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2화 (2/83)

2화. 실종 3일째2016.07.10.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여자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일방적이고 통보되어오기까지 하는 상냥함엔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신념을 따르겠다는 아집이 묻어 있었다.

남의 기분 따위와 상관없이, 상냥함이란 얼굴을 두르고 상대의 살점을 도려냈다.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은 ‘내가’ 먼저였다.

처음에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그가 주는 쾌락에 선선히 옷을 벗어준 것도 오롯이 ‘나’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나와 몸을 섞는지.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건지,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 남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증오와 고통이 범벅되어 내게 저주를 퍼붓는 여자를 보며 안심되었다.

이런 꼴을 보고도 설마 또 저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진 않겠지.

넌 몰랐겠지만 비극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어.

네가 내 언니가 되었을 때부터.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를 네가 집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어쩌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타고 난지도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너는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

영원은 조용히 눈을 떴다. 의식이 밀려오는 동시에 요오드 냄새가 코를 강렬하게 후벼 팠다.

등줄기에 닿는 차가운 스텐의 감촉. 그녀는 수술대 위였다.

“오빠. 나 임신했어.”“진짜?”자해한 팔목은 이미 봉합이 끝났고, 수술방을 간호사와 의사가 남아 뒷정리 중이었다.

기뻐하는 의사 목소리 뒤로 간호사의 볼멘소리가 뒤섞였다.

“임신 순번 올해 내 차례도 아닌데, 덜컥 애를 뱄으니. 선배들 얼마나 갈굴 거야.”“순번? 괜찮아. 원장님께 말씀드리면 너 당직이고 다 빼주실 거야.”영원은 간신히 의식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영원이 꼼짝없이 기절해 있는 줄 알고 전혀 이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지금이라는 생각에 숨이 가빠졌다.

지금이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지금뿐이야……!

시선에 피 묻은 메스가 들어왔다. 슬금슬금 메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이. 그래도 배불러서 웨딩드레스 입긴 싫은데.” 손끝에 간신히 스칠 뿐 메스가 더 멀어졌다. 영원은 어깨를 조금 더 아래로 늘어트렸다. 깨지 않은 마취에 팔이 파들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때 그들이 뒤를 돌았다.

조금만 더……!

영원이 손을 뻗었다. 절묘한 타이밍, 메스가 그녀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손바닥 아래에 메스를 숨기고 영원은 얼른 눈을 감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몸에 꽂혔다.

“근데 여긴 어디야? 원장님이 직접 왕진까지 오셔서 집도하는 걸 보니 웬만한 거물도 그냥 거물이 아닌가 본데.”“쉿, 그 입 조심해.”못 말리겠다는 듯 의사가 뒤통수를 거칠게 긁었다.

“여기가 5호실이란 곳인데, 가끔 여기 있는 인간들이 긴급하게 수술이 필요할 때가 있어, 그때마다 나랑 원장님이 와서 수술을 해줘.”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설명했다.

대학병원 못지않게 장비들이 구비된 수술실은 위기상황에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나도 여기 다닌 지 2년 안 돼. 근데, 확실히 뒤가 구려. 병원에서 1년 내내 구르는 것보다, 여기 한 번 왕진 올 때 받는 떡값이 더 쏠쏠해.”  영원은 메스를 힘껏 쥐었다. 메스가 살점을 가르고 피를 내었다.

다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섬뜩한 감각이 몸을 지배하면서 마취를 날카롭게 풀었다.

‘복종하세요.’‘복종하세요.’‘복종하세요.’맥동하듯 곳곳 세포들이 아우성쳤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복종의 단어가 머릿속을 지배했고, 영원은 폭발했다. 몸에 덮어져 있던 수술 천을 그대로 들췄다.

그들이 비명을 질렀다.

폭주한 아드레날린에 머릿속이 산산이 부서져 휘발되고 있다.

영원은 갈퀴처럼 빠르게 여자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아앗! 찢어질듯 머리카락이 움켜쥐어진 여자가 종이인형처럼 휘청거렸다.

영원의 반대쪽 손이 메스를 단 채 간호사의 생명을 위협했다.

“가만히 있어!”날카로운 칼날이 간호사의 목 줄기를 겨누었다. 의사가 투항한다는 표시를 하며 덜덜 떨었다.

“조. 조심해줘요. 배에 아기가 있어요!”“닥쳐! 이년도 죽이고 나도 그어버리면 그만이야!”분노를 참지 못한 손이 덜덜 떨렸다. 칼날이 간호사의 목덜미를 스쳤고, 약한 살갗이 찢어지면서 피가 솟았다.

