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33화 (233/243)

# 233

<피스 메이커>

꼭 잡은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달됐다.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느낌이다.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훌쩍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겨울이 은근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 최치우는 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단전의 심후한 내공이 추위와 더위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줘서가 아니다.

겨울의 한기를 녹이는 체온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최치우에게 따스함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은서였다.

뉴욕에 도착한 최치우는 가장 먼저 유은서를 만났다.

“손만 잡았는데 14시간 비행의 피로가 풀리는 거 같다.”

“나도 그래, 치우야. 오늘만 생각하면서 버텼어.”

자주 보기 힘든 장거리 커플이기에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는 아무 일정도 안 잡았어.”

“정말? 그래도 괜찮아?”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하루 종일 데이트하자.”

최치우가 웃으며 말했다.

남들이 보기에 최치우는 수십조의 자산을 가진 초현실적 부자다.

그래서 마냥 부러워하지만, 실상은 매일을 분초 단위로 쪼개며 살고 있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사업만 관여해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네오메이슨을 추적하는 UN의 특수기구 활동부터 북한 비핵화 문제까지, 국제사회의 굵직한 이슈를 주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오늘 뉴욕에 도착한 것도 일 때문이었다.

먼저 알렉산드로 사무총장으로부터 UN 특수기구의 활동 내역을 듣고, 방향성을 의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사드의 제2국장 라파엘도 만나기로 했다.

모사드는 평화전쟁에서 큰 힘이 되어 줬다.

이제 최치우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차례였다.

골치 아픈 일정을 마치면 곧바로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날아갈 계획이다.

아무도 모르게 백악관에 방문해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는 약속이 잡혀 있다.

최치우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해 독일의 총리, 케냐 대통령 등 여러 정상을 만났다.

그렇지만 미국 대통령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명실공히 세계 최강대국을 이끄는 지도자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만남도 아니다.

최치우는 미국 대통령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다들 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을 미국 대통령이라 말한다.

최치우도 그에 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눈에 보이는 재산만 중요한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국제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파워는 돈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돈, 인맥, 명예, 인기, 경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되어 한 사람의 영향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치우의 영향력은 미국 대통령과 어깨를 견줄 만했다.

평화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UN의 특수기구 창설을 주도한 것.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독대한 다음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

어느 하나 세계 역사에서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최근의 행보를 돌아보면 최치우가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사실 진즉 백악관에서 미팅이 이뤄졌어야 했을지 모른다.

이렇듯 최치우는 상상을 초월한 거물이 됐지만, 여자 친구인 유은서 앞에서는 다정한 남자 친구일 따름이었다.

하루를 통째로 비워 유은서와 데이트에 집중하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기 때문인지 최치우는 유은서를 유리구슬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어디로 갈 거야?”

“예약해 둔 레스토랑이 있지. 이번에 새로 미슐랭에 오른 곳이라던데.”

“바쁠 텐데 그런 건 언제 찾아봤어?”

“너랑 데이트하려고 준비를 좀 했지.”

자신 있게 씨익 웃은 최치우가 유은서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11월의 뉴욕은 벌써 심술궂은 날씨를 선보이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봄 같았다.

최치우도 오늘만큼은 복잡한 고민을 잊기로 마음먹었다.

‘무려 7번의 환생을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누구도 듣지 못하지만 최치우는 진심으로 유은서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을 전해줬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도, 올림푸스를 함께 세운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던 최치우의 영혼은 현대의 지구에 이르러 비로소 성장하고 있었다.

***

뉴욕에서 다시 만난 모사드의 실질적인 리더 라파엘은 과연 놀라운 여자였다.

그녀는 최치우를 보자마자 대뜸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백악관에서 1 : 1 미팅이 잡혔다고 들었어요. 어떤 내용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어지간해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최치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 대통령과 최치우의 만남은 극비 중에서도 극비였다.

CIA에서도 미리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미국 정보기관도 아닌, 이스라엘 모사드의 라파엘이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모사드가 은밀하게 CIA를 해킹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최치우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레 대답했다.

“역시 모사드는 만날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군요. 그래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대체 무슨 일로 백악관의 주인과 올림푸스의 CEO가 은밀하게 만날까…….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어요.”

라파엘은 모사드의 한계 또한 순순히 인정했다.

최치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라파엘의 겉모습에 현혹당하면 큰 코 다친다.

외모는 마치 축구선수 옆에 붙어 다니는 늘씬한 모델 같지만, 한창 젊은 나이로 세계 3대 정보기관을 이끌고 있는 괴물이 그녀의 실체다.

“불필요한 추측은 서로 사양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요. 우리 모사드는 단 한 가지 가능성만 보고 아프리카에서 올림푸스를 도왔어요. 그 결과 평화전쟁이 하루 만에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죠.”

“이제 그 보상을 받을 차례다?”

“우리가 보상을 주고받는 관계로 거래를 하진 않았잖아요? 파트너에 걸맞은 예의를 원할 뿐이에요.”

라파엘의 말은 자못 의미심장했다.

모사드와 올림푸스의 사이를 훨씬 깊게 정의내린 것이다.

