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3화 (3/83)
  • 3화. 실종 5일째 <1>2016.07.14.

    -실종 5일째

    환각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위로 늙은 무당의 표정이 꿈결 같았다.

    녹취를 담으며 레코더가 느릿느릿 돌아갔다.

    “신이 노한 거야. 이 마을에 곧 재앙이 닥칠 거야.”칠십 먹었다는 늙은 무당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이날 이때껏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백내장이 낀 오른 눈이 기괴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무당은 온몸으로 두려움을 내뿜고 있었다.

    “저 나무가…… 작년에 벼락을 맞았어.”“…….”“1년만 더 있으면 천 년을 채울 텐데.”“…….”“그걸 못 채우고 벼락을 맞아 두 쪽이 났다고.” 백운당이 위치한 마을 언덕배기, 불길처럼 번져가는 노을이 야성적이었다.

    그 옆으로 노랗고 빨간 천들이 여인네의 머리카락처럼 흩날렸다.

    굽이치듯 가지가 뻗친 당산나무는 검은 그림자처럼 우뚝 서 있었다.

    과거에 마을의 두려움이자 수호의 대상이었던 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거대한 당산나무는 찢어진 종잇장처럼 두 갈래가 되어 한쪽 줄기가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천 년을 기다렸는데. 천 년을.” 무당이 생각의 끝자락을 더듬으며, 나무를 불길하게 주시했다.

    “백운당에 대해서 뭐 이상한 소문 들은 건 없나요?”수진의 물음에 질게 찢어진 무당의 눈이 음습하게 젖어들었다.

    “이상한 소문?”아직 잃지 않은 신력이 날선 듯 다가왔다.

    “원래 폭풍 전야가 더 조용한 법이지.”

    .

    .

    .

    수진이 녹취를 마치고 자동차로 돌아왔을 때, 장 경감은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발아래에는 이미 여러 개의 꽁초가 흩어져 있었다.

    “아예, 그럼요. 다음 주까지 밀린 병원비는 납부할게요. 아는데, 제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아니,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그럼 눈도 못 뜨는 애를 바깥으로 내쫒는다는 거야?! 뭐야? 야, 이 새끼야! 넌 딸린 처자식도 없냐!” 전화를 끊은 장 경감이 애꿎은 휴대폰을 집어던지려다 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괜히 민망해서 그는 산뜻하게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어, 다 끝냈어?”  “원무과에서 또 병원비 독촉전화 왔습니까?” 한심하다는 눈빛을 한 수진이 봉고에 올랐다.

    “그러니까, 한신그룹 의뢰 받자니까요? 뭐가 문젠데요. 애 병원비는 마련해야 할 거 아녜요. 소장님도 미련 남으니까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닙니까. 남자가 말이야. 한 방이 없어 한 방이……! 아무리 젠틀한 사람이라지만 재벌이라구요. 이런 식으로 자기 뒤캐고 다니는 거 알면 무섭게 화낼걸요?”장 경감은 그날 주양의 위험한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단칼은 아니었다.

    ‘시간을……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장 경감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경찰이 신부를 찾지 못하게 해달라니.

    그는 침을 꿀컥 삼켰다.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사실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진주양의 면전에서 못 하겠다고 하자니 말이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직까지도 뚜렷한 답변을 주지 못한 상태다.

    막연히 의뢰를 받아들이기엔 부탁하는 내용이 몹시 수상쩍었고, 놓치기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너무나도 아까운 액수였다.

    평생을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그러나 별채 객실을 빠져나오기 직전, 진주양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장 경감이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불현듯 주양의 음성이 읊조려졌다.

    ‘45분입니다.’‘…….’‘제가 경감님 기다리는 데 허비한 시간.’진주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고 장 경감은 과장되게 뒷머리를 쓸었다. 수진과 한신호텔을 살피고 오느라 약속시간에 늦었다.

    ‘이거, 결례를 범했습니다. 원래 작업 특성상 현장 조사를 먼저 하는 게 관례…….’‘경감님 덕분에 오랜만에 쉬어봤습니다.’ 장 경감은 멍해졌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저에 대해 잘 모르셔서 이런 우를 범하신 것 같은데…….’ 주양이 인간미 없는 눈동자를 들어 소름끼치게 장 경감에게 박았다.

