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누더기를 입은 하녀2016.07.17.
넌 누더기 입은 하녀야.
그래서 ‘신데렐라’라고 부른다.
[영화 신데렐라 中]
-5년 전, 영원 22세
털썩-
발치에 빨랫감이 던져졌다.
“깨끗하게 빨아 놔. 핏물 남기지 말고.”계모가 던져놓고 간 이불을 영원은 익숙하게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딸들의 생리 혈이 묻은 이불이었다.
마당으로 나가자 하얗게 입김이 일었다. 계모는 찬물에 빨아야 피가 더 잘 빠진다며 한겨울에 바깥에서 이불 빨래를 시켰다.
영원 22세.
그들의 ‘하녀’였다.
허드렛일은 일상이었고, 손이 부르트도록 집안일을 했지만 아프고 힘들다고 운 적은 없었다.
그런 여유조차 영원에겐 사치였다.
한겨울에 마당에서 언 이불을 빨고 있던 영원은 문득, 뺨에 닿는 차가운 기척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늘에서 흰 눈이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희디흰, 깨끗한 눈이었다.
산더미처럼 빨래를 쌓아놓은 그녀의 비참한 삶과는 상관없이 눈은 평화롭고 적요했다.
한 번도 두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그 겨울 예상치 못하게도, 마음까지 청결시켜주는 백색 결정…….
그 깨끗한 눈을 보며, 영원은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느 동화에서나 그러하듯, 계모는 처음엔 다 착하고 상냥하다.
친모가 병에 걸리고, 아버지가 계모와 두 딸을 백운당에 데려왔다.
혜란은 처음엔 아픈 엄마를 대신해 영원을 돌봐줄 가정 교사였다.
일찍이 남편을 잃은 과부로, 혜란은 청상이 되기엔 너무나도 젊고 싱그러웠다.
‘네가 영원이구나. 반갑다.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아름다움이 불길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계모와 재혼을 했다. 여름휴가처럼 짧고 행복했던 시기였다. 죽은 친모를 잊을 만큼.
첫 만남에 느낀 불길함과 다르게 계모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워주었고 영원은 계모를 사랑했다.
그것이 행복했던 유년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가 실족사로 돌아가신 후, 백운당의 사장 자리를 꿰찬 계모는 본색을 드러냈다.
어느 동화에서나 그러하듯 계모는 의붓딸을 미워한다.
영원 17세.
“동튼 후엔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 했을 텐데. 특히 얼굴에 멍들었을 때. 네가 그 꼴로 돌아다니면 직원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니.”계모는 너른 사장실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영원은 뒤에서 그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그녀가 영원 앞에서 등을 보였을 때,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날카롭게 뻗은 손가락에서 굵은 옥가락지를 하나씩 하나씩 빼내며 생각에 잠기는 것.
영원을 벌세우듯 세워놓고 가만히 고민하는 것.
움켜쥔 주먹 아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누가 보면 내가 딸을 매일 밤 두들겨 패기라도 하는 줄 알 거 아냐.”말을 끊어내는 계모의 목소리가 몹시 상냥해서 때가 왔음을 확신했다.
사장실은 백운당에서 최고로 보안이 잘되어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르는 곳.
그 방은 특히 방음이 제일 잘되어 있는데, 그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너 참 이상한 버릇 있어. 왜 얘기할 때 사람 눈을 똑바로 안 봐?”“…….”“너 내가 재취라고 무시하는 거니?”놀라서 올려다봤다가 손바닥이 곧장 뺨을 그대로 가르고 들어왔다.
짜악??? !
영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휘청거리던 찰나, 다시 다른 쪽 뺨을 쓸고 지나갔다.
짜악??? !
닥치는 대로 후려쳐진다. 짜악?? ! 짜악?? !
휘둘린 영원의 몸뚱이가 바닥에 엎어졌다.
투, 두둑, 영원이 고개를 들었다. 굵은 핏덩이가 나무 바닥에 엉겨 붙었다. 검은 코피였다.
