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24화 (224/243)

# 224

***

특사단의 평양 방문은 갑작스레 결정된 것이었다.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은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정제국 대통령이 취임하며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 것 같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튼튼한 안보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제국 대통령은 변함없는 한미연합훈련을 실시했다.

진보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던 북한 정권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오히려 유영조 전 대통령 때보다 사이가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에서 서신을 보냈고, 탄력을 받아 평양 특사단이 조성된 것이다.

평양에 도착한 최치우는 고려호텔에 짐을 풀면서 김정은의 속내를 짐작했다.

‘핵과 ICBM 개발을 마지막 단계까지 끌고 왔지만, 이대로 가면 미국이 북한 정권을 무너트리려 나설 수도 있다. 결국 더 늦기 전에 핵을 팔아서 장사를 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 보증인 역할을 원하는군.’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생각은 어렵지 않게 읽혔다.

최치우가 내린 결론은 북한 외교 전문가들의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북한이 실제로 핵과 ICBM을 완성하면 미국이 가만있을 리 없다.

미국은 본토에 대한 핵 위협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 직전 단계가 레드 라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레드 라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시작했다.

평양 특사단을 통해 교류의 물꼬를 트고,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대한민국 정부와 화해하는 모습을 연출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정제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미국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국이 대북 제재를 거둬들이면 나쁠 게 없다.

지금쯤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북한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큰 그림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6인의 평양 특사단은 거대한 퍼즐의 첫 번째 조각인 셈이었다.

“갈 길이 멀지만, 일찍 투자할수록 잭팟은 더 크게 터지겠지.”

북한과 미국의 협상까지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핵 폐기를 합의하고, 미국과 UN의 대북 제재가 사라져야 북한 시장이 열린다.

북한 땅에 묻힌 자원을 개발하려는 최치우의 목표도 눈앞에 닥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아무도 북한의 가능성을 주목하지 않을 때, 미리 이름표를 붙여놓아서 손해 볼 게 없다.

최치우는 훗날 북한에서 강남 땅값이 수백, 수천배 폭등한 것 이상의 대박이 터질 거라 확신했다.

어쩌면 북한 개발을 발판삼아 부동의 재계 서열 1위 오성그룹을 추월할 수도 있다.

‘평범하고 안전한 시장에서 성장하며 오성그룹을 넘는 건 어렵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북한처럼 위험한 땅이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오게 마련이야.’

최치우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늘 저녁에 열릴 북한 예술단의 공연과 환영 만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메인 이벤트는 내일 오전부터 시작되는 대표단 공식 교류와 회담이다.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쳐서 김정은과 독대를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만 최치우가 남북 화해 무드와 경제 협력의 핵심 인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딩동-

그때 누군가 최치우의 호텔 방 초인종을 눌렀다.

움직일 시간이 된 것이다.

“누가 독재국가 아니랄까 봐, 시간 약속은 칼 같네.”

북한 측 실무진은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특사단의 방으로 찾아왔다.

한국 같았으면 호텔 로비에서 모여 이동했겠지만, 이곳은 북한이다.

호텔 방 입구에서 로비까지 따로 걸어갈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말이 안내이지 사실상 감시 또는 통제나 다름없다.

그래도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최치우는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줬다.

문 앞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중년 남성이 정복을 입고 서 있었다.

“최치우 동무, 예술단 공연과 환영 만찬에 나설 시간이라요.”

“준비는 끝났습니다. 가시죠.”

이제부터 평양에서의 일정이 시작된다.

최치우는 역사의 현장에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

전야제(前夜祭)라고 할 수 있는 공연과 환영 만찬은 무사히 끝났다.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북한 예술단 단장과 몇몇 고위급 인사들이 자리해 격을 맞췄다.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감시와 통제가 뒤따르고 있지만, 북한에서 대한민국의 특사단을 극진하게 대접하려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특사단의 방북이 성사된 만큼 북한도 대한민국 정부에 바라는 게 분명히 있다.

특사들, 특히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 좋을 게 없었다.

최치우는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평양에도 새로운 아침의 태양이 떠올랐고, 본격적인 교류 행사와 회담 일정이 특사단을 맞이했다.

가장 먼저 6인의 특사단은 북한의 고위급을 만난다.

북한에서는 2인자로 알려진 김영철 부위원장을 비롯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특사단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예정이었다.

그밖에도 외무성과 예술단 단장 등 굵직한 인물들과 대면하는 자리다.

물론 실제 회담은 정부 대표단이 이끌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경제인 대표단과 문화인 대표단은 해당 분야 의제가 나올 때 거드는 역할이다.

물론 최치우는 약속대로 들러리 역할을 수행해 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는 사진 촬영과 방명록 작성을 마치고 긴 테이블에 앉았다.

사진 촬영을 함께하며 처음 본 김영철은 포스가 대단했다.

그는 단순히 북한의 2인자가 아니다.

경험과 연륜이 부족한 김정은을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북한을 움직이는 주역이다.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유능한 왕족이라면, 김영철은 능력 하나로 총리대신의 자리를 지킨 독종이다.

그를 의식해서인지 대한민국 특사단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장도 여느 때보다 긴장한 눈치였다.

