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층 - 선착순 -->
‘피 냄새?’
인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미궁에 와서 피 냄새는 질리게 맞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서도 붉은 피는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피 냄새가 짙게 나려면 근처에 피가 가득 있다는 건데.’
인호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 챈 여름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인호 오빠 왜 그래요?”
“아니, 그게…….”
처음 만났을 때는 모르겠지만 가정사까지 듣고 이미 마음을 열어버린 인호는 여자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디서 피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
그 말에 여름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아, 그래요? 전 모르겠는데, 그것보다 우리 이제 슬슬 출발해요. 남들은 열심히 가고 있을 텐데.”
인호는 손에 쥐고 마시지 않던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쌉싸름한 맛이 나는 차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음? 이거 달달하고 맛있네. 무슨 차야?”
“차 이름은 네 목숨 차라고나 할까?”
“뭐?”
여름이 겨울을 바라봤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인호, 우람, 국진, 성연 4명 모두 몸이 굳어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어억?”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데 입은 움직일 수 있었다.
인호는 당황해서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상황파악이 쉽사리 되지 않았다.
“아, 의심은 더럽게 많아서 눈물 콧물 짜내니까 이제야 마시네.”
여름이 짜증난다는 듯 땅에 떨어진 잔들을 주웠다.
“아, 대장 연기 여우주연상감이던데?”
겨울은 쓰러진 남자들을 보기 좋게 하늘을 보도록 돌아 눕혔다.
가을은 손수건으로 손을 박박 씻고 있었다.
“아, 진짜 이 더러운 놈이 계속 손잡고 만지작거려서 토할 뻔 했네.”
방금까지 오빠라고 부르며 아양을 떨던 여자들이 짜증난다는 듯 남자들을 몇 번 씩 발로 찼다.
“너, 너희 어째서…….”
우람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여자들을 보며 누구랑 사귈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미궁 5층을 벗어나서 안전한 곳에 가게 되면 생길 로맨스를 생각하며 한껏 기대어 부푼 참이었다.
“이거 다 계획적이었던 거야?”
국진은 이미 2세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이름도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바닥을 뒹굴고 여자들의 본심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 이러는 거야?”
성연은 아직 설득할 기회가 있다고 보고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인호는 여자들의 눈빛을 보고 빠르게 포기했다.
“계획적이었군. 어쩐지 너무 호의적이다 했어.”
“알면서 당한 네가 멍청이지.”
여름은 겨울에게 강탈 스킬을 사용하라고 눈짓했다.
“마지막 할 말은?”
강탈 스킬로 상점 포인트와 스킬을 빼앗으면 죽음을 맞이했다.
그걸 아는 여름은 남자들에게서 최후의 한마디가 듣고 싶어졌다.
“어째서 이러는 거야?”
“남자들은 다 쓰레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달라.”
“그래? 발정 난 건 똑같던데?”
그때 봄이 환각 마법을 유지하는 게 힘든지 여름에게 시간이 다 되 간다고 손짓했다.
“아, 마법 풀어. 얘들도 죽기 전에 한 번 봐야지.”
봄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환각이 풀렸다.
동시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있는 시체가 나타났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해서 인호가 맡은 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 어째서 여자까지…….”
“우리랑 같은 고통을 맞보지 않은 여자들은 뭐가 좋다고 같은 편 남자 편을 들더군.”
의심이 많아 끝까지 차를 마시지 않은 사람은 직접적인 물리 공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피를 흘리고 죽은 시체는 그런 경우였다.
“그럼 잘 가.”
“젠장, 차만 안 마셨어도 너희쯤은.”
“호호! 정말 그렇게 생각해?”
겨울이 강탈 스킬을 사용하려 할 때 갑자기 가을이 여름에게 소리쳤다.
“대장, 누군가 또 접근하는데?”
“성별하고 숫자는?”
“9명 남자 다섯에 여자 네 명.”
“얘네 빨리 죽이자.”
그때 가을이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심각한 상황에 나오는 버릇 중 하나였다.
“가을아 왜 그래?”
“상대 중에 나 같이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상대가 있어. 그 사람들은 우리가 8명이라는 걸 파악했어.”
“뭐?”
여자 4명은 겨울의 스킬 강탈 배포 때문에 스스로를 일당백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이게 퀘스트를 해서는 얻을 수 없는 상점 포인트와 스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자들을 죽이면 방심 시킬 수 없겠지.”
