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실종 0일째2016.07.07.
텅 빈 신부대기실.
발가벗겨진 채 버려진 웨딩드레스.
충직한 비서는 결혼식을 앞두고 신랑에게 있을 수 없는 말을 전했다.
“신부님이…… 사라지셨습니다.”신데렐라 이야기는 그렇게 신데렐라의 실종과 함께 시작되었다.
*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랑은 잘생겼고, 위험했다.
정중한 마스크 위로 내리뜬 표정은 한없이 오만했고, 꺾일 줄 모르는 콧대는 우아한 유전적 면모를 거침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화려한 골드 자카드가 믹스매치 된 블랙 슈트는 그저 완성된 그를 장식하는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포마드 머리.
그러나 그 모든 조화의 결론은 역시 저 눈빛이겠지.
이마를 드러내는 바람에 숨길 수 없는 야성은 더욱 짙게 발산된다.
군림하고 있다는 듯 그는 사람들을 향해 오만한 눈빛을 무도한 검처럼 휘둘렀다.
신의 은총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란 저런 걸까.
시선을 잡아두는 매력이 무섭도록 다정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순간, 그는 놓치지 않고 그들의 눈길을 자기 안에 틀어박아버렸다.
욕심까지 많은 남자였다.
신부가 실종되기 20분 전, 또 다른 남자가 예식장 로비로 걸어 들어왔다.
남자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고 신랑을 훔쳐봤다.
신랑은 부유하게 차려입은 자신의 하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과연 한신그룹입니다. 한 끼 식사만 50만 원을 호가하는 호텔에 하객만 천 명이라뇨.’ ‘촌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김 총재. 재벌의 통큰 한 끼 대접이겠죠. 뭐. 하하.’ 뉴스 헤드라인을 오르내리던 그룹 후계자의 결혼식. 예식장에는 평소에 모이기 힘든 인사들이 참석했다.
금감원장, A신문사 사주, 차기 대권 주자라는 김판수 여당총재. 병석에 누워 있다던 연우그룹 명예회장까지.
한쪽 자리에 축의금은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문구가 돋보였다.
그때였다.
“앵무새. 앵무새.”옷깃 사이에 감춰둔 유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랑을 염탐하던 그는 이어마이크에 손을 갖다 댔다.
“듣고 있다. 앵무새.”남자가 답하자 곧바로 서두르라는 지시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남자가 이어마이크에 대고 속삭였다.
“경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삼엄한데.” “괜찮아. 우리의 본론은 신랑이 아니잖아.”상대의 말에 비웃듯 알 수 없이 남자는 대답했다.
“그래…….” 우리들의 목표는 한신그룹 왕자와 결혼하게 될 오늘의 주인공.
“아름다운 ‘신부’지.”남자는 신부 대기실이 있는 복도로 향했다. 다행히 보안요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신부 대기실.
약간 들뜬 대기실 문으로 얼굴을 비집는 짧은 동안,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다.
제일 처음 들어온 것은 눈부시게 하얀 옆모습이었다.
백금 같은 조명이 신부 위로 황홀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환하게 드러나 있는 숄더 위로 탐나는 쇄골과 순결한 웨딩드레스.
하늘거리는 시폰 소재를 여러 겹 덧댄 치마는 풍성한 볼륨감을 자랑했다.
마치 꽃잎을 쓸어모은 듯이, 치마 밑단에 입체적인 꽃잎 수백 개를 달아 신부가 걸을 때 꽃길을 걷는 듯이 보이게 했다.
신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면사포로 가려져 있었다.
그때, 어깨를 들썩인 신부가 면사포를 팔로 걷었다.
매끈한 목선이 드러나고 그 아름다움에 남자는 홀린 듯이 문을 비집었다.
인기척에 놀란 신부가 순간 이쪽을 돌아보았다.
두 시선이 멈춘 듯 얽혔다.
“이봐. 뭐야. 신부야? 어때?”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터질 듯이 울려댔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부를 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문 밖의 직원이 남자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거기, 누구시죠?”남자는 서둘러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요하게 쫒아온 직원이 복도 한편에서 그를 막아섰다.
