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인류의 빛>
쩌적- 쩌저저적!
마지막 남은 노하임이 얼어붙었다.
최치우는 왼손으로 가볍게 얼음 덩어리를 쳤다.
그러자 전갈 모양의 형체가 와르르 깨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불과 15분, 무림에서 말하는 일각(一刻) 만에 일곱 마리의 노하임이 전멸했다.
재규어도 두 마리밖에 안 보였다.
최치우는 상급 대지의 정령 일곱과 최상급 대지의 정령 둘을 소멸시켰다.
정령들이 소멸한 자리에는 황갈색 소울 스톤이 떨어져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남아있는 나드갈 두 마리와 최종 보스인 누쿠크를 쓰러트려야 소울 스톤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최치우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모두 대지 속성이긴 하지만, 무려 11개의 소울 스톤을 확보하게 된다.
절반만 에너지 추출을 해내도 5개 이상이다.
지구 곳곳에 올림푸스의 대체 에너지 깃발을 꽂을 수 있는 물량인 셈이다.
“이 싸움, 반드시 이겨야겠다.”
최치우가 전방을 노려보며 다시금 의지를 불태웠다.
누쿠크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예상보다 빨리 노하임과 나드갈이 소멸되어 당황했는지, 아니면 최치우의 힘을 빼는 것으로 만족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최치우는 남는 나드갈 두 마리도 소멸시키고 누쿠크에게 달려갈 것이다.
[크와아아아아-!]
정령왕의 권능 때문에 버서커 효과를 받은 나드갈이 포효했다.
순식간에 다른 정령들이 소멸되어 더욱 흥분한 것 같았다.
최상급 정령이 지니는 인격이 약해진 대신 공격은 훨씬 난폭해졌다.
슈우욱-
최치우의 발밑에서 땅이 치솟았다.
날카로운 창이나 다름없다.
미리 기운을 감지하고 피하지 않았다면 온몸에 꿰뚫렸을 것이다.
[죽어라!]
몸을 피한 최치우에게 나드갈 두 마리가 직접 날아왔다.
권능을 펼치는 것만으로는 절대 최치우를 쓰러트릴 수 없다.
다른 정령들이 소멸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깨달은 것이다.
후웅-
재규어의 앞발이 최치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제 재규어의 공격보다 몇십 배는 강한 파괴력이 담겨 있는 게 분명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바람의 압력으로 고막이 얼얼해졌다.
나머지 한 마리는 뒤에서 최치우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순순히 당할 최치우가 아니었다.
“미니 퀘이크, 프로즌!”
다른 속성의 6서클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하는 것은 7서클, 아니 8서클 마법을 펼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최치우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쿠구궁-
촤아아아악!
땅이 갈라지며 거칠게 흔들렸다.
최치우의 뒤에서 이빨을 드러낸 나드갈이 크게 휘청거렸다.
대지 속성 마법으로 대지의 정령을 물리친 것이다.
이후 차가운 빙결의 기운이 균형을 잃은 나드갈을 통째로 덮쳤다.
쩌저저저적!
중심을 잃으면 마법을 피하기도, 막기도 힘들다.
그만큼 6서클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하면 위력이 배가 된다.
이제 최치우는 마지막 남은 나드갈을 쳐다봤다.
정령왕의 권능으로 힘이 증폭됐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뭘 망설여? 아까처럼 미친 듯이 덤벼야지.”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나드갈을 도발했다.
아프리카에서 나드갈 한 마리와 격전을 벌였던 게 아득한 과거 같았다.
그때의 최치우와 지금의 최치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우라노스의 인장 덕분에 무한에 가까운 자연 에너지로 마법을 숙련한 최치우는 그리 지치지도 않았다.
정령 군단을 이끌고 최치우를 기다린 누쿠크의 기대가 빗나간 것이다.
그가 이토록 빠르게 최상급과 상급 정령들을 물리친 것은 역시 마법 덕분이었다.
그냥 마법이 아니라 6서클, 7서클의 고위 마법을 동시에 연달아 캐스팅했다.
아슬란 대륙의 어떤 마법사도, 현자 클래스에 도달했던 최치우의 전쟁 제로딘도 불가능한 경지다.
클래스는 낮아도 지금의 최치우가 제로딘보다 전투력은 훨씬 높은 것이다.
아직 무공과 과학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이제 금방이다.”
최치우는 마지막 남은 나드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뒤의 고릴라, 아니 킹콩 같은 누쿠크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땅을 박찼다.
