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38화 (238/243)

# 238

***

두 마리의 나드갈이 땅 밑에서 움직였다.

지진으로 뒤집힌 도로 아래에서 무척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최치우는 나드갈의 기운을 손쉽게 느낄 수 있었다.

두 마리는 안내자 역할에 충실했다.

혹시 최치우가 따라오지 못할까 봐 노골적인 기운을 뿌려댔다.

일반 사람들도 나드갈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왠지 모를 중압감을 느낄 것 같았다.

덕분에 나드갈 두 마리가 땅 밑으로 숨어서 이동해도 놓칠 염려는 없었다.

다만 이동 거리는 꽤 멀었다.

오사카 도심에서 외곽으로 한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질수록 땅 밑으로 움직이는 나드갈 두 마리는 속도를 높였다.

최치우도 경공을 펼치며 속도를 맞췄다.

그러다 사람이나 자동차가 나타나면 최치우는 거짓말처럼 속도를 줄였다.

한참 앞서 나가던 나드갈도 최치우가 멈추면 따라서 멈춰 섰다.

그들은 최치우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단단히 부여받은 것 같았다.

그렇기에 속도까지 맞춰주며 안내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마침 대지진으로 오사카 도심의 CCTV도 대부분 무용지물이 됐다.

최치우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경공을 펼칠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령왕밖에 없다.’

최치우는 대지의 정령왕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했다.

인격을 지닌 최상급 정령이 둘이나 나타난 것도, 그리고 묵묵히 안내자 노릇을 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대지의 정령왕, 누쿠크.

우락부락한 고릴라의 형상을 닮았다고 알려진 대지의 지배자를 곧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정령왕에 최상급 정령이 둘. 부담스럽지만… 상당히 재밌어지겠군.’

최치우가 현대에 환생해서 경험한 최악의 전투는 우라노스가 상대였다.

그런데 누쿠크를 만나면 최악이 갱신될지 모른다.

최상급 정령 나드갈도 더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는 미소를 지은 채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를 만났을 때보다 몇 단계는 더 강해진 자신을 믿기 때문일까.

어느새 오사카 도심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최치우는 결전의 순간을 고대하는 눈치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마리의 나드갈은 쉬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찌릿-!

그때였다.

한참을 달리던 중 최치우의 감각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려댔다.

본능이 먼저 위험을 감지한 셈이었다.

‘왔다.’

최치우는 가까운 거리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존재가 있음을 느꼈다.

나드갈 두 마리의 기운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 같다.

이만한 존재감이라면 역시 정령왕이다.

‘누쿠크.’

아슬란 대륙에서도 기록으로만 접했던 대지의 정령왕, 누쿠크와 조우할 시간이었다.

***

괜히 21세기 이후 일본 최악의 대지진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오사카 일대를 집어삼킨 대지진은 도심 외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두 마리의 나드갈은 목적지에 도착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치우는 낮게 그르렁거리는 황갈색 재규어를 쳐다볼 새도 없었다.

무너진 건물, 불규칙적으로 솟아난 바위, 시커멓게 패인 싱크홀과 도로.

오사카 도심 외곽으로 나오니 대지진의 흉터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처절하게 망가진 지역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CCTV는커녕 모든 시스템이 파괴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가 됐다.

일본 정부에서 복구에 나서도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바로 여기에 대지의 정령왕 누쿠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투둑- 투두둑-

건물의 잔해가 흔들렸다.

거대하고 육중한 형체가 쓰러진 건물의 구조물을 밀어내고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였다.

두 마리의 나드갈은 자세를 바짝 낮췄다.

한껏 온순해진 태도로 정령왕을 영접하는 것이다.

쿠구구궁!

지축이 울렸다.

최치우는 발끝으로 와 닿는 진동을 감지했다.

이만한 기파를 발산하는 존재는 현대에서 두 번째로 만나본다.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에 비해 결코 존재감이 약하지 않았다.

곧이어 저 앞에 거대한 고릴라 한 마리가 두 팔을 길게 늘어트리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누쿠크의 형상은 고릴라였다.

황토색 바윗덩어리가 근육처럼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다.

영악하고 거만한 나드갈 두 마리가 엎드려 맞이하는 게 이해됐다.

대지의 정령들을 주관하는 절대자, 누쿠크가 최치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라노스의 인장을 가진 인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누쿠크는 최치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족히 3M는 채우고도 남을 거대한 형체에서 울리는 의지는 단순하고 강렬했다.

반드시 최치우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최치우는 확고부동한 적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대답했다.

“정령들의 의리가 눈물겹군. 우라노스의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복수.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인간들의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궁금하군.”

[우리 아이들의 소멸을 막기 위해서 너를 소멸시키겠다.]

누쿠크의 논리는 간결했다.

최치우가 정령, 특히 대지의 정령들을 사냥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현대의 정령계에서 최치우는 유일한 정령 헌터로 악명이 자자했다.

사실 현대는 정령들이 활개 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차원이었다.