“죄송합니다만. 신분증 좀 확인해도 될까요?”“아아. 미안해요. 조용히 나가겠습니다.”남자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했지만 하객들이 북적이는 홀 중간에서 다시 잡혔다.
경호팀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까지 합세해 그를 에워쌌다.
“초대장 없으시죠?”“…….”“어디 언론사에서 순찰 나왔어요?” 남자가 난감해하는 걸 알아채고 경호팀 대장이 비릿하게 입술을 끌어 모았다.
“따로 인터뷰하겠다고 공문 보냈는데 그 언론사는 못 받았습니까? 이렇게 쥐새끼처럼 숨어들까 봐 구구절절 당부까지 한 건데.”남자는 일순 굳었다. 경호원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남자는 기자였다. 기자는 서둘러 해명했다.
“이쪽 일이 그렇잖아요. 편집장이 또 까라면 까야지.”“소송 따윈 무섭지 않다 이겁니까? 거기 편집장은 도대체 무슨 빽이길래 겁대가리 없이 어른들 다 모이신 행사에 스파이 노릇하라 시킨 겁니까. 카메라 주시죠.”“아무것도 안 찍었어요. 조용히 나간다니까? 어허, 거 사람을 뭐로 보고.”소란이 크게 일었다. 10분쯤 실랑이를 했을까.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그중에는 하객들을 응대하던 신랑도 있었다.
연매출 250조. 대 한신그룹 회장의 하나뿐인 손자.
진주양.
진주양과 거친 시선이 얽힌 순간, 기자의 두방망이질 쳐대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무슨 일입니까.” 신랑이 거침없이 걸어왔다. 비야냥거리던 직원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삼류 매거진 같은데, 직원인 척 신부 대기실에서 얼쩡거리는 걸 잡았습니다.” 진주양이 무표정하게 기자를 내려다봤다.
기자는 사색이 되어 침을 삼켰다. 신랑의 분위기와 품위에 압도되었다.
변화 없는 표정으로 진주양이 기자를 훑어 내렸다. 기자는 간이 졸아드는 듯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맞아떨어졌고 마침내, 쇳소리처럼 주양이 느리게 음절을 박아 넣었다
“카메라.”직원이 기자에게서 빼앗은 카메라를 주양에게 갖다 바쳤다.
크게 말할 것도 없었다. 주양은 그 안의 메모리칩을 빼고 간단히 돌려주었다.
“보내드리세요.” 두렵게만 보이던 주양이 내는 어조는 뜻밖에도 무척 정중했다.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쓴다거나 하는 행동은 일절 없었다.
그러나 그 눈빛. 어땠을까…….
기자의 안구 뒤편을 섬뜩하게 더듬어 내리는 것 같던 본모습의 한 조각.
“운 좋은 줄 알아, 당신.”직원이 카메라를 던지듯 주었다. 기자가 믿기지 않아 물었다.
“정말 이대로 그냥 보내주는 겁니까?” 이미 그들은 기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말 보내주려나 보다.
기자가 눈치를 살피며 얼른 빠져나가려는 그때였다.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복도에서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신부 대기실이 있는 쪽이었다.
주양이 심상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그게, 그게…….”직원이 사색이 되어 말끝을 흐렸다.
“……신부님이 사라지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었다. 부서진 난파선이었다.
분간할 수 없는 혼돈이었고, 고요 이상의 공포였다.
배는 부서졌고 그 난파선에 탑승한 선원들은 예식장을 잠식한 이 고요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리란 걸 예감했다.
문득, 기자는 대기실에 홀로 앉아 있던 신부를 떠올렸다.
위태롭지만, 어딘가 단호하게도 보였던 여자의 곧은 옆태.
대기실에 들어가려던 순간 신부가 그를 돌아봤고, 신부를 보고 그는 단숨에 굳었다.
스와로브스키의 은은한 샹들리에 불빛…….
