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5화 (5/83)
  • 5화. 신데렐라의 구두2016.07.21.

    -1년 전, 영원 26세

    “하악…… 하악.”식은땀이 베갯잇을 적셨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깬 영원은 탁상시계를 들여다봤다.

    새벽 2시. 한참 잠을 잘 시간이었다.

    또다. 또 그 꿈이다.

    영원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신음을 했다.

    그날 자살에 실패한 영원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와 잠에 빠져들었다.

    자살충동은 더 파격적인 사건에 깨끗이 잊혀졌다.

    그때부터였다. 그날 일이 매일 밤 악몽으로 되살아났다.

    야릇한 악몽의 주인은 매번 한 사람이었다.

    ‘걱정하는 얼굴로 보입니까?’그의 몸짓과 손짓,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영원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심지어는 영혼마저.

    다시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리란 걸 예감했다.

    키스가 끝나고 허름한 몰골을 한 영원을 응시하던 남자는 코트 소매에서 무언가를 떼어내 저금통에 던져주었다.

    짤랑!

    그는 실컷 농락해놓고 기생과 영원을 놔두고 사라졌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어둠으로……

    영원은 침대 옆 서랍을 열어 ‘그것’을 꺼내보았다.

    입막음 값으로 남자가 남긴 뇌물을 스탠드 불빛에 비춰보았다.

    맞춤 제작된 골든 버튼이었다.

    JY……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에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주양.” 진주양.

    왕자는 신데렐라를 백마에 태우는 대신, 그녀에게 금단추를 적선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심지어 누더기를 걸친 영원보다 영혼이 더 궁핍해 보이는 남자…….

    남자는 영원의 뇌수에 가득 차올라 끝내 숙주의 몸을 점령했다.

    숨이 콱, 막혔다. 벌써 4년 전 일이었다.

    영원은 지금 26살이다.

    “주양.”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매번 혀 안에서 삭아갔다.

    결국 새벽 내내 잠 못 이루다가 백운당으로 출근했다.

    다 큰 딸을 집안일만 시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했는지, 계모는 영원에게 번듯한 직장을 만들어주었다.

    백운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게 했다. 낮에는 식당 일을, 밤에는 집안일을 다 하는 조건으로.

    물론, 정식으로 월급을 주지도 않는 노예생활은 변함이 없었지만 영원은 괜찮았다.

    그녀가 가게에 나가는 목적은 오롯이 한 가지였다.

    봄도 오고 장독을 닦을 시기가 되었다. 천 개나 되는 장독대를 일일이 닦는 일은 노동이었다.

    백운당 숙수는 직접 장을 담가서 요리에 썼고, 그 맛이 일품이라 입맛 까다로운 손님들은 더욱 이곳을 찾았다.

    “여름에 선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매일 같이 뙤약볕에 이 짓을 하고 있으니.”장독을 문지르고 있던 동료 1이 반시간도 안 돼서 볼멘소리를 터트렸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씩 널브러졌다.

    “국악팀이나 기생들은 얼마나 좋을까? 겨울엔 따뜻한 온돌방에서 엉덩이 지지고, 여름엔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몸 식히고, 손님들한테 예쁜 짓해가면서 팁도 받고, 음식도 얻어먹고.”“급이 다르지. 걔네들 한복 한 벌에 얼마짜린데. 우리가 입는 천 쪼가리 개량한복하고 똑같겠냐?”그들 중 하나가 유니폼으로 지급받는 개량한복 치맛단을 성의 없이 들췄다.

    한국적인 멋을 더하기 위해 직원들은 전체 다 개량한복을 갖춰 입었다. 하지만 일을 하기엔 불편한 감이 많다.

    무엇보다 백운당의 간판 스타들인 기생들은 일반 직원들을 무시했다.

    “똑같은 직원 주제에, 우리가 청소부라고 지들 따까리 취급할 때면 완전 재수 없어.”동료 1이 입을 댓 발 내밀었다.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다가 태평하게 립글로스를 바르고 있는 영원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구겼다.

    10분 전에도 거울 보고 있는 걸 봤는데 아직도 그 상태다.

    동료 1은 수건을 장독 위에 패대기치고 영원에게 소리친다.