“아아!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살려줘? 살려달라고! 네 눈엔 이 병신 같은 데서 죽어가는 환자는 안 보이나 보지? 네가 의사야!”영원이 아무거나 발로 찼다. 쿠당탕 - !

“오빠! 오빠! 살려줘!”목젖을 압박하는 완력에 여자가 숨을 허덕거렸다. 의사가 손을 비벼댔다.

“부탁이에요. 원한다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요!”멀쩡한 사람이 감금되어 있는데 그깟 돈 몇 푼에 의사로서의 영혼까지 팔다니. 영원은 억울했지만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였다.

“좋아.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알겠어?!”의사를 굴복시킨 후 영원은 턱짓했다. 의사에게 수술복을 벗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엔 스스로 기계에 손을 묶도록 명령했다.

“호, 혼자는 못 묶어요. 그 사람을 보내줘요.”“어디서 개수작이야. 한쪽 팔이라도 묶으면 되잖아! 의사들은 올이 안 풀리게 하는 특별한 방법을 안다지?” 그가 플라스틱 수술용 실로 손목을 칭칭 묶었다.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원은 의사가 벗어준 수술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묶어놓았던 간호사를 수술방 입구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마스크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

“억울해 하지 마. 돈 받아쳐먹고 범죄를 묵인하는 너희들! 그 괴물하고 다를 거 없어.”한쪽 팔이 묶인 채 의사가 덜덜 몸을 움츠렸다.

“무사히 나가게 해주면 이 여자는 안전해. 그전에 입 뻥끗하면 여자랑 네 아이 다 죽는 거야. 잘 생각해. 난 여기서 죽어도 아쉬울 거 하나 없어.” 영원은 의사를 납득시키고 조용히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간호사를 앞세웠다.

등에 메스를 대고 바싹 붙이자 여자가 쫄았다.

좋은 징조였다.

그러나 문을 나서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입구에서부터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쭈르륵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매의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간호사가 덜덜 떨었고 영원은 경고하듯 메스를 등에 밀어붙였다.

간호사가 앞으로 전진했다. 둘을 신중히 보던 경호원들은 수술복에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무사히 빠져나가나 싶던 순간이었다.

“잠깐만요.”영원이 굳었다. 경호원 하나가 뒤에서 다가왔다.

“환자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겁니까?”영원이 등짝을 찔렀다. 간호사가 억지웃음을 짓고 돌아보았다.

“아, 아직 수술이 덜 끝났어요. 뒷정리하고 곧 방으로 옮길 겁니다.” 검은 양복의 남자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풀지 못했다.

간호사를 훑던 시선이 영원에게로 미끄러져왔다. 그가 한 발 영원 앞에 섰다.

영원은 얼른 마스크로 반이나 가려진 얼굴을 숙였다. 그녀의 얼굴을 아는 자였다.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영원은 간호사의 등을 쿡, 찔러 재촉했다. 간호사가 경기하듯 떨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고개를 갸웃한 남자가 영원을 보내주었다. 간호사에게 바짝 붙어 복도를 빠져나왔다.

무사히 복도를 귀퉁이를 도는 그때였다. 수술실에서 뛰쳐나온 의사가 팬티 바람으로 소리쳤다.

“저 여자 잡아요!”검은 양복 남자들이 일제히 영원을 돌아보았다.

영원은 간호사를 밀치고 엘리베이터로 달렸다. 타려는 사람들을 제치고 버튼에 미친 듯이 힘을 퍼부었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달려들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간발의 차로 닫히면서 그들은 영원을 눈앞에서 놓쳤다.

영원은 건물 주차장을 통해 빠져나왔다. 딱 한 대 있던 택시를 향해 달렸다.

“잡아!”남자들의 거친 구두 굽 소리가 소떼의 그것처럼 몰아쳤다.

영원은 택시를 타고 무작정 달리라고 소리 질렀다.

남자들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잡으려는 듯, 미끄러운 차 트렁크는 그대로 그들을 스쳤다.

1, 50, 100, 1km, 뛰쳐나온 의사와 검은 양복 남자들이 그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백미러에서 점차 작은 점이 되었다.

영원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

드디어.

드디어.

차장을 뚫고 은혜와도 같은 빛이 쏟아졌다.

영원은 도망쳐 나왔음에 환희했다.

*

도로를 달리던 택시가 불현듯 멈춰 섰다. 영원이 의아해하며 기사를 봤다.

