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평양 Dream>
최치우는 독일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라이프치히에서 최치우가 받은 환대는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높이기 충했다.
현대 사회에서 독일은 선진국이 상징처럼 여겨지는 국가다.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고, 유럽의 맹주로 우뚝 선 독일의 역사는 한국의 롤 모델이었다.
실제로 독일은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교육이면 교육 등 모든 부분에서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다.
비단 한국만 독일을 롤 모델로 바라보는 게 아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남미와 아프리카의 개발 도상국, 심지어 세계 최강 대국 미국마저 독일이라고 하면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다.
그런 독일 국민들이 최치우에게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독일 역사에서 손꼽히는 인기 정치인 메르켈 총리보다 박수 소리가 더 컸다.
최치우의 유명세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라이프치히의 소울 스톤 발전소 준공식은 그의 존재감을 한 계단 더 끌어올렸다.
명실 공히 세계 주요국의 대통령과 버금가는 영향력을 공인받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평양 특사단의 경제인 대표로 오성그룹의 이지용 부회장과 올림푸스의 최치우, 단 두 명만이 이름을 올렸다.
오성그룹은 3대째 뿌리를 내려온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다.
심지어 한국을 오성 공화국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시가 총액이 150조 원을 넘어 200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여전히 350조 원 이상의 시총을 자랑하는 오성그룹을 넘어서려면 여러 고비가 남았다.
올림푸스가 신흥 글로벌 기업이라면 오성그룹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1세대 글로벌 기업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성그룹 뒷자리는 현기 자동차의 차지였다.
현기 역시 글로벌 시장에서 5위까지 오른 저력을 지닌 대기업이다.
하지만 지금은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에게 시가총액 기준 국내 2위 자리를 내주고 밀려났다.
명성과 정치력에 있어서도 현기 자동차의 후계자 홍문기 부회장은 최치우의 상대가 못 된다.
게다가 홍문기 부회장은 최치우의 작전에 휘말려 유치장 신세를 지고 법정 다툼을 이어가는 중이다.
평양 특사단에 이지용과 최치우가 포함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 같았다.
재계와 정계에서도 별다른 반론이 나오지 않았다.
국민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최근 북한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며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자리매김했다.
원래도 문제아가 아닌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북한의 핵 도발 징후가 훨씬 심해졌다.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서 정제국 대통령이 평양 특사단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특사단의 방북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남북정상회담도 추진될 수 있다.
그렇기에 특사단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정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이 나섰고, 경제인 대표로는 대한민국 재계의 투톱이 선발됐다.
문화인 대표단의 이름값도 만만치 않았다.
국민가수 조영필과 빌보드까지 진출한 아이돌 에릭이 평양으로 가는 차에 함께 타게 됐다.
6명의 대표단과 수행 및 경호원으로 구성된 특사단은 육로를 이용해 이동한다.
판문점을 지나 평양으로 가는 육로를 개방한 것은 북한도 나름 큰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한계에 부딪친 북한 경제를 남북협력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 기회를 반드시 살린다.’
최치우는 다른 나라도 아닌 북한으로 떠나는 날을 앞두고 각오를 되새기고 있었다.
6인의 평양 특사단 중에서 가장 뜨거운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 바로 최치우일지 모른다.
최치우는 남북정상회담 성사라는 임무를 짊어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국정원장보다 더 큰 목표를 품었다.
평양을 기점으로 무주공산인 북한 땅 곳곳에 올림푸스의 깃발을 꽂겠다는 비전이다.
북한에 매장된 지하자원은 무궁무진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자본이 조금씩 개발을 하는 정도에 그치는 실정이다.
만약 남북협력이 성사되고, 올림푸스가 대표로 북한의 자원 개발을 주도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황금이 가득 묻힌 노다지 밭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주요 목표다.
하지만 최치우는 단순한 글로벌 경영을 추구하는 게 아니었다.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올림푸스의 설립 취지와 어울린다.
아프리카 대륙이 첫 번째 진흙 속 진주였다면 북한은 두 번째 진주가 될 수 있다.
물론 아프리카보다 훨씬 복잡한 변수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
기업인 혼자서 북한과의 경제 교류를 성사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북의 정치 문제뿐 아니라 북핵 완전 폐기를 요구하는 미국 등 국제 정치도 뇌관처럼 얽혀 있다.
괜히 잘못 건드리면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
승승장구하던 올림푸스가 북한 리스크 직격탄을 맞고 추락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보석을 건지는 게 최치우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평양행을 앞둔 그는 또 다른 역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특사단은 서울 시내 모처에서 평양 방문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물론 6명이 똑같은 시간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들 바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은 정부에서 업무량이 많기로 유명한 자리다.
또 무슨 수로 이지용 부회장과 최치우의 일정을 맞추겠는가.
365일 국내외 공연 일정이 빼곡한 에릭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국민 가수로 추앙 받는 조영필을 아무 때나 오라 가라 할 수도 없다.