파악!
최치우의 신형이 두 개로 쪼개졌다.
경공과 보법의 궁극이라는 이형환위(二形幻位)다.
[크르륵-!]
나드갈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진짜 최치우를 찾기 위해 애썼다.
곧이어 나드갈은 제법 똘똘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휘익-
왼쪽에서 달려드는 최치우에게는 앞발을 휘두르고, 오른쪽에는 바위 방패를 세운 것이다.
부웅!
최치우의 신형, 아니 그림자가 나드갈의 앞발에 정통으로 맞았다.
왼쪽은 이형환위로 만들어진 가짜였다.
진짜는 오른쪽이다.
퍼버버벅!
철문보다 두터운 바위 방패가 부서졌다.
방패를 뚫고 튀어나온 최치우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주먹을 곧게 뻗었다.
콰아앙-!
금강나한권의 극의, 천보일권(千步一拳)이다.
마치 바주카포를 쏜 것처럼 뚜렷한 권기(拳氣)가 직선으로 날아갔다.
퍼엉!
그걸로 끝이었다.
마지막 남은 나드갈은 재가 되었고, 그 자리에는 소울 스톤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마법으로 노하임과 나드갈을 상대하던 최치우가 무공을 펼쳤고, 갑작스러운 패턴 변화에 나드갈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인정한다, 인간. 너의 강함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최치우를 지켜보던 누쿠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치 못한 칭찬을 받은 최치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령왕에게 인정을 받다니, 가문의 영광이군.”
[그러나 너의 강함에 취해 실수를 했다, 인간.]
“실수?”
[마지막에 쓴 수법은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누쿠크는 최치우의 무공을 말하고 있었다.
만약 최치우가 마법만 펼쳤다면 누쿠크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공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무공을 일찍 선보였다.
정령왕 누쿠크는 최치우의 카드를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들의 소멸이 안타깝지만…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누쿠크는 소울 스톤으로 변해버린 노하임과 나드갈을 언급했다.
상급과 최상급 정령 군단으로 최치우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최치우가 어떻게 싸우는지 본 것만으로 소기의 성과는 달성한 셈이었다.
“대지의 정령들을 지키기 위해 함정을 팠다더니… 영악한 건 알아줘야 해.”
최치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5분이 넘도록 전투를 지켜보면 장단점을 분석하기 쉽다.
누쿠크는 정령들을 희생시킨 대가로 엄청나게 유리한 위치에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쿠크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대지의 정령왕 누쿠크, 오늘 이 자리에서 소멸해 나의 인장이 되어라.”
[가여운 소리를 하는구나.]
“끝은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최치우가 양팔을 오므렸다.
자세만 봐서는 마법을 캐스팅할지, 아니면 무공을 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누쿠크는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는 듯 가슴을 활짝 폈다.
바위 근육을 갑옷처럼 입은 육중한 신체의 고릴라.
이제부터 그와 부딪쳐야 한다.
일생일대의 전투가 시작되려는 순간, 최치우는 품에서 캡슐 몇 개를 꺼냈다.
펜타곤이 개발한 희대의 역작, 미쓰릴 필드였다.
“네가 본 건 절반도 안 되니까.”
투욱-
화아아아아악!
미쓰릴 필드의 역장이 최치우와 누쿠크를 감쌌다.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를 소멸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과학의 힘이 발휘됐다.
미쓰릴 필드가 뭔지 모르는 누쿠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부터 잠시지만 정령왕의 권능이 봉쇄됐다는 걸 알 리 없다.
권능을 펼치는 순간, 강력한 반발력이 누쿠크를 덮칠 것이다.
물론 최치우도 미쓰릴 필드의 역장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이 안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무공이면 충분하다.
타앗-
최치우가 바닥을 박차고 질주했다.
다시금 이형환위가 펼쳐졌고, 누쿠크는 지체 없이 권능을 행사했다.
쿠그그긍!
땅 밑에서 거대한 울림이 들렸다.
원래라면 작은 산(山)이 솟아나 최치우를 막아서야 했다.
그러나 권능은 끝까지 발현되지 않았다.
대신 미쓰릴 필드의 역장이 에너지를 흡수해 누쿠크에게 쏘아냈다.
쿠웅-!
퍼퍼퍼퍽!
난데없이 쏘아진 반발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누쿠크의 신체가 흔들렸다.
빠각-
최치우는 휘청거리는 누쿠크의 정수리에 선풍각을 꽂아 넣었다.