    장 경감은 순간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다음부터는 시간 약속.’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또박또박 경고를 새겨놓는다.

    ‘깔끔하게 지켜주세요.’ 화 한번 안 내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무서웠다. 10살도 넘게 어린 놈한테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이 치욕스러웠다.

    뜨끔해진 명치를 쓸며 장 경감은 수진을 보았다. 젠틀이라니. 그저 웃음만 났다.

    “젠틀?”“…….”“그래, 젠틀을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고 있긴 하더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되는 부류가 있다.

    사람을 죽인 인간.

    권력을 가진 인간.

    진주양은 권력을 가진 살인마였다.

    막연히 의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

    백운당은 산새에 둘러싸인 요새였다. 그 아래에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 있었다.

    장 경감이 수진과 낮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김매기가 한창이었다.

    챙 모자에 수건을 두른 동네 아낙들이 파릇한 논에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백운당의 사장 최혜란의 본가는 아랫마을과 인접하면서 백운당 뒤편인 아주 몫 좋은 자리에 위치했다.

    마을의 지주이자 가장 부유한 가정집이 최 사장의 댁이라는 것쯤은 동네 사람한테 물어물어 알 수 있었다.

    개량한복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은 외지인이 묻는 말에 쉬쉬했다. 진술들은 동네 주민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확실히 소장님 말대로 수상하긴 합니다. 이 바닥 생활 오래하다 보면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차 안에 앉아 수진이 녹음기를 눌렀다. 아줌마들의 수다였다.

    ‘한신그룹 사돈집에 줄 대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이 넘어. 뉴스에서나 보는 정치인이고 굴지의 대기업 마나님들까지 행차하시는데, 언제는 기생집이라고 무시하더니 굽실대는 꼴이 가관이었지, 아마.’‘딸장사 한번 기가 막히게 하더니 팔자 핀 것 좀 봐. 최혜란이가 저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어?’‘유부남 후려서 거기 조강지처 밀어내고 들어앉더니 이젠 상전이 따로 없어. 참, 해수 얘기가 듣고 싶다 했지? 왜? 둘이 뭔 문제 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둘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그럼. 결혼식 전날까지만 해도 해수랑 신랑 될 사람하고 팔짱끼고 산책했는데. 둘이 사이좋았다는 건 여기 사람들 다 안다.’‘서울서 온 양반이 매일 같이 해수하고 마을을 산책했지. 두 사람 얼마나 보기가 좋던지 매일 붙어 다녔는데…….’뜻밖에도 신해수와 진주양의 사이가 너무도 좋았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장 경감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렇게 사이가 좋았던 연인이 왜 한 명은 결혼식 직전 사라지고, 또 다른 한 명은 사라진 연인을 찾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을까.

    이래서는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 역시 헛다리인지도 모른다.

    진주양이 신부인 신해수를 찾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도, 그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남녀 관계엔 제3자가 알 수 없는 변수가 많다.

    그 뒤로는 아줌마들의 시답잖은 수다가 지겹게 이어졌다.

    흘려듣듯 집중하던 그때였다.

    문득 장 경감이 수진을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수진이 눈치껏 녹음기를 되감기 했다. 동네 여편네들의 무성의한 음성이 흘렀다.

    ‘걔가 좀 이상한 애인기라……. 제 언니, 해수 남편 될 사람은 그리 쫒아댕겼제.’외부 소리까지 같이 녹음된 목소리는 음질이 현저히 낮았다. 장 경감은 더욱더 소리에 집중했다.

    ‘그것 때문에 집도 나갔다니까. 가출을 해서 한동안 걔 찾는다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지.’‘걔가 짝사랑하다 미쳐서 기어이 지금 정신병원에 갔지, 아마?’‘걔가 양혜랑 말 섞는 것 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왜, 꽃 달고 다니는 양재슈퍼 집 손녀 딸. 확실히, 미친년들은 미친년들끼리 통하는 게 있다니까.’장 경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들은 아까부터 누군지는 밝히지 않은 채 ‘걔’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울서 온 그 양반은 해수밖에 몰랐지.’‘둘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눈 꼴 시려서. 껌 딱지처럼 맨날 붙어 다녔다니까. 그나저나 걔 이름이 뭐였더라. 신…… 신…… 혜원?’‘아니야. 신…… 신…… 영.’음성은 그것이 끝이었다.