    “키스할 남자친구도 없는 주제에 입술은……. 그만 처바르고 일해!”영원은 아랑곳 않고 거울을 봤다. 립글로스를 입술 선을 따라 신중하게 발랐다.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게! 사람 말을 콧구녕으로 쳐들었나!”앗! 입술 삐뚤어졌다. 동갑인데 영원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댔다.

    급기야 거울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료 1을 영원이 밀쳤다.

    “아악!”넘어진 채 노려보는 동료 1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키스 해봤냐?”동료 1이 당황했다.

    “와…… 살다 살다 백운당 최고 추녀 신영원한테까지 무시 받고. 키스가 별거 있어? 마우스 투 더 마우스. 끝이지.”역시 그럴 줄 알았다. 영원은 비웃었다.

    “네가 진짜 키스에 대해 알 리가 없지.” “됐고! 머리나 묶어! 너 때문에 주위 산만해서 미치겠으니까!”머리카락을 귀신 산발하고 다니는 영원은 불길해 보이기까지 했다.

    진짜 귀신이 나타났다가 혼비백산해서 도망칠 거라고 동료 1이 욕설을 내뱉었다.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무시로 일관하자 더 분통을 터트려댔다.

    “어우. 참자, 참아. 염장 지르는 저것도 능력이지. 해수는 대체 저깟 계집애가 뭐가 불쌍하다고 끼고 도는 거야? 착한 게 죄지.”해수와 비교하는 이야기에 영원이 발끈했다.

    해수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백운당 직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백운당의 해어화.

    그리고 영원은 백운당의 귀신.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동료를 노려봤다.

    눈빛이 공포 영화 <링>의 사다코를 닮아서 동료 1이 졸았다. 고개를 돌리고 딴 동료들한테 험담한다.

    “사장 딸이라지만 혼자만 너무 특혜 아니야? 음식에 머리카락이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사장님은 쟬 방치하는 거야?” “머리만 묶게 하면 죽는다고 게거품을 무니까 그러지. 사장 성격 몰라? 얄짤 없는 사장이 두 손 두 발 다 든 거면 말 다했지. 그나마 서빙이나 주방팀이 아니라, 음식에 머리카락 들어갈 일 없어 주의하는 걸로 넘어가는 거지.”“그래도. 손님 컴플레인 들어오면 우리 점수까지 깎인다구.”모든 여직원이 머리를 망에 넣게 되어 있지만, 영원만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사장 딸의 특권이라면 특권일까. 영원은 남에게 자기 민낯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계모만큼도 머리는 터치하지 못했다.

    머리를 묶으면 얼굴이 드러날 테고, 드러난 민낯에 사람들은 더욱 혐오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영원의 괴상한 눈을 제일 혐오하는 사람이 바로 계모였다.

    “늦바람이 들었는지 요즘은 깔끔하잖아. 머리도 빗고, 옷도 최대한 깨끗한 걸로 다려서 입고, 그래봐야 여전히 귀신같은 꼴이지만.”뭐라고 떠들어대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영원은 립글로스를 열심히 덧칠했다.

    항상 입술은 촉촉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4년 전에 깨우쳤다.

    언제 키스를 당하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돌연 정원이 소란스러워졌다. 멀리서 단체 손님들이 잔디가 깔린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고위급 정치 인사들의 차림새였다.

    “오늘이었나? 일본 타니구치 총리 내한이.” “사장이 한 달 전부터 주방을 아주 들들 볶아댔잖아. 총리 입맛에 맞게 요리 개발한다고. 백운당에서 응접하게 된 것도 진주양 이사 뜻이래.”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도 심드렁하기만 했던 영원이 ‘진주양 이사’라는 말에 거울을 내리고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파헤쳐봤다.

    총리 옆에서 걷는 주양을 발견하고 망부석이 되었다.

    그는 오늘도 나폴리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고급 수트를 단단한 몸체에 휘감고, 저주스러울 만큼 섹시한 모습이었다.

    핑크빛 설렘이나 뭉글뭉글한 감정과는 다른, 마약 같고, 늪 같고, 죽음 직전 공포 같은 그런 격렬함이 영원을 침공했다.

    죽음의 순간에 사람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지. 그를 볼 때면 죽을 것 같이 숨이 막히고 혈관이 조여들었다.