회전력이 실린 발차기는 바위처럼 단단한 누쿠크의 머리에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혔다.
“후우, 역시 한 방엔 안 되는군.”
멋지게 공격을 성공시킨 최치우가 착지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반면 시작부터 체면을 구긴 누쿠크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수작인가!]
“인간을 우습게 알았지?”
[무어라?]
“자연의 위대함을 부정할 수는 없지. 하지만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을 무시하면 큰 코 다쳐. 자연계를 지배하는 정령왕이라고 해도.”
최치우가 사뭇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누쿠크의 화는 더욱 거세질 따름이었다.
쿵! 쿵! 쿵!
누쿠크가 3M가 넘는 신체로 땅을 으깨며 최치우에게 달려왔다.
최치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주먹을 세게 쥐었다.
곧 미쓰릴 필드의 발동 시간이 끝난다.
무공을 펼치며 누쿠크의 육탄 공세를 막아내다 예고 없이 마법을 퍼부을 것이다.
이번에는 최초로 8서클 마법을 캐스팅할 작정이었다.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와라!”
최치우는 장판파에서 조조의 대군을 홀로 막아선 장비처럼 호쾌한 사자후를 뿜어냈다.
꽈아앙-
이윽고 누쿠크의 주먹과 최치우의 주먹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누쿠크의 바윗덩이 주먹은 최치우보다 족히 3배는 더 크고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최치우는 한 발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꽝- 꽈앙- 꽈아앙-
둘 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쉬지 않고 주먹을 뻗어냈다.
잠깐 사이에 서로의 오른손과 왼손을 맞부딪치며 불꽃을 뿜었다.
먼저 피하면 지는 것처럼 자존심 싸움이 됐다.
어차피 미쓰릴 필드 때문에 마법이나 권능을 펼칠 수 없어 육탄전이 최선이었다.
지이이잉!
그 순간, 최치우는 미쓰릴 필드의 역장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제한 시간 3분이 끝난 것이다.
팟!
최치우는 자존심보다 실리를 택했다.
정령 군단을 데리고 함정을 파놓은 누쿠크 앞에서 혼자 자존심을 지킬 필요는 없다.
[도망치는 것인가-!]
“이거나 처먹어, 블리자드!”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8서클의 마법, 블리자드가 캐스팅됐다.
심장에 박힌 우라노스의 인장이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끌어모았다.
촤라라라라락!
6서클 프로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이 누쿠크를 뒤덮었다.
마른하늘에 불어닥친 빙결의 폭풍은 누쿠크의 거대한 신체를 얼려 버렸다.
[감히……!]
하지만 정령왕은 역시 정령왕이다.
온몸이 얼어붙는 과정에도 누쿠크는 의지를 발산하며 저항했다.
시간이 지나면 블리자드의 기운을 물리치고 다시 괴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자칫 누쿠크가 정령왕의 권능이라도 발현하기 시작하면 싸움은 미궁에 빠질 것이다.
블리자드를 펼친 최치우는 하늘 높이 떠올라 누쿠크의 이마로 떨어졌다.
아랑권의 살초, 맹아일격(猛牙一擊)이 반쯤 얼어붙은 누쿠크의 미간을 쪼갰다.
현대에 환생해 내공도 없는 상태로 처음 펼친 초식이 바로 맹아일격이었다.
똑같은 초식이지만 위력은 천지차이다.
살짝 얼었던 누쿠크의 머리가 그대로 터지며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화아아악-
곧이어 몸을 잃은 몸이 가루가 되어 산화했다.
누쿠크의 형체가 사라지며 무형의 기운이 최치우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최치우는 또 다시 정령왕의 인장을 품게 된 것이다.
우라노스의 인장과 누쿠크의 인장.
최치우는 현대뿐 아니라 모든 차원계를 통틀어 정령왕의 인장을 두 개나 품은 최초의 인간이 됐다.
그러나 최치우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돈으로 따지면 이게 다 얼마야!”
그는 여기저기 흩어진 11개의 소울 스톤을 줍는 데 정신이 없었다.
이제 북한에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는 걸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북한뿐 아니라 유럽, 미국, 남미, 아시아, 중동 각지에 발전소 건립을 약속하며 올림푸스의 에너지 지배권을 전 세계로 확대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에게 최초로 불을 전달해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최치우도 현대의 인류에게 소울 스톤이라는 새로운 빛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최치우와 올림푸스의 이름은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각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