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층 - 지하 미궁 -->
“약속의 신께 맹세하는 계약서를 내 직접 너와 쓰지 않았느냐. 마왕을 소환하면 너를 풀어주마. 대신 평생 흑 마법을 쓰지 않는다는 약속도 그곳에 적혀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약속의 신께 맹세하고 그 계약을 어기면 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영혼이 파괴된다. 천국도 지옥도 환생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약속을 깨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라이프 베슬만 빼앗기지 않았어도.’
리치란 수명이 다했어도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자이다. 보통 리치들이 추구하는 것은 더 많은 마법에 대해 알고 연구하고자 하는 탐구열이다.
죽기에는 해보고 싶은 연구도 마법도 많은 그들은 죽음에 관해서 생명을 잃는다는 원초적인 두려움보다는 마법과 연구를 더 이상 못하게 된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트리아는 죽는 것보다는 동료들을 배신해서라도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왕국에서 마왕을 소환할 생각을 할 줄이야.’
발상은 훌륭했다. 120년 마다 정기적으로 마왕이 나타나는 것을 자신들의 주도하에 소환하여 소환되자마자 죽인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못 한 것이었다.
트리아는 지하실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왕국 수석 마법사 아르카디안, 소드 마스터 팔로스, 이단 심문관 제키엘만 해도 왕국 최고의 전력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거기에 자신을 용사라 당당하게 밝힌 주리안이라는 남자가 정말 용사라면 마왕은 소환되자 마자 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쿠쿠쿠쿠쿠쿠!
마법진이 위에 쌓인 재료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왕이 소환되기 직전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
승원과 일행은 자신들을 쫓는 기사단과 경비대를 피해 외성에서 내성으로 진입했다.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 바람의 정령 실프를 풀어 길을 안내하게 했다.
정령의 기운을 느낄 정도의 고수라면 실프를 느끼고 추격해 올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승원! 내가 마왕 소환을 저지할 수는 없어도 늦출 방법은 있어!”
“어떻게?”
“리치는 대륙 곳곳에 숨어 있는 흑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거든. 트리아가 잡혔다. 그러니까 마력 지원해주는 걸 끊으라고 한다면 소환 기간이 확 늘어날 거야.”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흑 마법사도 아니고 이 세계에 사는 시민도 아니야. 마왕을 소환하든 말든 내 알바가 아니야.”
“하지만…….”
게르엔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대화를 듣고 있던 효주가 대화에 끼어 들었다.
“마왕이 소환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을까요? 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효주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게르엔이 마왕 소환을 막자고 하는 것은 마왕이 소환되자 마자 죽을까봐 막자고 하는 거야. 그렇지 게르엔?”
“당연하지! 마왕님이 소환되면 흑 마법사들은 마법 서클이 한 개씩 올라가니까. 마왕님의 눈에 띄어 축복을 받으면 한 서클 더 올라갈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게르엔은 꿈에도 그리던 8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게르엔은 생각만 해도 짜릿한 듯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 게르엔 당신은 마왕으로 인해 죽게 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대답은 승원이 대신했다.
“효주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닌 리치야. 생명체가 들어갈 수 없는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부터가 그 증거지. 내 노예가 되어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 내가 해방시켜주면 던전 하나 만들고 들어가서 웃으면서 살아있는 인간을 해부할 녀석이니까.”
“서, 설마요. 게르엔 그러지 않을 거죠?”
효주가 겁을 집어먹은 듯 게르엔을 바라봤다.
게르엔은 효주의 말 보다는 승원의 말에 집중했다.
“헤헤, 승원 나를 해방 시켜 줄 의향이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수명이 다해서 죽기 전에 라이프 베슬 부술 거다만?”
“히익! 제발 자비를!”
내성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지키는 경비대는 달려오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거기 정지! 일단 멈춰서 천천히… 으악!”
백여 미터 떨어져 있던 승원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서 경비대의 뒤에서 나타나 점혈로 두 명의 경비를 기절시켰다.
기사단과 종단의 신관들은 승원 일행이 외성 내 어딘가에 꽁꽁 숨거나 외성을 빠져 나갈거라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내성으로 잠입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허를 찔렸다.
내성을 지키는 전력이 모두 외성으로 나간 것이다. 거기에는 내성에 왕국 최고의 전력이 모여 있다는 이유도 한 몫을 했다.
**
- 푸쉬이이이이이이이이!
마법진이 눈부신 빛을 내며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왕이 나타날 때 전조증상 중 하나였다.
“큭! 갑자기 더워지는데?”
용사 주리안은 더워진 방 안의 공기를 느꼈다.
그에 수석 마법사 아르카디안은 서둘러 마법을 펼쳐 그 연기를 걷어냈다.
“마계는 용암이 강처럼 흘러 다닌다고 한다. 인간이라면 숨도 쉬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게 마족. 걔 중에 왕이 나타나는 거다. 정신 바짝 차려.”
연기가 사라지자 지하실이 또렷히 보이기 시작했다.
마법진 위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피부의 미녀가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저게 마왕?”
주리안은 절세미녀의 등장에 아르카디안을 바라봤다.
아르카디안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멍청한 녀석!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라!”
소드 마스터 팔로스와 이단 심문관 제키엘은 이미 무기를 뽑아 들고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붉은 머리의 여성은 자신을 둘러싸고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중에 사슬에 묶여 매달려 있는 여성에게서 그 시선이 멈추었다.
“넌 나의 아이로구나. 왜 그곳에 묶여있는 것이냐?”
“마, 마왕님! 함정입니다! 도망치십시오!”