    “뭐야, 저거!” 장 경감과 수진이 동시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형 스타렉스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에라이! 망할 놈의 똥차!”수진은 스타렉스 바퀴를 차면서 욕을 했다. 덜덜거리더니 결국 엔진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견인차를 불렀지만 기사가 길치인지 위치를 찾지 못했다.

    수진이 큰 길로 기사를 마중 나간 동안 장 경감은 생수를 사러 동네 슈퍼로 향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멈이 가게를 뛰쳐나오더니 누군가를 찾아댔다.

    “아휴! 이 망할 지지배는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여! 싸돌아 댕기다 또 어떤 놈한테 험한 꼴 당하려고!”할멈은 장 경감을 지나쳐 다급하게 마을 안으로 사라졌다.

    할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곤혹스러운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등에 닿았다.

    “골치 아프겠어. 탐문은 펼치겠지만 낮말은 쥐도 듣는 법이야. 이대로 시간 질질 끌다 기사라도 터지면…….”  “왜 초장부터 초를 칩니까. 가뜩이나 그것 때문에 현 과장 날 서서 우릴 얼마나 들볶는데.”젊은 남자 둘이 장 경감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신그룹 신부 실종 사건> 담당 형사들이었다.

    염병! 장 경감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슈퍼 안 매대 뒤에 숨었다.

    그와 안면식이 있는 형사들이었다.

    흥신소 사람이 주변을 얼쩡거리는 걸 알면 의심할 것이다.

    “여기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젊은 형사들은 주인이 없는 걸 확인하고 슈퍼 파라솔에 엉덩이를 붙였다.

    장 경감은 몸을 낮추고 그들이 떠나길 기다렸다.

    엿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참 형사가 땀에 젖은 양말을 털어내며 말했다.

    “결혼식 직전에 신부가 도망을 쳤으니, 한신의 황태자께서 체면이 말이 아니겠습니다. 결혼하기 싫어서 제 발로 걸어 나간 모습이 CCTV에 제대로 찍혔는데, 어쩌겠어요?” “동화 속 왕자님이라며. 대한민국 최고 신랑감을 두고 어딜?”“남녀 사이는 누구도 모르는 법이죠. 다른 남자 있는 걸까요?”“글쎄.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근데, 현 과장은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쏘간 거냐.” 들려오는 익숙한 성에 장 경감은 멈칫했다.

    “현 과장님은 잠깐 파주 쪽에 내려가셨어요.”“파주?”“아 왜, 있잖습니까. 정신병원에 있다던 셋째 딸.” 장 경감은 비웃었다.

    현 과장. 현기영 과장. 그는 <한신그룹 신부 실종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특수팀 책임자였다.

    그들은 동기이자 한때 라이벌이었다.

    재벌가 사건에 특수본 지휘까지 맡게 되었으니 아주 날아다니겠어, 현기영.

    정신병원엘 갔다고?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대단하시구만?

    이번 계기로 재벌가 눈에 단단히 들고 싶은 보지? 그럼, 그래야지. 단 한 명의 참고인도 놓쳐선 안 되지.

    설령 그게 정신병자라도 말이야.

    그러면서 장 경감은 쓴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열심히 땅이나 파라. 너의 그 동아줄이 되어줄 재벌 후계자께선 신부를 경찰이 절대로 못 찾게 해달라고 내게 친히 부탁까지 해오셨으니.

    근데 저 새끼들은 언제 가는 거야? 하는데 때마침 그들의 무전이 울렸다.

    오늘은 이만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참 형사가 다 피운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중얼거렸다.

    “근데…… 그 신랑 말입니다.”고참이 신참을 돌아봤다.