숫자가 더 많은 상대와 싸울 때는 방금처럼 미인계를 이용했다.
헌데 기척을 느끼는 자가 남자 4명이 죽는 것을 알아차리면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가을아 이 인간들 기절시켜. 겨울아 봄한테 마력 넘기고 봄은 겨울이한테 마력 받고 여기 다시 감춰버려.”
여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름은 컵을 닦고 다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가을은 남자들을 기절 시켰으며 겨울은 봄에게 배포 스킬로 마력을 넘기고 봄은 이 주변의 시체들과 기절한 남자를 환각 마법으로 숨겼다.
“알다시피 들켰다 싶으면 리더부터 죽이고 강해보이는 녀석 순서대로 공격하는 거야. 알겠지?”
여름이 손거울을 보며 외모를 확인하는 동안 준비를 마친 세 사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
승원 일행은 반나절을 더 걸으며 이제 산 근처에 다다랐다.
그간 습격도 여러 차례 받았는데 그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며 죽이거나 제압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계속 이동한 것이다.
“형, 근데 우리도 출발 지점부터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 우리보다 앞에 있는 것들은 뭐에요?”
경호의 말에 승원은 배낭을 툭툭 쳤다.
“식량 안 챙기고 목적지까지 굶고 달린 애들이지. 배낭이 없으니 첫 날은 우리보다 훨씬 빨리 갔지만 둘째 날부터 목마르고 배고파서 더 못가겠으니까 숨어서 후발주자 공격하는 거고.”
생각해보니 분명 승원 일행은 시작 지점에서 배낭에 음식을 넣느라 정신없었는데 배낭도 없이 출발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식량도 없이 출발하다니 미친 거 아니에요?”
“목적지가 보기보다 가까워 보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다급했으니까…….”
이제 막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던 차에 승원의 레이더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우리가 가는 방향에 8명이 있어.”
“또요?”
경호는 자신들이 최 상위권에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자 한숨을 내쉬었다.
‘어라?’
상대 중 한명이 이쪽의 인원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생명력의 기척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눈 같은 걸로 보고 간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레어 스킬인데. 미궁 5층에서 제법이네.’
승원은 그들을 피해 이동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상대도 이쪽을 파악하고 있으니 전투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정환은 사정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승원아 상대는 어때?”
“가만히 있네요. 우리는 이쪽으로 가요.”
원래 3일 거리였지만 승원 일행이 부지런히 이동한 끝에 이틀째인 오늘 해가 질 무렵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제 산만 오르면 정상에 미궁 6층으로 향하는 빛의 기둥이 있을 것이다.
**
승원 일행이 자신들을 피해갔다는 사실을 가을에게 듣자 여름이 고민에 빠졌다.
최소한 거리를 두고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갈 줄 알았는데 바로 피해간 것이다.
‘하긴 당연한 건가?’
상대측에도 정찰 능력이 있는 능력자가 있어 이쪽이 8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겁을 집어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일단 그렇게 호전적인 그룹은 아니라는 거군.’
4명일 때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 숫자가 비등비등하니 호전적인 그룹이라도 비켜갈 수 있었다.
‘내 외모에 남자들이 혹하는 것을 지켜보는 여자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보고 싶어.’
여름은 손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때 봄이 피곤하다는 듯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대장, 마법 풀어도 돼?”
“풀어.”
봄이 환각마법을 풀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여자 배우 같은 얼굴이 갑자기 얼굴에 주근깨가 있고 콧대가 낮아졌으며 쌍꺼풀이 없는 눈이 됐다.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예쁜 얼굴도 아니었다.
“야! 너 미쳤어?”
“아, 미안 대장. 너무 졸려서…….”
그 뿐만 아니라 봄이나 가을 역시 예쁜 얼굴에서 평범한 얼굴로 돌아갔다.
겨울만이 원래 얼굴인 듯 예쁜 외모를 유지했다.
“쟤네가 마지막 그룹이야. 정신 차려. 미궁 6층에 가면 푹 자게 해줄 테니까.”
여름의 말에 봄이 서둘러 다시 환각 마법을 걸었다.
봄, 여름, 가을이 다시 예쁜 얼굴로 변했다.