트리아는 자신이 리치가 되며 사라졌던 마법 서클 하나가 다시 회복했음을 느끼고 눈앞의 여자가 마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달칵!
“아!”
마왕이 허공에 손읗 한번 저었을 뿐인데 한번 묶이면 시전자 보다 마법 서클이 낮으면 풀 수 없다는 마법 사슬이 손쉽게 풀렸다. 트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바닥에 착지하여 자신의 아픈 손목을 매만졌다.
“아르카디안님. 바로 죽일까요?”
팔로스가 뭐를 더 기다리냐는 듯 아르카디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르카디안은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백작님.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마왕에게 몇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미 지하실에는 텔레포트를 막는 마법부터 시작해서 온갖 흑 마법에 제재를 가하는 마법진이 가득 설치 되어 있었다. 거기에 백 마법은 그 힘을 강하게 해주는 마법진과 함께 복도에는 왕국 최정예 기사단이 가득 차 있었다.
“마왕이여. 나는 아리안 왕국 수석 마법사 아르카디안이라고 한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잠시의 대화로 마왕이 힘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정기를 흡수하던가 아니면 장시간 대자연의 마나를 흡수해서 어둠의 마나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 때문에 아르카디안은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내 이름은 카나.”
“카나? 마왕의 이름을 대라!”
카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왕국에서 내놓으라하는 강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했더니. 함정을 판 게로군. 소환하자마자 죽일 생각으로…….”
정곡을 찔린 아르카디안은 대화가 되지 않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루시퍼? 사탄? 벨제붑? 마몬? 레비아탄? 네 정체가 무엇이냐 물었다!”
“이름이 중요한가? 너희는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웃기는 소리! 이제 막 소환되어 갓난아이 같은 힘으로…….”
- 콰콰콰쾅!
그때 갑자기 복도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일어났다.
어찌나 충격이 큰지 마법으로 강화되어있는 지하실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
밖에 있는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팔로스가 서둘러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려고 달려갔지만, 손잡이를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문이 왜?”
“팔로스님 그 문은 비상시를 대비해서 안에서 밖으로는 열 수 없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감옥의 문과 같은 겁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져도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밖에서만 열 수 있도록 해 놓은 겁니다. 근데 밖에서 갑자기 왜…….”
아르카디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문을 바라보자 카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흐음, 케르베로스를 이 방안에 소환하려고 했는데 온갖 것을 다 설치해놔서 저쪽에 소환됐나 보네.”
“케르베로스라고?”
케르베로스는 마계의 괴물 중 하나로 머리가 셋 달려 그 입에서 화염을 뱉어내는 상위 마족급 힘을 가진 몬스터였다. 마왕과 달리 마족은 소환되자마자 본인이 가진 바 힘을 대부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소환되는 것 자체가 재앙에 가까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대 문헌에 따르면 소환되고 1년은 지나야 그 정도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했거늘!”
“미안하지만 소환된 지 1년 정도 됐어.”
“뭐? 그게 무슨?”
아르카디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리안을 바라봤다.
그때 제키엘이 두말할 거 없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카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앗!”
제키엘이 들고 있는 망치는 그의 생명력을 듬뿍 받아 폭발하듯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일격필살의 공격. 그의 수명 십 년에 달하는 기운이 머금어진 강대한 힘이었다.
- 척!
“어?”
제키엘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소멸시켜 버리는 자신의 빛나는 망치가 마왕의 왼손 하나에 가로막힌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어찌…….”
이 정도 힘이라면 비슷한 전력이라는 소드 마스터 팔로스라도 정면으로 받았다가는 검을 든 팔이 부러질 정도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카나는 맨손으로 그 공격을 받아내고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 퍽!
당황해서 바로 망치를 잡은 손을 바로 놓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를 자아냈다. 카나는 그대로 오른손을 휘둘러 제키엘의 손목을 잘라냈다.
“끄아아아아아악!”
“제키엘!”
제키엘이 큰 부상을 입자 팔로스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에 주리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아르카디안을 바라봤다.
“아르카디안님! 저도 참전합니까?”
용사의 운명을 받은 주리안을 발견해서 훈련 시킨 것이 다름 아닌 아르카디안이었다. 힘이 강해진 이후에는 뺀질거리며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아르카디안을 찾는 것이다.
- 쩡! 쩡! 쩡! 쩡!
팔로스가 오러가 담긴 검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카나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걸 지켜보는 아르카디안이나 트리아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막 소환된 마왕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 지금 소환된 게 아니라고?”
마왕이 중간계에 소환된 상태에서 다시 소환해본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르카디안은 두 사람의 싸움을 보다가 서둘러 주리안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서 도와라! 나도 뒤에서 도우마!”
“알겠다고요. 영감!”
주리안이 씨익 웃으며 검을 들고 두 사람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갔다. 넓은 지하실이 좁다 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전투에 끼어드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
카나가 팔로스의 공격을 피해 움직이며 등을 보인 찰나의 순간 주리안이 검을 찔러 넣었다.
- 츠츠츠츠!
분명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거로 생각했건만, 그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잔상?”
허공에서 사라진 마왕은 갑자기 지하실에 몸이 10개로 늘어나서 나타났다. 전투 경험이 짧은 주리안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팔로스가 서둘러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분신술이다! 일단 등을 맞대!”
10개의 마왕 중 어느 몸이 진짜인지 알 수 없어서 팔로스가 생각해낸 것은 등을 맞대고 진짜를 찾으려는 것이었지만, 용사는 자신의 가진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니야. 저 10개 다 본체야.”
용사의 눈. 그것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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