헉. 헉. 헉.
“일어나.”비틀거리는 몸이 만신창이었다.
“봐, 똑바로.”억센 계모의 손아귀에 영원은 앞머리가 틀어 잡혔다.
공포에 질린 검은 눈동자에 집어삼킬 듯, 흉포한 얼굴이 가깝게 맞대어진다.
“날 봐.” 사장실 보안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 방은, 체벌방으로 불렸다.
“이 집에서 내 말은 곧 법이야.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혼나야 해. 또다시 그 꼴로 돌아다닐래, 안 돌아다닐래.”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고 진실을 깨달았을 땐 치욕스러웠다. 죽고 싶을 때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더 쉬워졌다.
방울방울 맺혔던 물기가 이내, 영원의 뺨을 가르고 추락했다.
“제, 제가 사람들한테 보여지는 게 싫으면, 저를, 가둬두면 되잖아요.” 겁에 질려 달달 떨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에, 계모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슬프게도,
“이래서 내가 널 예뻐해.”“…….”“나를 아주…… 더러운 계모로 만들거든.”영원은 머리채를 잡혀 짐짝처럼 질질 끌려갔다.
온갖 허드렛일과, 구박과, 학대를 견디는 동안 백운당 아가씨로 자란 밝고 예뻤던 소녀는 죽었다.
영원은 점차 어두워졌고, 세상은 피로 얼룩져 보였으며 인간을 향한 경계와 공포심으로 가득했다.
누구든 눈을 직접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영원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루한 옷, 길게 산발된 머리카락, 귀신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는 우중충함.
그 머리카락 사이로 부릅뜬 눈동자.
아랫마을 아이들은 그녀에게 돌을 집어던졌다.
‘죽어라! 귀신은 죽어라! 웩 완전 혐오스러워!’인간은 치사한 종자들이라 멍청하게 굴수록 야비한 이빨을 드러냈다. 영원은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괴팍하게 행동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자신에게.
‘망할 애새끼들! 죽어볼래!’‘으아악! 귀신이 폭주한다!’ 알고 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리는지.
백운당에는 괴물이 산다지.
하나는 <말을 하는 꽃>이고, 다른 하나는 <얼굴이 없는 귀신>이었다.
‘얼굴 없는 귀신’은 재투성이 백운당 셋째 딸 영원을 가리켰다.
‘말을 하는 꽃’은…….
계모에게 맞고 다락방에 갇혔다 나온 지 3일째 되던 날, 아랫마을 논길에서 해수를 마주쳤다.
명문 여고를 다니는 해수는 일대 고교에서 얼짱으로 통했다.
그녀를 집까지 따라오는 남학생들은 자주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이번 주말에 뭐할 거야? 시내 나가서 우리 놀래?” 해수는 언제나 우아하며, 고매한 성정으로 남자애들을 차단했다.
“가족들하고 봉사활동 갈 거예요.”물론 거짓말이지만.
“언니랑 여동생 있다고 했지? 여동생이 동갑이라고 했나? 쌍둥이야? 일란성? 이란성?” 그때 마주 오던 영원을 발견한 해수가 멈췄다. 남자애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네 동생, 내 친구 소개시켜줘라. 해수 널 꼭 닮았겠지?”곧 해수가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남학생이 시선을 옮겼다. 눈앞에 있는 영원을 발견하고 제 자리에서 굳었다.
양산을 쓴 해수가 조심스레 영원에게 다가왔다. 꽃 자수가 입혀져 있는 사랑스러운 양산 아래에 감춰져 있는 얼굴선은 아름다웠다.
“오늘…… 나온 거야?”죄책감이 뒤엉킨 물음.
영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엄마를 막아보려 하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누구야, 이 여자?”남학생이 끼어들었다.
“몸 아직 안 나았을 텐데 막 돌아다녀도 돼?”“해수야. 아는…… 여자야?”“노 집사가 밥은 챙겨줬고?”“해수야. 이런 여자하고 말 섞지 마.”“내 여동생이에요! 선배, 이만 집에 가세요.”신해수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여동생. 그 말에 남자애는 흠칫, 뒷걸음쳤다.