일회성 거래가 아닌,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최치우로서도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정보다.

최치우는 돈을 주고 어나니머스를 움직일 수 있고, 미국의 펜타곤과 CIA, 영국의 MI6와도 우호적인 인연을 쌓아 놓았다.

그러나 무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가장 독종으로 알려진 모사드와 손을 잡아서 나쁠 게 하나도 없다.

어차피 100% 진심 어린 동맹이 아니라는 건 라파엘도 알고, 최치우도 알고 있다.

그저 결정적인 배신을 하지 않고, 필요할 때 서로 힘을 빌려주는 관계.

그만하면 더 바랄 게 없다.

“백악관을 다녀오면 내가 모사드, 아니 이스라엘에 주는 선물이 뭔지 알게 될 겁니다.”

“미국 대통령과 우리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계획인가요?”

예상 밖의 말을 들은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정보기관의 수장답지 못하게 순간적으로 표정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이것마저 고도로 계산된 행동일지 모른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중동 국가들의 반대로 아프리카와 수교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반기지 않죠.”

“미국과 UN이 동시에 협조해서 케냐, 남아공을 필두로 아프리카 주요 국가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들어서고 정식으로 국교를 맺도록 추진하겠습니다.”

“……!”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이번은 절대 계산된 연기가 아니다.

순수하게 놀란 것이다.

최치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툭 말했지만, 실로 엄청난 선물을 이스라엘에 안겨준 셈이었다.

이스라엘은 국제 사회의 외톨이나 다름없다.

유대인들의 어마어마한 자금력과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콧대를 높이지만 외교 무대의 왕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상 국가로서 많은 나라와 국교를 맺고 발언권을 높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숙원 중 하나다.

최치우는 그들의 오랜 목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라파엘은 최치우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 못지않게 최치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수집했다.

26살의 한국 청년이 마음만 먹으면 독일 총리와 UN 사무총장을 움직이고, 나아가 미국 대통령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거란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평화전쟁에 협력한 대가로는 너무 많은 걸 주는 게 아닌가요?”

라파엘의 솔직한 물음이 최치우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만, 조만간 모사드에서 나를 위해 땀 흘릴 일이 있을 겁니다.”

“제2국장으로서… 그때가 오면 성심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리죠. 야훼의 이름으로.”

라파엘은 유대교의 유일신 야훼를 언급했다.

다음에 최치우가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목숨 걸고 돕겠다는 뜻이다.

최치우는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워싱턴에 가야 해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우리 수상께서 만나고 싶어 하세요.”

“천천히 시간을 잡아봅시다.”

“네.”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이스라엘 수상이 만나자는데 최치우는 여유롭게 시간을 갖자고 대답했다.

짧은 대화에서도 최치우의 국제적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호가 함께하기를, 샬롬.”

“샬롬.”

최치우는 라파엘의 축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다음 행선지는 백악관이다.

***

미국 정치는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얼핏 보기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 체제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공화당 안에서 수많은 세력이 존재하고,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8년 만에 공화당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현직 미국 대통령은 주류와 거리가 멀다.

반면 마이크 페인스 부통령은 네오콘 출신이다.

군수업체, 총기업체, 그리고 미군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마이크 부통령은 공화당의 주류이자 최고 실세였다.

그에 반해 대통령은 아웃사이더나 다름없다.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과도 싸우고 공화당에서도 견제를 받는 처지다.

그래서일까.

일각에서는 현직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지 못하고 4년의 임기만 채울 거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었다.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중간선거는 그만큼 중요해졌다.

대통령의 인기가 여전한지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간선거의 결과가 나쁘면 공화당 주류와 네오콘은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최치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안이 보이지 않는 검정색 방탕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에 들어선 최치우는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비밀스러운 미팅이기 때문일까.

복잡한 절차 없이 금방 미국 대통령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모시겠습니다.”

미국 비밀 경호국 국장이 최치우를 안내했다.

공식적인 방문이라면 당연히 백악관 비서들이 안내를 맡았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는 만남이기에 비밀 경호국이 나섰다.

비밀경호국은 CIA나 FBI보다 더 알려진 게 없는 조직이다.

미국 대통령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답게 국장부터 기세가 남달랐다.

인간계 최강이라 불리는 리키와 싸움을 붙여도 쉽게 밀릴 것 같지 않았다.

‘역시… 이 세계의 1인자를 지키는 책임자답군.’

비록 4년, 혹은 8년의 임기가 있지만 미국 대통령은 부정할 수 없는 세계의 1인자다.

최치우는 그를 만나러 걸어가며 각오를 되새겼다.

‘나는 8년 짜리 1인자가 아닌, 인류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불멸의 1인자가 되겠어.’

결코 황당하다고 코웃음 칠 수 없는 다짐이었다.

그런 포부를 품은 당사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최치우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멸의 1인자라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그리고 과감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도 과정이 될 것이다.

“반갑습니다.”

문이 열리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국 남부 출신 특유의 영어 악센트가 느껴졌다.

최치우는 미국 대통령의 두툼한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또 다시 세상을 바꿀 담판을 지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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