얼굴에 드리워진 하얀 면사포는 순결했고, 여자의 그 조그만 턱 선을 타고 얼룩지던 눈물은 더없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결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신부는…… 울고 있었다.
*
촤아악- 자동차가 빗물을 튀기고 지나갔다.
장 경감은 아스팔트 도로를 쓸고 가는 비바람을 지켜봤다.
먹구름은 침입자처럼 한낮의 쾌활함을 지워버리고, 거리를 우중충하게 뒤덮었다.
완벽한 조용함. 그는 잿빛 거리가 풍기는 우울함을 즐겼다.
“신부가 사라졌는데, 결혼식은 어떻게 됐지?”담배를 조용히 태우며 장 경감이 묻자 옆에 서 있던 여조수 수진이 서둘러 답했다.
“하객들 다 모였는데 쪽팔릴 수 없잖아요. 대타 구해서 면사포 씌웠대요.”“진짜 신부는 감쪽같이 증발하고……?”한신그룹에게 연락이 온 것이 어제 아침이었다.
진짜 신부는 사라지고 가짜 신부와 결혼을 한다니.
장 경감은 무정한 눈초리로 도로를 쓸어 담았다.
<실종 3일째>
신부는 이곳 호텔의 예식장에서 실종된 뒤, 감감무소식이었다.
장 경감과 수진은 대한민국 최고라는 한신호텔 1층 로비 입구였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그들이 잠깐 서 있던 10분 동안 자동차 행렬이 쉼 없이 호텔 입구를 들락거렸다.
장 경감이 담배 연기를 흐렸다.
“구두 한쪽이라…….” 신부가 사라지면서 떨구고 간 구두 한 짝.
장 경감이 짜릿하게 입 끝을 올렸다.
“지가 신데렐라야? 유리 구두 한쪽만 남기고 사라지게.” 그가 신발로 담배를 으스러트렸다. 오랜만에 구미를 당기는 큰 사건이었다.
“그래서, 신랑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백운당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수진이 손목을 들췄다.
“정확히 20분 지각이에요.”
*
편백나무로 지은 현대식 한옥은 살색 빛이 돌았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창살은 규칙적이면서 정교했고, 기둥 곳곳에 달린 유럽풍의 등은 개방적인 고풍스러움을 풍겼다.
고루하지 않은 품격과 천박하지 않은 세련미가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었다.
백운당.
혹자는 그곳을 한식당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곳을 고급 요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백운당은, 대한민국 밀실 정치의 1번지였다.
거대한 한옥 요정으로 들어서면 그 권력의 꽃을 실감하게 된다.
자동차 100여 대가 수용 가능한 넓은 주차장.
궁궐 못지않게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기와집들과 백운당 중앙에 자리한 연못.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는 조경이 입구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조선시대 세도가의 아흔아홉 칸 대궐이 이러했을까.
개량 한복을 입은 서빙 직원들이 바삐 수랏상을 나르고, 객실 곳곳에선 가야금과 악기 소리,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복층으로 된 한옥 난간 객실에선 어느 대기업의 술상무가 머리에 넥타이를 동여매고 바이어 앞에서 술상을 한 판 벌이고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곳.
그게 바로 백운당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배하는 자.
“최혜란. 사라진 신부의 어머니이자 현 백운당 사장입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가면서 수진이 말했다.
“전 백운당 대표였던 신정태와는 재혼으로, 결혼할 당시 신정태에겐 이미 딸이 있었고, 최혜란이 바로 그 딸의 가정교사였다고 합니다.” 별채는 백운당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길목은 수풀이 우거지고, 고동색 나무 데크 계단이 길게 이어졌다.