    “어째 한신그룹은 진 이사 혼자 다 운영하는 것 같아? 회장은 신문지면에서나 보이지 코빼기도 안 비추고. 보통 수장이 나서서 접대해야 하는 거 아냐?” “항암치료 받는다는 소문이 있어. 얼굴색만 나빠도 주가가 널을 뛰는데, 기자들한테 재밌는 구경 시킬 순 없지. 그리고 총리가 진주양이랑 개인적으로 만나길 원했다나 봐. 친분이 있대.”“저번에는 석유부자 하마드 슐리만까지 데려오더니, 이젠 총리도 직접 접대하네?” “소문이 사실인 거지. 암암리에선 이미 진주양을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파다해.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한 아들 놔두고 손자한테 거물들을 맞길 이유가 없지.”4년이 흐른 지금, 유학에서 막 돌아온 햇병아리로 취급받던 주양의 위상도 달라졌다.

    무늬만 후계자인 숙부를 위협하는 한신그룹의 차기 주자로 올라섰다.

    대한민국에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정재계 인사들은 없었다.

    백운당은 그 밀실정치의 주요무대였다. 주양은 백운당의 단골 VVIP가 되었다.

    4년째 단골이지만, 그는 한 번도 영원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다.

    그녀가 가게에 나오는 목적은 오롯이 한 가지뿐이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언젠가부터 그만을 쫓게 되었고, 그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별실 테이블 오늘 내가 치울게.”대뜸 영원이 나서자 동료 1이 빈정대었다.

    “웬일이래? 몸 아프단 핑계로 매번 내빼는 애가.”“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한다고. 너희들은 쉬어.”아무런 희망도, 변화도 없이, 죽기 위해 흘러만 가는 삶에 주양은 유일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느끼게 했다.

    그는 가게에 나와야 멀리서라도 볼 수 있었다.

    그래 봐야 한 달에 두어 번 꼴이지만. 이 순간을 위해 영원은 힘든 것을 참을 수 있었다.

    그가 식사하고 나간 뒤 그의 그릇을 치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쓴 수저와 젓가락을 몰래 만져보는 게 낙이었다.

    영원이 혼자 키득거리니까 동료들이 미친년 또 시작이라며 혀를 찼다.

    정찬이 끝나고 영원은 테이블을 혼자 치웠다.

    그가 쓴 집기들을 정성스럽게 만지면서 시간을 음미하는데 동료 1이 눈치 없이 빨리 돌아왔다.

    “아직도 안 끝났어? 하여튼 굼벵이처럼 느려 터져 가지고. 테이블이 여기 하나뿐인 줄 알아?”“그래서 이 큰 방을 혼자 치우잖아. 다른 애들은 안 오고 왜 너 혼자야?” “누각에 총리대신 구경 갔지.”“누각? 거기는 병창 할 때만 쓰지 않아? 누가 연주라도 해?”“응. 해수가.”그 말을 들은 영원은 손가락에서 시작해 핏기가 심장부까지 싸악 가셨다.

    “총리가 국악에 관심이 많은가 봐. 진 이사가 추천해서 해수가 높으신 양반 앞에서 대단하게도 거문고 연주하고 있어.” “진…… 이사가?”“남자들이란 하나 같이 어쩜, 쯔쯧.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예쁘고 어리다면 그저…….”설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숟가락을 떨구고 이미 영원이 바깥으로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계모는 해수를 재벌 집 마나님으로 만들 야심을 키웠다.

    극소수 귀빈들에 한해서라지만 계모는 기생집 딸년이란 것을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냐고, 손님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계모가 유일하게 손님들 앞에서 연주를 허락하는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 같은 날.

    제일 먼저 전해져 온 건 귀를 끌어내리는 중후한 울림이었다. 마음까지 눌러 밀어 내리는 음정은 고요하고 그 슬픈 가락을 닮아 있었다.

    봄날에, 백련이 흐드러진 누각 위에 앉아 꽃같이 화사한 한복을 차려 입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해수는 아름다웠다.

    정종을 기울이며 감탄하는 일본 총리 옆에 주양이 앉아 있었다.

    한신가의 후계자.

    외모, 인성, 능력. 게다가 여성편력 전무한 젠틀맨.

    모든 면에서 퍼팩트한 남자는 미혼인 재벌가 딸들에게 1순위로 꼽히는 신랑감이었다.

    계모마저 그를 탐낼 정도로.

    미모가 출중한 해수는 계모에게 큰 재벌가 사돈이 되는 야망을 꿈꾸게 했다.

