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격변의 중심>
모사드 국장은 이스라엘 비밀 정보기관을 이끄는 수장이다.
장관급 대우를 받는 그는 CIA 국장, MI6의 디렉터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게 베일에 꽁꽁 싸인 모사드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몇 안 되는 인물이 바로 국장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국정원장인 셈이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총 책임자는 정치적인 자리다.
실제로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실무자들은 대부분 수면 아래 숨어 있다.
국정원에서도 신원이 공개되는 원장과 차장들보다 비밀 직함을 유지하는 실세들의 파워가 더 강하다.
비밀 정보기관이라면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사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대외적 책임자인 제1국장은 따로 있다.
그러나 제2국장이 실질적으로 모사드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핵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의 젊은 미녀가 자신을 모사드의 제2국장이라 소개했다.
트릭일까.
최치우는 가장 먼저 속임수가 아닐지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의심을 접었다.
모사드에서 굳이 가짜를 내세울 이유가 없다.
게다가 최치우는 주요 국가의 대통령와 총리를 1 대 1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모사드의 실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게 믿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라파엘 국장님.”
최치우는 제2라는 수식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1국장은 라파엘이 올린 보고서대로 결재를 할 것이다.
결정은 이곳에 나와있는 라파엘의 몫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을 알고 있으니 대화가 빠르겠습니다.”
최치우는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사드에서 파악한 내용이다.
굳이 말을 돌리며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최치우는 협상에서 속전속결을 선호한다.
심지어 도움을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진솔하고 당당한 태도가 최치우를 협상의 달인으로 만든 최강의 무기였다.
“UN 평화유지군의 전투 병력이 갑자기 늘어나서 좀 놀랐죠. 게다가 헤라클래스도 용병들을 대거 채용했고. 단순히 케냐에 진출해서만은 아닌 거 같았어요.”
라파엘은 판단의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했다.
그녀는, 그리고 모사드는 최치우와 알렉산드로 총장이 병력을 늘린 것까지 감지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누구를 치려는 건지도 파악했습니까?”
“새롭게 세력을 키우는 반군들. 아닌가요?”
“그럼 새로운 반군들이 누구의 지원을 받아 생겨났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그건…….”
막힘 없던 라파엘이 말끝을 흐렸다.
최치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모사드가 알고 있는 것을 교환합니다. 그럼 퍼즐이 완성될 테니까.”
“정보 교환?”
“그런 다음 조건이 맞으면 힘을 합치고.”
최치우의 제안은 대담했다.
함께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치르자고 요구하기 전, 각자의 정보를 카드로 내밀었다.
모사드가 입수한 정보를 얻으면 이스라엘까지 날아온 비행기값은 건지는 셈이다.
라파엘도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정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더구나 최치우 정도의 인물이 질 낮은 정보로 배팅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짧게 고민을 끝낸 라파엘이 당차게 말했다.
“좋아요. 우리는 6개 반군들의 거점과 전력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어요.”
“거점은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전력 파악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전투 병력과 주요 무기 리스트.”
라페일의 말을 들은 최치우가 눈을 빛냈다.
반군들의 병력과 무장 상태를 알 수 있다면 작전을 세우는데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최치우도 자체적으로 파악을 했지만, 모사드의 정보와 더블 체크를 할 필요가 있다.
“그쪽은요?”
이번에는 라파엘이 최치우의 패를 확인하려 했다.
최치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오메이슨.”
“그들이?”
라파엘은 네오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사드의 실질적인 리더가 네오메이슨을 모르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네오메이슨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무슨 미친 짓을 벌이려는지 세세하게 아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헤라클래스와 UN 평화유지군의 목표는 단 하나, 네오메이슨보다 먼저 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의 혼란을 막는다. 이것뿐입니다.”
“네오메이슨은 금융 마피아 집단인데, 그들이 굳이 아프리카의 반군을 지원할 이유는…….”
“의심스러운 자금 흐름 내역, 그리고 네오메이슨의 계획까지 여기 담겨 있죠.”
최치우가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라파엘에게 USB를 던졌다.
그녀는 곧장 USB를 랩탑 컴퓨터에 꽂고 최치우의 파일을 살펴봤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고 믿는 건가요, 올림푸스는? 그리고 알렉산드로 사무총장님도?”
“아닌 것 같습니까?”
최치우는 더 이상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USB 파일에는 최치우가 정리한 네오메이슨의 반군 지원 내역과 의도가 고스란히 적혀 있다.
판단은 라페엘의 몫이다.
“이제 모사드의 카드를 넘길 차례입니다.”
딸칵-
최치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파엘이 주머니에서 다른 USB를 꺼냈다.
두 사람 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할 생각을 하고 만난 것이다.
“그 안에 있어요. 6개의 반군들이 어느 정도의 병력을 모았는지, 그리고 주의해야 할 무기는 무엇인지.”
“1차 거래는 만족스러운데, 다음 스텝을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최치우가 라파엘의 USB를 챙기며 말했다.
그는 더블텐으로 예정됐던 D-Day를 최대한 당길 작전이었다.
반군 연합의 동향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찌릿!