결국 6인의 특사단은 각자 다른 날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 소속인 두 사람을 제외하면 특사단은 청와대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주요 인사로 구성됐다.
화려한 구색을 갖춘 만큼 그들을 수행하는 실무진의 부담도 커진 셈이다.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8월, 엄청난 환영 인파를 뒤로하고 특사단을 태운 버스가 판문점을 넘어섰다.
한 대의 대형 버스에 6명의 특사와 소수의 수행원 및 경호원들이 탑승했다.
최치우도 그제야 나머지 5명의 특사들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서실장은 듣던 대로 깐깐해 보이고, 국정원장은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군. 조영필 선생님은 수줍은 인상이고, 에릭은 밝고 활기차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오성그룹의 이지용 부회장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와 함께 경제인 대표단에 포함됐고, 국내 재계 서열 1위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최치우는 이지용 부회장과 구면이었다.
작년 1월, 유력 대선 후보였던 유경민을 낙마시키는 과정에서 이지용과 손을 잡았다.
가상화폐인 오성코인 아이디어를 주고, 그 대가로 유경민에 대한 오성그룹의 지원을 끊게 만들었다.
이후 유경민은 대선 후보에서 범죄자로 추락하고 만다.
따지고 보면 최치우와 이지용의 일시적 동맹이 정제국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인연이다.
최치우는 먼저 이지용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북한 땅을 밟게 되는군요.”
“그러네요. 우리는 1년 8개월 만에 다시 만난 것이지요?”
“그쯤 된 것 같습니다.”
“최 대표님을 만나면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때도…….”
이지용이 말끝을 흐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버스 안에는 듣는 귀들이 많다.
최치우와 이지용 사이의 일화가 흘러 나가면 여러모로 귀찮아질지 모른다.
특히 청와대에서 파견 나온 수행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버스에서부터 평양,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대화를 기억하고 보고하는 게 그들의 임무다.
최치우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 이지용을 도와줬다.
“부회장님은 워낙 바쁘실 텐데, 특사단 일정을 흔쾌히 수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쉽지만은 않은 결정 아닙니까.”
“국가에서 하는 일인데 당연히 힘을 보태야지요.”
이지용 부회장이 트레이드 마크인 무테안경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그는 최치우 덕분에 말실수 위기를 모면해서인지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최치우는 원하는 바를 얻었다.
아주 짧은 대화를 통해 이지용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오성그룹은 북한 투자를 노리고 있지 않다. 아직 현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겠지. 그저 청와대에 협조하기 위해 특사단에 합류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예기치 못한 순간이 찾아오면 쉽게 속내를 드러낸다.
국가에서 하는 일에 힘을 보태겠다는 이지용 부회장의 말은 가식이 아니었다.
이지용에게 있어 이번 평양 방문은 정부에 협조하는 데 의미를 두는 행사일 뿐이다.
최치우처럼 대규모 북한 자원 개발이나 투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만약 오성그룹이 북한을 비즈니스 필드로 생각하면 올림푸스는 까다로운 경쟁자를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내부경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남북 경제협력이 성사되면 올림푸스가 북한이라는 블루 오션을 선점할 확률이 높아졌다.
“아아, 아아.”
그때였다.
특사단 수행원의 책임자가 버스 앞에서 실내 마이크를 잡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출발 전 안내드린 것처럼 저희는 평양에 도착해 휴식을 취할 예정입니다. 저녁에는 북한 예술단이 주최하는 환영 만찬과 공연이 준비돼 있습니다. 정부 대표단, 경제인 대표단, 문화인 대표단의 공식 교류 행사와 회담은 내일 오전부터 진행됩니다. 다만 북한 당국의 사정에 따라 일정은 변동될 수 있다는 점, 널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최치우는 머릿속으로 평양의 풍경을 그려봤다.
사방이 꽉 막힌 공산주의 독재국가의 수도, 평양.
과연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할까.
‘판을 새로 깔고 평양을 먹는다.’
최치우는 담대한 발상을 거침없이 전개시켰다.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면 꼭두각시 노릇밖에 할 수 없다.
평양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면 천하의 최치우가 아니다.
그는 정부의 들러리나 설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평양일 수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수용소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독재국가이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그러한 평양에서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칠 작정이었다.
1달에서 2달이 지나면 아프리카 대륙의 운명을 걸고 싸울 최치우는 도무지 쉴 줄을 몰랐다.
북한 땅을 밟으며 평양으로 달려가는 버스 안,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과 달리 최치우는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3대 세습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정은.
그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평양 특사단의 주인공은 대통령 비서실장도, 국정원장도 아니다.
오성그룹의 이지용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내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미안하지만 조영필과 에릭은 축하 무대를 장식하는 역할일 뿐이다.
‘김정은과 유일하게 독대하는 사람,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까지 이끌어내는 사람 모두 내가 될 것이다.’
최치우는 주문을 외우듯 자기 암시를 거듭했다.
평양에서도 최치우의 자신감이 통할지, 앞으로 3박 4일이면 알게 될 것 같았다.