    ‘해수가 마음만 먹으면 남자 후리는 건 일도 아니야…….’푸른 나뭇결이었다. 따뜻한 초봄, 매향이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휘날렸다.

    ‘진 이사라고 별 수 있겠어? 예쁘고 여우같은 년한테 홀딱 빠지겠지.’햇살을 피하기 위해 전모를 머리에 쓴 해수는 오늘따라 더욱 희고 고왔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흰 너울이 그녀를 면사를 쓴 순백의 신부로 보이게 했다.

    매끄러운 눈썹과, 깊은 눈매. 오뚝한 콧날. 입술……

    문득, 해수와 주양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모름지기 대어를 낚으려면 오래오래 때를 달여야 해. 낚시란 시간과 정성의 싸움이지. 난 알아. 아닌 척 내숭 떨지만 그 계집애…… 언젠가 저 진 이사, 낼름 집어삼킬 거야.’영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주양의 무심했던 눈이 이례적으로 아름다운 해수에게 오래도록 박혔다.

    옆에 있는 총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솔직할 정도로 대담하게 몰두해오는 남자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저런 집중력을 발휘할까?

    저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는 어떤 기분일까.

    마음을 빼앗긴 채, 감춘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마음에, 꾹 누르고 있던 말이, 내내 입 안에서 맴돌았던 말이, 영원은 풍선처럼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줄곧.

    나는 너를……

    아니.

    나는 당신을……

    영원은 해수를 보는 주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건물을 돌아 나왔다.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에 눈물이 뺨을 적셨다.

    현실에서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왕자와 사랑에 빠질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같고, 샤워하다가 뒤로 자빠져 머리를 찧어 죽을 80만 1,923분의 1의 확률보다 10배는 어렵다.

    428만 9,652분의 1로 벼락 맞는 죽음을 두 번이나 반복해야 가능한 숫자.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현실의 신데렐라는 그냥 평생을 재를 뒤집어쓴 채 허드렛일을 하다 병에 걸려 죽을 뿐이다.

    “우욱…… 욱…….”영원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패배감에 턱이 달달 떨려왔다. 구역질이 났다.

    사람들은 어째서 저런 해수를 미워할 수 있냐고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영원에게서 잘못을 찾았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 자존심이 덜 다치든가. 그저 너는 자매의 그늘에 짓눌려, 열등감에 몸부림치는 한심한 여자일 뿐이야…….’지적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심장이 문드러질 만큼.

    그러나 용서 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어질 때마다 해수는 지켜본 것처럼 영원의 것을 하나씩 앗아갔다.

    신해수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사랑을 받을 수도,

    꿈꿔서도 안 된다.

    매순간, 진저리나도록 신해수는 확실히 깨닫게 해줬다.

    “흐으. 윽……하……, 하아…….”자매라는 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제일 먼저 축하해주다가도 누구보다 배 아파하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관계.

    자신보다 더 월등한 자매를,

    매일,

    매시,

    매분,

    매초,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야 하는 삶은 지옥이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해수는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았다.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도 상냥했고 똑똑하고, 모두가 그 애를 칭찬했다.

    그러니 모두가 사랑하는 그 애를 죽이고 싶을 만큼 질투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도 되는 게 아니겠냐고.

    영원은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에 더, 해수를 마음껏 미워하도록 스스로를 놔두기로 했다.

    *

    기와집 구석에서 울다가 영원은 핼쑥하게 일어섰다.

    중간에 일하다 말고 나왔으니 동료가 매니저한테 꼰질렀을 것이다. 매니저는 계모의 충성스런 개였다.

    일자리를 잘릴 수 없어 수돗가에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았다.

    립글로스를 바르며 걸음을 서두르는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지금 우리 회사가 대산물산에 보유한 지분율이 어떻게 됩니까. 국민연금 쪽도 손을 떼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습니다.”전화로 상대에게 지시하며 남자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주식 매각하세요.” 숨 막히는 운명처럼, 진주양이 눈앞에 있다.

    이 상황을 어떤 형용사로 해석해야 하는지, 영원은 아득해졌다.

    전화를 끊고 진주양은 숨이 조금 거칠었다.

    ‘어딘가 아픈 걸까?’비틀거린 그가 불식간에 쓰러졌다. 영원은 곧바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깨어나서 자신을 보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영원은 겁이 났다.