“모처럼 북남이 머리를 맞대고 모였으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들을 나눠보십시다.”

김영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곧이어 대한민국 특사단을 대표하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화답했다.

“이렇게 남과 북의 정치, 경제, 문화인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 그리고 경제와 문화 교류까지 폭넓게 의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뒤이어 길고 지루한, 그러나 중요한 교류 행사가 이어졌다.

역시 회담은 정치적인 이야기로 물꼬가 트였다.

북한의 김영철은 한미연합훈련을 물고 늘어졌고, 대한민국의 국정원장은 충실한 논리를 내세워 방어했다.

그렇게 한 차례 공방이 오가면 벌써 두 번의 평양 공연을 마친 국민가수 조영필이 딱딱한 공기를 풀어줬다.

석상처럼 굳은 인상의 김영철도 사석에서 조영필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라고 한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에릭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부에서 문화인 대표단을 특사단에 포함시킨 이유가 증명됐다.

조영필과 에릭은 존재 자체로 회담의 분위기를 풀어주는 윤활유였다.

“우리 세종문화회관에서 북한 예술단이 공연을 하면 참 의미 있는 행사가 아닐까요? 어제 본 공연의 감동을 더 많은 국민들이 느꼈으면 합니다.”

“그때는 제가 선생님과 같이 한 곡 불러도 되갔습니까?”

“영광이지요.”

북한 예술단의 단장은 조영필을 꽤나 흠모하는 눈치였다.

어려서부터 조영필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는 소문이 사실 같았다.

하지만 문화인들이 가까스로 분위기를 풀어도 금방 공기가 차가웠다.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당분간이라도 노동신문에서 우리 정부를 비방하지 말아야…….”

“비방이 아니라 정당한 의견 제시 아닙네까?”

“어떤 경우에도 연합훈련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국민과 언론이 들고 일어나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집니다. 연합훈련은 어디까지나 방어적 성격의 훈련입니다.”

“방어 훈련에 전투기가 그리 많이 필요합네까?”

국정원장과 북한 외무성이 티격태격 설전을 주고받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이대로 가면 아까운 시간만 흐를 것 같았다.

‘때가 됐군.’

최치우는 기가 막힌 타이밍을 잡았다.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앞이 안 보이는 막다른 골목에서 해결사가 등장해야 한다.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던 최치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에 설치된 실내용 마이크 가까이 입을 가져간 최치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최치우에게 집중됐다.

북한의 고위급 관계자들도 최치우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특히 북한은 넘치는 자원을 제대로 개발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형편이다.

대체 에너지뿐 아니라 남아공의 광산 개발 등 굵직한 프로젝트로 세상을 놀래게 만든 올림푸스를 모를 리 없다.

특히 이 자리에 없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은 스포츠광으로 유명하다.

최치우가 올림픽에서 100m 달리기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지켜봤을 것이다.

“편하게 말씀하시라우.”

김영철이 최치우를 거들어줬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린아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실례합니다만, 저는 이런 탁상공론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서 평양에 온 게 아닙니다.”

최치우는 시작부터 모두의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최치우를 돌아봤다.

이곳은 서울이 아닌 평양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외교의 상식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북한 군인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아예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입니다. 북한, 아니 북조선 여러분이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경제협력이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

장내가 조용해졌다.

김영철은 묵직한 눈빛으로 최치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북한의 다른 고위급 관련자들은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김정은이 없는 곳에서는 김영철이 최고 책임자다.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부위원장님, 이건 우리 최 대표가….”

대통령 비서실장이 상황을 수습하려 김영철을 불렀다.

그러나 김영철이 손을 내저었다.

“일 없소. 어디 더 들어보십시다.”

김영철은 최치우가 말을 끝까지 하길 원했다.

어떻게 보면 적국(敵國)의 수괴이지만 배포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최치우는 김영철에게 눈빛을 고정시켰다.

어차피 북한에서 나온 다른 사람들은 조연이다.

김여정도 영향력은 있겠지만, 김영철과 비교할 수는 없다.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북미정상회담까지. 북한이 먼저 평화를 선택해야 우리가 경제협력을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 경제적 도움을 달라고 했습네까?”

못 먹고 못 살아도 북한의 자존심과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

김영철은 경제협력이 필요 없다는 듯 배짱을 부렸다.

하지만 최치우는 김영철의 반응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중국이나 미국, 또 이제까지 대한민국이 제시했던 경제 지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제 지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죠. 그러나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는다면! 그리고 올림푸스가 북한 전역의 자원을 개발한다면… 훨씬 장기적인 경제 발전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최치우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렀다.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소울 스톤 발전소를 유치하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

북한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올림푸스의 CEO 최치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만하면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김영철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최 동무, 우리 최고 지도자 동지 앞에서도 같은 약속을 할 수 있겠습네까?”

“약속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최치우의 대답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이미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은 들러리가 되고, 최치우가 협상의 중심 키를 잡았다.

오성그룹의 이지용 부회장은 묘한 표정으로 최치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실례 좀 하갔시다.”

김영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회담장 바깥으로 나갔다.

아마 김정은에게 직접 보고를 하려는 것 같았다.

착 가라앉았던 평양의 공기가 뜨겁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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