일그러진 눈가가 명백한 경멸감은 담고 영원을 보았다.
눈에 깃든 혐오감, 경멸, 경악.
해수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을 보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취급이었다.
‘말을 하는 꽃’은 계모가 데리고 온 아리따운 둘째 딸이자 영원의 새언니 해수를 일컫는 말이었다.
꽃으로 불리는 자매와 귀신으로 불리는 다른 자매라니.
남자들은 해수의 아름다운 얼굴과 꾀꼬리 같은 목소리, 그보다 더 사려 깊은 마음에 매료되었다.
신해수라는 여자가 빛날수록 그 옆에 짱돌처럼 박힌 영원은 어둠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17살. 동갑내기 의붓자매란 그렇다.
한쪽이 빛날수록 한쪽은 비참해진다.
신해수가 잘나갈수록 그녀의 미덕을 드높이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사람처럼 영원은 항상 비교 대상에 놓였다.
‘같은 자매인데 어쩜 이렇게 달라? 아무리 의붓이라도 그렇지.’‘해수는 상냥하기도 하지. 영원이 넌 애가 왜 이렇게 못돼 처먹었니?’‘해수는 결혼을 해도 사랑받고 살 팔자야. 어이구. 도대체 영원이 쟤를 누가 데려갈지 걱정이다.’‘해수 누나. 동생이 있다고요? 나 좀 소개시켜줘요. 누나를 꼭 닮았겠죠? 엑? 저 여자가 동생이라고요?’예쁜 언니 밑에서 주눅이 들어 사는 동생의 삶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특수하지도 않기에 누구에게 제대로 위로 받지도 못한다.
언니의 험담을 털어놓아도 속이 좁다, 질투를 한다, 라며 도리어 언니 쪽의 호감도를 상승시켰다.
“조금 있으면 저녁 될 텐데 어디 가려고?”해수는 영원을 걱정해서 물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영원은 해수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저기, 해수야. 아까 동생 소개시켜달란 말은 취소할게.” “왜요? 내 동생이 어디가 어때서요? 영원아!”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르는 척 뛰어갔다.
해수의 상냥함은 영원을 비참하게 했다. 해수가 영원을 동정할수록 영원의 비루함이 더욱 신랄하게 까발려졌다.
신해수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22살이 되어도 변하는 건 없다.
영원은 여전히 그들의 하녀로, 계모의 샌드백으로, 그 딸들의 생리혈이 묻은 이불까지 빨아주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당에서 이불 빨래를 하는데 콧잔등에 기척도 없이 작은 것은 내려앉았다.
첫눈은 그렇게 불시에 영원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사가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백운당은 밤에도 성황이었다.
띵. 띠링- 띵띵. 가야금과 비파의 줄 타는 소리에 이어 손님들을 접대하는 기생들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중정 밖까지 새어나왔다.
그 화려함에 어울리지 않게 영원은 거지같은 허름한 차림이었다.
숱을 치지 않아 두터워진 더벅머리, 걸인처럼 기와집들을 지나치는데 기생들이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갔다.
“한신그룹 손자라며? 대산물산 김 회장이 요즘 자주 데리고 오는 그 남자.”“28살인데, 미국 와튼 스쿨에서 경영자 과정 따고 이제부터 일선에 참가하게 됐대. 김 회장이 사위 삼고 싶어서 아주 혀 안의 사탕처럼 모시는데, 못 봐주겠더라.”“아, 그 막내딸?”“뚜쟁이들 신바람 나게 생겼어.”“그 정도야?”“손자가 있다고 했지 그런 완전체일 줄 누가 알았나. 한신가라고 하면, 코 옆에 털 달린 점 있어도 재벌가 딸들이 줄을 설 텐데, 외모의 문제가 아니야. 아우라가……!” “다른 재벌 3,4세들하곤 차원이 다르다고?” “왜 한신, 한신 하는지 알겠더라. 품격이, 클래스가 달라.”“그래봐야 사내놈들 본질은 다 똑같지. 오늘 내가 호텔로 데려간다. 내기할래? 크리스마스이브에 누가 그 남자랑 뜨거운 밤을 보낼지.”하하하.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영원은 죽음을 결심했다.