    “신랑? 신랑이 왜.”“만나보셨어요?”“하하. 야, 우리가 그 지체 높으신 양반을 어떻게 봐? 청장 말고 담당 지휘관인 현 과장도 아직 못 만났대.”“이상하지 않습니까?”장 경감의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리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참이 짜증을 피웠다.

    “도대체 뭐가?”“남편이잖아요. 남편인데.”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스산하고 서늘한 바람이 마주 보고 있는 두 형사들을 훑고 지나갔다.

    어린 형사의 눈동자에 이는 기묘한 떨림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정적이었다.

    “자기 신부가 실종됐는데 5일이 되는 동안, 한 번을 서로 안 찾아왔어요.”장 경감은 눈을 감았다.

    ‘경찰이, 신부를 찾지 못하게 해줘요.’그렇게 의뢰하던 진주양의 날선 얼굴이 또렷하게 박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것도 수상한 점이 없는데.

    자꾸 불어나는 의심의 뿌리가 심장 저변까지 손을 뻗었다.

    사랑하는 신부가 사라진 지금, 그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형사들이 떠나고 슈퍼 평상에 앉아 기다리는데 뭔가가 부스럭했다. 자판기 뒤에서였다.

    그의 눈에 하얀 각목이 들어왔다.

    아니, 희고 고운 다리였다.

    새까맣게 지저분해진 맨발을 한 여자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것 같은 그녀는 품에 무언가를 꼭 안고 있었다.

    청순한 하늘색 원피스는 어쩌질 못해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가 있었고, 흰 허벅지를 탐스럽게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이런 외딴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젊고 꽤 예쁘장했다.

    급히 누군가를 찾으러 가던 슈퍼 할멈이 뇌리에 스쳤다.

    그의 눈길이 여자의 귓등에 안착했다. 꽃을 귀에 꽂고 있는 여자를 보던 장 경감의 시선이 문득 슈퍼 간판으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양재슈퍼>

    ‘걔가 양혜랑 말 섞는 것 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왜, 꽃 달고 다니는 양재슈퍼 집 손녀딸. 확실히, 미친년들은 미친년들끼리 통하는 게 있다니까.’동네 여자들이 떠들어대던 슈퍼집 손녀이자, 이 구역의 미친년이었다.

    “아저씨, 거기 있지 마요. 이리 와요. 거기 있으면 나까지 들킨단 말이야!” 양혜가 장 경감의 옷을 꾸깃 잡아끌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절박한 손아귀 힘이었다.

    장 경감은 의도치 않게 그녀의 등 뒤에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녀는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두렵게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그렇게 물으며 장 경감은 저도 모르게 양혜의 시선을 쫓았다.

    해질녘, 저물어가는 마을은 불길하고 고요한 냄새를 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기묘한 위화감이었다. 낡은 전신주에 매달린 전깃줄들이 느슨해져서 미약하게 삐걱대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천천히 주먹 쥔 손아귀의 힘을 풀어내듯이, 바람은 축축하고 그을어가는 것처럼 들판을 쓸어 갔다.

    몸에 몸을 잇듯 긴 풀들은 옆으로 몸을 뉘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바람이 살갗 위로 솟구친 땀을 서늘하게 식혀주었다.

    그것을 보던 양혜가 입을 달싹였다.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짧게 부딪혔다.

    “그날도 그 남자와…… 함께였어.”장 경감의 눈길이 양혜에게 옮겨 붙였다.

    물결치는 들판을 쳐다보는 양혜의 초점이 혼몽했다.

    “그리고 언니는 당했지.”“당해?”“짐승 같은 놈이 언니를. 그때 나는 너무 무서워서…… 여기 꼭꼭 숨어 있었어.” “…….”“언니가…… 영원 언니가…….”장 경감은 ‘영원’이란 말에 주저했다.

    “영원? 정신병원에 있다는 신영원 말하는 거야?”신영원이 남자한테 성폭행을 당했다는 거야, 지금?

    “아아…… 언니는 이제는 자기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었던 거야. 붉은 태양은 사람을 미치게 해서…… 내가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도. 그에게 미쳐버린 나머지…… 말해버린 거야.” 그녀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장 경감은 마음이 급해졌다.