“최혜란 역시 두 딸을 둔 과부였는데, 아마 가정교사로 들락거리다가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한 1년 살았나. 신정태가 등산 중 추락사하고, 최혜란이 백운당을 이어받아 여기까지 성장시켰습니다. 보시다시피 사업 수완이 보통이 아닙니다.”“딸자식은 지금 황천길을 건넜는지, 요단강 매표소 앞에서 표 끊고 대기하고 있는지 어쨌는지 모르는 판국에, 장사를 한다? 대단한 배짱이시구만.” 장 경감이 칫, 비웃었다. 수진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백운당이 정재계에서 힘 좀 쓴다는 양반들 드나드는 요정이라지만, 일개 요식업체가, 그것도 한신그룹과 사돈 맺은 걸 보면…… 이 여자 치맛바람이 어느 정돈지 예측 가능하죠.”드디어 별채가 나왔다. 문지방을 건너려 했을까. 불현듯 장 경감의 다리가 제자리에 붙었다.
그의 귓가로 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게다가 진주양 이사…… 유명하지 않습니까. 여자 보는 눈 까다롭기로. 백운당 딸하고 염문설 터지기 전까지 그 흔한 여배우랑 스캔들 한번 없었는걸요.”브리핑을 끝낸 수진이 장 경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너른 중정 끝에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단독 기와집이 놓여 있었다.
한옥에 <태화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고동색 한옥은 앞서 봐왔던 집채들과는 다른 위엄을 풍겼다. 원래는 들문에 가려져 있어야 할 대청인데, 그 문짝들을 완전히 위로 들어 젖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장 경감이 시선을 박아놓은 곳은 집채가 아니었다.
결코 만만찮은 권위를 내보이는 기와집에 한 남자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 수 없지만 테이블의 찻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로지 그곳만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처럼, 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겁고 습한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타다다닥. 빗줄기가 서까래를 타고 기와집을 차갑게 적셨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남자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오직 앞만 보고 있었다.
표정 없는 남자의 옆으로 가는 빗발이 거슬러 올라간다.
“저 사람이 실종된 신 씨의 남편, 진…….”쉿. 수진의 말을 막으며 장 경감이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VIP 중에도 귀빈들만 들인다는 별채.
삼십 대를 갓 넘긴 주제에 주인인 양 명당을 떡하니 혼자 차지하고 있는 남자.
퍼부어지는 빗물이, 끈적끈적한 습기가, 시간 감각을 마비시킨다…….
진주양은 어둡게 잠겨 비 내리는 정원의 전경을 응시하고, 장 경감은 밖에서 비를 맞아가며 반대로 안에 있는 주양을 눈에 담았다.
저 남자가 그 유명한 ‘한신의 황태자’인가.
“어떤 남자야? 진 이사란 남자.”장 경감이 외투 옷깃을 추켜올리자, 그런 걸 꼭 물어야 아냐는 듯 수진이 남자를 황홀하게 감상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남자죠. 다 갖춘 사람이에요. 신데렐라의 동화 속 왕자님처럼. 매너 철저하고 업무 실수로 부하직원들한테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고, 여직원들 사이에서도 젠틀하기로 아주 유명합니다. 완전 신사라고 하던데요. 돈 많고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아. 얼굴값 한다는 소리, 저 남자한테는 모욕이죠.”장 경감은 흥미롭게 보며 턱을 쓸었다.
젠틀하고 매사 깔끔한 성격.
강력계 형사 생활만 15년.
퇴직한 뒤에 흥신소 운영까지 합하면, 사람 상대한 경력만 20년이었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간 없었다는 것이다.
.
.
.
“운치가 참 좋습니다. 한창 달콤한 신혼을 즐기고 계셨을 텐데. 유감입니다.”장 경감이 말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좀 더 깊숙한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밀실에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두고 주양과 장 경감이 마주 보고 앉았다.
창밖으로 나뭇잎이 파르르 고개를 떨구어대고 있었다. 방 안에는 온통 땅을 파헤쳐 댈 것처럼 퍼부어지는 빗소리뿐이었다.
“권력 맛이 좋긴 좋나 보더군요. 청장님께 3년 만에 안부 전화 받고 놀랐습니다. 조용히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다고요?”장 경감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주양은 아까부터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장 경감은 그 특유의 분위기를 비웃었다. 어린 새끼가 가오 잡기는.
