 했다.

누구보다 계모는 영원을 집에서 내쫓고 싶어 했다.

머릿속이 백짓장이 되었다.

그 남자가 일하는 한신 본사를 모를 리는 없지만 애초에 만나는 것에서부터 장벽이 있었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연예인보다 보기 힘든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본사 1층 데스크로 가서 무작정 진주양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잡상인 같은 차림새에 여직원이 영원을 비웃었다.

“선약이 되어 있으신가요?”상당히 거슬리는 말투였다.

데스크는 회사의 얼굴이었다. 백운당에서 기생들이 이런 식으로 일하면 계모에게 뺨 맞을 거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으면 내가 여기서 죽치고 있겠어? 직접 전화했겠지.”만약에 그 남자를 만나면 서비스 태만이라고 당장에 이 여직원을 잘라주겠고 마음먹었다.

“약속 잡은 뒤에 찾아오세요.”“물어볼 수는 있잖아.”“아무나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만나주면? 만나주면 어쩔 건데?”절대 잘하는 짓이 아니다. 아니야. 이건. 그러나 저질러버렸다.

“구, 구두 주인이 찾아왔다고 전해.”직원은 짜증스러운 눈치였지만 비서실에 연결했다.

하지만 얼마 뒤, 상황은 역전됐다. 통화를 마친 여직원이 떨떠름하게 입가를 경련시켰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갑자기 무척 깍듯해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영원을 위로 ‘모시고’ 올라갈 직원이 내려온다는 거였다.

“층수만 알려줘. 혼자 올라가도 돼.”대우가 아까와는 천지차이였다. 너무 잘해주니까 소심한 간이 더욱 콩알하게 졸아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받은 만큼 뱉어내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영원은 무일푼이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목숨이 달아나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조마조마했다.

사옥 28층은 본사 간부실로 이루어진 엄연히 사원들과 구분된 층수였다.

“이사님께선 현재 업무 중이십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몸매가 잘 빠진 여비서가 접대실에 그녀를 앉혀놓고 떠났다.

직원을 얼굴 보고 뽑는지 하나같이 모델 못지않았다.

저렇게 예쁜 여자들하고 일을 하다 보면 가슴이 떨릴 때도 있겠지.

실제로도 재벌과 스캔들 내는 비서 출신이 많기도 했다.

문득 진주양의 연애사가 영원의 호기심을 당겼다. 저 중에 그를 몇 명이나 거쳐 갔을지 궁금해졌다.

‘저 중에 그와 사적인 만남을 가져본 여직원이 있을까?’ 무척 당차고 연애도 똑 부러지게 했을 거다. 말이나 더듬고 도망칠 줄밖에 모르는 그녀와는 다르리라.

아무리 기다려도 진주양은 함흥차사였다.

비서실 직원들은 바빴다.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누구도 영원을 신경 써줄 틈이 없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영원은 찌그러져 있다가 엉덩이를 떼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이렇게 쉽게 만나줄 리가 없는데.

벌써 3주가 지났다. 구두 주인에 대한 흥미는 진즉에 사그라지고도 남을 시기다.

형식상 인사치례는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일이 우선이겠지.

방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괜찮아, 이런 건 익숙하잖아.’되뇌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부산스럽게 머리를 정리했다. 주먹을 사려 쥐었다.

지하철 노숙자로 살다 겨울에 동사해도 여기는 안 찾아올 것이다.

사옥이 너무 컸다. 길을 잃다가 어떤 커다란 문에 다다랐다. 복도가 갑자기 한적해졌다.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주변을 보고 누구도 이 방에 쉽게 접근하지 않으려는 걸 느꼈다.

방문 앞에는 차가운 비서가 한 명 앉아 있었다.

회사에 최고로 규격화된 것 같은,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영원을 제지하지 않았다. 마치 들어가라는 듯, 제 할 일을 한다.

이 문 너머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불길한 예감이 진동했다.

문은 아주 살짝 열려 있었다. 방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가 흠칫, 물러섰다. 블라인드가 쳐진 방은 어두웠다.

방에 진주양 혼자 앉아 있었다.

자로 잰 듯 정밀한 이목구비.

셔츠 깃에 빈틈없이 맞물려 있는 타이.

모범적이고 인텔리한 느낌의 쥐색 양복이 파격적이게도 몹시 섹시했다.

“신영원 씨?”“내 이름을 알아?”그는 알 수 없는 웃음을 띨 뿐이었다. 데스크에서 신원확인 차 이름과 간단한 신상을 적은 것을 떠올렸다.

“앉아요.”진주양은 검은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가 바깥에서 멍청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도 줄곧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거다.

“얌전히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며 영원은 우물쭈물했다.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

“벼, 별로 할 말이 없다면 가고.”긴장한 채 말을 잇던 영원은 문득, 그와 눈이 부딪혔다가 숨이 막혔다.

매일같이 그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야릇한 악몽에서 그는 매번 영원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 꿈에서 그가 뭐라고 했더라?

슈트가 잘 어울리는 은밀한 관찰자는 영원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었다.

“당신이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렸으니까.”영원은 똑바로 겨눠오는 저 눈빛의 의미를 알아버렸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어물쩍 봐줄 거라 착각했다면 오산이다.

꽁꽁 숨어 있을 땐 언제고, 제멋대로 쳐들어와 정체를 밝히는 오만불손함이라니.

오만한 생명의 은인은, 주양을 기다리게 한다는 게 어떤 건지 혼나야 할 필요가 있다.

종래엔, 내 방식에 너도 길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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