퍼렇게 멍든 목덜미…… 초점을 잃은 눈동자.
흐르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안 한 채, 광적으로 흙을 파는데 집중했다.
문드러진 손톱에서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언 땅을 파헤치고 파헤쳤다.
“허억…… 허억…….”계모의 폭력이 극에 달했고 괴로움은 더 이상 이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극단으로 영원을 몰아갔다.
매일 같이 고스란히 계모의 분노가 퍼부어진 몸은 피멍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계모는 이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은 때리지 않았다. 대신 안 보이는 곳을 공략했다.
머리를 찧으면서 콧속이 찢어진 걸까. 코피가 멈추질 않았다.
저금통이 흙 속에서 차츰 모습을 드러내었다. ‘살기 위해서’ 모은 돈이었지만 ‘죽기 위해’ 쓰게 되었다.
철제 저금통에 동전 소리가 짤그랑거렸다. 계모 몰래 조금씩 모아둔, 푼돈들이었다. 채 10만 원이 못 된다.
하지만 농약을 사기엔 충분했다.
“아이참. 회장님! 의원님! 좀 더 놀다 가셔요!”별채에서 손님들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영원은 조경수 뒤에 숨었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소란이 잦아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거기서 그 남자를 만났다.
……
삶의 최후의 순간에.
영원은 주저앉았다. 아직 떠나지 않은 손님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손에 든 철제함이 덜덜 떨렸다. 계모에게 여기 있는 것을 들키면 죽는다.
마지막까지 계모 손에 죽기는 싫었다.
영원은 손님이 어서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무관심하게 지나쳐주기를.
느긋하고 자애로운 발소리였다.
뚜벅. 뚜벅.
뛰는 법을 모르는, 전형적인 권력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는 자들의 걸음 소리였다.
그들은 한없이 느긋했고, 지극히 자애로웠다.
그리고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냈다.
“사장님. 가신 줄 알았어요.”기생 하나가 남자가 나오길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티 나게 그에게 접근했다.
“일행 분들은 벌써 떠나셨지 뭐예요. 정말 뭐가 그렇게들 급하신 건지. 가족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사장님은 제 마음 이해하시죠?”기생이 남자에게 몸을 밀착 지분대었다.
“역시 솔로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엔 널널하죠.”은근한 유혹이었다. 돈맛을 본 기생들 중 간혹 대놓고 스폰을 요구하는 애들이 있었다.
여자들이 일반 취업을 포기하고 이곳을 선택하는 이유는 오롯이 돈과 야망 때문이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아직 아닙니다.”“예? 뭐가요?”“아직 사장이 아닙니다.”기생이 입을 가리고 와하하 웃었다.
“어머 숫기 너무 없으시다. 회장 손자면 자기 거나 마찬가지지. 에이. 어차피 나중에 사장 명찰 받으실 거면서.”“하지만 아직은 아니죠.” 완고한 어조에 해사하게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기생이 굳었다.
남자는 무기질같이 감정이 없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콧날과 턱선을 이루는 조각 같은 날카로움은 영하 5도의 추위와 더불어 섬뜩함을 더했다.
그가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는 단어를 되씹었다.
“아직은.”충족되지 않은 야망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생을 세워두었던 남자가 다시 움직였다.
앞장서는 그를 기생이 꼴사납게 뒤따라갔다. 놓치기 아까운 거물인가.
“이제 저녁 8시인데. 집에 가서 뭐하세요?” 남자는 묵묵히 걸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맨가슴으로 보내기 아깝지 않으세요?”“…….”“의원님께서 오늘 밤 잘 모시라고 보너스까지 찔러주시고 가셨는데.”현저히 느려진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조경수 아래에 엎드려 있던 영원은 식겁했다.
