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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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은 마치 학생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평소 소울 스톤 발전소에 대해, 또 올림푸스의 개발 사업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았던 모양이다.
최치우는 북한의 젊은 독재자가 결코 멍청한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긴, 형을 밀어내고 30대 초반의 나이로 군부와 당을 장악했으니… 멍청할 리 없지.’
세상 사람들은 김정은을 광인(狂人)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과 일부러 찌운 살이 아닌, 그의 진짜 모습을 주시해야 한다.
“광명에서는 그 발전소 하나로 필요한 전기가 다 채워진다, 이 말이오?”
“광명, 라이프치히, 두 도시의 필요 전력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케냐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라믄 우리 공화국의 개성 공단을 돌리는 데 돌맹이 하나로 충분하단 말 아니갔어?”
“공단은 특수 지역이지만, 수치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거 이거… 우리 민족에 이런 인물이 나오고 말이야. 남조선은 복도 많소.”
김정은이 활짝 웃으며 최치우를 치켜세웠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 지나자 분위기는 놀랍도록 부드러워졌다.
최치우는 김정은의 협상 스타일을 간파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간을 보는군.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부드럽게, 반대로 겁을 먹으면 더 세게 밀어붙이는 수법인데……. 제법이지만 나한테는 안 통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게 들이대는 스타일은 의외로 잘 먹힌다.
특히 북한처럼 모든 게 베일에 싸인 국가 지도자가 강약약강으로 나오면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치우는 김정은보다 몇 수는 앞서 있었다.
다양한 차원에서 환생하며 만났던 독재 군주와 광인들이 한 트럭이다.
김정은이 아무리 영민한 독재자라고 해도 최치우의 계산 범위를 벗어나진 못한다.
최치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심리를 읽어내고 있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동력으로 제2의 개성 공단을 짓고 싶다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를 낮춰야지.’
파악을 마친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가동이 중단됐지만, 개성 공단은 남북경제협력의 좋은 모델입니다. 만약 제2의 개성 공단, 제3의 개성 공단이 들어서면 경제 개발에 엄청난 효과를 끼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니갔어! 공단을 여럿 지어서 남조선이나 다른 나라에서 투자를 하고, 우리 노동자들은 땀 흘려 일하면 얼마나 좋갔냐는 말이오.”
“첫걸음부터 시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첫걸음이라면…….”
“남북정상회담입니다.”
최치우는 다시 한번 평화로 가는 절차를 강조했다.
사실 그의 대화 스킬은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먼저 김정은이 원하는 경제 개발 모델을 언급하며 가려운 곳을 긁었다.
그렇게 먹음직스러운 당근을 제시한 다음 곧바로 채찍을 들었다.
평양에서 김정은을 상대로 이만큼 대담하게 협상을 시도한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최치우는 소울 스톤이라는 당근을 독점하고 있다.
조커 카드를 들고 포커를 치는 셈이다.
게다가 무력(武力)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평범한 사람들은 김정은을 도발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 북한의 수용소에 갇히는 그림을 상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상 국가에서는 벌어질 가능성이 낮은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최치우는 수용소 따위를 겁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무공이나 마법으로 김정은의 목을 따버리고 유유히 탈출할 수도 있다.
세상을 굽어 내려다볼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이 최치우를 당당하게 만드는 마지막 한 수였다.
그렇기에 최치우는 날고 기는 협상가들도 발끝 아래 둘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갖지 못한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데 협상에서 밀리는 게 더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수뇌회담을 열어도… 그 돌맹이, 소울 스톤으로 발전소를 짓고 공단을 건설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지 않갔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남북에 이어 북미회담의 성공까지, 올림푸스가 움직일 겁니다.”
“제재가 해제되믄 발전소로 딴소리 할 것은 아니갔지?”
“발전소와 자원 개발권을 바꾸는 정당한 거래를 원할 뿐입니다.”
“거래라, 거래. 거 좋구만. 내 친서를 한 장 써주갔어.”
뜻밖의 말이 나왔다.
김정은의 친서(親書)는 생각보다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최치우가 친서를 들고 귀환하면 정제국 대통령이 직접 맞이할 수밖에 없다.
남북정상회담도 속도를 내게 될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빨리 빨리 봐야지. 그래야 전기를 만드는 돌로 발전소를 세우고, 또 공단도 짓지 말이오.”
김정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동당 간부를 불러 친서를 준비시켰다.
북한의 새 지도자가 대한민국에 보내는 첫 번째 친서다.
평양 특사단에서 다름 아닌 최치우가 그 친서를 받아낸 주역이 됐다.
최치우는 평양에서 폭풍의 씨앗을 얻어냈다.
올림푸스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한반도의 운명까지 주관하는 플레이어로 우뚝 섰다.
세상을 밝힐 새롭고 분명한 빛줄기가 한반도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
6인의 평양 특사단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판문점 남측에 도착한 특사단은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방북 성과를 설명했다.
특사단을 대표해 대통령 비서실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최치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인 대표단의 최치우 특사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독대를 하였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비서실장의 깜짝 발표에 기자단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생중계로 기자회견을 지켜보는 국민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놀랐다.
그러나 더 놀라운 소식은 따로 있었다.
