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소시오패스 왕자2016.07.24.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방이었다. 사각사각- 사인을 휘갈기다 만년필 끝이 툭, 부서졌다.
주양은 잉크가 흥건하게 번진 손끝을 응시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구두 주인, 찾았습니까?”방에는 주양 혼자가 아니었다. 기척도 내지 않고 책상 옆에 서 있던 양 비서가 그의 물음에 답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이 며칠째인 줄 압니까?”구두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앵무새 같은 대답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양 비서가 묵묵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백운당에서 있었던 불미스런 일의 배후를 찾았습니다.”식당에서 죽다 살아나고 며칠이 흘렀다. 비서실은 분명 단순 조리 실수는 아닌 것으로 추정, 배후를 추적했다.
“대산물산이 의심스럽습니다.”“근거는?”“진두영 사장…… 아니, 숙부님께서 대산물산과 접촉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만년필을 쥔 주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책상에 힘주어 누른 만년필 끝이 우둑, 부러졌다. 터져 나온 검은 물이 서류를 뒤덮었다.
주양이 조용히 굳은 표정의 양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대산물산이 지금의 파산 지경에 이르는 데 주양이 많은 개입을 했다. 김 회장은 그에게 유감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숙부라니.
“지금 내 가족을 의심, 하는 겁니까?”“…….”“말을 하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 말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주양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곧장 옷걸이로 갔다. 시계가 오후 3시 정각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선 전화가 삐익- 울렸다.
여비서의 목소리였다.
“숙부님께서 오셨습니다.”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고개 숙인 양 비서를 지나 문 앞에 섰다. 주양이 말했다.
“하지만, 잘했습니다.” 뜻밖의 칭찬에 양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조리 실수라니. 확실히 삼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허접한 방식이었어요. 김 회장은 교활한 노인네입니다. 나도 그렇게 배후가 뻔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필 숙부라는 게 애석한 일이지만, 일단 냄새가 난다면 폐기처분부터하고 봐야죠.” 그렇게 내뱉는 목소리엔 한 점의 연민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설령 그게 피를 나눈 혈육이라 해도.”문을 열었다.
숙부 진두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40대가 무색하게 하얗고 유순한 얼굴이었다.
백면서생 같은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미안. 괜히 네 시간만 뺏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아내가 오늘은 기필코 널 꼭 봐야겠다고 하지 뭐야.”병마에 사로잡힌 듯, 진두영의 눈동자는 소실점을 잃고 방황했다. 애써 웃고 있지만 주양과의 대면을 몹시 불편해하는 모습이었다.
죄책감이 뒤엉킨 얼굴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써 붙이고 있었다.
“어린 동생이 첫 데뷔 무대를 갖는다는데, 사촌오빠가 돼서 당연히 봐줘야죠.” 주양은 말했다. 분노하지도, 그러나 용서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
쉬쉬하지만 그룹 내에서도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그들이었다.
진 회장의 손자와 아들.
주양은 진 회장의 첫째 아들 소생이었고, 진두영은 진 회장이 바깥에서 나아온 둘째 아들이었다.
숙부라고 하지만 고작 10살 차밖에 안 나는 젊은 숙부였다. 그리고 너무나 큰 조카였다.
숙부와 조카의 나이차가 10살밖에 안 나는 애매한 구도는 진 회장의 여성편력이 빗어낸 비극이었다.
주양의 부친이 일찍 죽은 이상 진두영은 공식적으로 진 회장의 유일한 아들이자, 한신의 후계자였다.
아직까지는.
플래시가 터졌다. 공연은 끝났지만 2층 홀을 떠나지 못한 상류층 인사들을 기자들이 마구 찍어댔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발레극 <신데렐라>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진두영의 큰딸은 올해 12살로 국립발레단 소속 아카데미를 다녔다.
겨우 초등학생이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발레극을 하는 건 서민 수준으론 꿈도 못 꿀 사교육이었다.
“조카님.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아이보리 투피스에 진주 목걸이를 걸친 여자는 완벽한 재벌가 여성이었다.
한신 진 회장의 며느리이자, 주양이 숙모라고 부르는 여자였다.
“여주인공이 아니어서 아쉬우셨겠어요.”주양의 관람 후기에 그녀가 애써 실망을 감췄다.