“아, 미궁을 오르다보면 진짜 이런 얼굴을 가질 수 있겠지?”
여름은 손거울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 여름을 보며 가을은 콧방귀를 끼었다.
‘다들 제 정신이 아니야.’
남자에게 험한 일을 당했으니 남성혐오가 생길 수 있다.
가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덮친 남자를 죽였을 때 가을 같은 경우 분노가 풀렸다.
하지만 여름의 화는 풀릴 줄을 몰랐고 남자라면 무조건 죽이고 여자라면 같은 편으로 들어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동료였던 남자들을 죽였는데 진심으로 한 편이 되려는 여자는 없었다.
죽기 싫어서 연기를 한 여자들은 많았지만 여름은 귀신같이 눈치 채고 모두 죽여 버렸다.
‘가만 보면 봄은 나이가 어려서 그냥 대세를 따르는 거 같고, 겨울은…….’
겨울은 말 수가 극히 드물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살아남았던 것이나 이렇게 강해질 수 있던 것도 모두 겨울 덕분이었다.
강탈 스킬과 배포 스킬은 유니크 스킬로 자신이 생각해도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적당히 하다가 말 줄 알았더니 대장은 피 맛을 너무 봤어.’
의자매를 맺자며 이름을 쓰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별칭을 썼는데 이것도 귀찮아 지기 시작했다.
‘에이, 몰라…….’
겨울이 남자들에게 강탈 스킬을 쓰는 동안 가을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짐을 챙겼다.
오늘 안에 도착할 거 같으니 물 한 병과 한 끼 식사만 챙겼다.
**
승원 일행은 빠르게 이동을 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반나절 만 더 가면 되니까 여기서 한 끼 식사를 하고 짐 없이 달려가기로 한 것이다.
“으아, 전투식량 질린다.”
지현은 플라스틱 수저로 소고기 고추 비빔밤을 뒤적거렸다.
처음에는 맛있다고 먹던 음식이 5끼 넘게 똑같은 걸 먹으니까 물린 것이다.
“누나 MRE(미군 전투식량) 먹을래요?”
경호가 팬케이크를 주자 지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한 입 먹었다가 바로 뱉어냈다.
“우웩!”
“아! 누나! 아깝게 뭐하는 거예요.”
“물에 적신 골판지 먹는 기분이야.”
그걸 지켜 본 정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물에 적신 골판지 먹어본 적 있어?”
“아니요.”
“근데 어떻게 알아?”
“느낌적인 느낌?”
일행이 시시덕거리며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승원은 실프와 노움에게 정찰과 동시에 주변 경계를 시키고 있었다.
“4명 이쪽으로 온다.”
승원의 말에 사람들이 ‘또?’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먹던 것을 내려놓고 내려놨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정환은 땀띠 걸렸다며 벗었던 신발과 양말을 서둘러 신었다.
“먹는 거 원하면 이거 그냥 줘도 될 거 같은데.”
예원은 배낭에 남아있는 10끼 정도의 전투식량을 가리켰다.
출발 지점에서 3일을 계산하고 준비했던 터라 많이 남은 것이다.
승원은 고민에 잠겼다.
“일단 만나보고 결정하죠.”
마력에 여유가 있었기에 꽤 넓은 범위로 정찰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했던 팀은 8명의 사람들이었다.
이 4명이 그 8명 중 4명인지 아니면 다른 팀인지 알 수 없었다.
“근처를 지나갈 거 같아?”
예원의 말에 승원은 상대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상대가 아까 와 같이 이곳을 탐지하는 것을 포착했다.
“아까 8명 중 4명이네요. 정확히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정확히 이곳을 목표로 온다면 피할 수 없었다.
상대측은 짐이 없는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접근했어요. 저쪽.”
일행이 무기를 빼어들고 전투대형을 취했다.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만만하게 보이는 것 보다는 나았다.
“헉… 헉…….”
눈앞에 여름이 나타났다.
그 뒤로 겨울과 봄 그리고 가을이 나타났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돌핀 팬츠에 가슴골이 드러나는 나시티를 입고 나타났다.
그녀들은 달려온 탓에 호흡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오…….”
남자들이 너나할 거 없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마치 스포츠 웨어 CF모델들이 조깅을 나온 것 같은 모습 때문이었다.
그건 승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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