정령술사는 없지만, 대신 마법사나 기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를 이끄는 과학자들은 정령의 존재 자체를 불신한다.

그렇기에 크게 무리해서 인간들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마음껏 대자연을 갖고 놀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최치우라는 정령 헌터가 나타난 것이다.

상급 정령과 최상급 정령을 잡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어코 물의 정령왕까지 소멸시켰다.

대자연을 장난감 삼아 현대의 숨은 지배자 노릇을 하던 정령계가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속성의 정령들이 연합을 형성하진 않는다.

다만 우라노스처럼, 그리고 지금의 누쿠크처럼 먼저 나서는 정령왕은 생길 수 있다.

“나드갈이나 잡고 소울 스톤을 챙기려 했는데, 뜻밖의 횡재를 하겠어.”

최치우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정령왕 누쿠크와 최상급 대지의 정령 나드갈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아무리 최치우가 우라노스 때보다 훨씬 강해졌어도 부담스러운 전력이다.

그러나 누쿠크는 준비한 게 더 있었다.

[순진무구한 우라노스와 나를 비교하지 마라, 인간.]

아슬란 대륙에서 대지의 정령은 영악하고 교활한 편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지의 정령왕 누쿠크도 마찬가지였다.

나드갈 두 마리로는 부족하단 것일까.

사방에서 무시 못 할 기운이 옥죄어 오는 게 느껴졌다.

‘함정이었군.’

누쿠크는 오사카 대지진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지진이 발생하면 대지의 기운이 가장 왕성해진다.

그때를 빌려 최치우를 잡기 위한 덫을 놓은 것이다.

찌리릿-

대지의 정령들이 최치우의 전후좌우를 포위했다.

최상급 나드갈이 무려 네 마리, 상급의 노하임이 일곱 마리다.

누쿠크를 합하면 열두 개체가 딱 맞춰진다.

12는 자연계에서 가장 완벽한 숫자로 통한다.

대지의 정령왕 누쿠크가 최치우를 쓰러트리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전갈이 일곱, 재규어가 넷, 그리고 고릴라… 아니, 킹콩이 하나. 이거 완전 동물의 왕국인데.”

최치우는 웃으며 농담을 뱉었지만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는 최치우도 이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긴장하였군, 인간.]

누쿠크는 최치우의 호흡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간파했다.

상대는 정령왕이다.

그 하나로도 벅찬데 대지의 정령 군단을 이끌고 왔다.

어쩌면 오늘이 최치우가 현대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어머니… 은서, 그리고 내 사람들.’

최치우는 현대에서 만난 인연을 떠올렸다.

다른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인연을 맺었다.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은,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된 연인은, 지켜주고 싶은 직원들은 모두 현대에서 처음 생겼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우고 싶다는 감정도 7번의 환생 끝에 알게 됐다.

원래 최치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까짓것, 죽어봤자 어차피 다른 차원에서 다시 환생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죽고 싶지 않다. 절대 죽을 수 없어!’

난생 처음으로 죽음이 두려워졌다.

현대에서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고오오오오!

최치우의 단전에서 뜨거운 내공이 용솟음쳤다.

금강나한권과 아랑권.

서로 상극인 두 무공이 최치우의 몸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최치우는 역설적으로 더욱 강해졌다.

죽지 않기 위해서, 현대에서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누쿠크와 대지의 정령 군단을 소멸시켜야 한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유,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어떤 두려움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지만, 반대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드는 두려움도 있다.

7번의 환생 끝에 주어진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최치우의 두려움은 무엇보다 굳건한 의지로 환원됐다.

“11개의 소울 스톤, 그리고 정령왕 누쿠크의 인장까지. 모두 내가 갖겠다.”

최치우가 대범하게 소리쳤다.

함정에 빠졌지만 싸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뜻이다.

우웅- 우우우웅-

누쿠크가 등장할 때부터 주위에 형성된 무형의 결계가 거칠게 떨렸다.

결계를 친 정령왕이 분노했다는 의미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사죄하게 만들어주마. 무력함을 절감하여라, 인간.]

누쿠크가 선전포고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쿵! 쿠쿵!

어깨를 쫙 펼친 누쿠크가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영화 속 킹콩이 위세를 과시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최치우 주위를 맴돌던 네 마리의 나드갈과 일곱 마리의 노하임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크와아앙-!]

인격을 지닌 나드갈 네 마리도 눈빛이 흉폭하게 변했다.

정령왕의 권능을 받아 일종의 버서커 효과가 적용된 것 같았다.

미쳐 날뛰는 11마리의 최상급, 상급 정령들을 쓰러트린 다음에야 누쿠크와 싸울 수 있다.

최치우는 한층 짙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펼쳤다.

“시작하자. 프로즌-!”

빙결의 마법이 캐스팅되며 전투가 개시됐다.

아무도 모르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대(對)정령전이다.

최치우가 전무후무한 정령왕 슬레이어로 우뚝 설지, 아니면 한 줌의 재로 바스러질지 곧 결판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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