“경쟁이 치열했어요. 아카데미 단장이야 당연히 우리 애를 여주인공으로 점찍었지만, 알잖아요. 없는 것들이 피해의식 강한 거. 조금만 한신가가 혜택 받는 거 같으면, 지들 밥그릇 뺏는다고 빽빽댈 텐데. 애들 연극으로 재계 서열 구분 짓고 싶지도 않았고. 매스컴이 좀 시끄러워요? 과감히 여주인공을 양보했죠.”“…….”“그렇지만 한신가 사람이 남 들러리나 서는 조역을 맡을 순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왕자 역을 맡기로 했어요.”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자는 핵심을 짚었다.
“남자 역할이지만 ‘주인공’이잖아요.”주인공.
그거면 된다.
똑같이 분류되는 재벌 중에 특히 ‘한신’은 좀 더 스페셜하고 비범해야 한다.
“그런 차이를 알기에 아이들은 너무 순수하죠.”적당히 경청하는 척하며 주양은 사촌에게로 눈길을 내렸다.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주인공을 맡지 못한 어린 사촌은 발레극을 끝낸 지금도 뾰로통해 있다.
여주인공을 맡은 친구의 티아라가 아까서부터 사촌의 시선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어린 사촌이 눈을 암상하게 떴다. 왕관을 손에 넣고 싶어서, 바득바득 이를 가는 모습은 주양을 숨죽이게 했다.
신데렐라가 피날레에 왕자에게 하사받는 왕관.
왕비를 상징하는 티아라는 욕망의 결정이었다.
여주인공을 빼앗긴 질투심이 왕관을 향한 욕심으로 번졌다.
그때, 여주인공 아이가 달려와서 주양에게 부딪혔다.
“앗……!”교육을 잘 받은 아이는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아이가 공손히 인사하고 떠나고, 주양은 손바닥을 폈다. 아이의 가방에 있어야 할 왕관이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몸끼리 스칠 때 갈취했다.
착한 아이는 왕관을 도둑맞은 것도 모르고 멀어졌다.
“참, 요즘 보경이 소식 들으셨어요?”진 회장의 며느리가 눈치를 살피다 금기어를 내뱉었다.
“대산물산 그렇게 되고, 많이 쪼들리나 봐요.”김보경은 대산물산 김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학예회에 굳이 왜 그를 참관시켰나 했더니 아쉬운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거절할 수가 있어야죠. ……보경이랑 저 여고 동문인 거 아시죠. 한 번 뵙게 해달라고 통 사정을 하는데, 제 입장도 있고. 아시잖아요. 보경이가 조카님 많이 흠모한 거.”“…….”“난처하겠지만 돕는 셈치고 보경이 좀 만나줘요. 자금줄을 조카님이 틀어쥐고 있다면서요?”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매년 불우이웃 성금이다 뭐다 5천억씩 적선도 하는데, 뭐가 어려운 얘기일까마는.
주양은 무료하게 들으면서 왕관을 카펫 위에 던졌다.
훔친 왕관이 어린사촌의 발 앞까지 굴러갔다.
왕관을 발견한 사촌이 눈이 커다래졌다.
덫을 문 먹잇감을 보는 주양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사촌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인을 잃어버린 티아라. 잠깐의 갈등.
탐욕이 깃든 눈동자로 왕관을 주운 사촌은, 옷자락 안에 죄악을 감췄다.
주양은 잔혹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설픈 자들의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집요하게 그를 설득하던 여자가 갑작스런 주양의 물음에 의아하게 보았다.
“예?”“어설프게 욕심 부리다가, 언젠가 들통이 나죠.”이해하지 못한 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있고 죄를 짓고 살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주양이 전자라면 진두영은 그 후자였다.
죄를 지으려면, 죄책감을 느껴선 안 되었다. 죄책감은 또 다른 이름의 증거였다.
“김보경 씨 한번 만나보죠.”“…….”“백운당에 자리 만들어보겠습니다.” 여자가 겨우 안심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비명이 계단 쪽에서 터졌다. 계집아이의 비명소리였다.
꺄아아악??? !
진 회장의 며느리가 사색이 되어서 달려갔다.
“딸이에요. 딸의 목소리예요!”사촌은 계단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 아래에, 여주인공을 맡았던 아이가 넘어져 있었다.
굴러 떨어진 아이는 무릎이 까져서 울어재꼈다.
“계단에서 사람을 밀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 도대체 왜 그런 거니! 머리라도 깨졌으면 어쩔 뻔했어!”사촌은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얼어붙어 있었다. 친구가 자기 엄마에게 일렀다.