허공에서 최치우와 라파엘이 시선이 얽히며 스파크를 만들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죠? 그리고 줄 수 있는 것은?”
“모사드가 이 전쟁에 함께 하길 원합니다.”
“그 말은…….”
“아프리카 북부의 반군들을 교란해서 고립시키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대륙 곳곳에 숨어 있는 모사드의 파트너들이 나서서 싸우는 게 두 번째.”
“그 정도면 단순한 거래가 아니네요.”
“대신 모사드는, 아니 이스라엘은 올림푸스의 최치우에게 빚을 지우는 겁니다. UN에서 영향력도 커질 테고.”
최치우는 어깨를 쫙 펴면서 말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당황스럽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모사드의 대대적인 참전을 바라는 대가치고는 너무 터무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4시간 뒤에 남아공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겁니다. 그때까지 모사드의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행운을 빌겠어요.”
라파엘은 두루뭉술한 대답을 하고 의자를 돌렸다.
최치우는 그녀를 방안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스라엘까지 날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모사드와 정보를 교환하며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다.
이제 더 애를 쓴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의 일을 마쳤으니 하늘이 도와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사드의 안전 가옥을 벗어났다.
남은 몇 시간 동안 텔아비브에서 커피라도 한잔 마실 생각이었다.
아프리카를 넘어 중동의 화약고도 종횡무진 휘저은 최치우의 행보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앞으로 4시간이면 뚜렷해질 것 같았다.
***
“리키, 6.25가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까?”
최치우가 리키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지프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리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싸부, 6.25가 뭐예요?”
최치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말을 곧잘 하는 편이지만 리키는 흑인 혼혈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않았다.
최치우는 자못 친절하게 다시 말했다.
“한국전쟁 말입니다.”
“아하, 그거야 북한이 나쁜놈이라서?”
“방심해서.”
“와우!”
최치우의 아재식 개그에 리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 사람들에겐 익숙한 이야기지만, 리키는 처음 듣는 농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일찍 움직이는 것도…….”
“방심할 때를 노려서?”
“바로 그거죠.”
“역시 싸부는!”
리키가 필요 이상으로 감탄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풀려고 말을 꺼낸 최치우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두 사람을 태운 지프차는 케냐에서 르완다로 질주하는 중이었다.
헤라클래스 대원들도 각기 다른 지프차에 올라타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동선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르완다 국경지대 인근에서 모일 것이다.
휘이이이이-
세찬 모래바람이 지프차를 훑고 지나갔다.
머지않아 모래 대신 진한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퍼져나갈 것 같았다.
최치우와 리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레드 엑스 섬멸전을 경험한 헤라클래스 1기 대원들 정도만 둘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인간계 최강이자 헤라클래스의 리더인 리키, 그리고 현실의 한계 따위는 가뿐하게 넘어선 최치우.
D-Day를 한참 당겨서 더블텐 작전이 실행됐고, 최치우는 리키와 같이 르완다의 반군을 공격하는 루트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르완다 국경지대의 반군이 가장 위험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사드의 라파엘 제2국장에게 받은 정보 덕분에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네오메이슨은 비교적 감시가 취약한 아프리카 북부의 반군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모양이었다.
르완다 지역의 신규 반군은 병력부터 최신 무기까지 정규군대에 필적할 수준이었다.
모잠비크를 비롯한 다른 지역도 경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UN 평화유지군과 헤라클래스의 나머지 부대들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최치우는 리키와 함께 나선 대신 르완다에 투입되는 병력을 많이 줄였다.
어차피 최치우가 동행한 이상 머릿수는 무의미해진다.
최치우는 핵무기와 비교할 수 있는 일종의 전략 자산이다.
가장 까다로운 르완다 반군을 진압하는데 전략 자산 최치우를 쓰면서 헤라클래스의 병력은 아꼈다.
그만큼 남는 병력은 다른 지역에 보낼 수 있게 됐다.
최치우는 현대에 환생해서 올림픽 금메달 덕분에 군대를 면제 받았다.
그렇지만 병법과 전략은 베테랑 장군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실전을 경험하지 못한 장군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무수히 많은 전쟁을 겪으며 전략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싸부, 이제 곧.”
리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농담을 일삼은 하이톤이 아니라 착 가라앉은 로우톤의 음성이 울렸다.
다른 동선으로 르완다까지 이동한 헤라클래스 대원들의 지프차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네오메이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군들과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아니,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최치우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지휘는 리키가 맡아요. 나는 알아서 움직일 테니까.”
“라져.”
“경계 병력이 없는 걸 보니 모사드의 교란이 먹힌 것 같습니다.”
최치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사드는 터무니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치우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여러가지 정치적 고려가 얽힌 복잡한 결정이었다.
아무튼 모사드의 정보 교란으로 아프리카 북부의 반군들은 철저하게 고립됐다.
전쟁의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방심하게 된 것이다.
모사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쯤 경계 병력이 헤라클래스의 지프차를 발견했을 것이다.
“갑시다.”
최치우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리키는 레게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며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레츠 고!”
훗날 역사에 평화 전쟁으로 기록되는 아프리카의 반군 소탕전이 열렸다.
그 처음과 끝, 그리고 중심에 최치우가 오롯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