“아저씨. 여기가 아니에요. 마을이요. 마을까지만요.” 기사가 백미러로 영원의 차림을 훑어봤다. 피 묻은 옷에 손목에 감긴 붕대.

영원이 움츠리며 소매를 감추었다. 기사가 핸들에 팔을 걸치고 귀찮은 듯 대답했다.

“여기서 시내까지 나가려면 돈 푼 쥐어줘야 하는데.”그녀가 호주머니를 뒤졌다. 의사의 옷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 세 장이 나왔다.

“돈, 있어요. 여기 봐요.”“기본요금이 삼천 원이 넘어, 이 아가씨야. 나 참, 일진 더러워서.”기사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뭐해. 안 내려!”품안에 감춰둔 수술용 메스가 불끈했지만 영원은 손을 내렸다. 무고한 사람이었다.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그는 영원을 황량한 길에 내려놓고 먼지를 날리며 떠났다.

논과 밭, 그리고 폐공장밖에 없는 주변.

그녀는 파주 외곽에 있는 외딴 곳에 갇혀 있었고 더 가봤자 산길과 풀밭밖에 안 나왔다.

국도를 따라 맨발로 도망을 치다가 폐공장 하나를 발견했다.

영원은 갈증과 허기에 허덕이다가 그곳에 숨어들었다.

축축하고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공장은 어두웠다. 영원은 기계 뒤에 숨어들었다.

그러다 긴장이 풀린 것인지, 그제야 남아 있던 마취 기운이 돌았다.

그녀는 한 손에 메스를 꽉 쥐었다.

혀가 멋대로 돌아가고 뭉근해지더니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저녁 어스름이 져가던 쯤, 공장에 짓쳐든 무거운 발소리에 눈이 떠졌다.

터벅…… 터벅…… 터벅……

남자 그림자였다. 깨진 창문 밖으로 사람이 어른거렸다. 영원은 목숨 줄처럼 메스를 품에 꼭 안았다.

이 시각,

이곳에,

올 사람은 뻔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박수가 폭발했고, 그녀의 홍채가 넓게 퍼지듯 확장되었다.

마침내, 드르륵 문이 열렸다.

“딸꾹. 딸꾹.”술병을 쥔 노숙자가 비틀거렸다. 노숙자는 잘 곳을 살피려는 듯 깨끗한 박스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영원은 가만히 정면을 보았다. 노숙자를 쳐다보다가 멍하니 기계에 기대었다.

그 남자가 아니다.

그래. 아무리 그 남자라 해도 반나절도 안 돼서 나를 찾아내는 것은 무리다.

택시 기사가 내려준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공장이었다. 외진 도로라 CCTV도 없다.

‘넌 날 절대 못 찾아.’영원은 지금쯤 그녀를 찾아 근방을 이 잡듯 뒤지고 있을 ‘그 남자’를 떠올렸다.

정의의 여신이 그녀의 손을 들어주는 게 명백해지자, 서늘한 쾌감이 등골을 짜릿하게 치고 올라 왔다.

‘다시는 잡지 못하게 해주지. 꼭 꼭 숨어서…….’더 깊은 곳으로 숨기 위해 자리를 뜨려는데, 바닥에 있던 비닐이 밝혔다.

바스락. 노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의아했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정의의 여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반쯤 풀어져 있던 노숙자의 눈길이 영원의 풀어헤친 긴 머리와 젖은 목덜미. 그리고 가슴에서 멈췄다.

영원은 본능적으로 메스를 틀어쥐었다.

눈빛이 핥듯이 음란해진다.

환멸스러운 웃음이 흘렀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이 순간, 그녀를 지옥에 가둔 그 남자가 간절해졌다.

노숙자가 짐승처럼 영원에게 달려들었다.

굶주린 개. 덤벼드는 노숙자를 밀치고 영원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아……! 하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쓸린 맨발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핏기 없는 입술에선 공포에 질린 숨이 이어졌다.

미친 노숙자가 외쳤다.

“주여!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주여! 이 악에서 나를 구해주소서!” 어두컴컴한 공장가. 영원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쩔뚝거리며 다친 다리를 질질 끌고 도망쳤다.

“하느님은 찾고 있나? 이봐, 아가씨. 그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네.”그 말에 비명처럼 영원이 울부짖었다.

논길을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찢어진 발가락에 모래알이 껴들어갔다. 도망치지 못하고 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오, 오지 마.”노숙자의 눈빛은 오롯이 탐욕적으로 영원을 향해 번들거리고 있었다.