그러나 속마음과 달리 장 경감은 굽실굽실 허리 숙이며 두 손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저희 회사 모토입니다. 바람나서 도망간 마누라, 보증 서줬더니 토낀 친구, 길 잃은 개새끼까지. 돈만 주면 다 찾아줍니다.”경찰이 견찰이 된지 오래. 공권력은 더 이상 믿을 만한 게 못되었다.
자신에게 신부를 찾아 달라 부탁하러온 것이 확실했다. 장 경감이 거드름을 피웠다.
“저야 사양할 까닭이 없습니다만, 기껏 특수팀까지 꾸려놓으시고 번거롭게 저희 삼류 흥신소까지 참여시키는 이유가…….”“이름 장영범. 지구대 순경으로 시작해 단 1년 만에 강력계로 차출. 실종 수사에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 경찰대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형사로서는 이례적으로 30대에 전담팀을 꾸림.” 침묵하던 주양이 장 경감의 말을 빠르게 채갔다.
장 경감은 허리를 숙인 채 주양을 올려다봤다. 두 눈길이 불꽃처럼 부딪혔다.
“18건의 굵직한 실종 사건을 해결했고, 실종팀을 맡았던 5년 간, 실제로 담당 지역의 범죄가 급감함. 현재까지도 실종수사에서 만큼은 독보적인 존재이다.” 주양이 읊는 내용은 모두 다 장 경감에 대한 자랑뿐이었다.
이거 참. 난처한 기분에 장 경감이 숙였던 허리를 서서히 폈다.
어깨가 넓어지려는데 주양의 음성이 차갑게 끊어냈다.
“그러나 경찰대 엘리트 출신이 아닌 점 때문에, 번번이 승진 경쟁에서 밀림.”멈칫.
“5년 전, 보복 범죄로 아들이 유괴를 당함. 범인을 체포했으나 아이는 뇌사 상태. 아내와 갈등을 빚고 이혼. 병원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나이트클럽 포주 노릇이 걸려, 불명예 퇴직.”장 경감의 굳은 얼굴을 훑어 내리며 주양이 느리게 음절음절 박아 넣었다.
“그 뒤로는, 삼류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다.”장 경감이 주먹을 사려 쥐었다.
주양은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었다.
장 경감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굴욕으로 떠는 그를 주양이 느리게 살펴댔다.
카메라에 담듯 엉겨오는 검은 시선이 뚫어질 것 같았다.
눈빛은 어딘가 교활한 데가 있었다.
마치 그런 반응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 기분 나쁜 예감이 장 경감의 전신을 덮쳐왔다.
뭐야. 이 남자.
“청장이 대한민국에서 사람 찾는 기술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제 손으로 파면시킨 사람 직접 추천한 거니 오죽하겠습니까만.”“…….”“그런 건 차치하고.”장 경감의 앞으로 서류뭉치가 던져졌다. 서류철에서 흘러나온 사진이 테이블에 넓게 흩어졌다.
“저는 모든 확실한 사람들을 선호합니다. 특출난 재주에 큰돈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까지.”장 경감은 사진을 주섬주섬 주웠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이 몸에 달린 기계장치, 그거 떼어내는 날 오지 않게 해야 하잖습니까, 열심히 돈 버셔야죠.”아이가 찍힌 사진이었다. 뇌의 30퍼센트를 손실해, 현재 병실 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아이.
“이게 무슨…….”사색이 된 장 경감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주양의 그 뱀 같은 혀에서 굴려져 나오는 말들은 따가웠다.
“하나같이 그래요. 이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 벽에도 듣는 귀가 있죠. 꾸려놓은 살림살이가 늘어나다 보면 온갖 시답잖은 소리들이 새어나가지 않겠습니까?”“그래서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분노를 간신히 사려 씹는 목소리에 주양이 조용히 웃었다.
“저는 이 일의 적임자로 장 경감님이 적합하다 판단을 내렸습니다. 제 기대에 부응해주셨으면 합니다.”주양은 옆의 좌식 의자에 놓았던 것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검은 가방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주양은 007가방을 열어 앞면을 돌려 보여줬다. 5만 원권 지폐가 가방에 가득 쌓여 있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착수금입니다. 약소합니다. 대충 주유비 정도라고 생각해주세요.”장 경감이 눈앞의 현금을 의심하듯 주양을 봤다. 그러나 그는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장난 따윈 칠 줄 모르는 메마른 얼굴이었다.