“얘가 내 왕관을 훔쳤어요!”사촌의 손에는 티아라가 들려 있었다. 사촌이 곧바로 항변했다.
“아니야! 내, 내 거야. 훔친 게 아니야!”“거짓말!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가방에 넣어놨는데 없어졌어! 네가 가져간 거잖아!”“아니야. 내 거야. 내 거야! 으허헝.”사람들의 눈길이 취조관처럼 경멸스럽게 모녀를 감시했다.
진 회장의 며느리는 딸이 도둑질을 한 모욕적인 상황에 파르르 뺨을 경련했다.
주양은 소동을 지켜보다 유유히 오페라하우스를 빠져나왔다.
도중에 진두영과 마주쳤지만 어깨만 가볍게 스쳤다.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던가. 어설픈 자들은 밥을 숟가락으로 떠 먹여줘도 어설플 뿐이었다.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괘씸하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메시지가 떠 있었다.
<구두 주인 찾았습니다.>주양은 양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
구두는 짜 맞춘 것처럼 신해수의 발에 딱 맞았다. 최혜란 사장은 은근히 바람을 잡았다.
“해수 너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잖니.”구두 주인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여사장은 애써 경박한 기쁨을 억누르며 품위를 지켰다.
“이사님을 구한 게 우리 해수인가 봅니다.” 반신반의했지만 소문은 드라마틱한 설정에 힘입어 백운당 전체에 퍼졌다.
백운당 직원만 70여 명이고, 여직원이 90%를 차지하는 곳에서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는 각박한 현실을 잠시 잊기에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다.
‘한신의 왕자를 구해준 여자의 구두래. 근데, 그 여자가 안 나타난다는 거야.’다들 밑져야 본전이라 치며 한 번씩 구두를 신어보았다.
주방팀, 서빙팀, 국악팀에 손님들 접대를 맡는 백운당의 꽃 기생들까지 한 번씩 구두를 신어봤고 거쳐 갔다.
그럼에도 구두가 맞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신해수의, 신해수에 의한, 신해수를 위한 구두였으니까.
그녀의 딸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무도 안 맞는 게 당연해요. 오직 제 발을 위해서 맞춤 제작 구두니. 제가 약간 평발이거든요.” 해수는 감탄이든, 의심이든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주양의 반응은 심심했다.
“그렇군요.”기대감을 비웃듯, 뱀처럼 교활한 모습으로 맞장구쳐준다. 해수는 눈썹을 구겼다.
“그게 다인가요?” “더 무엇을 기대한 겁니까?”그러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드는 눈초리는 네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으며, 나와 어떤 줄다리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심지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느긋한 주양을 못 당하겠다 싶어 해수는 손뼉을 부딪쳤다.
“역시 안 속으시는군요.”“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신해수란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여성 아니었나. 결국에 탄로 날 거짓말을 하는 의도를 모르겠군요.”“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에요. 제 구두는 맞아요.”“…….”“제 구두는 맞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진 이사님을 구한 건 제가 아닐 뿐이죠.”“얘, 해수야!”최혜란이 솔직하다 못해 천금 같은 기회를 차버리는 딸을 저지하려 했다.
“아니요, 어머니.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추잡한 연극 그만하죠.”최혜란이 어처구니없어 하며 거실을 나갔다.
“죄송해요. 속이려는 의도는 없으셨을 거예요. 딸에 대한 사랑이 가끔 도가 지나쳐서 문제지.” “구두 주인은 맞지만 날 구한 건 그쪽이 아니다 라는 말, 계속하죠.”“이 구두, 제가 한 달 전에 버렸거든요.”“…….”“몇 번 안 신은 새 신발에 메이커니까, 아마 누가 주워서 신었을 수도 있어요.” 신발이 벗겨진 것도 신발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발이 벗겨지는 게 흔한 일은 아니죠.” 주양은 조용히 수긍했다. 충분히 납득 가는 말이었다.
“구두 주인을 왜 그렇게 찾고 싶어 하세요?”“반대로 묻고 싶군요. 그럼 도움을 받고 입 씻는 게 옳은 겁니까?”“언짢게…… 들리셨나요?”“도움 받는 걸 당연시 여기는 것도 일종의 나태함이죠. 그런 나태함을 경멸합니다. 거저먹는 건 제 방식이 아니에요.”“주관이 뚜렷하시네요.”판에 박힌 칭송에 주양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차가 녹차가 아니라 커피라 해도 맞장구칠 기세였다.