“오지 마!”노숙자가 영원에게 달려들었다. 싫어! 영원이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의 위를 점령한 노숙자가 영원의 옷을 찢으려 했다. 까칠한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흰 피부를 쓸어내렸다. 노숙자가 자신의 재킷을 잡아당겼다. 단추가 터지듯이 뜯어지면서 앞섬이 벌어졌다.

아아악! 영원이 팔을 휘두른 순간, 거짓말처럼 노숙자가 굳었다.

영원이 질겁하면서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헉…… 헉…….”엎드려 있던 노숙자가 전율하듯 등줄기를 꿈틀대더니 일어났다.

노숙자의 심장에 단단한 메스가 꽂혀 있었다.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가슴을 더듬더듬 만지던 노숙자가 영원을 봤다. 동태 눈깔처럼 영혼 없는 눈동자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종이 박스처럼 그대로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영원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아악!”그것과 동시에 검은 차들이 그녀를 에워싸듯 포위했다. 끼이익???

양 사이드, 사방에서 섬광처럼 뻗어난 헤드라이트가 맞물리며 그녀를 가두었다.

열댓 개의 둔탁한 구두 굽 소리가 짓쳐든 어둠을 깨부수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

뚜벅. 뚜벅.

죽음 같은 그 묵직한 울림. 몇 번을 들어도 구별할 수 있다.

정교한 검은 구두는 영원 앞에 멈춰 섰다.

남자가 손을 내밀자 비서가 길고 유려한 담배를 꺼내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불씨가 튀었고 라이터가 발화했다. 불꽃이 바람이 까불거리며 남자의 옆선을 붉게 물들였다.

“택시번호를 추적해 기사를 족치니까, 간단히 이 근방이라고 실토했습니다.”  주양은 비서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밤 어둠을 뭉근하게 휘감는 알싸한 담배 향.

침묵에 젖어 있다. 그저 아득하고 긴 마주침이었다.

고요하게 내리뜬 주양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멍해진 영원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기도를 막는 쓰디쓴 담배 연기는 피 묻은 그녀의 뺨을 훑어 내리며, 넓게 퍼졌다.

영원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끔찍하게 눈만 커다래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노숙자의 가슴에서 꾸역꾸역 검은 피가 비어져 나왔다.

핏물은 시멘트 바닥을 적시고 미지근하게 굽이쳐 논두렁으로 흘러들어갔다. 엎드린 노숙자는 반응이 없었다.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수행원이 노숙자의 경동맥에 손을 갖다 대었다.

주양은 메마른 입술로 한 번 담배를 깊게 빨고, 영원을 더듬듯 짙게 응시해올 뿐이었다.

그 순간 영원의 까만 눈동자에 명백한 공포가 차올랐다.

주양이 뜨겁게 불씨를 품은 담배를 노숙자의 얼굴에 떨어트렸다.

천벌 받아 마땅하게도, 죽은 노숙자의 머리를 그가 천천히 구둣발로 누르듯 지르밟았다.

영원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채였다.

치이이익??! 불씨를 비벼 끄자, 살이 타들어 가면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하…… 으으……!”영원의 떨림이 거세어졌다.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그를 보며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어째서 한 인간이 저런 모습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영원은 자포자기된 심정으로 허탈함을 삼켰다. 이내, 눈물이 뺨을 갈랐다.

“……내가 말했던가?”영원은 사약을 씹어 삼키듯,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

“신영원?”장 경감이 의아하게 말끝을 쳐올렸다. 가족 기록을 뒤지던 그는 종이 앞뒤를 살폈다.

“이런 여자가 있었나?”그의 물음에 커피를 마시던 수진이 대답했다.

“신부…… 아, 그러니까 실종된 신부 신해수 씨의 여동생이에요. 그 집 셋째 딸이죠. 신영원.” 진주양은 신영원의 언니인 신해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신해수는 돌연 결혼식장에서 사라지고, 경찰은 예식장에 있었던 백운당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다.

백운당 사장 최혜란부터 첫째 딸까지.

하지만 셋째 딸은 없었다.

장 경감이 펜촉으로 여자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두드렸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여자는 다소 음침했다.

“신영원은 왜 경찰 참고인 명단에서 빠진 거지?”“할 수 있을 리가 없죠.”장 경감이 의아하게 보자 수진이 답했다.

“거기 적혀 있잖아요.”그는 하단의 병원과 법원 기록을 그제야 발견했다. 뚜렷하게 적혀 있는 단어에 멈칫했다.

금치산자…….

“병원에 입원 중이에요.”수진의 목소리는 메마르고 딱딱했다.

“정신병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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