주유비라고? 돈 억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경비로 쓰라고 투척하는 게 바로 재벌인가.
전혀 약소하지가 않았다. 장 경감은 오만 원권 지폐 묵음을 떨리는 손으로 쥐었다.
채찍 다음엔 당근이라 이건가. 수진의 말대로 과연 젠틀했다. 일처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매끄럽게 진행한다.
보모 손에 오냐오냐 키워진 재벌 4세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사람 어르고 달래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장 경감이 조용히 돈을 내려놓았다.
“역시 스케일이 남다르십니다. 의뢰인 사정이야 개인 프라이버시니 물을 필요도 없죠.”진주양의 눈빛이 만족스럽게 짙어졌다.
하지만 가방은 말과 반대로 탁, 닫혔다.
“근데 제가…… 구린 돈 받아서 인생 망친 케이스 아닙니까? 액수가 벅차네요. ……목숨, 걸어야 하는 겁니까?”장 경감의 말에 진주양이 조금 웃었다. 장 경감은 찬찬히 주양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까마득히 깊은 심해 같았고, 불을 비춰도 어느 것 하나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까다로운 취향의 손님의 모습에서 단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부탁할 것은 신부를 찾아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위험하고 내밀한…….
“제가 바라는 건 딱 하나입니다. 수첩에 적을 필요도 없어요. 외우기 아주 쉬워요.”깍지 껴 교차시킨 손을 입가에 붙이고 장 경감을 응시해오는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은밀하고 위험했다.
“경찰이, 신부를 찾지 못하게 해줘요.”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장 경감이 혼란스러워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주양이 창가에 있던 난으로 손을 뻗었다.
간신히 움터낸 한 떨기의 꽃을 그는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찾지 못하게. 절대로.”마른 꽃줄기가 툭, 힘없이 분질러졌다.
*
영원은 소리에 집중했다. 빗소리였다. 밖에서 비가 내리는 게 분명했다.
방은 어두웠고, 공기는 아주 습했다. 마른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자 여인의 늙은 목소리가 곧바로 귓등을 쳤다.
“경찰이 이사님 회사까지 찾아갔답니다. 도망친 신부를 찾겠다고.” “…….”“어머님이 계신 백운당도 예외는 아니고요.” 노 집사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뜨개를 뜨고 있었다.
“참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불가능마저 가능하게 만드는 그분의 재주.”노 집사가 하던 걸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영원은 어느새 밥 먹던 것을 잊고 또다시 멍해져 있었다.
노 집사는 한숨을 내쉬고 상을 치웠다.
“평생 아가씨를 이곳에 가둬두실 수 있는 분이세요.”“…….”“그만 복종하세요.”복종하세요. 복종하세요. 복종하세요. 복종. 복종. 복종. 복. 복. 복. ㅂ……
영원은 엄지 끝으로 이음새를 미친 듯이 긁었다.
이전에도 몇 번 꿰맨 자국들은 울퉁불퉁 흉하게 아물어 마치 악보 오선지 같이 손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노 집사가 이상한 기분에 돌아보았다. 침대에 앉아 있던 영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둘러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영원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노 집사가 뜨개바늘을 바닥에 놓쳤다.
창가 쪽 화분이 하나 사라졌다.
영원은 쥐고 있던 화분 조각의 거친 표면을 매만졌다. 창밖을 보았다.
자살하기 딱 좋은 날이다.
“노 집사. 나를 불쌍히 여겨.”치켜든 유리조각을 손목에 힘껏 푹, 꽂았다.
꺄아아악??!
절규가 방 안 공기를 찢어발겼다.
피를 흘리며 영원은 볏단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천장이 어지럽게 흐트러졌고, 그녀의 관자놀이로 눈물이 죽 미끄러졌다.
부디,
나를 가엾이 여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