    하지만 깨어나서 영원을 봐야 할 그는 여전히 잔디에 쓰러져 있었다.

    누추한 장소에서는 신발도 벗어보지 않았을 남자였다.

    평소 그가 고집하던 완벽성은 칼 같은 옷매무새에서 나왔다.

    형편없이 구겨진 나폴리 정장은 그가 지금 정신적으로 얼마나 흐트러졌는지 보여주었다.

    영원이 깜짝 놀라서 그에게 달려갔다.

    “이, 이봐. 괜찮아?”시체 같이 팔이 늘어졌다. 파리한 안색.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손은 허공을 헤매었다. 현실자각이 흐릿해졌다 돌아왔다.

    영원은 덜컥, 겁이 났다.

    “이, 일어나. 주…… 죽지 마. 죽지 마!”머리가 유아기로 퇴행해 버렸다. 끝없이 아득해졌다.

    “왜 그래……. 눈 떠봐!”영원은 재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런 걸 본 적이 있었다. TV에서였다.

    호흡곤란. 호흡곤란.

    비상한 기억력으로 영원은 응급처치 방법을 떠올렸다. 사진기로 찍은 듯 영상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었다.

    영원은 옷을 풀었다.

    타이를 아래까지 끌어내리고, 흉부를 압박하고 있는 셔츠를 풀어헤쳤다.

    숨 쉬기 편한 환경을 만든 다음, 턱을 바로 세워 기도를 열었다.

    그의 가슴을 몇 번 누르고 영원은 그대로 인공호흡을 했다.

    들숨과 날숨이 한데 섞였다.

    영원은 정성을 다해 숨을 불어넣었다.

    영원의 숨이 그의 숨이 되었고, 그의 숨이 영원에게로 옮겨왔다.

    애정 어린 키스 같았다. 그가 안정을 찾았을 쯤 영원은 여운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

    Rrrrrr- Rrrrrr-

    주양의 휴대전화가 울려댔다. 받으면 누구냐고 물을 것 같아 건드리지도 않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소리가 이 근처에서 들리는데?”그가 돌아오지 않으니 수행원들이 나선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영원은 도망쳐버렸다. 힘 풀린 다리를 움직여 그곳을 벗어났다.

    ‘아, 내 신발.’흘리고 온 구두 한 짝을 주워가려 했지만 사람들이 이미 잔뜩 와 있었다. 돌아갈 수 없었다.

    영원은 안절부절 하다가 건물 뒤편으로 도망쳤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영원은 한숨도 자지 못해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민국 최고 의료진이 주치의인데 살았겠지?

    그와 키스를 했다…… 어쨌든 그건 키스였어…….

    이대로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대도 덜 아플 것 같았다.

    어차피 그와의 인연은 몰래 훔쳐보는 것 이상으로 진전될 수 없을 테니까.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직원실은 무언가로 들썩이고 있었다.

    영원이 개량한복 저고리에 팔을 끼워 넣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어제 왕자가 우리 음식 먹고 쓰러졌대.”“설마 후계구도를 둔 친족 간의 독살?”“미쳤냐.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새로 온 주방 스태프 실수래. 피해야 할 재료를 넣었대. 급성 알레르기 쇼크로 죽을 뻔한 거야.”“살았대?”“어.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다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귀는 그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왕자가 사람을 찾고 있대. 어제, 오후에 2~3시쯤 혼교정을 지나갔던 여직원 중에 구두 한 짝을 분실한 여자래.”털썩. 영원은 그대로 저고리를 놓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영원에게로 몰렸다. 등줄기로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하여튼 신영원 산통 깨는데 재주는. 뭐야, 그래서?”다들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죽을 뻔한 상태에서 쓰러졌어. 근데 구두를 잃어버린 여자를 찾고 있어. 이게 뭐겠어.”다들 합창했다. 뭔데!

    “신데렐라지의 유리구두지!”“신데렐라?”“왕자가 생명의 은인을 찾고 있는 거야!”와…… 로맨스 소설 같다! 다들 눈이 별처럼 빛났다.

    영원은 로커 아래 칸을 봤다.

    어제 잃어버리고 처량한 외기러기 신세가 된 자신의 신발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원은 로커 문을 쾅! 닫았다.

    누가 볼까 자물쇠로 꼭꼭 잠그니 현실감이 밀려왔다.

    아…… 나 이제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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