“흠흠, 이에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 대통령께 친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친서는 최치우 특사가 직접 청와대에 방문해 대통령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친서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제국 대통령이 먼저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알리는 게 순서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정제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뉴스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남북이 화해 무드로 접어든 게 실감이 났다.
최치우는 마이크를 잡은 비서실장 뒤편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나 기자들의 카메라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나쳐 최치우를 담기 바빴다.
이 순간만큼 오성그룹의 후계자인 이지용 부회장도 뒷전이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외신의 스포트라이트도 최치우를 향했다.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평양 특사단에 크게 기대를 건 언론은 많지 않았다.
특사단의 방북을 요식 행위라고 비판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그런데 정부 대표단도 아닌 경제인 대표단의 최치우가 김정은 위원장과 독대를 했다.
대체 무슨 수로 은둔의 독재자와 1:1 미팅을 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까지 받아왔다.
친서의 내용을 떠나 이미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를 거둔 셈이다.
최치우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또 한 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올림푸스를 창업해 성공 신화를 쓰는 기업인, 그리고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의 한계를 극복한 스포츠인.
이 두 가지만으로도 최치우는 역사에 다시 없을 기념비적 인물로 추앙받기 충분하다.
하지만 최치우의 업적은 끝을 모르고 커져갔다.
친서의 내용이 긍정적일 경우 남북정상회담 개최도 가능해진다.
무려 남북정상회담이다.
역사상 단 두 번밖에 없었던 남북정상회담을 최치우의 손으로 개최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이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최 대표님,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대표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발표가 끝나자 취재진이 앞다퉈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김정은과 독대를 한 최치우에게 뭐라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최치우는 말을 아꼈다.
몇 마디 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기자들 앞에서 폼을 잡고, 김정은과 만난 느낌을 이야기하면 일약 스타가 될 것이다.
‘주목은 넘치도록 받았고, 이제 유리구슬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지.’
최치우는 성숙했다.
현대에서의 나이는 26살이지만, 그의 경험은 수백 년에 이른다.
말이 앞서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미정상회담은 아주 조심스러운 의제다.
한 번 오해가 생기면 바로바로 풀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말을 아끼고, 일을 성사시키는데 집중하는 게 올바른 태도다.
최치우는 기자들의 부름을 뒤로하고 특사단과 함께 이동했다.
정제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평양 특사단을 환대할 예정이다.
물론 진짜 목적은 최치우로부터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받는 것이었다.
‘청와대로 간다, 지금.’
최치우는 오랜만에 정제국 대통령과 만날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끝에서 역사가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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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환영 만찬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성스럽게 준비돼 있었다.
정제국 대통령은 6인의 특사단 한 명 한 명에게 친필로 쓴 축전을 전달했다.
2시간에 걸친 만찬과 환영 행사가 끝났다.
이지용 부회장과 조영필, 에릭은 먼저 청와대에서 빠져나왔다.
정부 대표단인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은 청와대에 남았다.
아마 오늘 늦게까지 방북 회담의 성과를 보고할 것이다.
또 한 사람, 최치우도 청와대 경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제국 대통령, 아니 온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를 최치우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배석자 없이 정제국이 손수 따라주는 찻잔을 받았다.
며칠 사이에 북한과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차례대로 만나게 됐다.
이제 김정은과 정제국의 관계는 최치우에게 달려 있다.
“비서실장님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북한에 짓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요?”
정제국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최치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지만, 올림푸스에서는 북한에 소울 스톤을 투자할 계획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상의를 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절차가 복잡해졌겠죠. 지금처럼 김정은 위원장과 독대를 할 확률도 낮았을 겁니다.”
최치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통령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한 마디도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제국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제국을 청와대의 주인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이 최치우였다.
최치우가 유력 후보였던 유경민을 몰락시키지 않았다면 대선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정제국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고, 대선 후보를 쥐락펴락 다룰 수 있는 최치우의 무서움을 인지하고 있었다.
대통령 신분으로 국세청과 검찰을 동원해 올림푸스를 공격할 수도 없다.
최치우를 바라보는 국민 여론이 워낙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권위를 행사했다간 거꾸로 잡아먹힐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대통령이 됐어도 여전히 최치우를 어려워하는 것이다.
“친서는 보셨습니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제국은 이미 친서를 확인했다.
최치우는 찻잔을 내려놓고 정제국을 똑바로 쳐다봤다.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으로 평화협정을 맺으면 대통령님의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올림푸스가 함께 드라이브를 걸겠습니다.”
“그로 인해 최 대표님이 얻는 것은…….”
“북한이라는 시장을 선점하는 거죠. 넘치는 자원과 무궁무진한 가능성. 우리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이 투자하면 북한은 순식간에 중요한 시장이 될 겁니다.”
최치우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승부사답게 말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대통령님께서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저는 철저히 뒤로 숨겠습니다. 대신!
“대신?”
“겨울이 오기 전, 아프리카에서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그때 대한민국 정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북한과 아프리카.
최치우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두 곳을 묶었다.
정제국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선물을 준 대신 아프리카에서 값을 받으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정제국 대통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최치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지구를 아우르는 최치우의 원대한 계획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