그녀 바로 앞에서였다.
영원을 발견하지 못한 기생이 눈꼬리를 접으며 저고리 사이에서 흰 봉부를 꺼내 보였다.
“신신당부 하셨어요. 잘 모셔야 된다고요.” “…….”“이대로 가시면 제가 혼나요.”심장이 벌렁거렸다. 영원은 둘이 빨리 용건을 마치고 사라져줬으면 했다.
“혹시, 제가 술을 따르는 여자라 눈에 차지 않으신 건가요? 말이 통하지 않는 게 걱정이시라면 염려 마세요. 김 회장님 외국 바이어 접대 때 제가 계약을 성사시킨 적도 있으니까요.”기생이라고 부르지만 백운당의 그녀들은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엘리트들이었다.
일류를 지향하는 백운당에 찾아오는 손님들 또한 기본적으로 상당한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말상대가 가능할 정도의 지성을 갖춘 명문대 스펙은 기본이었다. 잠깐 노는데 파트너로 안성맞춤이다.
비뚜름하게 남자가 입술을 치켜들었다.
“걱정하는 얼굴로 보입니까?”비일비재한 일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인사들은 재력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왕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여자를 사는 것쯤이야.
기생의 얼굴이 단박에 화사해졌다.
“그럼…….”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게 아니죠. 남녀가 단둘이 있는데.”남자가 천천히 기생에게 접근했다. 몰이하듯 남자는 조경수로 기생을 밀어 넣었다.
“아……!”기생이 나무에 등허리를 부딪쳤다.
영원은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터지려 했다.
까슬한 한복 치맛단이 뺨을 간질일 정도로 그들과 가까웠다. 바로 나무 기둥 하나 간격이었다.
손을 얹은 남자가 기생과 눈을 얽었다.
“말해야 할 때를 빼고 난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이 왜 필요하겠어요?”입술 맞대는 일에…… 홀린 듯 기생이 입술을 내주었다.
두 남녀의 은밀함이 얽혔다. 영원은 혼몽하게 그걸 보다가 저금통을 챙겼다.
황망한 마음에 팔이 수전증 환자처럼 떨리는데 순간 굳었다.
정수리에 섬뜩한 위화감이 흘러들었다.
남자가 기생 어깨 너머로 영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키스를 하면서.
가만히 서 있는데 전속력으로 버스가 돌진해오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시선은 몹시 위험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에 머릿속에 경고등이 빨갛게 찢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간신히 바닥에 흩어진 이성을 주워 담고 달아나려는데, 그가 영원에게 손을 뻗었다.
읏. 머리카락이 세게 움켜잡혀 얼굴이 끌려갔다.
그는 그들 앞에 영원을 끌어다놓고 행위를 지켜보게 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에 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싫……!”소리를 듣고 기생이 눈을 뜨려 했다. 그가 여자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기생이 몸을 뒤틀며 신음했다.
그가 영원을 내려다봤다. 직선으로 박히는 눈동자.
남자는 느긋한 눈빛과 달리 안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히스테릭한 집단 난교 속에 갇혀 있는 배덕감이 영원을 몰락시켰다.
쿵. 심장이 추락했다.
충격적이며 대단히 부도덕한 남자는 손끝으로 영원의 눈, 코, 입술 언저리를 확인하며 만져댔고, 생채기가 터진 입술을 부드럽게 엄지로 쓸어내렸다.
아득한 감촉에 옴짝달싹할 수 없다.
아아……! 입을 섞고 있던 기생이 화음을 넣듯 신음했다.
영원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생긴 마스크, 값비싼 옷과 구두, 대담한 성적 욕망까지.
남자가 발하는 섹슈얼한 향수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신사의 탈을 쓰고, 헐벗은 영혼들을 기만하기 위해 휘둘러지는 ‘폭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