해수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그는 신랄한 어조로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내었다.
“뚜렷하다기보다는 무척 피곤한 성격이죠. 남한테 빚지는 것도, 밑지는 것도 용납 못 하는.”신해수는 당황했다. 딱딱해지는 기색을 비쳤지만 백운당 차기 사장답게 가면을 덧씌운다.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웃음을 유지했다.
“양심적이신 거죠. 이사님같이 셈이 정확한 분이 요직에 열 명만 있어도, 세상이 좀 덜 파렴치할 텐데.”말하는 족족 상대를 추켜 세워주는 여자는 만만치 않았다.
주양은 녹차를 마시며, 신해수를 보았다.
단아한 분위기에 아름다운 얼굴.
게다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집안답게 상대의 기분을 맞출 줄 아는 화술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저토록 잘 경청해주는 데다가, 은연중 위신까지 세워주니 남자들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게다가 남자라면 한 번 쯤은 품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가늘고 섬세하며, 청순함. 남자에게 자신이 꽃 같은 여자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저 정도 분위기는 화류계에 가면 널렸다.
여자다움은 그에게 무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쪽 여자들이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훨씬 진솔했다.
얌전 빼는 모습을 참아주는 건 다른 재벌가 규수들로도 충분했다.
“구두 주인을 다시 수소문해볼까요.”최혜란 사장의 사가를 나오는데 양 비서가 물었다.
주양은 간략하게 손짓으로 됐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할 도리는 다 했고 생각한다. 이 정도 찾아다녔으면 어디 가서 날로 먹었단 소리는 안 듣겠지.
“차 대기시켜놓겠습니다.”피로해 보이는 그를 비서가 눈치채고 기민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일주일을 넘게 기다렸다. 한가해서가 아니었다. 목숨을 구했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약속해줄 수 있었다.
곧바로 금전적인 요구를 해올 거라던 예측은 빗나갔다.
구두 주인은 그 어떤 사례도 바라지 않았고, 정체마저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신비에 싸인 구두 주인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동정 하나하나가 그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는 게 인간이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행이라.
‘천치가 아니고서야…….’그날을 더듬었다. 흐릿한 기억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몸이 딱딱하고 차갑게 식어가고, 어느새 주양은 며칠 전 그 장소에 누워 있었다.
죽음은 턱밑까지 추격해왔고, 주양의 바짓단을 저승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삶에 각별함을 느낀 적은 없지만 죽음을 기다린 적도 없다.
죽음은 영혼이 없는 그조차도 슬프게 만들었다. 허무한 죽음에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주양은 죽어가고 있었다.
향기였다. 그의 의식을 깨운 건.
‘눈 떠.’입술에 닿았던 립글로스 향기.
‘제발, 제발 숨 쉬어…….’간단하게 삶을 포기하려는 그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죽지 마.’처연한 슬픔이 그의 뺨에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죽지 마. 제발.’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죽음을 원하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주양은 타인이 주는 선물을 맞을 자격이 안 되는 부류였다.
제 뱃속 채우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고, 눈물은 투자에 막대한 손실을 보았을 때 목구멍 뒤로 쓴물을 삼키는 것보다 하찮게 여겼다.
돈 벌 궁리만 해온 인생에 눈물 흘려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순간 무엇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했다.
‘죽지 마.’여자는 진심으로 기도하며 감정을 폭발시켰다.
‘죽지 마.’환각과 환청이 쾅쾅쾅-! 양 사이드에서 스테레오로 고막을 밟아댔다.
‘눈을 떠.’그리고 마침내, 주양은 눈을 떴다.
감미로운 봄밤, 벚나무들은 새까만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흡수한 벚꽃들은 낮에 보는 것과 다른 보랏빛이었다.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키는, 형광물질에 오염된 것 같은 야한 색채감을 뚝뚝 떨어트려댔다.
기묘한 봄밤에 기척이 느껴져 본 대문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놀란 건 검은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막 퇴근하고 돌아온 듯, 피곤에 찌든 얼굴이 정원에 스며든 낯선 손님을 보고 흠칫했다.
별들은 총총 밤하늘을 수놓았고, 신비로운 가야금 연주음이 멀리 백운당에서 실려 왔다.
수억 만발의 벚꽃이 흐드러졌다.
이내, 그들 머리에 꽃비가 쏟아졌다.
핑크빛 파편이 그와 그녀를 중심으로 날아다녔다.
재투성이 하녀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래서 그도 그녀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