    “신영원이…… 뭘 말했다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또 그 남자는 누구고?”양혜가 정신을 잃을 것처럼 흐리멍덩해졌다.

    “이봐!”어깨를 잡아 흔드는 힘에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것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남녀 한 쌍의 바비 인형이었다.

    양혜는 가는 손끝으로 여자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인형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사랑해.”갑자기 쇳소리처럼 발음되어 나온 말에 장 경감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무한히 사랑한다고 속삭인 그녀는 남자와 여자 인형을 서로 마주 보게 했다.

    구애의 언어는 여자인형이 남자인형의 귀에 속삭이는 고백이었다.

    남자와 여자 인형이 밀착되었다. 두 얼굴이 가깝다.

    “언니가 사랑한다고 하면, 붉은 태양은 그럴 때마다 언니를 짐승처럼…….” 남자 인형의 고개가 여자인형에게로 수그려졌다.

    찌는 듯이 빨갛게 하늘에 번지는 붉은 노을.

    까 - 까 - 까- 까-

    까마귀가 짐스럽게 울어대는 순간, 장 경감은 붉어진 들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랑해…… 그 속삭임이 그의 귓가에까지 와 닿는 착각이 일었다.

    장 경감은 양혜가 줄곧 응시하고 있었던 들판을 바라봤다.

    차차 퍼즐이 맞춰지고 머릿속이 맑게 개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젠 장 경감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양혜의 말대로 정말로 있었다.

    잔상처럼 ‘그들은’ 들판 위에 서 있었다.

    ‘사랑해.’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을 했다.

    ‘당신도 날 사랑하지?’남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남자에게 그런 면이 있었을 거라고.

    백 마디 말 대신 남자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마음을 보여주었다.

    여자의 미끈한 뺨을 쓸어내리던 남자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 위에 내려졌다.

    느릿한 숨결. 붉은 혀가 유린하듯 여자의 안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이 엉켰다.

    숨 막히는 적요가 장 경감을 에워쌌다.

    이윽고,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다.

    *

    “이거 냉각수 고장이네. 아직 쓸 만하니까 폐차 말고 그냥 보험 처리 하세요.” 견인차 기사가 엔진을 살피더니 혀를 찼다.

    “어떡할 거예요?”수진이 장 경감에게 물었다. 그는 계속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소장님. ……소장님!”장 경감이 평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수진과 기사를 지나쳐 견인차로 걸어갔다.

    멋대로 견인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형씨. 잠깐 차 좀 빌립시다.”“예?”장 경감은 꽂혀 있던 차 키를 돌렸다.

    “어머! 소장님!”수진이 소리치며 쫓아왔지만 작은 점이 되었다.

    장 경감의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비에 파주 정신병원을 찍었다. 딱 한 군데가 나왔다.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다 되었다.

    그는 병원 리셉션 데스크로 뛰어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지만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장 경감은 멀리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굳어버렸다.

    검은 무리가 병원 1층 로비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각진 어깨와 검은 정장, 권위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그들은 무소의 뿔처럼 한 곳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위세에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움칠하며 피했다.

    무리의 선두에는 있는 남자는 진주양이었다.

    그들은 병원 관계자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가는 아주 짧은 순간, 진주양의 견고한 표정이 또렷하게 장 경감에게 각인되었다.

    ‘자기 신부가 실종됐는데 5일이 되는 동안, 한 번을 서로 안 찾아왔어요.’‘남편이잖아. 남편인데…….’‘걔가 좀 이상한 애인기라……. 제 언니, 해수 남편 될 사람은 그리 쫒아댕겼제.’‘그것 때문에 집도 나갔다니까. 가출을 해서 한동안 걔 찾는다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지.’‘짝사랑하다 미쳐서 기어이 지금 정신병원에 갔지, 아마?’‘붉은 태양은 사람을 미치게 해서…….’붉은 태양.

    붉은 주(朱), 볕 양(陽)

    주양.

    나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

    ‘언니가 사랑한다고 하면, 붉은 태양은 그럴 때마다 언니를 짐승처럼…….’진주양이 신영원의 입술을,

    ‘집어삼켰어.’사랑의 비밀은 일방적이 아닌 쌍방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